예수님을 만나는 자리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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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9-04-28 22:17
*** 예수님을 만나는 자리 / 누가복음 22:24-30
** 들어가는 말
누가복음 22:24-30, “24 또 저희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저희를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26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두목은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27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28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한 자들인즉 29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30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자본금 규모가 30억 정도 되는 중소기업을 경영하는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사업도 그런대로 잘 되고, 모든 것이 순탄하게 잘 되었습니다. 그런데 몸이 조금 좋지 않아서 병원을 찾았는데, 췌장암 말기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암 선고로 고민할 틈도 없이 급하게 수술을 받고 방사선 항암 치료를 받는 중이었습니다. 치료기간이 길어지면서 너무 고통스러워 병원 치료를 더 받을 수 없을 만큼 체력이 떨어졌고, 면역력도 저하되어 미음 한 수저도 넘기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모든 것을 체념할 정도로 고통스러운 때에 이런 음성이 들렸습니다.
“나는 네가 생명같이 아꼈던 30억 재산을 미음 한 수저로 바꿀 수 있다.”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그는 그동안 사업에 바빠서 등한히 했던 자신의 믿음을 돌아보았습니다. 십일조 못 드린 것, 감사 못했던 것,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사랑한 것, 하나님보다 자신의 능력을 더 믿었던 것, 주일을 지키는 것보다 사업과 사람 관리를 더 중요하게 여겼던 것 등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며, 뜨거운 눈물로 회개하며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미음 한 수저로 사는 사람입니다. 당신은 나를 아무거나 먹어도 살 수 있는 사람으로도 만들 수 있습니다.”
그 후 그는 건강을 회복했고, 지금은 겸손하게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사람은 이렇게 잘 될 때에는 ‘자신이 잘 나서 그렇다.’고 교만한 생각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인생의 위기를 당하게 되면 비로소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이것이 ‘한 치 앞도 알지 못하는’인간의 어리석음입니다. 그러나 예화에 나오는 집사님처럼 모든 성도가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깨달을 수 있는 많은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깨닫지 못한 채로 생을 마감하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때로는 너무 늦게 깨달아서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에서처럼 말입니다. 히브리서 12:17절에서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고 증언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기회가 있을 때에 하나님의 뜻에 관심을 가지고 깨닫도록 힘써야 합니다. 왜냐하면 기회는 한 없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모스 4장에는 하나님을 떠나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경고와 채찍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돌아오도록 가뭄으로 징계하기도 하며, 재난으로, 전염병으로, 삶의 어려움으로 징계하며 돌아오라고 하셨지만 백성들은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경고하십니다. 아모스 4:12절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아, 내가 이와 같이 네게 행하리라. 내가 이것을 네게 행하리니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 여기에서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심판을 준비하라.’는 의미입니다. 즉 사람에게 주어진 기회의 다음 자리는 하나님의 심판의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심판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 지금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심판의 하나님은 두려운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은혜를 받을 수 있을 때, 아직 은총의 기회가 있을 때에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래야 두려운 심판의 하나님으로 만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사야 55:6절에서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고 하시며, 고린도후서 6:2절에서는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러므로 지금 은혜의 기회가 있을 때에 하나님을 만나도록 힘쓰십시오.
♥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본문의 내용을 살펴봅시다. 본문은 예수님의 공생애가 끝나가는 때에 제자들을 깨우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제물로 십자가 달리게 될 일을 생각하시며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나누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정권을 잡으시면 높은 자리를 차지할 생각’에 빠져서 서로 ‘자신이 크다.’고 싸우고 있었습니다. 이걸 두고 ‘동상이몽(同床異夢)’이라고 합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꿈에서 깨어나도록 말씀하십니다. 본문 25-27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저희를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두목은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상에서의 이치와 하나님 나라에서의 이치가 전혀 다르다는 것을 가르치십니다. 세상이치는 지위가 높은 사람, 권세가 있는 사람이 다스리고 높임을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나라 이치는 낮은 자리에서 섬기는 사람이 높임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위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이미 높은 자리를 예비해 두셨습니다. 본문 28-30절입니다.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한 자들인즉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그러므로 제자들이 세상에서는 낮은 자리에 있어야 하고, 섬기는 자리에 있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아직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세상에서의 낮은 자리, 섬김의 자리가 곧 주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자리임을 가르치셨습니다.
♥ 낮은 자리에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낮은 데로 임하소서.’라는 기독교 소설책이 있습니다. 1981년 ‘믿음의 글들’ 시리즈 첫 번째 책입니다. 이 소설은 맹인 목회자인 안요한 목사(새빛맹인교회)의 삶을 소설화한 책이며, 영화로도 만들어졌습니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요한’은 가난과 자유분방한 성격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고 아버지에게 반항하며 성도들을 놀리고 괴롭혔습니다. 심지어 아버지가 목회하는 교회 문에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다.”(안요한복음 1장1절) 이라고 써 붙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다가 아버지의 권유로 신학대학에 입학했지만 도저히 하나님을 믿을 수 없어서 휴학하고 군에 입대해 버립니다. 그는 하나님 없이도 성공하고 잘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하여 어느 정도 성공의 길을 달렸습니다.
미국 군사학교 교관으로 선발되어 출세의 길이 열렸을 때에, 갑자기 오른쪽 눈에 이상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병원을 전전하며 온갖 약을 다 써 보았지만 원인조차 알 수 없었고, 점점 어두워지던 눈은 결국 보이지 않게 되었고, 왼 쪽 눈마저 같은 증상이 되었습니다. 직장도 잃었고, 친구들도 떠나고 아내마저 떠나버린 절망에 몸부림치던 요한은 결국 자살의 길을 택했습니다. 칼로 손목을 그었지만 피만 나고 죽지 않았고, 목을 매어 죽으려 했지만 줄이 끊어져서 죽지도 못했습니다.
절망에 엎드려있던 어느 날, 밝은 빛이 비치면서 음성이 들렸습니다. “구약성경 320페이지를 읽어보라.”는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그는 길을 지나는 사람에게 ‘구약성경 320페이지를 좀 읽어 달라.’고 매달렸습니다. “내가 너를 떠나지 않으며, 버리지 않겠다.”고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 후 신학교를 마치고 맹인교회를 시작하고, 지금도 ‘새빛 맹인 선교회’를 이끌며 ‘맹인의 대부’라고 불릴 정도로 많은 섬김을 하고 있습니다.
이 글의 제목처럼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자리는 ‘낮은 자리’입니다. 본문 27절에서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고 하셨듯이 ‘낮은 자리’, ‘섬김의 자리’에 주님이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에도 마구간의 구유가 몸을 누이신 처음 자리였습니다. 또한 마태복음 11:29절에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라고 하시며, 항상 낮은 자리에 계신 주님이심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을 만나려면 당연히 예수님이 계시는 낮은 자리를 찾아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낮은 자리는 어떤 곳입니까?
* 낮은 자리는 비움의 자리입니다.
네덜란드 출신의 미국의 로마 가톨릭 사제이자 작가인, 헨리 나우웬(Henri Jozef Machiel Nouwen 1932년-1996년)교수입니다. 그는 예일대학의 교수였으며, 하버드 대학의 교수이기도 한 명망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것을 버리고 1985년 프랑스의 라르쉬의 정신지체 장애인 공동체인 ‘데이브레이크’에 들어갔습니다. 거기서 1년을 머문 후 캐나다 토론토의 라르쉬 데이브레이크 공동체에서 장애인을 섬기는 데 여생을 바쳤습니다. 그는 출세의 길을 버리고 장애인 공동체로 간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나는 공부하는 동안 단 한 번도 1등의 자리를 놓친 적이 없었으며, 하버드 대학의 교수가 되기까지 출세가도를 달렸습니다. 그런데 그 어느 곳에서도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아담’이라는 식물인간이 된 청년을 만난 후 그를 통하여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
나우웬 교수는 비록 가톨릭 사제였지만 그의 예수님께로 향하는 정신은 본받을 만합니다. 사람들은 출세의 자리를 얻으려고 갖은 노력을 다합니다. 때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출세하려 합니다. 그런데 그 탄탄대로가 열린 출세 길을 마다하고 고생을 자초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탄탄대로가 아니라 자신의 작은 소유물조차 버리지 못하는 것이 보통의 인생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낮은 자리는 자신의 것을 비워야만 갈 수 있는 곳에 있습니다. 누가복음 14:33절을 봅시다.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하십니다. 모두 버려야 한다고 하니 걱정이 되지요? 그러나 오해하지 마십시오. 알거지가 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명하시면 당장이라도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도록 소유물에 집착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관심두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요구가 부당하게 여겨집니까? 부당한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주어진 것들 중에 어느 것 하나라도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세상에 오면서 가지고 온 것이 있습니까?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면서 무엇인가를 들고 온 사람을 아무도 없습니다. 욥이 사단의 시기를 받아 모든 소유를 다 잃어버린 후에 욥기 1:21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여러분이 그토록 애지중지 하는 모든 재물도 자식도 모두가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이 사실을 인정할 때에 비로소 자신을 비울 수가 있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을 비울 때에 그 곳에 주님이 계심을 보게 될 것입니다.
* 낮은 자리는 섬김의 자리입니다.
본문 27절을 다시 읽습니다.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고 하십니다. 마가복음 10:45절에서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도 ‘섬김을 위함’이며, 이 땅에서의 모든 사역도 ‘오직 섬김’이셨습니다. 제자들이 만찬의 자리에서 더러운 발로 눈치만 보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도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함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13-15)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섬김의 본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3년이 온통 섬김으로 가득하게 채워졌습니다. 온갖 병자를 고치시고,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시며,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서로 높아지려 하고, 섬기며 봉사하는 일을 싫어하며 피하려 했던 제자들에게 주님이 친히 본을 보이셨습니다. 우리의 예수님이 계시는 그곳은 바로 섬기는 자리였습니다. 여러분이 자신을 낮추어 다른 사람을 섬기고 봉사할 때에 그곳에 주님이 계십니다. 주님이 하시는 일을 여러분이 대신 할 때에 주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고 힘을 주시며 여러분의 삶을 복되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섬김을 독려하시려고 마태복음 10:42절에서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고 약속하십니다.
♥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열매가 가장 많이 달린 무거운 가지는 항상 맨 밑으로 조용히 내려지게 되고, 벼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는 법입니다. 흐르는 냇물이 얕을수록 요란하고 출렁임이 심하지만, 깊은 물은 잠잠한 법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께 가까이 가면 갈수록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낮아지고 겸손하게 됩니다. 바로 이 자리, 자신을 낮추어 비우고 섬기는 그 자리에 주님이 계십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할 때에 그 자리는 풍성한 자리가 되며, 기쁨과 행복의 자리, 영원한 소망의 자리가 될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요셉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창 39:2)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의 삶이 이와 같이 자신을 낮추고 겸손한 마음으로 비우고 섬기는 삶으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형통한 삶을 이루시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누가복음 22:24-30, “24 또 저희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저희를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26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두목은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27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28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한 자들인즉 29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30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자본금 규모가 30억 정도 되는 중소기업을 경영하는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사업도 그런대로 잘 되고, 모든 것이 순탄하게 잘 되었습니다. 그런데 몸이 조금 좋지 않아서 병원을 찾았는데, 췌장암 말기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암 선고로 고민할 틈도 없이 급하게 수술을 받고 방사선 항암 치료를 받는 중이었습니다. 치료기간이 길어지면서 너무 고통스러워 병원 치료를 더 받을 수 없을 만큼 체력이 떨어졌고, 면역력도 저하되어 미음 한 수저도 넘기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모든 것을 체념할 정도로 고통스러운 때에 이런 음성이 들렸습니다.
“나는 네가 생명같이 아꼈던 30억 재산을 미음 한 수저로 바꿀 수 있다.”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그는 그동안 사업에 바빠서 등한히 했던 자신의 믿음을 돌아보았습니다. 십일조 못 드린 것, 감사 못했던 것,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사랑한 것, 하나님보다 자신의 능력을 더 믿었던 것, 주일을 지키는 것보다 사업과 사람 관리를 더 중요하게 여겼던 것 등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며, 뜨거운 눈물로 회개하며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미음 한 수저로 사는 사람입니다. 당신은 나를 아무거나 먹어도 살 수 있는 사람으로도 만들 수 있습니다.”
그 후 그는 건강을 회복했고, 지금은 겸손하게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사람은 이렇게 잘 될 때에는 ‘자신이 잘 나서 그렇다.’고 교만한 생각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인생의 위기를 당하게 되면 비로소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이것이 ‘한 치 앞도 알지 못하는’인간의 어리석음입니다. 그러나 예화에 나오는 집사님처럼 모든 성도가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깨달을 수 있는 많은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깨닫지 못한 채로 생을 마감하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때로는 너무 늦게 깨달아서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에서처럼 말입니다. 히브리서 12:17절에서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고 증언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기회가 있을 때에 하나님의 뜻에 관심을 가지고 깨닫도록 힘써야 합니다. 왜냐하면 기회는 한 없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모스 4장에는 하나님을 떠나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경고와 채찍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돌아오도록 가뭄으로 징계하기도 하며, 재난으로, 전염병으로, 삶의 어려움으로 징계하며 돌아오라고 하셨지만 백성들은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경고하십니다. 아모스 4:12절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아, 내가 이와 같이 네게 행하리라. 내가 이것을 네게 행하리니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 여기에서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심판을 준비하라.’는 의미입니다. 즉 사람에게 주어진 기회의 다음 자리는 하나님의 심판의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심판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 지금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심판의 하나님은 두려운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은혜를 받을 수 있을 때, 아직 은총의 기회가 있을 때에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래야 두려운 심판의 하나님으로 만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사야 55:6절에서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고 하시며, 고린도후서 6:2절에서는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러므로 지금 은혜의 기회가 있을 때에 하나님을 만나도록 힘쓰십시오.
♥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본문의 내용을 살펴봅시다. 본문은 예수님의 공생애가 끝나가는 때에 제자들을 깨우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제물로 십자가 달리게 될 일을 생각하시며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나누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정권을 잡으시면 높은 자리를 차지할 생각’에 빠져서 서로 ‘자신이 크다.’고 싸우고 있었습니다. 이걸 두고 ‘동상이몽(同床異夢)’이라고 합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꿈에서 깨어나도록 말씀하십니다. 본문 25-27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저희를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두목은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상에서의 이치와 하나님 나라에서의 이치가 전혀 다르다는 것을 가르치십니다. 세상이치는 지위가 높은 사람, 권세가 있는 사람이 다스리고 높임을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나라 이치는 낮은 자리에서 섬기는 사람이 높임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위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이미 높은 자리를 예비해 두셨습니다. 본문 28-30절입니다.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한 자들인즉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그러므로 제자들이 세상에서는 낮은 자리에 있어야 하고, 섬기는 자리에 있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아직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세상에서의 낮은 자리, 섬김의 자리가 곧 주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자리임을 가르치셨습니다.
♥ 낮은 자리에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낮은 데로 임하소서.’라는 기독교 소설책이 있습니다. 1981년 ‘믿음의 글들’ 시리즈 첫 번째 책입니다. 이 소설은 맹인 목회자인 안요한 목사(새빛맹인교회)의 삶을 소설화한 책이며, 영화로도 만들어졌습니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요한’은 가난과 자유분방한 성격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고 아버지에게 반항하며 성도들을 놀리고 괴롭혔습니다. 심지어 아버지가 목회하는 교회 문에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다.”(안요한복음 1장1절) 이라고 써 붙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다가 아버지의 권유로 신학대학에 입학했지만 도저히 하나님을 믿을 수 없어서 휴학하고 군에 입대해 버립니다. 그는 하나님 없이도 성공하고 잘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하여 어느 정도 성공의 길을 달렸습니다.
미국 군사학교 교관으로 선발되어 출세의 길이 열렸을 때에, 갑자기 오른쪽 눈에 이상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병원을 전전하며 온갖 약을 다 써 보았지만 원인조차 알 수 없었고, 점점 어두워지던 눈은 결국 보이지 않게 되었고, 왼 쪽 눈마저 같은 증상이 되었습니다. 직장도 잃었고, 친구들도 떠나고 아내마저 떠나버린 절망에 몸부림치던 요한은 결국 자살의 길을 택했습니다. 칼로 손목을 그었지만 피만 나고 죽지 않았고, 목을 매어 죽으려 했지만 줄이 끊어져서 죽지도 못했습니다.
절망에 엎드려있던 어느 날, 밝은 빛이 비치면서 음성이 들렸습니다. “구약성경 320페이지를 읽어보라.”는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그는 길을 지나는 사람에게 ‘구약성경 320페이지를 좀 읽어 달라.’고 매달렸습니다. “내가 너를 떠나지 않으며, 버리지 않겠다.”고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 후 신학교를 마치고 맹인교회를 시작하고, 지금도 ‘새빛 맹인 선교회’를 이끌며 ‘맹인의 대부’라고 불릴 정도로 많은 섬김을 하고 있습니다.
이 글의 제목처럼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자리는 ‘낮은 자리’입니다. 본문 27절에서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고 하셨듯이 ‘낮은 자리’, ‘섬김의 자리’에 주님이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에도 마구간의 구유가 몸을 누이신 처음 자리였습니다. 또한 마태복음 11:29절에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라고 하시며, 항상 낮은 자리에 계신 주님이심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을 만나려면 당연히 예수님이 계시는 낮은 자리를 찾아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낮은 자리는 어떤 곳입니까?
* 낮은 자리는 비움의 자리입니다.
네덜란드 출신의 미국의 로마 가톨릭 사제이자 작가인, 헨리 나우웬(Henri Jozef Machiel Nouwen 1932년-1996년)교수입니다. 그는 예일대학의 교수였으며, 하버드 대학의 교수이기도 한 명망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것을 버리고 1985년 프랑스의 라르쉬의 정신지체 장애인 공동체인 ‘데이브레이크’에 들어갔습니다. 거기서 1년을 머문 후 캐나다 토론토의 라르쉬 데이브레이크 공동체에서 장애인을 섬기는 데 여생을 바쳤습니다. 그는 출세의 길을 버리고 장애인 공동체로 간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나는 공부하는 동안 단 한 번도 1등의 자리를 놓친 적이 없었으며, 하버드 대학의 교수가 되기까지 출세가도를 달렸습니다. 그런데 그 어느 곳에서도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아담’이라는 식물인간이 된 청년을 만난 후 그를 통하여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
나우웬 교수는 비록 가톨릭 사제였지만 그의 예수님께로 향하는 정신은 본받을 만합니다. 사람들은 출세의 자리를 얻으려고 갖은 노력을 다합니다. 때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출세하려 합니다. 그런데 그 탄탄대로가 열린 출세 길을 마다하고 고생을 자초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탄탄대로가 아니라 자신의 작은 소유물조차 버리지 못하는 것이 보통의 인생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낮은 자리는 자신의 것을 비워야만 갈 수 있는 곳에 있습니다. 누가복음 14:33절을 봅시다.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하십니다. 모두 버려야 한다고 하니 걱정이 되지요? 그러나 오해하지 마십시오. 알거지가 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명하시면 당장이라도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도록 소유물에 집착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관심두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요구가 부당하게 여겨집니까? 부당한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주어진 것들 중에 어느 것 하나라도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세상에 오면서 가지고 온 것이 있습니까?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면서 무엇인가를 들고 온 사람을 아무도 없습니다. 욥이 사단의 시기를 받아 모든 소유를 다 잃어버린 후에 욥기 1:21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여러분이 그토록 애지중지 하는 모든 재물도 자식도 모두가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이 사실을 인정할 때에 비로소 자신을 비울 수가 있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을 비울 때에 그 곳에 주님이 계심을 보게 될 것입니다.
* 낮은 자리는 섬김의 자리입니다.
본문 27절을 다시 읽습니다.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고 하십니다. 마가복음 10:45절에서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도 ‘섬김을 위함’이며, 이 땅에서의 모든 사역도 ‘오직 섬김’이셨습니다. 제자들이 만찬의 자리에서 더러운 발로 눈치만 보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도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함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13-15)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섬김의 본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3년이 온통 섬김으로 가득하게 채워졌습니다. 온갖 병자를 고치시고,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시며,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서로 높아지려 하고, 섬기며 봉사하는 일을 싫어하며 피하려 했던 제자들에게 주님이 친히 본을 보이셨습니다. 우리의 예수님이 계시는 그곳은 바로 섬기는 자리였습니다. 여러분이 자신을 낮추어 다른 사람을 섬기고 봉사할 때에 그곳에 주님이 계십니다. 주님이 하시는 일을 여러분이 대신 할 때에 주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고 힘을 주시며 여러분의 삶을 복되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섬김을 독려하시려고 마태복음 10:42절에서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고 약속하십니다.
♥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열매가 가장 많이 달린 무거운 가지는 항상 맨 밑으로 조용히 내려지게 되고, 벼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는 법입니다. 흐르는 냇물이 얕을수록 요란하고 출렁임이 심하지만, 깊은 물은 잠잠한 법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께 가까이 가면 갈수록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낮아지고 겸손하게 됩니다. 바로 이 자리, 자신을 낮추어 비우고 섬기는 그 자리에 주님이 계십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할 때에 그 자리는 풍성한 자리가 되며, 기쁨과 행복의 자리, 영원한 소망의 자리가 될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요셉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창 39:2)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의 삶이 이와 같이 자신을 낮추고 겸손한 마음으로 비우고 섬기는 삶으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형통한 삶을 이루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