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을 바꾸면 길이 보입니다.
작성자 배의신 댓글
/ 조회: 7,116회
작성일
2009-12-05 14:00
*** 생각을 바꾸면 길이 보입니다. / 요한복음 14:6-14
** 들어가는 말
요한복음 14:6-14, “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7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8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9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10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오늘부터 2009년 대림절이 시작됩니다. 대림절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날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절기로서 성탄절 전 4주간을 말합니다. 성도들에게는 매일의 삶이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주님을 따르는 삶입니다. 그러나 대림절 기간은 기다림의 마음과 준비됨을 점검하며 새롭게 하는 시간입니다. 고린도전서 16:22절 후반절에 “…주께서 임하시느니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여러분이 들어 보았을 ‘마라나 타(Our Lord, Come!)’라는 말인데, ‘주께서 임하신다.’ 또는 ‘우리들의 주님, 오시옵소서.’라는 뜻입니다. 또한 요한계시록 22:20절에서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했는데, 이 말씀은 계시록에서 증거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말씀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 오시옵소서.’라는 고백입니다. 여러분은 지금이라도 ‘예수님 오시옵소서!’라고 자신 있게 고백할 수 있도록 예수님의 재림을 고대하고 있습니까? 이러한 고백을 할 수 있다면 자신 있게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이겠지요!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자신 있게 고백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성도들은 하루 종일 혹은 일주일 내내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생각을 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매일의 삶이 판에 박힌 듯이 또는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짜인 틀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가급적이면 이 틀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합니다. 때때로 그 삶의 틀에서 벗어나게 되면 ‘우째 이런 일이!’라며 당황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의 제자인 ‘도마’ 나 ‘빌립’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신의 삶의 틀, 생각의 틀을 벗어난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도마는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라고 했으며, 빌립은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수님께서는 영적인 길을 말씀하시는데, 제자들은 세상의 길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패러다임(paradigm, 이론적인 틀, 생각의 틀)이 달랐습니다. 생각이 다르면 길도 다릅니다. 요한복음 3장에 나오는 ‘니고데모’도 그러했습니다. 예수님은 ‘영적인 거듭남’을 말씀하시는데, 니고데모는 ‘육신적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4장의 ‘수가 성의 여인’도 그러했습니다. 예수님은 영적인 생수 즉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말했지만, 수가 성의 여인은 우물에서 깃는 물을 생각했습니다. 지금의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뜻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면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문도 찾을 수 없고, 길도 찾을 수 없고, 평안도 행복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8:7절에서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생명의 길, 행복의 길을 찾는다면 생각의 틀을 바꾸어야 합니다. 즉 생각의 틀을 예수님께 맞추어야 합니다.
** 먼저, 본문을 다시 살펴봅시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 하나님의 나라로 가셔야 할 것을 아시고 제자들에게 장차 이루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한 제자들이 염려에 휩싸였습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예수님이 세상에서 권세를 잡으시고 독립된 나라를 이루실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하시면서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게 될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도마가 대뜸 끼어들었습니다. “주님, 저희는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너희가 나를 알았으니 나의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알게 되었다. 아니 이미 뵈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빌립이 끼어들었습니다. “주님, 저희에게 아버지를 뵙게 하여 주시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답답한 심정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빌립아,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같이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 그런데도 아버지를 뵙게 해 달라니 무슨 말이냐? 너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믿지 않느냐?”
여러분, 꼭 동문서답(東問西答)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이처럼 생각이 다르면 하나님과 교통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생명의 길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믿음이 없는 것이 아니라 생각의 틀이 달랐습니다. 제자들은 세상 적인 사상에 젖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영적인 일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믿음을 갖기를 소망하셨고, 제자들에게 구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왜냐하면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영적인 일들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고 약속하십니다. 여러분도 자신의 삶의 길을 찾고 싶지 않습니까? 영원한 생명의 길을 찾고 싶지요? 그렇다면 생각의 틀을 바꾸어야 합니다.
** 의식의 틀을 바꾸어야 생명의 길이 보입니다.
제자들은 율법적인 의식의 틀에 습관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생각의 틀에 맞는 형식을 원했습니다. 즉 지금까지의 율법적 신앙은 눈에 보이게 제물을 드려서 예배를 하고, 방법도 분명히 가르치고, 이럴 때는 이렇게 해라 등. 눈에 보이는 감각에 의존하는 신앙이었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삶의 길은 알지를 못했습니다.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하고 있었지만, 하나님을 알지 못했고 하나님께로 가는 길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만든 종교의 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1:1절에서,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라고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 이것도 자신들이 가지 율법적인 의식의 틀에 새 신앙을 맞추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의 틀을 바꾸게 하시려고 비유의 말씀으로 가르치셨습니다. 누가복음 5:37-38절을 봅시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되리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이 말씀에서 낡은 부대는 율법이며, 새 포도주는 복음입니다. 이 말씀을 이해해야 생각의 틀을 바꿀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바꾸어야 했던 것은 그들이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사고방식입니다. 그들은 율법적이고 세상적인 지식과 틀에 길들어 있었습니다. 오늘의 우리도 세상적인 지식의 틀과 자신이 경험한 사상의 틀에 길들어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적인 패러다임은 자신들끼리도 충돌을 합니다. 그래서 서로 자신의 사상과 생각을 고집하면서 사상적인 싸움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세상적인 사상의 틀을 그대로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이상한 신앙의 형태를 띠게 됩니다. 바로 오늘의 교회들의 모습입니다. 이론적으로는 하나님을 경외하지만 실제 생활에서는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21-23절의 모습이 그것입니다.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여러분, 진정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합니까?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 받아 하나님의 자녀로 영원한 삶을 누리고 싶은 소망이 확실합니까? 그렇다면 세상적인 지식과 자신의 경험들로 쌓여진 자신의 생각의 틀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뜻이 이해가 되고,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삶의 등불이 되며 인도자가 될 것입니다. 로마서 8:5-6절을 봅시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고 하십니다. 이어서 13-14절에서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십니다.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육신이 원하는 대로 살면 영원한 죽음 즉 지옥행을 면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지금까지 육신의 생각을 따라 살았던 삶이 세상적인 생각의 틀입니다. 이 틀을 벗어버리고 영의 생각을 따라가야 합니다.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영의 생각이 곧 하나님 나라에 맞는 생각의 틀입니다.
** 생활의 틀을 바꾸어야 생명의 길이 보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3년 동안이나 예수님으로부터 교훈과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예전과 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예전에는 고기 잡는 어부, 혹은 세리, 어떤 조직원들이었지만, 지금은 주님을 따라다니는 제자 공동체라는 것이 다를 뿐이었습니다. 제자들은 많은 것을 보고, 듣고, 체험하고, 배웠지만, 주님과 생활을 나누지는 못했습니다. 생활을 나눈다는 것은 배우고 깨달은 것을 생활에 실천하면서 주님과의 공유면적을 넓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전혀 주님과 삶을 공유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 제자들을 데리시고 산에 오르신 후, 벙어리 귀신들린 아들을 둔 아버지가 남은 제자들에게 와서 아들을 고쳐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홉 제자들은 아무런 일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려오셔서 답답한 현실을 보시면서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하시며 귀신을 내어 쫓으시고 고쳐주셨습니다. 후에 제자들이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막 9:29)고 하셨습니다. 기도란 이론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왜냐하면 기도를 통하여 성령께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배들의 항로를 단축시키기 위하여 내륙에 뱃길을 열어놓은 것이 ‘운하’입니다. 운하 중에는 바다와 수면의 높이가 다른 곳이 있습니다. 수면의 높이가 다르면 배가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운하와 바다의 수면을 맞추기 위하여 바다와 운하 사이에 큰 도크를 만들고 수문을 만듭니다. 수면이 낮은 쪽에서 배가 도크로 들어옵니다. 배가 완전히 들어오면 낮은 쪽의 수문을 닫고 수면이 높은 쪽의 수문을 조금씩 열어서 도크와 수면이 같아지게 합니다. 수면이 같아지면 수문을 완전히 열고 배가 운하로 전진하게 됩니다.
예수님과 성도 사이에 영적인 수면의 차이가 생기면 제자로서의 삶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함께 하는 생활을 통하여 제자들에게 많은 교훈과 체험을 갖도록 배려하셨습니다. 이는 주님과 성도의 영적인 공유면적을 넓히기 위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더디 깨닫는 제자들의 영적인 공유면적을 넓히기 위하여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까지 본을 보이셨습니다. 요한복음 13:15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고 모범을 보이신 목적을 말씀하셨습니다. 실천하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합니까?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기”때문입니다.
옛말에도 “그림 속의 떡”이라고 했습니다. 그림 속에 있는 떡이 아무리 먹음직스럽고 많아도 굶주린 배를 채워주지는 못합니다. 여러분의 신앙적인 지식이 아무리 많고 성경을 다 외운다고 해도 깨닫고 믿은 것을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3:3절에서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생각이 바뀌지 않고, 삶이 바뀌지 않으면 설령 자신의 생명을 내놓는다고 해도 생명의 길을 보이지 않습니다.
이제 곧 2009년의 성탄절을 맞이하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흥겨워하는 크리스마스와 구별된 성탄절이 되려면, 생각의 틀을 바꾸어야 합니다. 그래서 대림절이 있습니다. 2010년을 맞이하기 전, 이 성탄의 계절에 우리 생각의 틀, 생활의 틀을 바꾸고 부끄럽지 않는 하나님의 자녀의 삶을 회복합시다. 아직도 깨달음이 없고, 결심이 서지 않는다면, 혹 그 방법을 알지 못한다면 기도하십시오.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고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결코 사탄의 세력을 이길 수 없음도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요한복음 15:5절의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는 말씀대로 주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생명의 길을 끝까지 주님과 함께 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요한복음 14:6-14, “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7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8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9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10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오늘부터 2009년 대림절이 시작됩니다. 대림절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날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절기로서 성탄절 전 4주간을 말합니다. 성도들에게는 매일의 삶이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주님을 따르는 삶입니다. 그러나 대림절 기간은 기다림의 마음과 준비됨을 점검하며 새롭게 하는 시간입니다. 고린도전서 16:22절 후반절에 “…주께서 임하시느니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여러분이 들어 보았을 ‘마라나 타(Our Lord, Come!)’라는 말인데, ‘주께서 임하신다.’ 또는 ‘우리들의 주님, 오시옵소서.’라는 뜻입니다. 또한 요한계시록 22:20절에서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했는데, 이 말씀은 계시록에서 증거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말씀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 오시옵소서.’라는 고백입니다. 여러분은 지금이라도 ‘예수님 오시옵소서!’라고 자신 있게 고백할 수 있도록 예수님의 재림을 고대하고 있습니까? 이러한 고백을 할 수 있다면 자신 있게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이겠지요!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자신 있게 고백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성도들은 하루 종일 혹은 일주일 내내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생각을 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매일의 삶이 판에 박힌 듯이 또는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짜인 틀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가급적이면 이 틀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합니다. 때때로 그 삶의 틀에서 벗어나게 되면 ‘우째 이런 일이!’라며 당황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의 제자인 ‘도마’ 나 ‘빌립’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신의 삶의 틀, 생각의 틀을 벗어난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도마는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라고 했으며, 빌립은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수님께서는 영적인 길을 말씀하시는데, 제자들은 세상의 길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패러다임(paradigm, 이론적인 틀, 생각의 틀)이 달랐습니다. 생각이 다르면 길도 다릅니다. 요한복음 3장에 나오는 ‘니고데모’도 그러했습니다. 예수님은 ‘영적인 거듭남’을 말씀하시는데, 니고데모는 ‘육신적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4장의 ‘수가 성의 여인’도 그러했습니다. 예수님은 영적인 생수 즉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말했지만, 수가 성의 여인은 우물에서 깃는 물을 생각했습니다. 지금의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뜻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면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문도 찾을 수 없고, 길도 찾을 수 없고, 평안도 행복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8:7절에서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생명의 길, 행복의 길을 찾는다면 생각의 틀을 바꾸어야 합니다. 즉 생각의 틀을 예수님께 맞추어야 합니다.
** 먼저, 본문을 다시 살펴봅시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 하나님의 나라로 가셔야 할 것을 아시고 제자들에게 장차 이루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한 제자들이 염려에 휩싸였습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예수님이 세상에서 권세를 잡으시고 독립된 나라를 이루실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하시면서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게 될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도마가 대뜸 끼어들었습니다. “주님, 저희는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너희가 나를 알았으니 나의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알게 되었다. 아니 이미 뵈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빌립이 끼어들었습니다. “주님, 저희에게 아버지를 뵙게 하여 주시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답답한 심정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빌립아,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같이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 그런데도 아버지를 뵙게 해 달라니 무슨 말이냐? 너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믿지 않느냐?”
여러분, 꼭 동문서답(東問西答)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이처럼 생각이 다르면 하나님과 교통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생명의 길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믿음이 없는 것이 아니라 생각의 틀이 달랐습니다. 제자들은 세상 적인 사상에 젖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영적인 일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믿음을 갖기를 소망하셨고, 제자들에게 구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왜냐하면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영적인 일들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고 약속하십니다. 여러분도 자신의 삶의 길을 찾고 싶지 않습니까? 영원한 생명의 길을 찾고 싶지요? 그렇다면 생각의 틀을 바꾸어야 합니다.
** 의식의 틀을 바꾸어야 생명의 길이 보입니다.
제자들은 율법적인 의식의 틀에 습관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생각의 틀에 맞는 형식을 원했습니다. 즉 지금까지의 율법적 신앙은 눈에 보이게 제물을 드려서 예배를 하고, 방법도 분명히 가르치고, 이럴 때는 이렇게 해라 등. 눈에 보이는 감각에 의존하는 신앙이었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삶의 길은 알지를 못했습니다.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하고 있었지만, 하나님을 알지 못했고 하나님께로 가는 길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만든 종교의 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1:1절에서,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라고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 이것도 자신들이 가지 율법적인 의식의 틀에 새 신앙을 맞추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의 틀을 바꾸게 하시려고 비유의 말씀으로 가르치셨습니다. 누가복음 5:37-38절을 봅시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되리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이 말씀에서 낡은 부대는 율법이며, 새 포도주는 복음입니다. 이 말씀을 이해해야 생각의 틀을 바꿀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바꾸어야 했던 것은 그들이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사고방식입니다. 그들은 율법적이고 세상적인 지식과 틀에 길들어 있었습니다. 오늘의 우리도 세상적인 지식의 틀과 자신이 경험한 사상의 틀에 길들어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적인 패러다임은 자신들끼리도 충돌을 합니다. 그래서 서로 자신의 사상과 생각을 고집하면서 사상적인 싸움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세상적인 사상의 틀을 그대로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이상한 신앙의 형태를 띠게 됩니다. 바로 오늘의 교회들의 모습입니다. 이론적으로는 하나님을 경외하지만 실제 생활에서는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21-23절의 모습이 그것입니다.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여러분, 진정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합니까?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 받아 하나님의 자녀로 영원한 삶을 누리고 싶은 소망이 확실합니까? 그렇다면 세상적인 지식과 자신의 경험들로 쌓여진 자신의 생각의 틀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뜻이 이해가 되고,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삶의 등불이 되며 인도자가 될 것입니다. 로마서 8:5-6절을 봅시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고 하십니다. 이어서 13-14절에서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십니다.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육신이 원하는 대로 살면 영원한 죽음 즉 지옥행을 면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지금까지 육신의 생각을 따라 살았던 삶이 세상적인 생각의 틀입니다. 이 틀을 벗어버리고 영의 생각을 따라가야 합니다.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영의 생각이 곧 하나님 나라에 맞는 생각의 틀입니다.
** 생활의 틀을 바꾸어야 생명의 길이 보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3년 동안이나 예수님으로부터 교훈과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예전과 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예전에는 고기 잡는 어부, 혹은 세리, 어떤 조직원들이었지만, 지금은 주님을 따라다니는 제자 공동체라는 것이 다를 뿐이었습니다. 제자들은 많은 것을 보고, 듣고, 체험하고, 배웠지만, 주님과 생활을 나누지는 못했습니다. 생활을 나눈다는 것은 배우고 깨달은 것을 생활에 실천하면서 주님과의 공유면적을 넓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전혀 주님과 삶을 공유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 제자들을 데리시고 산에 오르신 후, 벙어리 귀신들린 아들을 둔 아버지가 남은 제자들에게 와서 아들을 고쳐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홉 제자들은 아무런 일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려오셔서 답답한 현실을 보시면서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하시며 귀신을 내어 쫓으시고 고쳐주셨습니다. 후에 제자들이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막 9:29)고 하셨습니다. 기도란 이론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왜냐하면 기도를 통하여 성령께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배들의 항로를 단축시키기 위하여 내륙에 뱃길을 열어놓은 것이 ‘운하’입니다. 운하 중에는 바다와 수면의 높이가 다른 곳이 있습니다. 수면의 높이가 다르면 배가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운하와 바다의 수면을 맞추기 위하여 바다와 운하 사이에 큰 도크를 만들고 수문을 만듭니다. 수면이 낮은 쪽에서 배가 도크로 들어옵니다. 배가 완전히 들어오면 낮은 쪽의 수문을 닫고 수면이 높은 쪽의 수문을 조금씩 열어서 도크와 수면이 같아지게 합니다. 수면이 같아지면 수문을 완전히 열고 배가 운하로 전진하게 됩니다.
예수님과 성도 사이에 영적인 수면의 차이가 생기면 제자로서의 삶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함께 하는 생활을 통하여 제자들에게 많은 교훈과 체험을 갖도록 배려하셨습니다. 이는 주님과 성도의 영적인 공유면적을 넓히기 위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더디 깨닫는 제자들의 영적인 공유면적을 넓히기 위하여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까지 본을 보이셨습니다. 요한복음 13:15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고 모범을 보이신 목적을 말씀하셨습니다. 실천하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합니까?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기”때문입니다.
옛말에도 “그림 속의 떡”이라고 했습니다. 그림 속에 있는 떡이 아무리 먹음직스럽고 많아도 굶주린 배를 채워주지는 못합니다. 여러분의 신앙적인 지식이 아무리 많고 성경을 다 외운다고 해도 깨닫고 믿은 것을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3:3절에서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생각이 바뀌지 않고, 삶이 바뀌지 않으면 설령 자신의 생명을 내놓는다고 해도 생명의 길을 보이지 않습니다.
이제 곧 2009년의 성탄절을 맞이하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흥겨워하는 크리스마스와 구별된 성탄절이 되려면, 생각의 틀을 바꾸어야 합니다. 그래서 대림절이 있습니다. 2010년을 맞이하기 전, 이 성탄의 계절에 우리 생각의 틀, 생활의 틀을 바꾸고 부끄럽지 않는 하나님의 자녀의 삶을 회복합시다. 아직도 깨달음이 없고, 결심이 서지 않는다면, 혹 그 방법을 알지 못한다면 기도하십시오.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고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결코 사탄의 세력을 이길 수 없음도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요한복음 15:5절의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는 말씀대로 주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생명의 길을 끝까지 주님과 함께 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