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 장로회
설교모음

나를 위한 메시아

작성자 배의신 댓글 / 조회: 5,762회 작성일 2009-12-08 15:11
*** 나를 위한 메시아 / 이사야 11:1-9

** 들어가는 말

이사야 11:1-9, “1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2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 3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치 아니하며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치 아니하며 4 공의로 빈핍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5 공의로 그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몸의 띠를 삼으리라. 6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7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8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9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대림절 두 번째 주간이 시작되는 주일입니다. 대림절에는 예수님 생각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 즉 메시아입니다. 메시아(Messiah, הישׁמ)라는 말은 히브리어로서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보다 친숙한 표현은, 메시아를 헬라어로 번역한 그리스도(Χρὶστὸς)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은 ‘예수 Messiah’라는 말로서, ‘예수는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운 자’라는 의미입니다. 기름 부어 세운다는 것은 특별한 직분자임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직분자를 세울 때에 세 종류의 직분에는 기름을 부어 세우도록 하셨습니다. ‘선지자’, ‘제사장’, ‘왕’ 이 세 직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것은 이 세 직분을 가지셨음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누구를 위한 메시아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이 왜 중요한가 하면 온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이 탄생하신 크리스마스를 즐기지만, 정작 예수님을 자신의 메시아로 인정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벌써 대형 판매점이나 거리 곳곳에는 크리스마스 장식이 화려하게 꾸며지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술집 안에도 창문에도 크리스마스 장식이 있으며, 사람들은 괜스레 마음 설레어 합니다. 이들이 성탄절을 기뻐하고 기다리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이들이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환영하고 영접하는 것이 아님은 누구나 압니다. 이들은 손님을 기다리고, 돈을 기다리고, 즐거움과 쾌락을 기다립니다. 첫 번 성탄절 때, 베들레헴의 어느 마구간 말구유가 예수님의 요람이 되었습니다. 머무실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마태복음 8:20절에서 예수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영접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에도 예수님은 역시 머무실 곳이 별로 없으십니다. 환영하는 곳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예수님께서 자신의 메시아이심을 확신하고 고백합니까? 이 사실은 우리가 어떤 환경에서나 꿈에서나 심지어 죽는 순간까지도 잊어서는 안 되는 중요하고 중요한 고백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열쇠이기 때문입니다. 이 고백이 없으면 결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본문말씀을 중심으로 우리의 이 고백을 다시 한 번 확실하게 점검하고 세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먼저, 본문의 내용을 살펴봅시다.

본문은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서 징벌을 당하여 처참하게 이지러진 상황에서 주어진 말씀입니다. 이처럼 처참한 환경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이 좌절하지 않고 희망을 가지도록 주시는 소망의 말씀입니다. 그 소망은 메시야가 오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1-5절에는 오실 메시아의 근본이 무엇이며, 메시아의 다스림이 어떠할 것인지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메시아는 하나님의 약속대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것이며,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이루실 것입니다. 그리고 6-9절에는 메시아의 오심으로 이루어질 메시아 왕국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루어질 메시아의 왕국은 세상의 나라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메시아 왕국은 참된 신앙에 기초를 둔 조화와 평화의 왕국이 될 것입니다. 무방비 상태인 연약한 동물이 맹수들과 함께 평화롭게 사는 표현은 인간 세상의 모든 적대감과 두려움이 없어질 것을 나타냅니다.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다스림이 이루어지는 이 땅에서의 하나님 나라를 말합니다. 이와 같이 메시아는 평화의 왕으로 오실 것입니다.

‘평화(平和)’라는 단어의 평안할 평(平) 자는 심장 두 개가 나란히 공존하는 모양새를 나타내는 평화의 이념입니다. 합할 화(和) 자는 口(입구) 변에 禾(벼화)가 붙어 있습니다. 즉 ‘입 속에 밥이 있다.’는 ‘경제적 평화’를 의미합니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먹을거리가 풍족하면 싸움이 없습니다. 메시아의 시대, 예수 그리스도의 다스림 안에는 모든 것이 충만한 그리스도의 평화가 있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14:27절에서 예수님은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의 지금의 삶은 어떻습니까? 메시아가 주시는 평안을 누리고 있습니까? 예수님이 메시아로 세상에 오신 목적부터 찾아봅시다.

1.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왜 세상에 오셨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왜 세상에 오셨습니까? 무엇이 답답해서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습니까? 이렇게 물으면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상을 구원하러 오셨다.’ 혹은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다.’, 좀 유식한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게 하시려고 오셨다.’ 이렇게 대답할 것 같습니다. 물론 모두 옳은 말입니다. 옳은 말이기는 하지만 올바른 고백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철저하게 개인적이기 때문입니다. 에스겔 14:20절에서 “비록 노아, 다니엘, 욥이 거기 있을지라도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그들은 자녀도 건지지 못하고 자기의 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로마서 10:13절에서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십니다. 구원은 철저하게 개인적입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에도 자신이 홀로 서야합니다. 자신의 신앙을 대변해줄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앙고백은 철저하게 자신의 것이어야 합니다. ‘나를 위한 메시아’이며, ‘나의 하나님’입니다. 이 고백을 하게 하시려고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으며, 십자가에서 대속의 제물이 되셨습니다.

이런 고백이 필요한 이유는 사람들이 전혀 엉뚱한 것을 메시아고 삼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돈을 메시아로 삼고, 권력을 메시아로 삼고, 지식을 메시아로 삼고, 자원, 물질을 메시아로 삼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십자가를 지는 나약한 메시아가 아닌 힘과 능력으로 무장하고 세상을 바꿀 정치적 메시아를 기대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실망한 제자들이 뿔뿔이 흩어졌을 때, 엠마오로 낙향하던 두 제자를 통하여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24:21절 상반절에서,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고 실망어린 말을 합니다. 자신의 상상 속에 있는 메시아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을 찾아 나오는 사람들이 자신의 형통함과 부귀영화를 꿈꾸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그 나라를 위하여 고난 정도가 아니라 생명을 잃을 각오까지 하고 따르라고 하시는데 말입니다. 마태복음 10:37-38절에서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고 하시며, 요한복음 12:25절에서는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은 지금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나의 주님이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며, 나를 위한 메시아십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까?

2. 나는 나의 메시아를 위하여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을 나를 위한 메시아로 고백한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4:20절에서 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는 말씀대로, 나의 고백이 나의 생활에서 나타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대림절의 정신이기도 합니다. 만일 대림절이나 사순절 같은 절기들이 구호나 이론에 그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특히 이 대림절에는 ‘나의 메시아를 위하여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14:21절을 봅시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고 하십니다. 23절에서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고 하십니다. 또한 24절에서는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지켜야 할 주님의 말씀은 어떤 것입니까? 요한복음 13:34절에서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랑으로 행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사랑은 마태복음 22:37-40절에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고 하십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즐거워하며 성실하게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 순종에는 큰 부상이 딸려있습니다. 마태복음 6:33절의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생활 속에서 열심히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고 실천하기를 바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만 하면 “이 모든 것” 즉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덤으로 주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내 생활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할 수 있습니까?

기타에 ‘카포’라는 도구를 끼우면 위치에 따라서 전체의 소리가 반음씩 또는 한 음씩 높아지고 낮아지게 됩니다. 또한 평범한 안경에 녹색 셀로판지를 붙이면 모든 물체에 녹색이 더해진 색으로 보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구한다는 것은 나의 생각이라는 안경에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셀로판지를 붙이고, 나의 생활이라는 악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끼워서 소리를 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나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하나님을 통하여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해야 합니까?

 유럽에는 길거리에서 연주하는 젊은이들을 종종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주로 학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로 길거리 연주를 한다고 합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잠시 연주를 들으면서 여유로움을 갖게 되고 그 대가로 몇 푼씩을 던져줍니다.
이태리의 어느 거리에서 허름한 차림의 늙은이가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었습니다. 그 늙은이는 악기 연주로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나는 사람들은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아주 가끔씩 동정어린 눈으로 동전을 던져 주는 사람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오후 무렵, 어떤 중년의 신사가 지나가다가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늙은이에게 “바이올린을 제가 잠깐 연주 해봐도 되겠습니까?”라고 했습니다. 늙은이는 팔도 아프고 지친 터라서 쉽게 “그러시구려.”라며 바이올린을 넘겨주었습니다. 중년의 신사는 천천히 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바이올린에서는 늙은이의 연주 때와는 전혀 다른 아름답고 매혹적인 음악이 흘러나왔습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한 사람, 두 사람 걸음을 멈추고 그 연주를 듣고 있었습니다. 잠깐 사이에 길거리 연주장이 되었습니다. 연주를 마쳤을 때 사람들은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지폐와 동전이 가득하게 쌓였습니다. 중년의 신사는 악기를 늙은이에게 넘겨주면서 “이 돈을 가져가세요.”라며 돌아서 갔습니다.
그 뒤에서 어떤 아가씨들이 자그마하게 “파가니니다.”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파가니니(Niccol Paganini)는 이태리 출신의 작곡가이며 바이올린 협주곡을 작곡한 분이기도 합니다.

똑 같은 바이올린이었지만 늙은이가 연주할 때와 파가니니가 연주할 때는 전혀 다른 소리가 났습니다. 그렇습니다. 악기는 누가 연주하느냐에 따라서 천차만별의 소리가 납니다. 우리 인생도 그러합니다.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며 자기 인생을 자기 마음대로 사용하겠다고 고집한다면 실수와 실패로 얼룩진 인생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나를 지으셨으며, 나 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나를 사용하신다면 최상의 가치를 지닌 인생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고 하나님의 의를 구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나의 인생’이라는 악기를 하나님께서 연주하시도록 맡기는 것입니다.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고백한 이사야 선지자처럼, ‘주님의 뜻을 위하여 나를 써 주십시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나를 위한 메시아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나의 메시아가 오심을 감사하며 ‘다시 오마’고 약속하신 그 날을 기다리는 우리는 온전한 믿음의 고백과 함께 주님의 도구로 쓰임 받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이 자신의 생명으로 이루신 구원과 평화와 사랑의 역사를 지금은 우리가 이어가야 합니다. 이번 성탄절에는 나를 위한 메시아를 기쁨으로 환영하여 주님께서 기꺼이 우리와 함께 거처하시는 행복한 성탄절을 맞이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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