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세상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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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9-08-23 17:19
*** 두 세상 / 야고보서 4:1-10
** 들어가는 말
야고보서 4:1-10, “1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 2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3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4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 5 너희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뇨? 6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7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8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 9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10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우리가 사는 세상은 두 종류의 세상이 있습니다. 모든 세상은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 속에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의 세상과 예수 그리스도 밖의 세상으로 나눠집니다. 두 세상은 삶의 자리가 다릅니다. 그리스도 안의 세상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성결한 영의 세상이며, 그리스도 밖의 세상은 하나님과는 결별된 채 사단이 지배하는 육신적 세상입니다. 각 세상의 종말적인 결과도 각각 다릅니다. 그리스도 밖의 세상의 결말은 두 번째 죽음이 지배하는 지옥이며, 하나님과 결별된 영원한 고통의 세상입니다. 그리스도 안의 세상의 결말은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생명과 평안과 행복의 세상입니다. 로마서 8:6절에서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느 세상에 속해 있습니까?
만일 우리가 천국과 지옥이 있음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내가 속한 세상에 대한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혹 여러분 중에 내가 어느 세상에 속했는지 심정은 있는데 확신이 없는 분이 있습니까? 고린도후서 13:5절을 기억하십시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 하십니다. 아직 확신이 없는 성도는 오늘 말씀을 주의 깊게 생각하십시오. 본문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의 삶의 자세에 대하여 강력하고도 확실하게 말씀하십니다. 만일 확신이 있는 성도라도 다시 한 번 자신을 점검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까? 부르심을 받았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택하심과 부르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성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고백은 성령 하나님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로마서8:15-16절에서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라고 하시며, 갈라디아서4:6절에서는,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하여 거절하거나 외면하게 되면 삶의 고통이 따르게 됩니다.
어느 목사님의 딸이 믿지 않는 남자와 연애를 했습니다. 그 아버지는 눈물로 극구 말리는 데도 딸은 듣지 않고 기어이 자신의 뜻대로 결혼을 했습니다. 그 후 10여 년 동안 딸은 자기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물론 교회도 다니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에 그녀의 외아들이 병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끝끝내 불신앙의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결국 아들은 죽었고, 그제야 교회를 찾아가서 너무나 괴롭고 답답한 마음을 목사님께 하소연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찌 이러실 수 있습니까? 하나뿐인 내 아들이 왜 죽어야 합니까?”
회개는 하지 않고 도리어 원망만을 늘어놓았습니다. 자기가 목회자의 자녀라는 사실도 고백하면서 갖은 넋두리로 원망을 늘어놓았습니다. 듣다 못한 목사님이 한마디 했습니다.
“당신과 같은 사람은 그 정도 얻어 터져야 10년만에라도 교회에 나오는 것을 어떡합니까?”
웬만하면 좋은 말로 위로하고 싶었는데, 줄곧 못된 말로 원망하는 것을 보고 신중하게 꾸짖었다고 합니다. ‘그 정도가 아니고는 당신이 제 발로 교회를 찾아오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런 방법을 사용하신 것이다. 그 일이 있게 된 것은 당신을 부르기 위해서이다.’라고 깨우쳐주려 한 것입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회개했다고 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결코 피할 수 없습니다. 요나 선지자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피하여 ‘다시스’로 가는 배 밑창에 숨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가 스스로 나오도록 환경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르신 사람으로 하여금 왜 이렇게까지 하나님의 요청을 받아들이도록 압력을 넣으시는 것입니까? 거절하고 피하는 사람을 그냥 내버려 두실 수는 없을까요? 본문 5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성령께서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로 부르신 사람이 다른 우상에게로 가는 것을 질투하시고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이사야 42:8절에서 “나는 여호와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고 하시며 출애굽기 34:14절에서는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 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온전한 마음으로 응답하고 순종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혹시 하나님의 인내심을 시험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1. 부름을 받은 성도가 욕망의 충족을 따르면 패망하게 됩니다.
본문에서는 사람들의 상반되는 두 마음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마음’과 ‘세상의 쾌락을 위하여 자신의 욕망을 만족시키려는 마음’ 이 둘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는 이와 같은 싸움이 끊임없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야고보 선생을 통하여 경고하십니다. 다툼과 싸움과 시기와 살인 등, 사람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폭풍은 인생의 욕망 때문이며,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함도 욕망의 담으로 가려져 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사이에 가려져 있는 담들을 적극적으로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응답을 해야 한다고 경고하십니다. 사람의 욕망은 바다에서 일어나는 거센 폭풍과도 같습니다. 어떤 욕망이 사람을 사로잡으면,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에 휘말려 결국은 모든 것을 삼키고야 마는 것입니다. 로마서 8:12,13절에서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라고 하십니다.
세상적인 욕망의 추구는 전쟁이나 다툼처럼 오랜 기간에 걸친 원한을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욕망의 만족을 위한 투쟁은 증오와 같은 독소를 뿜어냅니다. 오늘 세계는 이러한 개인이나 집단의 욕망을 위한 이기주의로 병들고 있습니다. 최근의 예를 들어봅시다.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쌍용자동차 노사 간의 협상’이 70여일 만에 타결됐습니다. 그러나 이미 수 천 억 원에 달하는 재정적 손실과 영업망 붕괴, 협력업체 상실, 투자기피 등으로 재기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갈라디아서 5:15-16절을 보십시오.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고 하십니다. 육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려고 서로 싸웠던 결말이 서로의 고통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사람에게서 일어나는 욕망은 사단에 의해서 조종됩니다. 왜냐하면 사단이 하나님보다 높아지려는 자신의 욕망으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서 쫓겨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욕망에 한 번 발을 들여놓으면 그 다음은 사막의 모래펄에 빠진 것처럼 발버둥 칠수록 더욱 깊이 빠져들 뿐입니다. 이러한 욕망은 그 크기와 종류만 다르지 세상의 거의 모든 사람들은 어떤 종류의 욕망이든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다만 그것을 잘 절제하거나 숨기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죄의 범위를 마음의 생각의 폭에까지 넓히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5:28절에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고 하시며, 요한일서 3:15절에서는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고 했습니다.
이렇듯 사람의 마음으로부터 시작되는 욕망은 사람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고민하고 갈등하게 합니다. 마음 한편에서는 ‘하나님 뜻대로 살아야지!’라는 결심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 편에서는 ‘아니, 그러면 뭘 먹고 살지! 적당히 해야지! 하나님도 아실거야!’ 라고 현실을 변명합니다. 그래서 신앙인들이 믿음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고 고민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7:19,21절에서 “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도다.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라고 자신의 갈등어린 마음을 고백했습니다. 분명한 것은 욕망으로 인한 세상적인 근심은 영혼과 육신의 죽음을 부른다는 사실입니다. 고린도후서 7:10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부름 받은 성도가 육신의 욕망을 쫓아가면 그 끝은 영원한 고통으로 파멸하는 것입니다.
2. 파멸을 면하려면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세상적인 욕망에 대하여는 철저하게 대적하고 하나님께 순복할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본문7-10절을 봅시다.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8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 9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10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본문에서는 대단히 강경한 어조로 명령하고 있습니다. 이는 살기 위해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살기를 원한다면 그리스도 안의 세상으로 들어오라고 하십니다.
그리스도 안의 세상에서 사는 사람에게 요구되는 것은 ‘새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22-24절에서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하시며, 골로새서3:9-10절에서는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고 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때에 추구하던 세상적인 욕망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섬기고 따르는 새로운 지식과 열심으로 채우라는 것입니다.
인도에 간 ‘알렉산더’가 철학자인 ‘디오게네스’를 만났는데, 그는 강가에 누워 한가로이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알렉산더에게는 그 모습이 몹시 인상적이었습니다. 이 벌거벗은 남자를 둘러싸고 있는 평온, 침묵, 그리고 그의 아름다움, 당당함, 고상함, 소박함, 자연스러움, 이 모든 것이 알렉산더를 사로잡았습니다. 순간 강한 질투를 느낀 알렉산더는 디오게네스에게 말했습니다.
“만일 내가 세상에 다시 태어나게 된다면, 나는 신에게 ‘다음에는 나를 알렉산더가 아니라 디오게네스로 태어나게 해 주소서.’ 라고 기도할 생각이오.” 그러자 디오게네스는 큰 소리로 웃으며 말했습니다.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릴 필요가 어디 있습니까? 폐하는 지금 당장이라도 디오게네스가 될 수 있습니다. 누가 폐하를 막는단 말입니까? 당장이라도 저처럼 이렇게 일광욕을 즐기실 수 있습니다.”알렉산더는 갑자기 부끄러움을 느끼며 말했습니다.
“그렇소. 나도 그렇게 하고 싶소! 그러나, 온 세계를 정복한 후에 당신처럼 편안히 휴식을 취하며 즐길 것이오.” 그 말을 이어 디오게네스가 말했습니다.
“이해할 수가 없군요. 저는 세계를 정복하지 않고도 이렇게 즐길 수 있는데, 폐하는 왜 지금 당장 즐기실 수 없다는 겁니까? 왜 폐하는 지금 당장 하실 수 있는 일을 뒤로 미루시는 것입니까? 이 강둑은 충분히 넓어 여러 사람이 즐길 수 있습니다. 폐하께서 여기에 계신다 하더라도 제 자리가 조금도 좁아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 둑은 충분히 넓은데도 아직 아무도 오지 않군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알렉산더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알렉산더처럼 지금은 어떤 계기가 마련되지 않아서 다음으로 실천을 미루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한다면 옛 사람을 벗어내는 일을 미루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 4절에서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이며, “세상과 친해지려 한다면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하나님께 순복하고, 손을 깨끗이 하고, 두 마음을 정리하고 한 마음을 품어 성결하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의 세상으로 들어오는 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만 진정한 쉼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마태복음11:28절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초청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지금은 아직 때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대한 순종을 다음 기회로 미루고 있습니다. 자기들의 때가 한없이 많이 있는 줄로 여기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래의 어느 때에 일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이야말로 일할 수 있는 가장 적당한 때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지금 이 시대에 우리를 부르셨고, 일하게 하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6:1-2절을 봅시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가라사대 ‘내가 은혜를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라고 하십니다. 지금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지금 손을 깨끗하게 하고, 지금 마음을 성결케 하고, 지금 겸손하게 순종해야 합니다. 여러분, 이제는 더 이상 내일로 미루지 말고, 지금 내게 주어진 시간이 있을 때 나의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여놓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사는 행복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야고보서 4:1-10, “1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 2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3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4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 5 너희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뇨? 6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7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8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 9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10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우리가 사는 세상은 두 종류의 세상이 있습니다. 모든 세상은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 속에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의 세상과 예수 그리스도 밖의 세상으로 나눠집니다. 두 세상은 삶의 자리가 다릅니다. 그리스도 안의 세상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성결한 영의 세상이며, 그리스도 밖의 세상은 하나님과는 결별된 채 사단이 지배하는 육신적 세상입니다. 각 세상의 종말적인 결과도 각각 다릅니다. 그리스도 밖의 세상의 결말은 두 번째 죽음이 지배하는 지옥이며, 하나님과 결별된 영원한 고통의 세상입니다. 그리스도 안의 세상의 결말은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생명과 평안과 행복의 세상입니다. 로마서 8:6절에서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느 세상에 속해 있습니까?
만일 우리가 천국과 지옥이 있음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내가 속한 세상에 대한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혹 여러분 중에 내가 어느 세상에 속했는지 심정은 있는데 확신이 없는 분이 있습니까? 고린도후서 13:5절을 기억하십시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 하십니다. 아직 확신이 없는 성도는 오늘 말씀을 주의 깊게 생각하십시오. 본문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의 삶의 자세에 대하여 강력하고도 확실하게 말씀하십니다. 만일 확신이 있는 성도라도 다시 한 번 자신을 점검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까? 부르심을 받았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택하심과 부르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성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고백은 성령 하나님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로마서8:15-16절에서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라고 하시며, 갈라디아서4:6절에서는,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하여 거절하거나 외면하게 되면 삶의 고통이 따르게 됩니다.
어느 목사님의 딸이 믿지 않는 남자와 연애를 했습니다. 그 아버지는 눈물로 극구 말리는 데도 딸은 듣지 않고 기어이 자신의 뜻대로 결혼을 했습니다. 그 후 10여 년 동안 딸은 자기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물론 교회도 다니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에 그녀의 외아들이 병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끝끝내 불신앙의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결국 아들은 죽었고, 그제야 교회를 찾아가서 너무나 괴롭고 답답한 마음을 목사님께 하소연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찌 이러실 수 있습니까? 하나뿐인 내 아들이 왜 죽어야 합니까?”
회개는 하지 않고 도리어 원망만을 늘어놓았습니다. 자기가 목회자의 자녀라는 사실도 고백하면서 갖은 넋두리로 원망을 늘어놓았습니다. 듣다 못한 목사님이 한마디 했습니다.
“당신과 같은 사람은 그 정도 얻어 터져야 10년만에라도 교회에 나오는 것을 어떡합니까?”
웬만하면 좋은 말로 위로하고 싶었는데, 줄곧 못된 말로 원망하는 것을 보고 신중하게 꾸짖었다고 합니다. ‘그 정도가 아니고는 당신이 제 발로 교회를 찾아오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런 방법을 사용하신 것이다. 그 일이 있게 된 것은 당신을 부르기 위해서이다.’라고 깨우쳐주려 한 것입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회개했다고 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결코 피할 수 없습니다. 요나 선지자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피하여 ‘다시스’로 가는 배 밑창에 숨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가 스스로 나오도록 환경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르신 사람으로 하여금 왜 이렇게까지 하나님의 요청을 받아들이도록 압력을 넣으시는 것입니까? 거절하고 피하는 사람을 그냥 내버려 두실 수는 없을까요? 본문 5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성령께서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로 부르신 사람이 다른 우상에게로 가는 것을 질투하시고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이사야 42:8절에서 “나는 여호와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고 하시며 출애굽기 34:14절에서는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 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온전한 마음으로 응답하고 순종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혹시 하나님의 인내심을 시험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1. 부름을 받은 성도가 욕망의 충족을 따르면 패망하게 됩니다.
본문에서는 사람들의 상반되는 두 마음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마음’과 ‘세상의 쾌락을 위하여 자신의 욕망을 만족시키려는 마음’ 이 둘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는 이와 같은 싸움이 끊임없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야고보 선생을 통하여 경고하십니다. 다툼과 싸움과 시기와 살인 등, 사람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폭풍은 인생의 욕망 때문이며,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함도 욕망의 담으로 가려져 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사이에 가려져 있는 담들을 적극적으로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응답을 해야 한다고 경고하십니다. 사람의 욕망은 바다에서 일어나는 거센 폭풍과도 같습니다. 어떤 욕망이 사람을 사로잡으면,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에 휘말려 결국은 모든 것을 삼키고야 마는 것입니다. 로마서 8:12,13절에서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라고 하십니다.
세상적인 욕망의 추구는 전쟁이나 다툼처럼 오랜 기간에 걸친 원한을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욕망의 만족을 위한 투쟁은 증오와 같은 독소를 뿜어냅니다. 오늘 세계는 이러한 개인이나 집단의 욕망을 위한 이기주의로 병들고 있습니다. 최근의 예를 들어봅시다.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쌍용자동차 노사 간의 협상’이 70여일 만에 타결됐습니다. 그러나 이미 수 천 억 원에 달하는 재정적 손실과 영업망 붕괴, 협력업체 상실, 투자기피 등으로 재기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갈라디아서 5:15-16절을 보십시오.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고 하십니다. 육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려고 서로 싸웠던 결말이 서로의 고통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사람에게서 일어나는 욕망은 사단에 의해서 조종됩니다. 왜냐하면 사단이 하나님보다 높아지려는 자신의 욕망으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서 쫓겨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욕망에 한 번 발을 들여놓으면 그 다음은 사막의 모래펄에 빠진 것처럼 발버둥 칠수록 더욱 깊이 빠져들 뿐입니다. 이러한 욕망은 그 크기와 종류만 다르지 세상의 거의 모든 사람들은 어떤 종류의 욕망이든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다만 그것을 잘 절제하거나 숨기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죄의 범위를 마음의 생각의 폭에까지 넓히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5:28절에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고 하시며, 요한일서 3:15절에서는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고 했습니다.
이렇듯 사람의 마음으로부터 시작되는 욕망은 사람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고민하고 갈등하게 합니다. 마음 한편에서는 ‘하나님 뜻대로 살아야지!’라는 결심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 편에서는 ‘아니, 그러면 뭘 먹고 살지! 적당히 해야지! 하나님도 아실거야!’ 라고 현실을 변명합니다. 그래서 신앙인들이 믿음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고 고민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7:19,21절에서 “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도다.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라고 자신의 갈등어린 마음을 고백했습니다. 분명한 것은 욕망으로 인한 세상적인 근심은 영혼과 육신의 죽음을 부른다는 사실입니다. 고린도후서 7:10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부름 받은 성도가 육신의 욕망을 쫓아가면 그 끝은 영원한 고통으로 파멸하는 것입니다.
2. 파멸을 면하려면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세상적인 욕망에 대하여는 철저하게 대적하고 하나님께 순복할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본문7-10절을 봅시다.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8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 9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10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본문에서는 대단히 강경한 어조로 명령하고 있습니다. 이는 살기 위해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살기를 원한다면 그리스도 안의 세상으로 들어오라고 하십니다.
그리스도 안의 세상에서 사는 사람에게 요구되는 것은 ‘새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22-24절에서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하시며, 골로새서3:9-10절에서는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고 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때에 추구하던 세상적인 욕망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섬기고 따르는 새로운 지식과 열심으로 채우라는 것입니다.
인도에 간 ‘알렉산더’가 철학자인 ‘디오게네스’를 만났는데, 그는 강가에 누워 한가로이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알렉산더에게는 그 모습이 몹시 인상적이었습니다. 이 벌거벗은 남자를 둘러싸고 있는 평온, 침묵, 그리고 그의 아름다움, 당당함, 고상함, 소박함, 자연스러움, 이 모든 것이 알렉산더를 사로잡았습니다. 순간 강한 질투를 느낀 알렉산더는 디오게네스에게 말했습니다.
“만일 내가 세상에 다시 태어나게 된다면, 나는 신에게 ‘다음에는 나를 알렉산더가 아니라 디오게네스로 태어나게 해 주소서.’ 라고 기도할 생각이오.” 그러자 디오게네스는 큰 소리로 웃으며 말했습니다.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릴 필요가 어디 있습니까? 폐하는 지금 당장이라도 디오게네스가 될 수 있습니다. 누가 폐하를 막는단 말입니까? 당장이라도 저처럼 이렇게 일광욕을 즐기실 수 있습니다.”알렉산더는 갑자기 부끄러움을 느끼며 말했습니다.
“그렇소. 나도 그렇게 하고 싶소! 그러나, 온 세계를 정복한 후에 당신처럼 편안히 휴식을 취하며 즐길 것이오.” 그 말을 이어 디오게네스가 말했습니다.
“이해할 수가 없군요. 저는 세계를 정복하지 않고도 이렇게 즐길 수 있는데, 폐하는 왜 지금 당장 즐기실 수 없다는 겁니까? 왜 폐하는 지금 당장 하실 수 있는 일을 뒤로 미루시는 것입니까? 이 강둑은 충분히 넓어 여러 사람이 즐길 수 있습니다. 폐하께서 여기에 계신다 하더라도 제 자리가 조금도 좁아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 둑은 충분히 넓은데도 아직 아무도 오지 않군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알렉산더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알렉산더처럼 지금은 어떤 계기가 마련되지 않아서 다음으로 실천을 미루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한다면 옛 사람을 벗어내는 일을 미루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 4절에서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이며, “세상과 친해지려 한다면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하나님께 순복하고, 손을 깨끗이 하고, 두 마음을 정리하고 한 마음을 품어 성결하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의 세상으로 들어오는 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만 진정한 쉼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마태복음11:28절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초청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지금은 아직 때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대한 순종을 다음 기회로 미루고 있습니다. 자기들의 때가 한없이 많이 있는 줄로 여기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래의 어느 때에 일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이야말로 일할 수 있는 가장 적당한 때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지금 이 시대에 우리를 부르셨고, 일하게 하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6:1-2절을 봅시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가라사대 ‘내가 은혜를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라고 하십니다. 지금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지금 손을 깨끗하게 하고, 지금 마음을 성결케 하고, 지금 겸손하게 순종해야 합니다. 여러분, 이제는 더 이상 내일로 미루지 말고, 지금 내게 주어진 시간이 있을 때 나의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여놓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사는 행복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