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원이 다른 성도의 삶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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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0-07-15 12:49
*** 차원이 다른 성도의 삶 / 요한복음 6:5-15
** 들어가는 말
요한복음 6:5-15, “5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 6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7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8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9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시니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가 오천 명쯤 되더라. 11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12 그들이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13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 두 바구니에 찼더라. 14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15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꼭 일 년 전에 오병이어 이적의 서론 부분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는 법’이라는 말씀을 전한 적이 있습니다. 이 시간에는 ‘생각과 삶의 차원’에 중심을 두고 말씀을 살펴보려 합니다. 생각과 삶의 차원이란 쉽게 말해서 각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길이라고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생각과 삶의 길이 있습니다. 같을 수도 있지만 전혀 다를 수도 있습니다. 특히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사람들과 믿지 않는 사람들의 길은 ‘조금 다른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것’입니다. 물론 밥을 먹고 일을 하고 자녀를 양육하는 등의 육신이 살아가는 생활이 다른 것은 아닙니다. 같은 일을 하더라도 목적과 추구하는 방식이 전혀 다른 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이나 사람에 대한 관심도 세상 사람들의 관심과는 전혀 다릅니다. 예를 들면,
‘월리엄 제임스’라는 심리학자의 글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러시아 상류사회의 어떤 귀부인이 극장에 오페라를 관람하러 갔습니다. 그런데 그 오페라에 나오는 주인공이 너무도 비참한 죽음을 당하는 운명을 보고 한없이 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시간, 그 극장 밖에서는 그 귀부인의 마차부가 추위와 배고픔으로 떨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작은 예에 불과하지만 세상에는 이와 같은 일들이 생활화 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삶의 모습은 ‘자기 주도적’이며, ‘자기중심적’인 삶의 자세입니다. 쉽게 말해서 ‘자신에게 이익이 되고, 자신이 즐겁고, 자신이 만족하는 생활’을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세상이 이렇게 변해 가고 있습니다. 핵가족화 현상이라든지, 아이를 적게 낳는다든지, 독신이 늘어가는 현상이나, 화합이나 연합하는 일들이 어려워지는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마저 이런 사회 현상에 자연스럽게 적응해 가고 있습니다. 이것을 교회의 세속화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렇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10:24절에서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 하셨고, 하나님께서는 구약과 신약 모두에서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세상과는 차원이 다른 삶을 살라는 명령이십니다. 지금 우리의 입장은 현실을 무시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는 현실과 하나님의 말씀 사이에서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겠습니까?
※ 먼저 본문의 의미를 살펴봅시다.
본문의 내용은 더 설명이 필요 없도록 잘 알려진 ‘오천 명을 먹이신 이적’입니다. 이 이적은 네 복음서 모두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요한복음에서는 이적의 의미를 부여하는 예수님의 설교가 뒤따르기 때문에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한은 이 설교를 통하여 예수님께서 어느 시대에나 동일하게 이러한 역사를 이루시며, 지금 이 말씀을 대하는 사람들에게도 역사하심을 나타내고자 했습니다. 그 말씀의 내용은 “생명의 떡”에 관한 것입니다. 이 표적을 기록한 이유는 어느 날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오병 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셨다는 단순한 사실을 전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언제, 어디서나 사람의 영과 육의 삶을 풍성하게 하실 수 있다는 진리를 전하려는 것입니다. 35절에서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하신 말씀에서 분명하게 증거하십니다.
주님께서 이 표적을 행하신 것은 지금 우리에 대한 주님의 관심이 어떠한 것임을 보여주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성도들의 생활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도 가난한 자, 병든 자, 소외된 자, 약한 자 그리고 자신의 문제를 알고 겸손하게 내어 놓는 자들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친히 그들을 고치시고 채우시고 긍휼히 여기시고 돌보셨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관심은 세월이 흐르고 문화와 생활이 변한다 할지라도 변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의 관심이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주님을 따르는 성도의 관심과 가치관과 생활도 같은 차원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는 현실과 하나님의 말씀 사이에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말씀 속에서 찾아봅시다.
※ 주님의 관심과 우리의 관심을 비교해 봅시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보여주는 외적인 목적은 ‘인생의 육신적 필요를 채우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진리와 복음을 전하는 것에만 관심을 두신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듣는 무리들이 피곤과 굶주림에 지쳐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마태복음의 기록에서는 그 사실을 자세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5:32절에서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고 하십니다. 어떤 성도들은 기독교가 마치 인간의 영혼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람이 육신이 있음과 그 육신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모인 수천 명의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이 소작인들이거나, 주인을 모시고 있는 일군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먼 길을 가야만 집에 당도할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굶주리고 지쳐 있는 이들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육신의 음식임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현실적인 필요를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관점에서 본다면 육신의 필요를 채우는 것도 성도에게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구제’는 구약시대부터 하나님의 백성들이 힘써야 할 일로 가르치셨습니다. 신명기 15:9-11절에서 “삼가 너는 마음에 악한 생각을 품지 말라. 곧 이르기를 ‘일곱째 해 면제년이 가까이 왔다’ 하고 네 궁핍한 형제를 악한 눈으로 바라보며 아무것도 주지 아니하면,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리니 네게 죄가 되리라. 너는 반드시 그에게 줄 것이요. 줄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과 네 손이 닿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고 하셨고, 누가복음 12:33절에서는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곧 하늘에 둔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적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인간의 육신을 돌보셨음을 생각하면, 어떤 일이든지 다른 사람을 돕는 일은 그리스도를 위한 일이 됩니다. 이 일은 주일(안식일)에도 허용될 만큼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일(눅 6:9)입니다.
구세군의 창시자인 ‘윌리엄 부스’(W. Booth) 장군이 런던에서 구세군의 일을 시작했을 때의 일입니다. 부스는 어려운 사람들에게 따뜻한 음식을 제공했습니다. 그 일을 두고 어떤 사람들이 비난을 했습니다. “그런 일은 인간의 영혼을 그리스도께 인도할 책임을 맡은 사람이 해야 할 일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부스는 이에 대하여, “발에 동상이 걸려 썩어 가고 있는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사랑만으로 따뜻하게 해줄 수 있다는 말인가?”라고 반문했습니다(약2:15-17).
‘지스문트 겟치’라는 화가의 작품 중에, ‘버림받은 예수’란 그림이 있습니다.
‘성 바울 대성전’의 계단에 예수님이 서 있습니다. 그 주변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스포츠 신문에 열중한 청년, 휴가 여행을 위하여 택시를 잡으려는 남녀, 길을 가면서도 시험관을 들여다보고 있는 과학자, 그러나 아무도 예수님이 거기에 서 있다는 사실에 관심을 둔 사람은 없습니다. 신부 서너 명이 둘러서서 팔을 휘두르며 열렬히 토론하고 있지만 역시 예수님에게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한사람, 간호원 제복을 입은 여성만이 잠깐 멈추어 곁눈으로 예수님을 보는 장면입니다.
이 두 이야기는 분명 현대의 기독교인들에게 깊은 의미를 주고 있습니다. 부스 장군의 반문 속에는 현대 그리스도인의 균형 잃은 관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버림받은 예수’의 그림은 신앙의 본질을 상실한 현대 기독교인들의 신앙의 현주소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정말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는가? 나는 생활 속에서 예수님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는가?”라고 말입니다. 직장의 일 때문에 주일 예배에 참석하지 않는다면 예수님은 세상 일 보다 비중이 낮은 것입니다. 비단 직장뿐만 아니라, 모든 일에 있어서 그러합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킬 것인가?’아니면 ‘몇 십만 원을 벌 것인가?’ 그런 선택에서 어느 정도까지 양보할 수 있을까? 혹시 몇 만 원을 벌기 위하여 예수님을 외면하는 것은 아닌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주님이 내 생활에 관심을 가지시듯이 나도 주님의 관심에 응답하고 순종하는 것이 세상과 다른 차원의 삶입니다.
주님은 생활의 관심뿐만 아니라 성도의 마음 씀씀이에도 관심을 가지십니다.
주님은 어느 날 예배가 있는 성전의 입구에서 사람들이 헌금을 넣는 모습을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어떤 부자는 금화를 넣었고, 많은 사람들이 나름대로의 헌금을 함에 넣었습니다. 그 중에 가난한 과부가 드린 엽전 두 닢도 들어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 날 가장 많은 헌금을 넣은 사람으로 엽전 두 닢을 넣은 가난한 과부를 꼽으셨습니다. 금화와 엽전 두 닢이 비교가 됩니까? 주님이 보신 것은 물질의 양의 아니라, 드리는 이의 마음과 자세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소유가 어떠한 것이든지 그것으로 뜻하신 바를 위해 사용하실 수 있으십니다.
어린아이의 작은 소풍 도시락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삶은 계란만한 보리떡은 가장 맛없는 음식이었고 가난한 사람들의 음식이었습니다. 작은 물고기 두 마리 역시 호숫가 사람들의 볼품없는 반찬이었습니다. 그러나 소년이 그 도시락을 내놓았을 때 그것은 예수님의 기적을 일으키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긴 가뭄으로 양식이 고갈되어 죽음을 기다리는 ‘사르밧 과부’에게는 밀가루 한 줌과 병 바닥에 고인 약간의 기름은 자신의 마지막 생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에게 내놓았을 때, 삼년을 먹을 수 있는 기적의 도구가 되었습니다(왕상17:10-16).
이들이 내 놓은 것은 결코 큰 것도 아니며 좋은 것도 아니며 많은 양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 씀씀이를 아셨습니다.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이지만 자신의 소중한 것을 아낌없이 내놓은 그들의 마음을 보셨습니다. 그 작은 것들이 천국의 기적을 불러왔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보잘 것 없는 재능, 극히 적은 물질이라 할지라도 있는 것을 아낌없이, 감사함으로 내놓는 것을 기뻐하시며, 바로 그것을 기적의 도구로 삼으십니다. 뿐만 아니라 기술자, 권력자, 부자 등. 특별한 사람을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일이라 할지라도 열심과 성실로 감당하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역대하 16:9상반절에서,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라고 하시며, 고린도후서 8:12절에서는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을 받지 아니하시리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주님의 관심에 호응하여 기쁨으로 드리고 순종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며, 이것이 세상 사람과는 차원이 다른 성도의 삶입니다.
주님은 자신을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참된 양식이며 참된 음료’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오병이어의 이적을 경험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억지로 임금으로 추대하려는 모습을 보시고 그들에게 깨닫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들은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보고 예수님을 선지자라고 불렀습니다. 세상을 따르는 사람들은 육신의 음식과 평안을 추구합니다. 이것이 육신 차원의 삶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영원한 생명을 위한 예수님 자신을 소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을 추구하고 따르는 것이 세상과는 차원이 다른 성도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차원의 삶에 관심을 가지고 따라가고 있습니까? 지금 당장 눈앞의 즐거움과 이익을 위하여 영원한 생명의 삶을 버리시겠습니까? 지금 눈앞의 이익을 따르면 지금은 좋을지 모르겠지만 결국은 육신과 영의 모든 생명을 잃게 됩니다. 지금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관심에 우리의 관심을 맞추고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차원 높은 삶을 추구합시다. 그리하여 지금 우리의 삶에 관심을 가지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영원한 생명의 복을 저축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 들어가는 말
요한복음 6:5-15, “5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 6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7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8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9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시니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가 오천 명쯤 되더라. 11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12 그들이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13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 두 바구니에 찼더라. 14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15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꼭 일 년 전에 오병이어 이적의 서론 부분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는 법’이라는 말씀을 전한 적이 있습니다. 이 시간에는 ‘생각과 삶의 차원’에 중심을 두고 말씀을 살펴보려 합니다. 생각과 삶의 차원이란 쉽게 말해서 각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길이라고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생각과 삶의 길이 있습니다. 같을 수도 있지만 전혀 다를 수도 있습니다. 특히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사람들과 믿지 않는 사람들의 길은 ‘조금 다른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것’입니다. 물론 밥을 먹고 일을 하고 자녀를 양육하는 등의 육신이 살아가는 생활이 다른 것은 아닙니다. 같은 일을 하더라도 목적과 추구하는 방식이 전혀 다른 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이나 사람에 대한 관심도 세상 사람들의 관심과는 전혀 다릅니다. 예를 들면,
‘월리엄 제임스’라는 심리학자의 글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러시아 상류사회의 어떤 귀부인이 극장에 오페라를 관람하러 갔습니다. 그런데 그 오페라에 나오는 주인공이 너무도 비참한 죽음을 당하는 운명을 보고 한없이 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시간, 그 극장 밖에서는 그 귀부인의 마차부가 추위와 배고픔으로 떨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작은 예에 불과하지만 세상에는 이와 같은 일들이 생활화 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삶의 모습은 ‘자기 주도적’이며, ‘자기중심적’인 삶의 자세입니다. 쉽게 말해서 ‘자신에게 이익이 되고, 자신이 즐겁고, 자신이 만족하는 생활’을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세상이 이렇게 변해 가고 있습니다. 핵가족화 현상이라든지, 아이를 적게 낳는다든지, 독신이 늘어가는 현상이나, 화합이나 연합하는 일들이 어려워지는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마저 이런 사회 현상에 자연스럽게 적응해 가고 있습니다. 이것을 교회의 세속화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렇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10:24절에서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 하셨고, 하나님께서는 구약과 신약 모두에서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세상과는 차원이 다른 삶을 살라는 명령이십니다. 지금 우리의 입장은 현실을 무시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는 현실과 하나님의 말씀 사이에서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겠습니까?
※ 먼저 본문의 의미를 살펴봅시다.
본문의 내용은 더 설명이 필요 없도록 잘 알려진 ‘오천 명을 먹이신 이적’입니다. 이 이적은 네 복음서 모두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요한복음에서는 이적의 의미를 부여하는 예수님의 설교가 뒤따르기 때문에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한은 이 설교를 통하여 예수님께서 어느 시대에나 동일하게 이러한 역사를 이루시며, 지금 이 말씀을 대하는 사람들에게도 역사하심을 나타내고자 했습니다. 그 말씀의 내용은 “생명의 떡”에 관한 것입니다. 이 표적을 기록한 이유는 어느 날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오병 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셨다는 단순한 사실을 전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언제, 어디서나 사람의 영과 육의 삶을 풍성하게 하실 수 있다는 진리를 전하려는 것입니다. 35절에서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하신 말씀에서 분명하게 증거하십니다.
주님께서 이 표적을 행하신 것은 지금 우리에 대한 주님의 관심이 어떠한 것임을 보여주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성도들의 생활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도 가난한 자, 병든 자, 소외된 자, 약한 자 그리고 자신의 문제를 알고 겸손하게 내어 놓는 자들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친히 그들을 고치시고 채우시고 긍휼히 여기시고 돌보셨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관심은 세월이 흐르고 문화와 생활이 변한다 할지라도 변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의 관심이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주님을 따르는 성도의 관심과 가치관과 생활도 같은 차원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는 현실과 하나님의 말씀 사이에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말씀 속에서 찾아봅시다.
※ 주님의 관심과 우리의 관심을 비교해 봅시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보여주는 외적인 목적은 ‘인생의 육신적 필요를 채우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진리와 복음을 전하는 것에만 관심을 두신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듣는 무리들이 피곤과 굶주림에 지쳐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마태복음의 기록에서는 그 사실을 자세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5:32절에서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고 하십니다. 어떤 성도들은 기독교가 마치 인간의 영혼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람이 육신이 있음과 그 육신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모인 수천 명의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이 소작인들이거나, 주인을 모시고 있는 일군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먼 길을 가야만 집에 당도할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굶주리고 지쳐 있는 이들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육신의 음식임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현실적인 필요를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관점에서 본다면 육신의 필요를 채우는 것도 성도에게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구제’는 구약시대부터 하나님의 백성들이 힘써야 할 일로 가르치셨습니다. 신명기 15:9-11절에서 “삼가 너는 마음에 악한 생각을 품지 말라. 곧 이르기를 ‘일곱째 해 면제년이 가까이 왔다’ 하고 네 궁핍한 형제를 악한 눈으로 바라보며 아무것도 주지 아니하면,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리니 네게 죄가 되리라. 너는 반드시 그에게 줄 것이요. 줄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과 네 손이 닿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고 하셨고, 누가복음 12:33절에서는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곧 하늘에 둔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적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인간의 육신을 돌보셨음을 생각하면, 어떤 일이든지 다른 사람을 돕는 일은 그리스도를 위한 일이 됩니다. 이 일은 주일(안식일)에도 허용될 만큼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일(눅 6:9)입니다.
구세군의 창시자인 ‘윌리엄 부스’(W. Booth) 장군이 런던에서 구세군의 일을 시작했을 때의 일입니다. 부스는 어려운 사람들에게 따뜻한 음식을 제공했습니다. 그 일을 두고 어떤 사람들이 비난을 했습니다. “그런 일은 인간의 영혼을 그리스도께 인도할 책임을 맡은 사람이 해야 할 일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부스는 이에 대하여, “발에 동상이 걸려 썩어 가고 있는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사랑만으로 따뜻하게 해줄 수 있다는 말인가?”라고 반문했습니다(약2:15-17).
‘지스문트 겟치’라는 화가의 작품 중에, ‘버림받은 예수’란 그림이 있습니다.
‘성 바울 대성전’의 계단에 예수님이 서 있습니다. 그 주변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스포츠 신문에 열중한 청년, 휴가 여행을 위하여 택시를 잡으려는 남녀, 길을 가면서도 시험관을 들여다보고 있는 과학자, 그러나 아무도 예수님이 거기에 서 있다는 사실에 관심을 둔 사람은 없습니다. 신부 서너 명이 둘러서서 팔을 휘두르며 열렬히 토론하고 있지만 역시 예수님에게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한사람, 간호원 제복을 입은 여성만이 잠깐 멈추어 곁눈으로 예수님을 보는 장면입니다.
이 두 이야기는 분명 현대의 기독교인들에게 깊은 의미를 주고 있습니다. 부스 장군의 반문 속에는 현대 그리스도인의 균형 잃은 관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버림받은 예수’의 그림은 신앙의 본질을 상실한 현대 기독교인들의 신앙의 현주소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정말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는가? 나는 생활 속에서 예수님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는가?”라고 말입니다. 직장의 일 때문에 주일 예배에 참석하지 않는다면 예수님은 세상 일 보다 비중이 낮은 것입니다. 비단 직장뿐만 아니라, 모든 일에 있어서 그러합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킬 것인가?’아니면 ‘몇 십만 원을 벌 것인가?’ 그런 선택에서 어느 정도까지 양보할 수 있을까? 혹시 몇 만 원을 벌기 위하여 예수님을 외면하는 것은 아닌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주님이 내 생활에 관심을 가지시듯이 나도 주님의 관심에 응답하고 순종하는 것이 세상과 다른 차원의 삶입니다.
주님은 생활의 관심뿐만 아니라 성도의 마음 씀씀이에도 관심을 가지십니다.
주님은 어느 날 예배가 있는 성전의 입구에서 사람들이 헌금을 넣는 모습을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어떤 부자는 금화를 넣었고, 많은 사람들이 나름대로의 헌금을 함에 넣었습니다. 그 중에 가난한 과부가 드린 엽전 두 닢도 들어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 날 가장 많은 헌금을 넣은 사람으로 엽전 두 닢을 넣은 가난한 과부를 꼽으셨습니다. 금화와 엽전 두 닢이 비교가 됩니까? 주님이 보신 것은 물질의 양의 아니라, 드리는 이의 마음과 자세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소유가 어떠한 것이든지 그것으로 뜻하신 바를 위해 사용하실 수 있으십니다.
어린아이의 작은 소풍 도시락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삶은 계란만한 보리떡은 가장 맛없는 음식이었고 가난한 사람들의 음식이었습니다. 작은 물고기 두 마리 역시 호숫가 사람들의 볼품없는 반찬이었습니다. 그러나 소년이 그 도시락을 내놓았을 때 그것은 예수님의 기적을 일으키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긴 가뭄으로 양식이 고갈되어 죽음을 기다리는 ‘사르밧 과부’에게는 밀가루 한 줌과 병 바닥에 고인 약간의 기름은 자신의 마지막 생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에게 내놓았을 때, 삼년을 먹을 수 있는 기적의 도구가 되었습니다(왕상17:10-16).
이들이 내 놓은 것은 결코 큰 것도 아니며 좋은 것도 아니며 많은 양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 씀씀이를 아셨습니다.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이지만 자신의 소중한 것을 아낌없이 내놓은 그들의 마음을 보셨습니다. 그 작은 것들이 천국의 기적을 불러왔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보잘 것 없는 재능, 극히 적은 물질이라 할지라도 있는 것을 아낌없이, 감사함으로 내놓는 것을 기뻐하시며, 바로 그것을 기적의 도구로 삼으십니다. 뿐만 아니라 기술자, 권력자, 부자 등. 특별한 사람을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일이라 할지라도 열심과 성실로 감당하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역대하 16:9상반절에서,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라고 하시며, 고린도후서 8:12절에서는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을 받지 아니하시리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주님의 관심에 호응하여 기쁨으로 드리고 순종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며, 이것이 세상 사람과는 차원이 다른 성도의 삶입니다.
주님은 자신을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참된 양식이며 참된 음료’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오병이어의 이적을 경험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억지로 임금으로 추대하려는 모습을 보시고 그들에게 깨닫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들은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보고 예수님을 선지자라고 불렀습니다. 세상을 따르는 사람들은 육신의 음식과 평안을 추구합니다. 이것이 육신 차원의 삶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영원한 생명을 위한 예수님 자신을 소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을 추구하고 따르는 것이 세상과는 차원이 다른 성도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차원의 삶에 관심을 가지고 따라가고 있습니까? 지금 당장 눈앞의 즐거움과 이익을 위하여 영원한 생명의 삶을 버리시겠습니까? 지금 눈앞의 이익을 따르면 지금은 좋을지 모르겠지만 결국은 육신과 영의 모든 생명을 잃게 됩니다. 지금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관심에 우리의 관심을 맞추고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차원 높은 삶을 추구합시다. 그리하여 지금 우리의 삶에 관심을 가지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영원한 생명의 복을 저축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