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의 원천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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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9-12-17 17:34
*** 능력의 원천 / 빌립보서 4:13, 사무엘하 22:30
** 들어가는 말
빌립보서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사무엘하 22:30,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에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성벽을 뛰어넘나이다”
대림절 세 번째 주간이 시작되는 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한 메시아로 오심을 기뻐하고 감사하는 대림절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그친다면 반쪽짜리 절기일 뿐입니다. 나머지 반쪽의 의미는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요 14:3)라는 말씀 속에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세상에 다시 오겠다고 하신 그 날을 생각하며 준비상황을 점검하는 절기입니다. 그런데 세상에 오셔서 나를 구원하신 예수님께 대하여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은 누구나 잘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을 위하여 어떻게 준비해야 되는지에 관한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 앞에 설 때에 부끄럽지 않게 설 수 있겠습니까? 누가복음 21:36절에서 주님은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다.’는 것은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순종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이런 삶은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이루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이런 삶을 이루어 갈 수 있는 능력의 원천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 시간에는 이 해답을 살펴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안에 성령님이 계심을 믿습니까?
아마 어린아이들에게, “예수님이 어디 계셔요?”라고 물으면, 아마 대부분이 ‘내 마음 속에요!’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내 마음에 영접하는 것’이라고 수도 없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신앙생활을 해 온 사람이라면, 거의 기계적으로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신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신다.’는 사실과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는 것을 느낀다.’는 감정과 혼동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예배가 아주 은혜스럽다고 느꼈을 때, 사람들은 흔히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예배였다.’고 감격스러워 합니다. 그렇다면, 예배가 은혜스럽지 않다고 느꼈을 때, 하나님은 그 예배 중에 함께 하지 않으셨다는 것인데, 과연 그렇습니까? 또는, ‘이 교회에는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느꼈습니다.’ 라고 말한다면, 평상시에는 하나님이 어디에 계셨습니까?
하나님은 은혜롭게 예배하는 곳에만 계십니까? 아니면 부르짖어 기도하시는 곳에만 계십니까? 그렇다면 초라하고 가난한 집에서 드리는 가정 예배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나 혼자 있을 때나, 많은 사람이 있을 때나, 은혜로운 예배 처소에나, 은혜롭게 느끼지 못하는 예배 처소에나, 누구를 만날 때에나, 슬픔으로 가슴이 무너지는 때에나, 언제든지 어느 곳에서든지 하나님은 성도들과 함께 계십니다. 심지어 시편 116:15절에서는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라는 말씀대로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죽음의 자리에도 여전히 함께 하십니다.
이렇게 우리는 하나님이 항상 함께 하시는 실제 상황을, 확실하지 않은 자신의 느낌에 의존하려 합니다. 이는 마치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는 생명의 샘물을 소유하고 있는 성도들이 늘 무엇인가 갈급해 하는 것과 같습니다. 믿음은 결코 느낌이나 감정에 의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1절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셨습니다.
탕자 비유에는 탕자인 둘째 아들과 착실하게 아버지를 돕고 있는 맏아들이 있습니다. 탕자가 돌아 왔을 때, 아버지는 그를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고 성대한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마침 일터에서 돌아오던 맏아들이 집에서 들려오는 시끌벅적한 사람들 소리와 노래 소리를 들었습니다. 곧 그 소동이 동생이 돌아와 잔치를 베푸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맏아들은 화가 나서 집으로 들어가지도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그 사실을 알고 밖으로 나와 맏아들을 달랬습니다. 맏아들은, “아버지, 저는 아버지와 내내 함께 있었지만 제 친구들과 잔치하도록 염소 새끼 한 마리 안 주셨지 않습니까? 그런데 유산을 챙겨서 몽땅 까먹고 돌아 온 저 망나니를 위해서 살진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벌립니까?” 하며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그 때 아버지는, “얘야,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었고 내 것은 무엇이든지 다 네 것이 아니냐!”라고 하셨습니다. 즉 ‘네가 잔치를 벌리고 싶거든 얼마든지 하려무나. 이 집의 모든 것이 다 네 것이지 않느냐?’라고 하신 것입니다.
맏아들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잔치를 벌이든 무엇을 하든지 얼마든지 허용되어 있었습니다. 다만 자신이 사용하지를 못했을 뿐입니다. 맏아들에게 모든 것을 허용하신 하나님은 지금 우리에게도 아버지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본문의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는 이 고백처럼, 내가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의 원천을 알고 그것을 사용하면 되는 것입니다.
1. 능력의 원천이 무엇입니까?
사람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내용의 90%는 ‘무엇을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밑 빠진 독처럼 채워도 채워도 부족한 듯이 자꾸만 하나님께 요구하게 됩니다. 이미 우리에게는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계심에도 불구하고 없는 것만 생각나고 채우고 싶어합니다. 주님께서 마태복음 6:31-32절에서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의도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부족한 것을 구하라고 하십니까?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심에도 불구하고 주지 않으시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아직은 필요치 않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지금 너희에게 주어진 것으로 충분하다.’는 말씀입니다.
지금 여러분 자신의 소유나 환경에 만족하십니까? 불만족이시지요? 만족하지 못하는 것은 채움 받는 비결을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즉 능력의 원천을 알지 못하거나, 안다고 해도 활용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본문을 함께 읽어봅시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이 말씀을 믿습니까? 그러면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지금 내게 있는 것이 풍족하고 능력이 충만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나에게 있는 것은 전혀 언급하지 않습니다. 오직 능력의 원천이 무엇인지만을 말씀합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능력의 원천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나는 무능해도 되고, 아무 것도 없어도 됩니다. 내 안에 계시는 하나님이 능력의 근본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내게 능력 주시는 능력의 원천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능력의 원천이 지금 내 안에 계시고, 나는 그 능력 안에 있음을 확실하게 믿습니까? 이 말이 잘 믿어지지 않는다면 요한복음 15:10절을 봅시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 있으면 너무도 당연히 말씀이신 주님이 내 안에 계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곧 능력의 원천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것을 얻어낼 수 있을까!’ 라고 고민하고 기도할 것이 아닙니다. 정말 기도하고 배워야 할 것은 ‘내가 어떻게 주님 안에 있을 수 있을까!’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도울 수 있도록 사랑과 물질을 보다 많이 주십시오.’라고 기도한다고 합시다. 이 기도는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충분한 사랑도 물질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혹 이 말에 의의를 제기하고 싶은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내 안에 계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면 좀 더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환경과 여건을 조성하시고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예레미야 33:2절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라고 소개하십니다. 고린도전서 10:26절에서,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니라.”고 하시며, 에베소서 1:23절에서는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고 하시고, 골로새서 2:10절에서는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시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미 충만한 사랑도 있고, 필요한 물질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은 ‘자신이 생각하는 충만이 아니기 때문에 자꾸만 무엇인가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자신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이나 권력이나 세상적인 것들을 의지하고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무엘하 본문을 봅시다.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에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성벽을 뛰어넘나이다.”이 말씀은 전쟁에 능한 왕이었던 다윗 왕의 고백입니다. 다윗은 생명을 건 전쟁에서 병력이나 무기를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뢰하고 의지했습니다. 이것이 다윗의 능력의 원천이었으며 하나님의 마음에 꼭 들었던 이유였습니다. 지금 우리의 능력의 원천도 역시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전적으로 의지하는 믿음입니다.
2. 능력의 원천은 주어진 것을 충성되게 사용할 때 나타납니다.
다시 한 번 마태복음 6:31-33절을 읽어봅시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현재 보이는 것이나 원하는 것이나 환경에 집착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을 구하라.’는 것은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사명,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그 일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정리해보면 ‘주어진 환경에 집착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에 충실하라.’는 말씀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는 말씀과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에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성벽을 뛰어넘나이다”는 말씀과 뜻이 맞아떨어집니다.
진정한 능력의 원천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모든 것을 맡기며, 지금 주어진 환경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행동은 하지 않고는 무엇인가 부족한 것처럼 ‘달라고, 달라고’보채기만 한다든지, ‘주시면 하겠다.’고 떼를 쓴다면 아마도 평생을 그렇게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4:20절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 했으며, 믿음장이라고 부르는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 모두가 한결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여 행할 때에 능력이 나타났던’것입니다.
한 가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고자 하지만 도무지 없는 것이 있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라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내게 허락하지 않은 능력을 나타내라고 요구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모든 것을 허락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우리 몸에 많은 기관들이 있지만 각자의 역할은 다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성도들 각자에게 각각의 재능과 은사를 주셨습니다. 성도는 이 은사를 서로 합함으로서 교회를 세워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사론입니다. 로마서 12:6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라고 하셨고, 고린도전서 7:7절에서는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하나는 이러하고 하나는 저러하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12:11-12절에서는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지금 내게 주어진 것을 십분 활용하면 됩니다. 내게 주어진 것이 보잘것없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최선을 다하여 사용해야 합니다. 만일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것마저 빼앗길 것입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한 달란트 받은 사람과 므나의 비유에서 주어진 한 므나를 사용하지 않았던 사람의 결과를 알고 계시지요? 그들은 주어진 것을 사용하지 않으므로 인하여 그 있던 것까지 빼앗기고 결국 천국공동체에서 쫓겨났습니다. 주어지지 않은 것을 원망하고 불평하거나, 얻으려고 애쓰기보다 주어진 것에 충실해야 합니다. 부족한 것을 더 풍성하게 채우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능력의 원천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며, 그것을 충성되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과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는 여러분, 미루지 말고 지금하십시오. 환경을 기다리고, 기회를 기다리지 말고 지금 하십시오. 지금, 생명이 있는 지금 이 순간이 최고의 기회입니다. 이 기회가 있을 때에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모든 것을 맡기며, 지금 주어진 환경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에 충실하십시오. 그리하여 언제 주님이 오셔도 부끄럽지 않는 기쁨의 만남을 준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빌립보서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사무엘하 22:30,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에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성벽을 뛰어넘나이다”
대림절 세 번째 주간이 시작되는 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한 메시아로 오심을 기뻐하고 감사하는 대림절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그친다면 반쪽짜리 절기일 뿐입니다. 나머지 반쪽의 의미는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요 14:3)라는 말씀 속에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세상에 다시 오겠다고 하신 그 날을 생각하며 준비상황을 점검하는 절기입니다. 그런데 세상에 오셔서 나를 구원하신 예수님께 대하여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은 누구나 잘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을 위하여 어떻게 준비해야 되는지에 관한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 앞에 설 때에 부끄럽지 않게 설 수 있겠습니까? 누가복음 21:36절에서 주님은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다.’는 것은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순종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이런 삶은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이루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이런 삶을 이루어 갈 수 있는 능력의 원천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 시간에는 이 해답을 살펴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안에 성령님이 계심을 믿습니까?
아마 어린아이들에게, “예수님이 어디 계셔요?”라고 물으면, 아마 대부분이 ‘내 마음 속에요!’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내 마음에 영접하는 것’이라고 수도 없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신앙생활을 해 온 사람이라면, 거의 기계적으로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신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신다.’는 사실과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는 것을 느낀다.’는 감정과 혼동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예배가 아주 은혜스럽다고 느꼈을 때, 사람들은 흔히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예배였다.’고 감격스러워 합니다. 그렇다면, 예배가 은혜스럽지 않다고 느꼈을 때, 하나님은 그 예배 중에 함께 하지 않으셨다는 것인데, 과연 그렇습니까? 또는, ‘이 교회에는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느꼈습니다.’ 라고 말한다면, 평상시에는 하나님이 어디에 계셨습니까?
하나님은 은혜롭게 예배하는 곳에만 계십니까? 아니면 부르짖어 기도하시는 곳에만 계십니까? 그렇다면 초라하고 가난한 집에서 드리는 가정 예배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나 혼자 있을 때나, 많은 사람이 있을 때나, 은혜로운 예배 처소에나, 은혜롭게 느끼지 못하는 예배 처소에나, 누구를 만날 때에나, 슬픔으로 가슴이 무너지는 때에나, 언제든지 어느 곳에서든지 하나님은 성도들과 함께 계십니다. 심지어 시편 116:15절에서는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라는 말씀대로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죽음의 자리에도 여전히 함께 하십니다.
이렇게 우리는 하나님이 항상 함께 하시는 실제 상황을, 확실하지 않은 자신의 느낌에 의존하려 합니다. 이는 마치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는 생명의 샘물을 소유하고 있는 성도들이 늘 무엇인가 갈급해 하는 것과 같습니다. 믿음은 결코 느낌이나 감정에 의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1절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셨습니다.
탕자 비유에는 탕자인 둘째 아들과 착실하게 아버지를 돕고 있는 맏아들이 있습니다. 탕자가 돌아 왔을 때, 아버지는 그를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고 성대한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마침 일터에서 돌아오던 맏아들이 집에서 들려오는 시끌벅적한 사람들 소리와 노래 소리를 들었습니다. 곧 그 소동이 동생이 돌아와 잔치를 베푸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맏아들은 화가 나서 집으로 들어가지도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그 사실을 알고 밖으로 나와 맏아들을 달랬습니다. 맏아들은, “아버지, 저는 아버지와 내내 함께 있었지만 제 친구들과 잔치하도록 염소 새끼 한 마리 안 주셨지 않습니까? 그런데 유산을 챙겨서 몽땅 까먹고 돌아 온 저 망나니를 위해서 살진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벌립니까?” 하며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그 때 아버지는, “얘야,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었고 내 것은 무엇이든지 다 네 것이 아니냐!”라고 하셨습니다. 즉 ‘네가 잔치를 벌리고 싶거든 얼마든지 하려무나. 이 집의 모든 것이 다 네 것이지 않느냐?’라고 하신 것입니다.
맏아들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잔치를 벌이든 무엇을 하든지 얼마든지 허용되어 있었습니다. 다만 자신이 사용하지를 못했을 뿐입니다. 맏아들에게 모든 것을 허용하신 하나님은 지금 우리에게도 아버지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본문의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는 이 고백처럼, 내가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의 원천을 알고 그것을 사용하면 되는 것입니다.
1. 능력의 원천이 무엇입니까?
사람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내용의 90%는 ‘무엇을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밑 빠진 독처럼 채워도 채워도 부족한 듯이 자꾸만 하나님께 요구하게 됩니다. 이미 우리에게는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계심에도 불구하고 없는 것만 생각나고 채우고 싶어합니다. 주님께서 마태복음 6:31-32절에서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의도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부족한 것을 구하라고 하십니까?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심에도 불구하고 주지 않으시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아직은 필요치 않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지금 너희에게 주어진 것으로 충분하다.’는 말씀입니다.
지금 여러분 자신의 소유나 환경에 만족하십니까? 불만족이시지요? 만족하지 못하는 것은 채움 받는 비결을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즉 능력의 원천을 알지 못하거나, 안다고 해도 활용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본문을 함께 읽어봅시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이 말씀을 믿습니까? 그러면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지금 내게 있는 것이 풍족하고 능력이 충만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나에게 있는 것은 전혀 언급하지 않습니다. 오직 능력의 원천이 무엇인지만을 말씀합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능력의 원천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나는 무능해도 되고, 아무 것도 없어도 됩니다. 내 안에 계시는 하나님이 능력의 근본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내게 능력 주시는 능력의 원천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능력의 원천이 지금 내 안에 계시고, 나는 그 능력 안에 있음을 확실하게 믿습니까? 이 말이 잘 믿어지지 않는다면 요한복음 15:10절을 봅시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 있으면 너무도 당연히 말씀이신 주님이 내 안에 계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곧 능력의 원천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것을 얻어낼 수 있을까!’ 라고 고민하고 기도할 것이 아닙니다. 정말 기도하고 배워야 할 것은 ‘내가 어떻게 주님 안에 있을 수 있을까!’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도울 수 있도록 사랑과 물질을 보다 많이 주십시오.’라고 기도한다고 합시다. 이 기도는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충분한 사랑도 물질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혹 이 말에 의의를 제기하고 싶은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내 안에 계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면 좀 더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환경과 여건을 조성하시고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예레미야 33:2절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라고 소개하십니다. 고린도전서 10:26절에서,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니라.”고 하시며, 에베소서 1:23절에서는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고 하시고, 골로새서 2:10절에서는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시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미 충만한 사랑도 있고, 필요한 물질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은 ‘자신이 생각하는 충만이 아니기 때문에 자꾸만 무엇인가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자신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이나 권력이나 세상적인 것들을 의지하고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무엘하 본문을 봅시다.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에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성벽을 뛰어넘나이다.”이 말씀은 전쟁에 능한 왕이었던 다윗 왕의 고백입니다. 다윗은 생명을 건 전쟁에서 병력이나 무기를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뢰하고 의지했습니다. 이것이 다윗의 능력의 원천이었으며 하나님의 마음에 꼭 들었던 이유였습니다. 지금 우리의 능력의 원천도 역시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전적으로 의지하는 믿음입니다.
2. 능력의 원천은 주어진 것을 충성되게 사용할 때 나타납니다.
다시 한 번 마태복음 6:31-33절을 읽어봅시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현재 보이는 것이나 원하는 것이나 환경에 집착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을 구하라.’는 것은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사명,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그 일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정리해보면 ‘주어진 환경에 집착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에 충실하라.’는 말씀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는 말씀과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에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성벽을 뛰어넘나이다”는 말씀과 뜻이 맞아떨어집니다.
진정한 능력의 원천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모든 것을 맡기며, 지금 주어진 환경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행동은 하지 않고는 무엇인가 부족한 것처럼 ‘달라고, 달라고’보채기만 한다든지, ‘주시면 하겠다.’고 떼를 쓴다면 아마도 평생을 그렇게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4:20절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 했으며, 믿음장이라고 부르는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 모두가 한결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여 행할 때에 능력이 나타났던’것입니다.
한 가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고자 하지만 도무지 없는 것이 있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라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내게 허락하지 않은 능력을 나타내라고 요구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모든 것을 허락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우리 몸에 많은 기관들이 있지만 각자의 역할은 다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성도들 각자에게 각각의 재능과 은사를 주셨습니다. 성도는 이 은사를 서로 합함으로서 교회를 세워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사론입니다. 로마서 12:6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라고 하셨고, 고린도전서 7:7절에서는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하나는 이러하고 하나는 저러하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12:11-12절에서는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지금 내게 주어진 것을 십분 활용하면 됩니다. 내게 주어진 것이 보잘것없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최선을 다하여 사용해야 합니다. 만일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것마저 빼앗길 것입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한 달란트 받은 사람과 므나의 비유에서 주어진 한 므나를 사용하지 않았던 사람의 결과를 알고 계시지요? 그들은 주어진 것을 사용하지 않으므로 인하여 그 있던 것까지 빼앗기고 결국 천국공동체에서 쫓겨났습니다. 주어지지 않은 것을 원망하고 불평하거나, 얻으려고 애쓰기보다 주어진 것에 충실해야 합니다. 부족한 것을 더 풍성하게 채우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능력의 원천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며, 그것을 충성되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과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는 여러분, 미루지 말고 지금하십시오. 환경을 기다리고, 기회를 기다리지 말고 지금 하십시오. 지금, 생명이 있는 지금 이 순간이 최고의 기회입니다. 이 기회가 있을 때에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모든 것을 맡기며, 지금 주어진 환경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에 충실하십시오. 그리하여 언제 주님이 오셔도 부끄럽지 않는 기쁨의 만남을 준비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