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의 교통의 문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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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9-10-26 17:52
*** 하나님과의 교통의 문 / 눅 15:11-24
** 들어가는 말
누가복음 15:11-24, “11 또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12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산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14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 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1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인도의 기독교 성자 가운데 ‘선다 싱’이란 분이 있습니다. 이 분은 신비주의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지만, 삶과 인격은 많은 사람들을 감동케 합니다. 그의 일화 중에 하나입니다.
선다 싱이 추운 겨울에 히말라야산맥을 넘어 네팔 전도에 나섰을 때였습니다. 마침 같은 방향으로 가는 동행자를 만나서 함께 가게 되었습니다. 산을 넘어가다가 길가 눈 속에 쓰러져 있는 노인을 보게 되었습니다. 추위로 인하여 정신을 잃고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선다 싱은 동행에게 함께 데려가자고 했지만 동행은 ‘이 혹독한 추위에 혼자서 빨리 산을 넘어도 안 될 판에 죽어가는 사람 때문에 시간을 지체할 수 없다.’면서 먼저 앞서 가버렸습니다.
선다 싱은 쓰려져 있는 노인을 업고 혼자서도 가기 힘든 산길을 가고 있습니다. 너무나 힘들어서 몇 번이나 쓰러지면서 그 추위에 땀이 흐를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 온기로 인하여 정신을 잃었던 노인도 서서히 깨어났습니다. 이렇게 업고 가다가 부축해서 가다가 하면서 밤새도록 걸어서 아침녘에야 겨우 산을 넘어 인가(人家)가 있는 마을로 들어섰습니다.
그런데 마을 입구에 쓰러져 있는 또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혼자 먼저 떠났던 동행이었습니다. 그 친구는 어두움 속에서 마을을 바로 앞에 두고 추위와 잠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얼어 죽은 것입니다.
사람은 애초에 하나님께서 서로 돕고, 격려하며, 위로하며, 협력하며 살도록 만드셨습니다. ‘독불장군이 없다.’는 말이 있듯이 사람은 혼자 살기에는 너무 약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사회적동물이다.”라고 정의했습니다. 이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과 서로 교제 속에서 살아가는 공동체적 속성을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지으시고 그가 살아가는 모습을 보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창 2:18) 그리고 여자를 만들어 아담에게로 이끌어오셨습니다. 이렇게 인류의 시작부터 인간은 공동체적인 성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기독교 신앙은 성도간의 교제와 하나님과의 교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신조 속에도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믿습니다.”라는 고백이 들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의 끝 인사에서(고후 13: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이는 모두 서로 간에 왕복되는 ‘교제’를 말합니다.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행위인 ‘예배’도 하나님과의 교통의 자리입니다.
교통 혹은 교제라는 말에는 ‘쌍방통행’의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쌍방통행이란 ‘주고받는다.’는 뜻입니다. 만일 신앙이 주는 것 혹은 받는 것에만 국한된다면 별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세상의 다른 모든 종교는 일방통행입니다. 신(神)과의 대화도 없고, 교제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섬기는 신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만 인간이 있지도 않은 신에게 일방적인 신앙을 가진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는 서로의 교통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신 참 신이시기 때문에 기도와 말씀으로 교통이 이루어지며, 성도들 서로 간에도 영적인 교통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29:13절에서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고 하시며, 33:3절에서는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하십니다. 이런 것이 하나님과의 교통이며 교제입니다. 성도의 교제에 대하여는 야고보서 5:14-16절을 봅시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15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16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이러한 영적인 교제가 성도의 교통입니다. 하나님의 성도들에게 이런 교통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곧 영적인 침체가 오게 되며 결국 영적인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이러한 하나님과의 교통은 우리 영의 생명을 좌우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모든 삶을 좌우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들은 반드시 하나님과의 교통이 원활하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많은 성도들이 여러 가지 생활의 어려움이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러다가 아무런 응답도 변화도 없으면 그만 실망하여 포기하거나 신앙이 식어져버립니다. 정작 자신의 죄로 인하여 자신이 스스로 문을 닫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합니다. 이사야 59:2절을 봅시다.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고 하시며, 예레미야 5:25절에서는 “너희 허물이 이러한 일들을 물리쳤고 너희 죄가 너희에게 오는 좋은 것을 막았느니라.”고 하십니다.
오늘 본문말씀이 이 사실을 보여줍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방탕하고 고집스러운 둘째 아들은 자신의 생각과 지식과 감정을 따라서 세상으로 나갔습니다. 마치 자신을 자유스럽고 행복하게 해 줄 파랑새가 세상에 있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아주 잠깐 동안, 재물이 있는 동안은 그런 듯이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핑크 빛 행복은 재물과 함께 사라져버렸고, 남은 것은 굶주림과 고독 그리고 생명의 위기뿐이었습니다. 탕자는 깊은 죄의식에 사로잡혔습니다. 탕자는 모든 것이 풍족한 아버지의 집이 그리웠습니다.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선뜻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모진 고통과 생명의 위기가 탕자를 아버지 집으로 향하게 했습니다. 탕자는 모든 것이 풍부한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서 이렇게 고백하며 용서를 빌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탕자의 마음에는 아버지의 집이 굳게 닫혀져 있을 것이라는 염려뿐입니다. 무슨 면목으로 아버지께 돌아갈까 하는 염려입니다.
하지만 탕자가 집을 떠난 이후로 아버지의 집 문은 닫힌 적이 없었습니다. 탕자가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이미 대문 밖에서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탕자가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빌었지만 아버지는 아무 것도 묻지 않으시고 아들을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리고 옷을 입히고 반지를 끼워주고 신발을 신겨주시며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고 하시면서 잔치를 열었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이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한 가지만 살펴보겠습니다.
* 하나님과의 교통의 문은 내가 열어야 합니다.
어느 누구도 탕자에게 ‘당신 아버지의 집이 당신에게 굳게 닫혀져 있다’고 말한 사람이 없습니다. 탕자의 죄책감은 자기 스스로가 만들어 낸 것일 뿐입니다. 탕자는 자신의 지식과 감정과 느낌에 의하여 아버지께서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상상을 만들었습니다. 쉽게 표현해서 ‘도둑이 제 발 저린 것’입니다. 그래서 ‘품꾼의 하나’라는 대체 신분까지 생각해 낸 것입니다. 이것은 막혀버린 아버지와의 교통의 문을 어떻게 해서라도 열어보려는 눈물겨운 노력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생각들은 탕자의 자격지심(自激之心)으로 인한 기우(杞憂, 쓸데없는 염려)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탕자가 아버지의 집을 나간 그 날부터 아버지는 아들을 염려하며 혹시 돌아올까 하여 대문도 닫지 못하고 틈만 나면 대문 밖에서 기다리셨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스스로 상상의 하나님을 만들고 자신이 만들어 낸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 깨닫고 순종하는 신앙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에 의하여 스스로 만들어 낸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빌립이 예수님을 만난 후 친구인 나다나엘을 부르러 갔습니다. 나다나엘에게 ‘내가 예수님을 만났다’고 전하면서 “와 보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때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1:46)고 거절했습니다. 나다나엘은 자신의 지식과 느낌을 신뢰한 것입니다. 그 뿐입니까!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들은 두 제자도 역시 실망감을 안고 고향인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곁에 서셨으나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고 말입니다. 그들은 지금 자신의 감정에 휩싸여 스스로 실망하고 좌절한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옆에 계심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이처럼 오늘 많은 사람들도 자신의 생각이 만들어 낸 하나님을 상상하고 있습니다.
이러하듯이 하나님께서 천국의 문을 닫으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스스로가 자신의 지식과 감정에 빠져서 마음을 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3:20절에서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고 하십니다. 이는 하나님과의 교통의 문을 우리 스스로가 열어야 함을 말합니다. 만일 죄가 있으면 죄를 고백하고 죄로 인하여 스스로 닫힌 자신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요한일서 1:9절에서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하십니다. 왜 이렇게 죄를 고백해야 합니까? 시편 66:18절에서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고 하신 말씀대로 죄가 있으면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1:18절에서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고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내 안에 스스로 가지고 있습니다. 만일 탕자가 자신의 잘못을 알고 있었고 돌아갈 방법도 알았지만 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머물렀다면 비참한 종말을 맞았을 것입니다. 사람은 실수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돌아서는 것입니다. 탕자처럼 용기를 내어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나를 대신하여 돌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내 문제를 대신 풀어줄 사람도 없습니다. 기다린다고 저절로 해결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교통의 문을 여는 길은 오직 나 자신이 스스로 마음의 문을 열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방황하는 시간이 길어지고,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 오래 방황할수록 인생은 힘들어지고 고통만 더하게 됩니다. 이사야 1:5절에서 하나님께서 반항하는 이스라엘백성을 향하여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 더욱 패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어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유하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라고 탄식하십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의 성공 열쇠는 ‘하나님과의 교통의 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교통의 문이 열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을 지도하시고 인도하십니다. 시편 37:5,6절에서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이 스스로 키를 몇 센티미터 더 크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까? 아니면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는 경험이나 능력이 있습니까? 하나님 없이도 영원한 생명과 행복에 이를 수 있는 길이 있습니까?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 되는대로 살다가 되는대로 죽겠다는 각오입니까? 이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며 소망한다면 여러분의 삶을 하나님께 내려놓으십시오. 하나님을 믿고 모든 죄를 고백하며 회개하고, 여러분의 생명과 모든 삶을 맡기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과의 교통의 문이 열릴 것이며,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에 들어오셔서 지도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기쁨과 평안과 함께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도 기꺼이 주실 것입니다. 이왕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한다면 한 시간이라도 더 주님이 주시는 행복을 누리도록 하나님과의 교통의 문을 활짝 여시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누가복음 15:11-24, “11 또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12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산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14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 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1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인도의 기독교 성자 가운데 ‘선다 싱’이란 분이 있습니다. 이 분은 신비주의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지만, 삶과 인격은 많은 사람들을 감동케 합니다. 그의 일화 중에 하나입니다.
선다 싱이 추운 겨울에 히말라야산맥을 넘어 네팔 전도에 나섰을 때였습니다. 마침 같은 방향으로 가는 동행자를 만나서 함께 가게 되었습니다. 산을 넘어가다가 길가 눈 속에 쓰러져 있는 노인을 보게 되었습니다. 추위로 인하여 정신을 잃고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선다 싱은 동행에게 함께 데려가자고 했지만 동행은 ‘이 혹독한 추위에 혼자서 빨리 산을 넘어도 안 될 판에 죽어가는 사람 때문에 시간을 지체할 수 없다.’면서 먼저 앞서 가버렸습니다.
선다 싱은 쓰려져 있는 노인을 업고 혼자서도 가기 힘든 산길을 가고 있습니다. 너무나 힘들어서 몇 번이나 쓰러지면서 그 추위에 땀이 흐를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 온기로 인하여 정신을 잃었던 노인도 서서히 깨어났습니다. 이렇게 업고 가다가 부축해서 가다가 하면서 밤새도록 걸어서 아침녘에야 겨우 산을 넘어 인가(人家)가 있는 마을로 들어섰습니다.
그런데 마을 입구에 쓰러져 있는 또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혼자 먼저 떠났던 동행이었습니다. 그 친구는 어두움 속에서 마을을 바로 앞에 두고 추위와 잠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얼어 죽은 것입니다.
사람은 애초에 하나님께서 서로 돕고, 격려하며, 위로하며, 협력하며 살도록 만드셨습니다. ‘독불장군이 없다.’는 말이 있듯이 사람은 혼자 살기에는 너무 약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사회적동물이다.”라고 정의했습니다. 이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과 서로 교제 속에서 살아가는 공동체적 속성을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지으시고 그가 살아가는 모습을 보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창 2:18) 그리고 여자를 만들어 아담에게로 이끌어오셨습니다. 이렇게 인류의 시작부터 인간은 공동체적인 성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기독교 신앙은 성도간의 교제와 하나님과의 교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신조 속에도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믿습니다.”라는 고백이 들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의 끝 인사에서(고후 13: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이는 모두 서로 간에 왕복되는 ‘교제’를 말합니다.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행위인 ‘예배’도 하나님과의 교통의 자리입니다.
교통 혹은 교제라는 말에는 ‘쌍방통행’의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쌍방통행이란 ‘주고받는다.’는 뜻입니다. 만일 신앙이 주는 것 혹은 받는 것에만 국한된다면 별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세상의 다른 모든 종교는 일방통행입니다. 신(神)과의 대화도 없고, 교제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섬기는 신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만 인간이 있지도 않은 신에게 일방적인 신앙을 가진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는 서로의 교통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신 참 신이시기 때문에 기도와 말씀으로 교통이 이루어지며, 성도들 서로 간에도 영적인 교통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29:13절에서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고 하시며, 33:3절에서는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하십니다. 이런 것이 하나님과의 교통이며 교제입니다. 성도의 교제에 대하여는 야고보서 5:14-16절을 봅시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15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16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이러한 영적인 교제가 성도의 교통입니다. 하나님의 성도들에게 이런 교통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곧 영적인 침체가 오게 되며 결국 영적인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이러한 하나님과의 교통은 우리 영의 생명을 좌우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모든 삶을 좌우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들은 반드시 하나님과의 교통이 원활하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많은 성도들이 여러 가지 생활의 어려움이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러다가 아무런 응답도 변화도 없으면 그만 실망하여 포기하거나 신앙이 식어져버립니다. 정작 자신의 죄로 인하여 자신이 스스로 문을 닫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합니다. 이사야 59:2절을 봅시다.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고 하시며, 예레미야 5:25절에서는 “너희 허물이 이러한 일들을 물리쳤고 너희 죄가 너희에게 오는 좋은 것을 막았느니라.”고 하십니다.
오늘 본문말씀이 이 사실을 보여줍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방탕하고 고집스러운 둘째 아들은 자신의 생각과 지식과 감정을 따라서 세상으로 나갔습니다. 마치 자신을 자유스럽고 행복하게 해 줄 파랑새가 세상에 있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아주 잠깐 동안, 재물이 있는 동안은 그런 듯이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핑크 빛 행복은 재물과 함께 사라져버렸고, 남은 것은 굶주림과 고독 그리고 생명의 위기뿐이었습니다. 탕자는 깊은 죄의식에 사로잡혔습니다. 탕자는 모든 것이 풍족한 아버지의 집이 그리웠습니다.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선뜻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모진 고통과 생명의 위기가 탕자를 아버지 집으로 향하게 했습니다. 탕자는 모든 것이 풍부한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서 이렇게 고백하며 용서를 빌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탕자의 마음에는 아버지의 집이 굳게 닫혀져 있을 것이라는 염려뿐입니다. 무슨 면목으로 아버지께 돌아갈까 하는 염려입니다.
하지만 탕자가 집을 떠난 이후로 아버지의 집 문은 닫힌 적이 없었습니다. 탕자가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이미 대문 밖에서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탕자가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빌었지만 아버지는 아무 것도 묻지 않으시고 아들을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리고 옷을 입히고 반지를 끼워주고 신발을 신겨주시며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고 하시면서 잔치를 열었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이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한 가지만 살펴보겠습니다.
* 하나님과의 교통의 문은 내가 열어야 합니다.
어느 누구도 탕자에게 ‘당신 아버지의 집이 당신에게 굳게 닫혀져 있다’고 말한 사람이 없습니다. 탕자의 죄책감은 자기 스스로가 만들어 낸 것일 뿐입니다. 탕자는 자신의 지식과 감정과 느낌에 의하여 아버지께서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상상을 만들었습니다. 쉽게 표현해서 ‘도둑이 제 발 저린 것’입니다. 그래서 ‘품꾼의 하나’라는 대체 신분까지 생각해 낸 것입니다. 이것은 막혀버린 아버지와의 교통의 문을 어떻게 해서라도 열어보려는 눈물겨운 노력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생각들은 탕자의 자격지심(自激之心)으로 인한 기우(杞憂, 쓸데없는 염려)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탕자가 아버지의 집을 나간 그 날부터 아버지는 아들을 염려하며 혹시 돌아올까 하여 대문도 닫지 못하고 틈만 나면 대문 밖에서 기다리셨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스스로 상상의 하나님을 만들고 자신이 만들어 낸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 깨닫고 순종하는 신앙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에 의하여 스스로 만들어 낸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빌립이 예수님을 만난 후 친구인 나다나엘을 부르러 갔습니다. 나다나엘에게 ‘내가 예수님을 만났다’고 전하면서 “와 보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때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1:46)고 거절했습니다. 나다나엘은 자신의 지식과 느낌을 신뢰한 것입니다. 그 뿐입니까!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들은 두 제자도 역시 실망감을 안고 고향인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곁에 서셨으나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고 말입니다. 그들은 지금 자신의 감정에 휩싸여 스스로 실망하고 좌절한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옆에 계심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이처럼 오늘 많은 사람들도 자신의 생각이 만들어 낸 하나님을 상상하고 있습니다.
이러하듯이 하나님께서 천국의 문을 닫으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스스로가 자신의 지식과 감정에 빠져서 마음을 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3:20절에서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고 하십니다. 이는 하나님과의 교통의 문을 우리 스스로가 열어야 함을 말합니다. 만일 죄가 있으면 죄를 고백하고 죄로 인하여 스스로 닫힌 자신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요한일서 1:9절에서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하십니다. 왜 이렇게 죄를 고백해야 합니까? 시편 66:18절에서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고 하신 말씀대로 죄가 있으면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1:18절에서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고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내 안에 스스로 가지고 있습니다. 만일 탕자가 자신의 잘못을 알고 있었고 돌아갈 방법도 알았지만 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머물렀다면 비참한 종말을 맞았을 것입니다. 사람은 실수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돌아서는 것입니다. 탕자처럼 용기를 내어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나를 대신하여 돌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내 문제를 대신 풀어줄 사람도 없습니다. 기다린다고 저절로 해결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교통의 문을 여는 길은 오직 나 자신이 스스로 마음의 문을 열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방황하는 시간이 길어지고,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 오래 방황할수록 인생은 힘들어지고 고통만 더하게 됩니다. 이사야 1:5절에서 하나님께서 반항하는 이스라엘백성을 향하여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 더욱 패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어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유하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라고 탄식하십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의 성공 열쇠는 ‘하나님과의 교통의 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교통의 문이 열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을 지도하시고 인도하십니다. 시편 37:5,6절에서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이 스스로 키를 몇 센티미터 더 크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까? 아니면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는 경험이나 능력이 있습니까? 하나님 없이도 영원한 생명과 행복에 이를 수 있는 길이 있습니까?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 되는대로 살다가 되는대로 죽겠다는 각오입니까? 이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며 소망한다면 여러분의 삶을 하나님께 내려놓으십시오. 하나님을 믿고 모든 죄를 고백하며 회개하고, 여러분의 생명과 모든 삶을 맡기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과의 교통의 문이 열릴 것이며,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에 들어오셔서 지도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기쁨과 평안과 함께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도 기꺼이 주실 것입니다. 이왕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한다면 한 시간이라도 더 주님이 주시는 행복을 누리도록 하나님과의 교통의 문을 활짝 여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