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자녀들의 진정한 자유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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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9-11-04 13:20
*** 하나님의 자녀들의 진정한 자유 / 눅 15:11-24
** 들어가는 말
누가복음 15:11-24, “11 또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12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산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14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 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1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지난 주일과 같은 본문으로 오늘은 ‘자유’에 대하여 말씀을 전하려합니다.
‘자유!’말만 들어도 가슴이 뛰는 선망의 대상입니다. “…모든 인간은 아무도 박탈할 수 없는 생명, 자유 및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신으로부터 부여받았음을 믿는다.…” 미국 독립선언서의 일부입니다. 지금은 세계 최강의 국가인 미국도 156년간이나 영국의 지배를 받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인간의 권리를 회복하고자 독립을 선언했습니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당시 미국 독립혁명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던 ‘페트릭 헨리(Patrick Henry, 1736~1799)가 남긴 유명한 말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자유를 갈망했습니다.
미국에 노예 해방운동이 일어나서 북부는 노예제도가 없어졌지만 남부에는 아직 노예제도를 따르고 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남부에 살던 흑인 노예 한명이 주인으로부터 도망하여 시카고로 갔습니다. 그 흑인노예는 자신의 인권을 찾아보려고 변호사를 찾아갔습니다.
변호사가 물었습니다. “자네는 먹고 살기가 어려워서 도망했나?” “아닙니다. 먹을 것은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그러면 사는 곳이 누추해서인가?” “아니요. 살고 있는 집은 썩 좋은 곳이었습니다.” “그럼 주인의 학대가 심했던 모양이군.” “천만에요. 주인의 학대는 없었습니다.” “그럼 일이 몹시 고되었군.” “일은 충분히 견딜 만 했습니다.” “그럼 자넨 왜 그 좋은 환경을 버리고 도망을 쳤는가?”
변호사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노예를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그러자 흑인 노예는 변호사를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 환경이 그렇게 좋아 보이시거든 선생님이 제 대신 노예로 들어가시죠.”
흑인노예가 갈망했던 ‘자유’ 이 자유는 개인에게나, 집단에게나 인간이라면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이자 축복입니다. 하지만 자유를 마음껏 누리며 사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늘 무언가에 쫓기면서 살고, 무엇엔가 붙잡혀 자유롭지 못한 채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늘 힘들고 답답합니다. 이걸 두고 ‘삶의 노예’라고 부릅니다. 이런 삶의 노예 상태는 사람이 스스로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하나님의 사람들까지도 삶의 노예가 되어 답답하게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로 이루신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갈라다아서 5:1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습니까? 아니면 늘 무엇엔가 쫓기는 듯이 살고, 무엇엔가 붙잡혀서 자유를 갈망하면서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저나 여러분은 자유로운 사람들입니다. 요한복음 8:32절에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셨고, 36절에서는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고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갈라디아서 5:13절에서는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의 자유를 보장하시는 진정한 자유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유롭지 못합니다. 왜 자유롭지 못한지, 어떻게 하면 자유를 누릴 수 있을지를 말씀을 통하여 확인하고 자신의 것으로 삼으시기를 바랍니다.
* 우리는 왜 자유롭지 못합니까?
여러분은 자신이 자유롭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하나님께서 자유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자유롭지 못합니까?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내려놓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생애뿐만 아니라 자신의 모든 삶을 하나님께 내려놓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내려놓는다는 것은 하나님께 맡긴다는 뜻이며, 하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는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누차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시편 55:22절에서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고 하시며, 37:5절에서는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라고 하시며, 마태복음 11:28절에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초청하시며, 베드로전서 5:7절에서는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고 하십니다. 이 모든 말씀은 우리가 지고 있는 인생의 모든 짐을 하나님께 내려놓으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내 인생의 짐을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께서 이루시며 우리는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내려놓지를 못하고 맡기지를 못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아주 심각한 문제입니다. 맡기지 못한다는 말은 ‘불신(不信)’을 뜻하며, 불신은 하나님과의 단절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큰 죄악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며, 또 스스로가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진정한 믿음은 자신의 생활에서 나타나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고 신뢰한다고 하면서도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명백한 불신의 행위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2:14절에서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라고 하시며, 17절에서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하시며, 22절에서는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고 하십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세상에 대하여 자유롭지 못한 것은 ‘스스로의 죄의 문제’때문입니다. 이 죄는 ‘내 삶을 하나님께 내려놓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삶을 내려놓으면, 하나님 안에서 마음껏 자유를 누릴 수 있게 하셨습니다. 마치 물고기가 좁은 어항이라 할지라도 물속에 있을 때에 자유로운 것과 같습니다. 만일 물고기가 좁은 어항이 싫다고 밖으로 뛰쳐나온다면 그 순간이 곧 죽음의 순간이 될 것입니다. 바로 본문에 나오는 둘째 아들이 그러했습니다. 둘째 아들을 ‘탕자’라고 부르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탕자는 아버지의 집이 갑갑하고 싫었습니다. 자유롭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자기에게 돌아올 재산을 모아서 아버지의 집을 떠났습니다. 그리고는 아무런 간섭도 받지 않고 마음껏 허랑방탕했습니다. 본문 14절에서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꼭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의 자녀가 세상에서는 얻을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세상 사람들은 채워지지 않는 영의 빈자리로 인하여 허덕이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서 하나님이 사람들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탕자처럼 세상 사람들이 얻을 것이 있는 동안에는 사람들이 몰려들겠지만, 언젠가는 모든 것이 비어버릴 날이 올 것입니다. 바로 “비로소 궁핍한 때”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을 떠나 있을 동안에는 결코 평안이 없습니다. 버는 것은 단 한 가지 ‘매’뿐입니다. 이사야 1:5절에서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 더욱 패역하느냐?”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떠나 있는 동안에는 자유뿐만 아니라 생명의 보장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5:5절에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하십니다. 탕자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 같습니까? 하나님을 떠나서 세상에서는 마음대로 할 수 있어서 좋다고 생각하십니까?
* 진정한 자유는 하나님 안에서만 누릴 수 있습니다.
도시에 있는 초등학교의 운동장이 담도 없이 번잡한 도로와 연결되어 있어서 위험했습니다. 교사들은 항상 학생들에게 조심하라고 주의시켰고, 또한 학생들도 운동장에서 놀다가 자칫 공이 길거리에 굴러 나가게 될까봐 주의했습니다.
이 사실을 안 교육청에서 그 초등학교 운동장 둘레에 담을 쌓도록 조치를 취했습니다. 담이 완공되자 학교 교사들은 안심하게 되었고, 특히 학생들은 위험을 느끼지 않고 마음껏 뛰어 놀게 되었습니다.
학교 둘레에 담이 없을 때에는 가려진 것이 없어서 시원하고 좋았겠지만 자유롭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나 담이 생김으로서 아이들은 오히려 안전하게 자유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 안에서 사는 것이 답답한 듯이 느껴지겠지만 진정한 자유를 위한 하나님의 안전장치입니다. 그래서 기도와 말씀 안에서 항상 하나님과 교통하며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게 하신 것입니다. 마치 물고기에게 있어서 물이 자신의 생명인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의 삶은 곧 생명입니다. 요한복음 15:5,6절을 봅시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고 하십니다. 당연히 가지는 줄기에 붙어있어야 삽니다. 가지가 자유롭고 싶다고 줄기를 떠나서 혼자 떨어지게 되면 서서히 말라지고 결국은 죽게 될 것입니다.
탕자의 삶이 그러했습니다. 줄기를 떠난 가지처럼 아버지의 집을 떠났을 때에는 신바람이 났습니다. 가진 재산으로 세상의 풍요와 즐거움을 마음껏 누리는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풍요와 즐거움은 한 순간 뿐이었습니다. 탕자에게 고갈이 찾아왔습니다. 세상은 탕자에게 문을 열지 않았습니다. 광야에 돼지와 함께 버려두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결코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5:18-19절을 봅시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세상에서 환영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며 맡겨야 합니다. 여러분의 모든 삶과 생명을 하나님께 맡기면 세상에서도 자유롭게 됩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하나님을 대적하지 못하며 하나님께 붙은 우리를 결코 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39절에서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하십니다.
탕자는 자신의 고갈을 알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탕자는 생명을 잃기 전에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물고기가 죽기 전에 물속으로 돌아간 것과 같습니다. 사람은 고집이 세고 어리석어서 꼭 실패를 해봐야 정신을 차립니다. ‘외국에 나가보면 모두 애국자가 된다.’고 했듯이 어리석은 자녀는 아버지 집을 떠나봐야 아버지의 집이 좋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도 이만하면 다행입니다. 더 고집이 센 사람은 거의 죽도록 얻어맞아야 돌아옵니다. 그에 비하면 탕자는 지혜로운 편입니다. 탕자는 한 번 실패하고 죽을 뻔하고는 정신을 차리고 모든 것을 아버지께 내려놓았습니다. “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 탕자가 아버지 집을 떠날 때와 너무 다르지 않습니까? 떠날 때는 너무도 당당하게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라고 했습니다. 한 번 세상의 모진 맛을 보고는 자신의 고집을 다 꺾고 ‘자녀’라는 당연한 신분마저도 내려놓았습니다. 이렇게 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순종하는 것이 지혜로움이며 하나님의 크신 은총을 받게 됩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지혜로운 자녀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얼싸안으며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자녀의 신분과 함께 아버지의 풍요로움을 다 주셨습니다.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이것이 하나님 안에서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만의 진정한 자유입니다. 세상에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릴 수 있는 풍요와 자유의 길을 찾았습니까? 길을 깨달았다면 이제는 더 망설이지 말고 그 길로 나아가십시오.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여 내 일은 내가 해야겠다고 고집하면서 하나님께 내려놓지 못하면 죽도록 고생은 기본이고, 비참한 결말을 맞이할 것입니다. 의심과 두려움이 엄습할 때마다 주님을 의지하고 맡기십시오. 결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항상 기도하며 말씀에 깨어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이미 자유를 누리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진정한 이 자유를 마음껏 누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누가복음 15:11-24, “11 또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12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산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14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 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1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지난 주일과 같은 본문으로 오늘은 ‘자유’에 대하여 말씀을 전하려합니다.
‘자유!’말만 들어도 가슴이 뛰는 선망의 대상입니다. “…모든 인간은 아무도 박탈할 수 없는 생명, 자유 및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신으로부터 부여받았음을 믿는다.…” 미국 독립선언서의 일부입니다. 지금은 세계 최강의 국가인 미국도 156년간이나 영국의 지배를 받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인간의 권리를 회복하고자 독립을 선언했습니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당시 미국 독립혁명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던 ‘페트릭 헨리(Patrick Henry, 1736~1799)가 남긴 유명한 말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자유를 갈망했습니다.
미국에 노예 해방운동이 일어나서 북부는 노예제도가 없어졌지만 남부에는 아직 노예제도를 따르고 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남부에 살던 흑인 노예 한명이 주인으로부터 도망하여 시카고로 갔습니다. 그 흑인노예는 자신의 인권을 찾아보려고 변호사를 찾아갔습니다.
변호사가 물었습니다. “자네는 먹고 살기가 어려워서 도망했나?” “아닙니다. 먹을 것은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그러면 사는 곳이 누추해서인가?” “아니요. 살고 있는 집은 썩 좋은 곳이었습니다.” “그럼 주인의 학대가 심했던 모양이군.” “천만에요. 주인의 학대는 없었습니다.” “그럼 일이 몹시 고되었군.” “일은 충분히 견딜 만 했습니다.” “그럼 자넨 왜 그 좋은 환경을 버리고 도망을 쳤는가?”
변호사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노예를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그러자 흑인 노예는 변호사를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 환경이 그렇게 좋아 보이시거든 선생님이 제 대신 노예로 들어가시죠.”
흑인노예가 갈망했던 ‘자유’ 이 자유는 개인에게나, 집단에게나 인간이라면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이자 축복입니다. 하지만 자유를 마음껏 누리며 사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늘 무언가에 쫓기면서 살고, 무엇엔가 붙잡혀 자유롭지 못한 채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늘 힘들고 답답합니다. 이걸 두고 ‘삶의 노예’라고 부릅니다. 이런 삶의 노예 상태는 사람이 스스로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하나님의 사람들까지도 삶의 노예가 되어 답답하게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로 이루신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갈라다아서 5:1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습니까? 아니면 늘 무엇엔가 쫓기는 듯이 살고, 무엇엔가 붙잡혀서 자유를 갈망하면서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저나 여러분은 자유로운 사람들입니다. 요한복음 8:32절에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셨고, 36절에서는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고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갈라디아서 5:13절에서는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의 자유를 보장하시는 진정한 자유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유롭지 못합니다. 왜 자유롭지 못한지, 어떻게 하면 자유를 누릴 수 있을지를 말씀을 통하여 확인하고 자신의 것으로 삼으시기를 바랍니다.
* 우리는 왜 자유롭지 못합니까?
여러분은 자신이 자유롭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하나님께서 자유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자유롭지 못합니까?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내려놓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생애뿐만 아니라 자신의 모든 삶을 하나님께 내려놓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내려놓는다는 것은 하나님께 맡긴다는 뜻이며, 하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는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누차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시편 55:22절에서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고 하시며, 37:5절에서는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라고 하시며, 마태복음 11:28절에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초청하시며, 베드로전서 5:7절에서는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고 하십니다. 이 모든 말씀은 우리가 지고 있는 인생의 모든 짐을 하나님께 내려놓으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내 인생의 짐을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께서 이루시며 우리는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내려놓지를 못하고 맡기지를 못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아주 심각한 문제입니다. 맡기지 못한다는 말은 ‘불신(不信)’을 뜻하며, 불신은 하나님과의 단절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큰 죄악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며, 또 스스로가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진정한 믿음은 자신의 생활에서 나타나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고 신뢰한다고 하면서도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명백한 불신의 행위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2:14절에서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라고 하시며, 17절에서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하시며, 22절에서는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고 하십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세상에 대하여 자유롭지 못한 것은 ‘스스로의 죄의 문제’때문입니다. 이 죄는 ‘내 삶을 하나님께 내려놓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삶을 내려놓으면, 하나님 안에서 마음껏 자유를 누릴 수 있게 하셨습니다. 마치 물고기가 좁은 어항이라 할지라도 물속에 있을 때에 자유로운 것과 같습니다. 만일 물고기가 좁은 어항이 싫다고 밖으로 뛰쳐나온다면 그 순간이 곧 죽음의 순간이 될 것입니다. 바로 본문에 나오는 둘째 아들이 그러했습니다. 둘째 아들을 ‘탕자’라고 부르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탕자는 아버지의 집이 갑갑하고 싫었습니다. 자유롭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자기에게 돌아올 재산을 모아서 아버지의 집을 떠났습니다. 그리고는 아무런 간섭도 받지 않고 마음껏 허랑방탕했습니다. 본문 14절에서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꼭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의 자녀가 세상에서는 얻을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세상 사람들은 채워지지 않는 영의 빈자리로 인하여 허덕이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서 하나님이 사람들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탕자처럼 세상 사람들이 얻을 것이 있는 동안에는 사람들이 몰려들겠지만, 언젠가는 모든 것이 비어버릴 날이 올 것입니다. 바로 “비로소 궁핍한 때”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을 떠나 있을 동안에는 결코 평안이 없습니다. 버는 것은 단 한 가지 ‘매’뿐입니다. 이사야 1:5절에서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 더욱 패역하느냐?”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떠나 있는 동안에는 자유뿐만 아니라 생명의 보장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5:5절에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하십니다. 탕자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 같습니까? 하나님을 떠나서 세상에서는 마음대로 할 수 있어서 좋다고 생각하십니까?
* 진정한 자유는 하나님 안에서만 누릴 수 있습니다.
도시에 있는 초등학교의 운동장이 담도 없이 번잡한 도로와 연결되어 있어서 위험했습니다. 교사들은 항상 학생들에게 조심하라고 주의시켰고, 또한 학생들도 운동장에서 놀다가 자칫 공이 길거리에 굴러 나가게 될까봐 주의했습니다.
이 사실을 안 교육청에서 그 초등학교 운동장 둘레에 담을 쌓도록 조치를 취했습니다. 담이 완공되자 학교 교사들은 안심하게 되었고, 특히 학생들은 위험을 느끼지 않고 마음껏 뛰어 놀게 되었습니다.
학교 둘레에 담이 없을 때에는 가려진 것이 없어서 시원하고 좋았겠지만 자유롭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나 담이 생김으로서 아이들은 오히려 안전하게 자유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 안에서 사는 것이 답답한 듯이 느껴지겠지만 진정한 자유를 위한 하나님의 안전장치입니다. 그래서 기도와 말씀 안에서 항상 하나님과 교통하며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게 하신 것입니다. 마치 물고기에게 있어서 물이 자신의 생명인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의 삶은 곧 생명입니다. 요한복음 15:5,6절을 봅시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고 하십니다. 당연히 가지는 줄기에 붙어있어야 삽니다. 가지가 자유롭고 싶다고 줄기를 떠나서 혼자 떨어지게 되면 서서히 말라지고 결국은 죽게 될 것입니다.
탕자의 삶이 그러했습니다. 줄기를 떠난 가지처럼 아버지의 집을 떠났을 때에는 신바람이 났습니다. 가진 재산으로 세상의 풍요와 즐거움을 마음껏 누리는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풍요와 즐거움은 한 순간 뿐이었습니다. 탕자에게 고갈이 찾아왔습니다. 세상은 탕자에게 문을 열지 않았습니다. 광야에 돼지와 함께 버려두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결코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5:18-19절을 봅시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세상에서 환영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며 맡겨야 합니다. 여러분의 모든 삶과 생명을 하나님께 맡기면 세상에서도 자유롭게 됩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하나님을 대적하지 못하며 하나님께 붙은 우리를 결코 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39절에서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하십니다.
탕자는 자신의 고갈을 알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탕자는 생명을 잃기 전에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물고기가 죽기 전에 물속으로 돌아간 것과 같습니다. 사람은 고집이 세고 어리석어서 꼭 실패를 해봐야 정신을 차립니다. ‘외국에 나가보면 모두 애국자가 된다.’고 했듯이 어리석은 자녀는 아버지 집을 떠나봐야 아버지의 집이 좋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도 이만하면 다행입니다. 더 고집이 센 사람은 거의 죽도록 얻어맞아야 돌아옵니다. 그에 비하면 탕자는 지혜로운 편입니다. 탕자는 한 번 실패하고 죽을 뻔하고는 정신을 차리고 모든 것을 아버지께 내려놓았습니다. “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 탕자가 아버지 집을 떠날 때와 너무 다르지 않습니까? 떠날 때는 너무도 당당하게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라고 했습니다. 한 번 세상의 모진 맛을 보고는 자신의 고집을 다 꺾고 ‘자녀’라는 당연한 신분마저도 내려놓았습니다. 이렇게 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순종하는 것이 지혜로움이며 하나님의 크신 은총을 받게 됩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지혜로운 자녀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얼싸안으며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자녀의 신분과 함께 아버지의 풍요로움을 다 주셨습니다.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이것이 하나님 안에서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만의 진정한 자유입니다. 세상에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릴 수 있는 풍요와 자유의 길을 찾았습니까? 길을 깨달았다면 이제는 더 망설이지 말고 그 길로 나아가십시오.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여 내 일은 내가 해야겠다고 고집하면서 하나님께 내려놓지 못하면 죽도록 고생은 기본이고, 비참한 결말을 맞이할 것입니다. 의심과 두려움이 엄습할 때마다 주님을 의지하고 맡기십시오. 결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항상 기도하며 말씀에 깨어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이미 자유를 누리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진정한 이 자유를 마음껏 누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