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 장로회
설교모음

사는 것이 힘이 듭니까?

작성자 배의신 댓글 / 조회: 7,029회 작성일 2009-11-23 16:56
*** 사는 것이 힘이 듭니까?  / 고린도후서 1:3-10

** 들어가는 말

고린도후서 1:3-10, “3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6 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7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10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

1980년 3월, 프랑스 파리의 부르셀 병원에는 한 세기를 떠들썩하게 했던 존경받는 지성인이 폐수종으로 입원했습니다. 그가 입원해 있는 한 달 동안 문자 그대로 발악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 때문에 자기의 병명이 무엇인지를 아내에게도 묻지 못했고 아내조차도 그의 병명을 말하지 못했습니다. 소리치며 괴로워하고 있는 남편의 곁에서 위로조차 하지 못하고 지켜보아야만 했던 이 불쌍한 여인과 그 사람!
이 사람은 한 세기에 가장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던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6.21~1980.4.15)였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만큼 글로써 현대인에게 깊은 감동을 남긴 사람도 드뭅니다. 뿐만 아니라 그가 남긴 ‘자유의 길’이라는 장편소설에서 죽음으로부터의 자유를 그리고 있습니다.
1980년 4월 16일, 그는 입원한 지 한 달 만에 병원에서 그렇게 두려움 속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난 후, '사르트르가 왜 그렇게 죽어야 했는가?', '죽음으로부터의 자유를 그렇게도 외쳤던 그의 말로가 이렇게 비참했던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해 각 언론이 떠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어떤 독자가 한 신문사에 이런 기사를 투고했다고 합니다.
“그는 아마도 비 그리스도인이었는지 모릅니다. 사르트르의 말로가 그렇게도 비참했던 이유는 그에게 돌아갈 고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는 그토록 자랑스럽고 당당하고 위대했던 사르트르였지만 죽음 이후에 돌아갈 고향이 없었습니다. 그렇게도 당당하게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하던 그에게는 돌아갈 영원한 안식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고 고통스러워했던 것입니다. 지금의 사람들도 다르지 않습니다. 건강하고 모든 일이 잘되어 살만할 때는 큰소리치고, 당당하고, 하나님 없이도 잘 살 수 있다고 장담하면서 삽니다. 그러나 인생의 황혼이 다가오고, 죽음의 위기가 닥치면 사르트르처럼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고통스러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세상의 부귀영화, 육신의 건강과 즐거움에 매어달리는 것입니다. 미래의 불안을 잊으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베드로후서 3:3-5절을 봅시다.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부러 잊으려 함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모습입니다. 내가 믿지 않는다고, 내가 잊어버린다고 엄연한 사실이 바뀌겠습니까?

혹 여러분들에게도 미래에 대한 불안이 밀려올 때가 없습니까? 생활이 힘들고 어려울 때, 남들은 자녀의 미래를 위하여 준비하고, 자신의 노후를 위하여 준비하는데 나는 아무런 대책이 없을 때, 또는 건강이 염려가 될 때, 학생들은 자신의 능력과 미래가 불분명할 때,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이 몰려오게 됩니다. 그것은 미래에 대한 소망이 확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즈음처럼 스트레스가 많은 때가 예전에는 거의 없었습니다. 지금은 시대가 너무나 빠르게 변하여 새로운 것에 적응하기도 전에 더 새로운 것이 나타납니다. 사람이든 짐승들이든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면 불안하게 됩니다. 이 세상은 적응하는 생명들만 살아남기 때문입니다. 바로 적자생존(適者生存)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미래의 불안함을 보상하는 심리로 ‘보험’을 들고 그것을 위로로 삼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사는 것이 많이 피곤하지요? 복음송 가사에도 나오듯이 “하늘 보아도 땅을 보아도 앞을 보아도 뒤를 보아도 쉴 곳이 없는 안개와 같은 우리네 인생”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피곤한 인생길에서 무엇을 위로로 삼습니까?

* 먼저 본문의 내용을 살펴봅시다.

본문은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사도 바울의 두 번째 편지 앞부분입니다. 고린도교회는 바울에게 근심을 끼치는 교회 중 하나였습니다. 고린도교회가 있는 고린도 시는 여러 민족들이 섞여 있는 다민족문화를 이루고 있었으며, 상업이 발달하여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는 이기주의가 가득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돈이 많이 돌면서 향락사업이 발달했고, 술의 신인 ‘디오뉴소스(박카스)’, 아폴로 신전, 아프로디테 여신전, 등이 있어서 우상숭배와 음행의 극치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환경에 있는 고린도교회도 여러 가지 죄악들을 용납하고 있어서 바울의 근심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첫 번째 편지를 보냈지만 고린도교회는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직접 고린도교회를 방문하여 책망하면서 말씀으로 가르쳤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로 달라지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 후에 ‘디도’로부터 고린도교회가 회개했으며, 사도 바울을 사모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바울이 이 두 번째 편지를 썼습니다.

이 두 번째 편지 서두에서 바울은 먼저 신앙을 지키기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고난을 무릅쓰고 믿음을 지켜가는 성도들에게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라며 위로합니다. 이러한 위로가 필요한 이유는 타락한 세상에서 믿음을 지키려면 많은 손해와 환난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진실하게 살고자 한다면 세상에서 많은 고난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로마서 8:17절에서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고 하셨고, 디모데후서 3:12절에서는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고난만 예고된 것은 아닙니다. 만일 고난만 있다면 무슨 맛으로 예수님을 따라가겠습니까? 고난의 목적과 그에 따르는 위로까지도 말씀하십니다.

* 그리스도인의 고난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고난에 무슨 목적이 있습니까? 예수님 안에서 주어지는 고난은 목적을 가진 고난이어서 ‘연단’이라고 부릅니다. 고난도 고난 나름이지 아무 고난이나 다 연단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 영원한 우리의 고향을 사모하면서 견뎌내는 고난입니다. 즉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순종의 삶에서 오는 불이익과 정신적 육체적인 어려움, 정직하고 바른 삶에서 오는 가난 등. 주님을 따르는 신앙의 길에서 당하는 고난을 말합니다. 본문에서는 세상에서 성도가 당면하는 환난을 ‘그리스도의 고난’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몸소 겪으신 것과 같은 고난을 말합니다. 그 사실은 본문에 사용된 단어를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본문 4절에서 사용된 ‘환난’이라는 말은 ‘극심한 중압감’, ‘눌리고 짓밟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짐이 너무 무거운 나머지 그 밑에 깔려버린 가축을 연상케 하는 그런 말입니다. 이 단어가 본문 3-7절에 네 번이나 등장합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는 이런 고난을 당하지 않으려고 세상과 적당하게 타협했습니다. 우상숭배, 음행, 이기주의 등 적당하게 요령껏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도 그렇습니다. 세상과 조금만 타협하면 돈도 벌고 조금 더 편하게 살 수도 있습니다. 거짓말로 꾸며서 보험금을 탈 수도 있고, 양심을 조금만 속이면 돈을 더 벌수도 있고, 주일을 온전하게 지키지 않고, 헌금을 적당하게 하고, 봉사도 섬김도 헌신도 요령껏 하면 조금 더 편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신앙을 조금만 느슨하게 풀면 세상의 쾌락도 적당하게 즐길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세상 사람들도 좋아하고 핍박이나 놀림도 불이익도 당하지 않아서 좋습니다. 이렇게 하고도 천국 본향에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전도서 11:9절을 봅시다. (공동번역)“그러니 젊은이들아, 청춘을 즐겨라. 네 청춘이 가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즐겨라. 가고 싶은 데 가고, 보고 싶은 것을 보아라. 그러나 하나님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을 심판하시리라는 것만은 명심하여라.”

이처럼 어려움, 고난을 피하려고 세상과 타협하면 돌아갈 본향은 없습니다. 이 세상의 것과 영원한 것을 바꾼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고난(연단)이 주어집니다. 본문 8-9절을 봅시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고 하십니다. 곧 고난의 목적은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왜냐하면 인생이 힘들고 어려울 때는 죄에서 떠나고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전서 4:1-2절을 봅시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힘쓰는 데도 불구하고 인생이 힘들고 어려울 때는 감사하십시오. 하나님의 따뜻한 관심과 손길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 주님 안에서의 고난에는 위로가 함께 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살거나, 자기의 욕심을 따라가다가 어려움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징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다가 당하는 어려움에는 하나님의 넘치는 위로가 함께 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자녀 된 우리가 절망하거나 고통을 당하도록 버려두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애가 3:33절에서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라고 하시며, 예레미야 29:11절에서는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고 하십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생각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세상에서 잘되고 행복하게 살고 하나님의 나라에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고난당하는 자녀들에게는 미리 피할 길도 준비하시고, 넉넉히 이길 수 있도록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십니다. 고린도전서 10:13절에서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 하시며, 로마서 8:37절에서는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하십니다.

이 위로의 확실한 말씀이 본문에 있습니다. 이 말씀은 더 설명이 필요 없이 읽는 것으로 충분하리라 생각합니다. 본문 3-5절을 함께 읽읍시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제가 부교역자로 시무하던 교회에서 한 가정이 오토바이 사고로 아들을 잃었습니다. 어머니 홀로 아들을 키워왔는데, 그 아들이 친구 오토바이를 빌려 타고 난폭하게 달리다가 사고를 낸 것입니다. 가슴앓이로 몸져누운 그 성도를 위로하기 위하여 목사님이 심방을 하고, 전도사가 심방을 하고, 성도들이 심방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성도님은 좀처럼 기운을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사고가 있은 몇 주일 후 그 성도님이 많이 회복한 모습으로 교회를 왔습니다. 다음 날 심방을 한 저에게 들려주시는 이야기가, 같은 아파트에 사시는 가난한 가정의 노 성도님의 이야기를 듣고 힘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바로 그 노 성도님은 특이한 병으로 아들을 둘씩이나 먼저 보내는 아픔을 겪었던 분이었습니다.

‘동병상련’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목회자의 위로보다도 성도들의 위로보다도 같은 아픔을 가지고 있는 성도의 위로가 큰 힘이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위로는 이러한 위로입니다. 극한 가난과 사람이 당할 수 있는 가장 모진 고통과 멸시를 받으시고, 끝내는 인간에게 내려지는 최고의 극형인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이십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의 고난을 바라보면서 우리에게 다가온 고난도 견디고 이길 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어려움의 길을 따라가는 사람에게 ‘친구’라는 파격적인 대우까지 주어집니다. 요한복음 15:15절에서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고 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사는 것이 힘이 듭니까? 우리에게 다가오는 어려움은 인내를 이루게 하고, 그 인내로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하심을 잊지 맙시다. 세상이 힘들어질수록 하나님을 더욱 의지합시다. 세상과 타협하면 돌아갈 본향이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위로도 받을 수가 없습니다. 다음 주일부터 대림절이 시작되며 우리의 영원한 소망이며 위로자이신 예수님의 성탄절이 다가옵니다. 이 평화와 위로의 계절에 주님 안에서 위로가 넘치며, 더 어려운 이웃들을 돌아보며 위로할 수 있는 큰 복이 우리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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