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된 사람들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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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0-03-31 13:47
*** 준비된 사람들 / 마태복음 22:1-14
** 들어가는 말
마태복음 22:1-14, “1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이르시되 2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3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4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르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5 그들이 돌아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 6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니 7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8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 9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한대 10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 11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12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13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세상에서의 결혼식은 새로운 가정을 이루는 출발점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세계의 저출산 국가로 분류되고 있으며, 결혼하지 않는 독신들이 많아지고 있다고 합니다. 어떻든 가문이 유지되고 국가가 존속하기 위해서 생산적인 가정을 이루는 결혼은 필수적입니다. 성경에도 하나님의 나라를 결혼식에 비유한 이야기들이 나옵니다. 본문의 내용이 그 중의 하나입니다. 성경에서의 결혼식은 주로 하나님을 신랑으로 그의 백성들을 신부로 표현하여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를 보여줍니다. 본문은 혼인잔치를 열고 그 잔치에 초대한 손님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그래서 본문말씀에서는 마지막 절인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는 말씀대로 ‘준비된 사람’이라는 주제를 상기시킵니다. 왜냐하면 초대를 받은 사람들은 많지만 혼인잔치에 적합하게 준비된 사람은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짧은 두 이야기를 들어보십시오.
어느 날, 작은 개 한 마리가 커다란 사냥개 옆에 나란히 섰습니다. 사냥개가 으르렁거리면서 작은 개에게 물었습니다. \"너도 개축에 드냐?\" 작은 개는 감히 사냥개에게 정면으로 대들 생각은 못하고 아주 공손하게 대답했습니다. \"물론 저는 당신만큼 크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아무도 저를 보고 고양이라고 하지는 않는답니다.\"
어느 가정에서 가정 예배를 드리는 중에 요한계시록을 읽게 되었습니다. 읽는 중에 7장 9절 말씀인,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라는 대목에 이르렀을 때였습니다. 다섯 살짜리 꼬마가 근심 어린 표정으로, “예수님, 내가 입을 흰옷도 있습니까?”라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이 두 이야기의 의미를 알겠습니까? 여러분, 작은 개는 개가 아닙니까? 그리고 천국에 어린아이가 입을 작은 흰옷은 없겠습니까? 작은 개도 당연히 개고, 마찬가지로 꼬마 그리스도인도 그리스도인입니다. 성도는 남녀노소, 인종, 신분에 관계없이 하나님의 백성이며,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특별한 존재들입니다. 본문의 내용처럼 본래 초대 받은 사람들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초대를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임금은 모든 이방인 중에서 어떤 구별도 없이 잔치에 초대를 했습니다. 이 잔치자리에는 남녀노소, 인종, 신분에 관계없이 예복만 준비되면 참여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저도 여러분도 이 혼인잔치에 초대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혼인잔치에 필요한 예복을 준비하셨습니까? 과연 혼인잔치에서 입어야 할 예복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1. 이해를 돕기 위해 먼저 본문의 내용을 살펴봅시다.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라고도 불리는 ‘혼인잔치와 예복’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 말씀입니다. 이 비유는 마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비슷한 내용으로 ‘큰 잔치의 비유’가 누가복음 14:15-24절에 나오지만 의미가 다릅니다. 일단 내용을 살펴봅시다.
어느 나라의 왕이 아들을 위하여 혼인잔치를 열었습니다. 그리고 하객으로 내정한 사람들에게 종들을 통하여 초청장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초대 받은 사람들이 하나같이 모두 거절했습니다. 왕은 다시 다른 종을 보내어 첫 번째 초청 때보다 잔치에 대하여 더 자세히 소개하면서 재차 초청의사를 밝혔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초대받은 자들이 자신의 바쁜 일정을 이유로 거절할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적대행위를 했습니다. 심부름꾼인 종들을 죽인 것입니다. 황당한 결과를 접한 왕은 군대를 풀어서 그 대적 자들을 죽이고 그들의 동네를 불살라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종들을 거리로 보내면서 자격의 제한 없이 누구든지 데려오도록 명령했습니다. 덕분에 잔치 자리는 가득하게 찼고, 왕은 손님들을 둘러보는 가운데 예복을 입지 않은 하객을 발견하고는 물었습니다.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그 사람은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임금은 종들에게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어 던지라.”고 했습니다.
앞에서도 잠깐 말씀드렸지만, 이 비유의 핵심은 ‘혼인잔치에 초대 받은 사람과 예복’입니다. 이미 감을 잡으셨겠지만, 이 잔치는 계시록에 나오는 어린양의 혼인잔치와 그 의미를 같이하고 있습니다. 이 잔치는 성도들과 예수 그리스도의 혼인잔치라고 하셨습니다. 본문에서는 하객들의 예복이라고 했지만, 계시록에서는 신부의 자격을 의미하는 예복이라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19:7-9절입니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이 말씀처럼 계시록의 어린양의 혼인잔치는 혼인예식이 치러지는 본 행사(main event)입니다. 반면에 본문의 비유는 혼인잔치를 위한 준비작업 단계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본문에는 초청장이 배부되고, 하객들이 선별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초청자이신 임금은 하나님이시고, 신랑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초청장을 배부하는 종들은 선지자, 예언자, 사도들 그리고 오늘의 목회자들과 복음 증거자들입니다. 초대를 거절한 사람들은 본 이스라엘 자손들이며, 마지막에 제한 없이 초대받은 사람들은 이방인들, 즉 복음을 접하는 모든 사람들입니다. 마태복음 8:11-12절을 봅시다.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본문의 내용과 일치하지요?
2. 그러면, 본 비유의 중요한 의미들을 살펴봅시다.
잔치를 배설하고 사람들을 초대한 임금의 입장을 봅시다. 본문 3-4절입니다.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4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르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임금은 초청자들을 위하여 많은 것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1차, 2차, 3차로 인내하면서 여러 방법으로 사람들을 초대했습니다. 이는 긴 세월 동안 많은 선지자들과 예언자들과 복음 증거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복음을 세상에 나타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뜻합니다. 이 사실을 다른 성경인 디모데전서 2:4절에서는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하셨고, 베드로후서 3:9절에서는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입장을 봅시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처럼,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하여 사람들을 초대하십니다. 예레미야 7:13절에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제 너희가 그 모든 일을 행하였으며, 내가 너희에게 말하되 새벽부터 부지런히 말하여도 듣지 아니하였고, 너희를 불러도 대답지 아니 하였느니라.”고 탄식하십니다.
다음으로, 종들을 보내십니다.
이는 초대받은 자들을 모으기 위한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예레미야 7:25-26절에서, “너희 열조가 애굽 땅에서 나온 날부터 오늘까지 내가 내 종 선지자들을 너희에게 보내었으되 부지런히 보내었으나, 너희가 나를 청종치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고, 목을 굳게 하여 너희 열조보다 악을 더 행하였느니라.”고 하십니다.
절박한 간곡한 호소로 초청하십니다.
본문 3절에서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라고 하셨고, 마태복음 11:28절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초청하십니다. 이는 초청자들의 거절로 인한 호소이며, 모든 것이 준비되었다는 절박한 호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계속 거절하고 있습니다.
거절한 사람들의 입장을 봅시다.
처음으로 초대받은 자들과 2차로 초대받은 자들 중의 일부는 소극적인 거절의 뜻을 밝혔습니다. 즉 이들의 거절은 싫어하거나 무관심의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일보다 이 세상의 일에 더 관심이 있으며, 영적인 것보다 물질적인 것에 더 관심이 있음을 말합니다. 디모데후서 3:1-5절에서,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 그리고 마태복음 13장의 ‘씨 뿌리는 비유’에서 돌밭과 가시떨기 같은 마음을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삶 보다는 이 땅에서의 육신의 삶을 더 중요시하는 사람들입니다. 거절 자 중의 일부는 적극적인 적대행위를 했습니다. 이들은 종들을 핍박하고 능욕하고 죽였습니다. 이들은 적극적으로 복음을 훼방하거나 핍박하는 자들입니다.
3. 혼인잔치에 참여하려면 예복을 준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기회도, 예복을 준비할 수 있는 기회도 한계가 있습니다. 어느 시점이 지나면 인간에게 베푸셨던 긍휼도 거두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신앙의 일들을 차일피일 미루지 않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어느 때에 내게 주어졌던 기회가 끝날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2:16-17절에서 좋은 모범을 소개합니다.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에서가 이미 놓쳐버린 기회는 눈물을 흘리며 애원했지만 돌이킬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내게 주어진 기회가 최선의 기회임을 알고 열심을 다해 예복을 준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나 들어올 수 있도록 잔치집의 문을 활짝 열어두셨습니다. 그러나 잔치에 합당한 사람을 선별하는 과정이 잔치 직전에 이루어졌습니다. 혼인잔치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 선별기준은 예복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의문이 생기지 않습니까? ‘갑자기 초대받은 사람들이 값비싼 예복을 준비할 시간이 있었겠는가?’ 라는 의문입니다. 그 답변은 그들의 관습에 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관습에 따르면, 예복은 초대자에 의하여 예식장 입구에서 주어졌다고 합니다. 이러한 관습은 이사야 선지자의 글에서도 나타납니다. 이사야 61:10절에서 “내가 여호와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고 하십니다.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아마도 옷이 예복 못지않게 좋은 옷이었으므로 예복을 사양했을 것입니다. 예복은 ‘성도의 옳은 행실이라.’고 하셨는데, 이 사람은 아마도 자신의 선행이나 공로로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선행이나 공로로는 구원받을 수가 없습니다.(엡 2:8,9)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씻음 받은 성결한 삶만이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예할 수 있는 예복입니다.
복음의 기회는 아직 있습니다. 그러나 청함을 받은 대부분은 무관심 할 것이며, 또한 초대에 응했다 할지라도 예복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결국 잔치에 합당한 사람은 소수에 불과할 것입니다. 마태복음 7:13-14절에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환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 신랑으로 입성하시는 예수님과 함께 하는 신부로 서도록 예복을 준비합시다. 지금 기회가 있을 때에 성실하고 열심 있게 준비하여 언제라도 주님 앞에 부끄러움 없이 신부로 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마태복음 22:1-14, “1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이르시되 2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3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4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르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5 그들이 돌아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 6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니 7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8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 9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한대 10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 11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12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13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세상에서의 결혼식은 새로운 가정을 이루는 출발점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세계의 저출산 국가로 분류되고 있으며, 결혼하지 않는 독신들이 많아지고 있다고 합니다. 어떻든 가문이 유지되고 국가가 존속하기 위해서 생산적인 가정을 이루는 결혼은 필수적입니다. 성경에도 하나님의 나라를 결혼식에 비유한 이야기들이 나옵니다. 본문의 내용이 그 중의 하나입니다. 성경에서의 결혼식은 주로 하나님을 신랑으로 그의 백성들을 신부로 표현하여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를 보여줍니다. 본문은 혼인잔치를 열고 그 잔치에 초대한 손님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그래서 본문말씀에서는 마지막 절인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는 말씀대로 ‘준비된 사람’이라는 주제를 상기시킵니다. 왜냐하면 초대를 받은 사람들은 많지만 혼인잔치에 적합하게 준비된 사람은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짧은 두 이야기를 들어보십시오.
어느 날, 작은 개 한 마리가 커다란 사냥개 옆에 나란히 섰습니다. 사냥개가 으르렁거리면서 작은 개에게 물었습니다. \"너도 개축에 드냐?\" 작은 개는 감히 사냥개에게 정면으로 대들 생각은 못하고 아주 공손하게 대답했습니다. \"물론 저는 당신만큼 크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아무도 저를 보고 고양이라고 하지는 않는답니다.\"
어느 가정에서 가정 예배를 드리는 중에 요한계시록을 읽게 되었습니다. 읽는 중에 7장 9절 말씀인,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라는 대목에 이르렀을 때였습니다. 다섯 살짜리 꼬마가 근심 어린 표정으로, “예수님, 내가 입을 흰옷도 있습니까?”라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이 두 이야기의 의미를 알겠습니까? 여러분, 작은 개는 개가 아닙니까? 그리고 천국에 어린아이가 입을 작은 흰옷은 없겠습니까? 작은 개도 당연히 개고, 마찬가지로 꼬마 그리스도인도 그리스도인입니다. 성도는 남녀노소, 인종, 신분에 관계없이 하나님의 백성이며,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특별한 존재들입니다. 본문의 내용처럼 본래 초대 받은 사람들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초대를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임금은 모든 이방인 중에서 어떤 구별도 없이 잔치에 초대를 했습니다. 이 잔치자리에는 남녀노소, 인종, 신분에 관계없이 예복만 준비되면 참여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저도 여러분도 이 혼인잔치에 초대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혼인잔치에 필요한 예복을 준비하셨습니까? 과연 혼인잔치에서 입어야 할 예복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1. 이해를 돕기 위해 먼저 본문의 내용을 살펴봅시다.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라고도 불리는 ‘혼인잔치와 예복’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 말씀입니다. 이 비유는 마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비슷한 내용으로 ‘큰 잔치의 비유’가 누가복음 14:15-24절에 나오지만 의미가 다릅니다. 일단 내용을 살펴봅시다.
어느 나라의 왕이 아들을 위하여 혼인잔치를 열었습니다. 그리고 하객으로 내정한 사람들에게 종들을 통하여 초청장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초대 받은 사람들이 하나같이 모두 거절했습니다. 왕은 다시 다른 종을 보내어 첫 번째 초청 때보다 잔치에 대하여 더 자세히 소개하면서 재차 초청의사를 밝혔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초대받은 자들이 자신의 바쁜 일정을 이유로 거절할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적대행위를 했습니다. 심부름꾼인 종들을 죽인 것입니다. 황당한 결과를 접한 왕은 군대를 풀어서 그 대적 자들을 죽이고 그들의 동네를 불살라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종들을 거리로 보내면서 자격의 제한 없이 누구든지 데려오도록 명령했습니다. 덕분에 잔치 자리는 가득하게 찼고, 왕은 손님들을 둘러보는 가운데 예복을 입지 않은 하객을 발견하고는 물었습니다.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그 사람은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임금은 종들에게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어 던지라.”고 했습니다.
앞에서도 잠깐 말씀드렸지만, 이 비유의 핵심은 ‘혼인잔치에 초대 받은 사람과 예복’입니다. 이미 감을 잡으셨겠지만, 이 잔치는 계시록에 나오는 어린양의 혼인잔치와 그 의미를 같이하고 있습니다. 이 잔치는 성도들과 예수 그리스도의 혼인잔치라고 하셨습니다. 본문에서는 하객들의 예복이라고 했지만, 계시록에서는 신부의 자격을 의미하는 예복이라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19:7-9절입니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이 말씀처럼 계시록의 어린양의 혼인잔치는 혼인예식이 치러지는 본 행사(main event)입니다. 반면에 본문의 비유는 혼인잔치를 위한 준비작업 단계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본문에는 초청장이 배부되고, 하객들이 선별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초청자이신 임금은 하나님이시고, 신랑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초청장을 배부하는 종들은 선지자, 예언자, 사도들 그리고 오늘의 목회자들과 복음 증거자들입니다. 초대를 거절한 사람들은 본 이스라엘 자손들이며, 마지막에 제한 없이 초대받은 사람들은 이방인들, 즉 복음을 접하는 모든 사람들입니다. 마태복음 8:11-12절을 봅시다.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본문의 내용과 일치하지요?
2. 그러면, 본 비유의 중요한 의미들을 살펴봅시다.
잔치를 배설하고 사람들을 초대한 임금의 입장을 봅시다. 본문 3-4절입니다.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4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르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임금은 초청자들을 위하여 많은 것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1차, 2차, 3차로 인내하면서 여러 방법으로 사람들을 초대했습니다. 이는 긴 세월 동안 많은 선지자들과 예언자들과 복음 증거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복음을 세상에 나타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뜻합니다. 이 사실을 다른 성경인 디모데전서 2:4절에서는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하셨고, 베드로후서 3:9절에서는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입장을 봅시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처럼,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하여 사람들을 초대하십니다. 예레미야 7:13절에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제 너희가 그 모든 일을 행하였으며, 내가 너희에게 말하되 새벽부터 부지런히 말하여도 듣지 아니하였고, 너희를 불러도 대답지 아니 하였느니라.”고 탄식하십니다.
다음으로, 종들을 보내십니다.
이는 초대받은 자들을 모으기 위한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예레미야 7:25-26절에서, “너희 열조가 애굽 땅에서 나온 날부터 오늘까지 내가 내 종 선지자들을 너희에게 보내었으되 부지런히 보내었으나, 너희가 나를 청종치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고, 목을 굳게 하여 너희 열조보다 악을 더 행하였느니라.”고 하십니다.
절박한 간곡한 호소로 초청하십니다.
본문 3절에서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라고 하셨고, 마태복음 11:28절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초청하십니다. 이는 초청자들의 거절로 인한 호소이며, 모든 것이 준비되었다는 절박한 호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계속 거절하고 있습니다.
거절한 사람들의 입장을 봅시다.
처음으로 초대받은 자들과 2차로 초대받은 자들 중의 일부는 소극적인 거절의 뜻을 밝혔습니다. 즉 이들의 거절은 싫어하거나 무관심의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일보다 이 세상의 일에 더 관심이 있으며, 영적인 것보다 물질적인 것에 더 관심이 있음을 말합니다. 디모데후서 3:1-5절에서,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 그리고 마태복음 13장의 ‘씨 뿌리는 비유’에서 돌밭과 가시떨기 같은 마음을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삶 보다는 이 땅에서의 육신의 삶을 더 중요시하는 사람들입니다. 거절 자 중의 일부는 적극적인 적대행위를 했습니다. 이들은 종들을 핍박하고 능욕하고 죽였습니다. 이들은 적극적으로 복음을 훼방하거나 핍박하는 자들입니다.
3. 혼인잔치에 참여하려면 예복을 준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기회도, 예복을 준비할 수 있는 기회도 한계가 있습니다. 어느 시점이 지나면 인간에게 베푸셨던 긍휼도 거두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신앙의 일들을 차일피일 미루지 않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어느 때에 내게 주어졌던 기회가 끝날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2:16-17절에서 좋은 모범을 소개합니다.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에서가 이미 놓쳐버린 기회는 눈물을 흘리며 애원했지만 돌이킬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내게 주어진 기회가 최선의 기회임을 알고 열심을 다해 예복을 준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나 들어올 수 있도록 잔치집의 문을 활짝 열어두셨습니다. 그러나 잔치에 합당한 사람을 선별하는 과정이 잔치 직전에 이루어졌습니다. 혼인잔치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 선별기준은 예복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의문이 생기지 않습니까? ‘갑자기 초대받은 사람들이 값비싼 예복을 준비할 시간이 있었겠는가?’ 라는 의문입니다. 그 답변은 그들의 관습에 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관습에 따르면, 예복은 초대자에 의하여 예식장 입구에서 주어졌다고 합니다. 이러한 관습은 이사야 선지자의 글에서도 나타납니다. 이사야 61:10절에서 “내가 여호와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고 하십니다.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아마도 옷이 예복 못지않게 좋은 옷이었으므로 예복을 사양했을 것입니다. 예복은 ‘성도의 옳은 행실이라.’고 하셨는데, 이 사람은 아마도 자신의 선행이나 공로로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선행이나 공로로는 구원받을 수가 없습니다.(엡 2:8,9)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씻음 받은 성결한 삶만이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예할 수 있는 예복입니다.
복음의 기회는 아직 있습니다. 그러나 청함을 받은 대부분은 무관심 할 것이며, 또한 초대에 응했다 할지라도 예복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결국 잔치에 합당한 사람은 소수에 불과할 것입니다. 마태복음 7:13-14절에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환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 신랑으로 입성하시는 예수님과 함께 하는 신부로 서도록 예복을 준비합시다. 지금 기회가 있을 때에 성실하고 열심 있게 준비하여 언제라도 주님 앞에 부끄러움 없이 신부로 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