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애 최고의 날을 위하여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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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9-10-21 12:43
*** 내 생애 최고의 날을 위하여 / 딤후 4:6-8, 히 3:13-14
** 들어가는 말
디모데후서 4:6-8, “6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7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히브리서 3:13-14, “13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14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사람이 살아가는 일평생은 쉽고 편하고 좋은 일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힘들고 어렵고 나쁜 일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전도서 7:14절에서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처럼 잘되는 날도 있고 힘든 날도 있어서 앞날을 예측하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때때로 사람들은 자신의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면서 한 숨 짓기도 하고, 빙긋이 미소 짓기도 합니다. 인생이 힘들 때에는 “그래, 그때가 좋았지, 정말 좋았어!”라며 좋았던 순간들을 생각하면서 다시 희망을 갖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나름대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생애 최고의 순간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미국의 대표적인 극작가인 ‘아서 밀러(Arthur Asher Miller)’가 1949년에 퓰리처상을 받은 ‘세일즈맨의 죽음’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이 소설은 ‘윌리 로만’이라는 세일즈맨의 일생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의 생의 목표는 ‘장사를 크게 하는 것, 모든 사람이 그를 좋아하게 만드는 것, 자기 자식들이 자기 발자취를 따라오게 하는 것’등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꿈은 하나하나 깨어지게 됩니다. 먼저 직장을 잃게 되었고, 다음에는 매우 실망스럽게도 자기 자식들을 하나같이 믿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윌리는 마침내 실망에 빠져 자살을 합니다.
장례식을 마친 무덤 앞에서 그의 아내가 오열합니다. “25년 동안 나누어 내던 우리 집의 할부금을 이제서야 다 갚았는데… 이제서야 홀가분해졌는데… 그런데 왜 하필 오늘 당신은 죽어야 했나요?”
그리고 후에 그의 아들이 무덤에 찾아와서 말합니다. “아버지는 잘못된 꿈을 가졌었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이 누군가를 끝까지 몰랐습니다.”
주인공인 세일즈맨 ‘윌리 로만’이 왜 실망했겠습니까? 아마도 그는 ‘자신이 추구하는 생애의 목적이 정말 그만한 노력을 기울이며 삶을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를 깊이 생각해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자신이 가졌던 생애 최고의 목적을 헛된 가치관에 두었기 때문에 스스로 파멸을 맞이한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지금까지 생애 최고의 순간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앞으로 생애 최고의 순간을 꿈꾸며 추구하는 일들이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하나님께서는 오늘 본문말씀을 통하여 우리 인생들이 진정으로 꿈꿔야 하는 생애 최고의 순간이 어떤 것인지를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여러분 자신의 인생의 가치와 목적을 새롭게 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먼저,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살펴봅시다.
디모데후서의 본문은 사도 바울의 ‘회고록’입니다. 디모데후서는 바울의 말년인 로마에서 순교하기 직전 어느 시점에 기록한 서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자신의 순교를 예감한 바울 사도는 에베소 교회에서 사역하는 목회자이며 영적인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했습니다. 자신은 더 이상 디모데를 볼 수 없을 것임을 안 바울은 젊은 목회자 디모데가 잘 헤쳐갈 수 있도록 편지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편지의 마지막 부분인 본문에는 자신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면서 자신의 미래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보여주면서 디모데에게도 소망을 가지게 하며 격려하고 있습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꿈꾸고 있는 자신의 생애 최고의 날이 어떤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즉 바울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의의 면류관을 쓰는 그 날을 생애 최고의 날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날은 바울에게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모하며 섬기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똑같은 생애 최고의 순간이 될 것임을 말씀합니다. 바울은 이 순간을 위하여 자신의 마지막 생명까지도 아낌없이 내 놓는 것입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본문말씀은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 ‘오늘’이라고 가르칩니다. 이 사상은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핵심 내용 중의 하나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삼위하나님께 대한 고백과 구속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과 재림에 대한 고백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이 고백을 생활로 연결하는 현재적인 삶입니다. 즉 ‘오늘’이라는 표현은 우리 신앙의 현주소를 말합니다. 즉 지금 나 자신의 신앙고백이 무엇이며, 어떻게 실천하고 있는지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 사상은 모든 성경에서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에스겔 18:21,22절을 봅시다. “그러나 악인이 만일 그 행한 모든 죄에서 돌이켜 떠나 내 모든 율례를 지키고 법과 의를 행하면 정녕 살고 죽지 아니할 것이라. 그 범죄한 것이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 행한 의로 인하여 살리라.” 이어지는 24절에서 “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의에서 떠나서 범죄하고 악인의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대로 행하면 살겠느냐? 그 행한 의로운 일은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범한 허물과 그 지은 죄로 인하여 죽으리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현재를 보신다는 것을 가르치십니다.
그러면, 내 생애 최고의 날을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 생애 최고의 날을 위해서 내가 해야 할 일은 앞의 디모데후서의 말씀과 히브리서의 말씀의 의미를 하나로 합하여 적용하면 됩니다. 먼저 사도 바울의 생애를 잠깐 봅시다. 사도 바울은 스데반 집사를 죽일 때까지만 해도 당시로서는 잘 나가는 엘리트였습니다. 최고의 학력을 가졌으며, 실제로도 헬라문화와 히브리문화를 통달한 실력가였습니다. 가문도 역시 나면서부터 바리새인이었으며, 로마 시민권을 가졌습니다. 신앙적인 열성도 스데반 집사를 죽이는 일에 모든 책임을 질 만큼 율법에 열성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인생 최고의 전성기였습니다. 빌립보서 3:6절에서 당시의 자신을 한마디로 이렇게 증언합니다.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름도 ‘희망’을 뜻하는 ‘사울’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서 예수님을 만난 이후 모든 삶이 완전히 새롭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변화가 아니라 ‘중생’ 즉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이름부터 바뀌었습니다. ‘작은 자’를 의미하는 ‘바울’이 된 것입니다. 그는 한 때 잘 나갔던 때를 회고하면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빌립보서 3:7-9상반절입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뿐만 아니라 골로새서 2:20절에서는 “너희가 세상의 초등 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에 순종하느냐?”라고 했습니다. 이는 예전에 자신이 그토록 자랑스럽게 여겼던 세상 학문을 초등학문이라고 비하시킨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알기 이전에 최고로 여겼던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생애의 목표를 세웠습니다. 빌립보서 3:14절에서 그 목표를 말합니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바울은 생애의 목표점을 ‘예수 안에 있는 부름의 상급’으로 세웠습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생애 최고의 목표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생애 최고의 목표로 삼고 달려왔던 30여년의 사역의 길을 마쳐가면서 고백합니다.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자신이 세웠던 최고의 목표점에 거의 다 이르렀음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토록 꿈꾸어 왔던 하나님께 상급 받는 ‘생애 최고의 날’이 다가왔음을 고백합니다. 바로 예수 안에 있는 부름의 상급을 위하여 그토록 애써 달려왔던 그 길 끝에서 이제 의의 면류관을 받게 될 소망에 부푼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소망했던 ‘생애 최고의 순간’인 ‘하나님께로부터 의의면류관을 받을 날’은 오늘 우리에게도 ‘생애 최고의 순간’이 될 것입니다. 바울이 최고로 여겼던 율법과 세상의 명예권세도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는 ‘배설물’이 되어버렸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마가복음 8:34절에서 말씀하시는 제자의 길입니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는 말씀으로써 제자가 될 수 있는 단서조항입니다. 이 말씀에 응답이라도 하듯이 사도 바울은 30여 년 동안 어떤 환경에서도 주님을 따르며 믿음을 지켜온 신앙의 길에서 마지막으로 자신의 생명을 내놓았습니다.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라는 말씀은 곧 순교의 제물이 될 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면류관을 받게 될 그 순간을 생애 최고의 날’로 삼고 있습니까? 만일 이러한 소망이 있다면 주님이 가셨던 길이며, 모든 사도들이 갔던 길이며, 우리 앞의 믿음의 선조들이 걸었던 그 제자의 길을 우리도 가야합니다. 사도 바울이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던’ 그 제자의 길이 ‘자신의 생애 최고의 날을 위한 길’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동일합니다.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사명의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켜야 생애 최고의 날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주님과 우리가 맺은 계약입니다. 요한복음 8:51절입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고 하십니다. 앞에서 말씀하신 제자의 길에 대한 계약을 잘 지키면 영원한 삶이 보장되는 인생 최고의 날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계약을 지키지 못하면 인생 최고의 날은 없으며, 아예 하나님의 나라에 입성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길이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는 좁은 문이며 좁은 길입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조건을 더 말씀드려야겠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루어야 하는 제자의 삶이 ‘현재’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열심히 출석하고, 전도하고, 기도하고, 섬기고 봉사했던 과거의 일들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또한 ‘이것만 좀 해결하고 열심히 하겠다.’ 혹은 ‘지금은 여유가 없어서 좀 더 여유가 있을 때에 하겠다.’ 등의 앞으로 하겠다는 결심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중요한 시간은 ‘지금’뿐입니다. 히브리서 본문을 다시 봅시다.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이 말씀은 지금 현재의 신앙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향하는 길은 시작하던 순간부터 생명이 끝나는 순간까지 계속 달려야 하는 현재형입니다. 마라톤 경주자가 42.195KM를 다 달릴 때까지 쉴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언제 우리의 경주가 끝나게 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깨어있으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5:13절에서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고 하셨고, 마가복음 13:37절에서는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이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깨어서 제자의 길을 가야합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순종을 요구하신 말씀은 영원한 생명과 상급을 덤으로 걸고 우리와 계약을 맺으신 ‘제자의 길’입니다. 사도 바울이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던’ 그 길이 제자의 길이었습니다. 이 길의 끝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의 나라와 의의면류관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곳에 이르는 때가‘우리의 생애 최고의 날’입니다. 이 날을 위하여 우리도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사명을 다하고 믿음을 지켜야합니다. 정말 잊지 않아야 할 것은 어제도 아니고, 내일도 아니고 오늘, 지금 깨어서 제자의 길을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행복의 시간을 미루지 말고 지금 결단하고 제자의 길에 올인(all-in)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디모데후서 4:6-8, “6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7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히브리서 3:13-14, “13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14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사람이 살아가는 일평생은 쉽고 편하고 좋은 일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힘들고 어렵고 나쁜 일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전도서 7:14절에서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처럼 잘되는 날도 있고 힘든 날도 있어서 앞날을 예측하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때때로 사람들은 자신의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면서 한 숨 짓기도 하고, 빙긋이 미소 짓기도 합니다. 인생이 힘들 때에는 “그래, 그때가 좋았지, 정말 좋았어!”라며 좋았던 순간들을 생각하면서 다시 희망을 갖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나름대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생애 최고의 순간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미국의 대표적인 극작가인 ‘아서 밀러(Arthur Asher Miller)’가 1949년에 퓰리처상을 받은 ‘세일즈맨의 죽음’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이 소설은 ‘윌리 로만’이라는 세일즈맨의 일생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의 생의 목표는 ‘장사를 크게 하는 것, 모든 사람이 그를 좋아하게 만드는 것, 자기 자식들이 자기 발자취를 따라오게 하는 것’등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꿈은 하나하나 깨어지게 됩니다. 먼저 직장을 잃게 되었고, 다음에는 매우 실망스럽게도 자기 자식들을 하나같이 믿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윌리는 마침내 실망에 빠져 자살을 합니다.
장례식을 마친 무덤 앞에서 그의 아내가 오열합니다. “25년 동안 나누어 내던 우리 집의 할부금을 이제서야 다 갚았는데… 이제서야 홀가분해졌는데… 그런데 왜 하필 오늘 당신은 죽어야 했나요?”
그리고 후에 그의 아들이 무덤에 찾아와서 말합니다. “아버지는 잘못된 꿈을 가졌었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이 누군가를 끝까지 몰랐습니다.”
주인공인 세일즈맨 ‘윌리 로만’이 왜 실망했겠습니까? 아마도 그는 ‘자신이 추구하는 생애의 목적이 정말 그만한 노력을 기울이며 삶을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를 깊이 생각해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자신이 가졌던 생애 최고의 목적을 헛된 가치관에 두었기 때문에 스스로 파멸을 맞이한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지금까지 생애 최고의 순간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앞으로 생애 최고의 순간을 꿈꾸며 추구하는 일들이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하나님께서는 오늘 본문말씀을 통하여 우리 인생들이 진정으로 꿈꿔야 하는 생애 최고의 순간이 어떤 것인지를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여러분 자신의 인생의 가치와 목적을 새롭게 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먼저,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살펴봅시다.
디모데후서의 본문은 사도 바울의 ‘회고록’입니다. 디모데후서는 바울의 말년인 로마에서 순교하기 직전 어느 시점에 기록한 서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자신의 순교를 예감한 바울 사도는 에베소 교회에서 사역하는 목회자이며 영적인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했습니다. 자신은 더 이상 디모데를 볼 수 없을 것임을 안 바울은 젊은 목회자 디모데가 잘 헤쳐갈 수 있도록 편지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편지의 마지막 부분인 본문에는 자신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면서 자신의 미래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보여주면서 디모데에게도 소망을 가지게 하며 격려하고 있습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꿈꾸고 있는 자신의 생애 최고의 날이 어떤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즉 바울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의의 면류관을 쓰는 그 날을 생애 최고의 날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날은 바울에게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모하며 섬기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똑같은 생애 최고의 순간이 될 것임을 말씀합니다. 바울은 이 순간을 위하여 자신의 마지막 생명까지도 아낌없이 내 놓는 것입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본문말씀은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 ‘오늘’이라고 가르칩니다. 이 사상은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핵심 내용 중의 하나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삼위하나님께 대한 고백과 구속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과 재림에 대한 고백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이 고백을 생활로 연결하는 현재적인 삶입니다. 즉 ‘오늘’이라는 표현은 우리 신앙의 현주소를 말합니다. 즉 지금 나 자신의 신앙고백이 무엇이며, 어떻게 실천하고 있는지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 사상은 모든 성경에서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에스겔 18:21,22절을 봅시다. “그러나 악인이 만일 그 행한 모든 죄에서 돌이켜 떠나 내 모든 율례를 지키고 법과 의를 행하면 정녕 살고 죽지 아니할 것이라. 그 범죄한 것이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 행한 의로 인하여 살리라.” 이어지는 24절에서 “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의에서 떠나서 범죄하고 악인의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대로 행하면 살겠느냐? 그 행한 의로운 일은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범한 허물과 그 지은 죄로 인하여 죽으리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현재를 보신다는 것을 가르치십니다.
그러면, 내 생애 최고의 날을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 생애 최고의 날을 위해서 내가 해야 할 일은 앞의 디모데후서의 말씀과 히브리서의 말씀의 의미를 하나로 합하여 적용하면 됩니다. 먼저 사도 바울의 생애를 잠깐 봅시다. 사도 바울은 스데반 집사를 죽일 때까지만 해도 당시로서는 잘 나가는 엘리트였습니다. 최고의 학력을 가졌으며, 실제로도 헬라문화와 히브리문화를 통달한 실력가였습니다. 가문도 역시 나면서부터 바리새인이었으며, 로마 시민권을 가졌습니다. 신앙적인 열성도 스데반 집사를 죽이는 일에 모든 책임을 질 만큼 율법에 열성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인생 최고의 전성기였습니다. 빌립보서 3:6절에서 당시의 자신을 한마디로 이렇게 증언합니다.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름도 ‘희망’을 뜻하는 ‘사울’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서 예수님을 만난 이후 모든 삶이 완전히 새롭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변화가 아니라 ‘중생’ 즉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이름부터 바뀌었습니다. ‘작은 자’를 의미하는 ‘바울’이 된 것입니다. 그는 한 때 잘 나갔던 때를 회고하면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빌립보서 3:7-9상반절입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뿐만 아니라 골로새서 2:20절에서는 “너희가 세상의 초등 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에 순종하느냐?”라고 했습니다. 이는 예전에 자신이 그토록 자랑스럽게 여겼던 세상 학문을 초등학문이라고 비하시킨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알기 이전에 최고로 여겼던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생애의 목표를 세웠습니다. 빌립보서 3:14절에서 그 목표를 말합니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바울은 생애의 목표점을 ‘예수 안에 있는 부름의 상급’으로 세웠습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생애 최고의 목표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생애 최고의 목표로 삼고 달려왔던 30여년의 사역의 길을 마쳐가면서 고백합니다.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자신이 세웠던 최고의 목표점에 거의 다 이르렀음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토록 꿈꾸어 왔던 하나님께 상급 받는 ‘생애 최고의 날’이 다가왔음을 고백합니다. 바로 예수 안에 있는 부름의 상급을 위하여 그토록 애써 달려왔던 그 길 끝에서 이제 의의 면류관을 받게 될 소망에 부푼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소망했던 ‘생애 최고의 순간’인 ‘하나님께로부터 의의면류관을 받을 날’은 오늘 우리에게도 ‘생애 최고의 순간’이 될 것입니다. 바울이 최고로 여겼던 율법과 세상의 명예권세도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는 ‘배설물’이 되어버렸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마가복음 8:34절에서 말씀하시는 제자의 길입니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는 말씀으로써 제자가 될 수 있는 단서조항입니다. 이 말씀에 응답이라도 하듯이 사도 바울은 30여 년 동안 어떤 환경에서도 주님을 따르며 믿음을 지켜온 신앙의 길에서 마지막으로 자신의 생명을 내놓았습니다.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라는 말씀은 곧 순교의 제물이 될 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면류관을 받게 될 그 순간을 생애 최고의 날’로 삼고 있습니까? 만일 이러한 소망이 있다면 주님이 가셨던 길이며, 모든 사도들이 갔던 길이며, 우리 앞의 믿음의 선조들이 걸었던 그 제자의 길을 우리도 가야합니다. 사도 바울이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던’ 그 제자의 길이 ‘자신의 생애 최고의 날을 위한 길’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동일합니다.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사명의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켜야 생애 최고의 날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주님과 우리가 맺은 계약입니다. 요한복음 8:51절입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고 하십니다. 앞에서 말씀하신 제자의 길에 대한 계약을 잘 지키면 영원한 삶이 보장되는 인생 최고의 날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계약을 지키지 못하면 인생 최고의 날은 없으며, 아예 하나님의 나라에 입성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길이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는 좁은 문이며 좁은 길입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조건을 더 말씀드려야겠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루어야 하는 제자의 삶이 ‘현재’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열심히 출석하고, 전도하고, 기도하고, 섬기고 봉사했던 과거의 일들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또한 ‘이것만 좀 해결하고 열심히 하겠다.’ 혹은 ‘지금은 여유가 없어서 좀 더 여유가 있을 때에 하겠다.’ 등의 앞으로 하겠다는 결심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중요한 시간은 ‘지금’뿐입니다. 히브리서 본문을 다시 봅시다.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이 말씀은 지금 현재의 신앙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향하는 길은 시작하던 순간부터 생명이 끝나는 순간까지 계속 달려야 하는 현재형입니다. 마라톤 경주자가 42.195KM를 다 달릴 때까지 쉴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언제 우리의 경주가 끝나게 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깨어있으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5:13절에서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고 하셨고, 마가복음 13:37절에서는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이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깨어서 제자의 길을 가야합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순종을 요구하신 말씀은 영원한 생명과 상급을 덤으로 걸고 우리와 계약을 맺으신 ‘제자의 길’입니다. 사도 바울이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던’ 그 길이 제자의 길이었습니다. 이 길의 끝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의 나라와 의의면류관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곳에 이르는 때가‘우리의 생애 최고의 날’입니다. 이 날을 위하여 우리도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사명을 다하고 믿음을 지켜야합니다. 정말 잊지 않아야 할 것은 어제도 아니고, 내일도 아니고 오늘, 지금 깨어서 제자의 길을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행복의 시간을 미루지 말고 지금 결단하고 제자의 길에 올인(all-in)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