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 장로회
설교모음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

작성자 배의신 댓글 / 조회: 6,044회 작성일 2010-07-06 14:33
***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 / 요한일서 4:16-21

** 들어가는 말

요한일서 4:16-21, “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17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21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이 말씀은 2009년을 시작하면서 우리교회가 선언한 영구 표어이자 행동강령의 말씀으로 전한 바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2009년에 그리스도인이 이를 수 있는 최고의 경지인 ‘사랑의 삶’을 살려고 결심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더 설명이 필요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에게 최고의 은사이며, 그리스도인임을 나타내는 증표이며,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요한복음 15:12절에서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고 하십니다. 이는 요청도 부탁도 아니라 명령입니다. 즉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이라면 당연히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먼저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스스로 죽음을 자초한 인간들을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속죄의 제물로 보내시는 것으로 나타내셨습니다. 본문 앞쪽의 9-10절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고 증거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된 우리가 반드시 이루어야 할 것은 ‘사랑’입니다.

오늘은 맥추감사주일로 지키면서 사랑의 삶을 증거하는 이유는 맥추감사절을 명하신 하나님의 뜻이 사랑에 있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16:10-11절을 봅시다.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칠칠절을 지키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 11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있는 레위인과 및 너희 중에 있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지니라.” 이 말씀에서 맥추감사절을 지키는 요점이 들어 있습니다. 첫째는 자신의 힘대로 자원하는 예물입니다. 이는 베푸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노비와 성중에 있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라는 말씀인데, 이 말씀이 서로 돌아보고 사랑을 나누는 삶을 말합니다. 셋째는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하라.”는 말씀으로, 이는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행하셨다는 믿음이 표현이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참된 맥추감사절을 지키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이번 감사절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은 우리가 받은 사랑과 은혜를 나누 고 행하는 삶을 증거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사랑의 삶을 증거하는 또 한 가지 이유는 지금 우리의 세대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4:12절에서 말세에는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사람들이 자기 뜻과 욕심대로 살면서, 서로 불편해 하고 미워하고 무관심하게 변하고 있습니다. 교회마저 함께 예배하고 행사에 참여하는 것 외에는 서로 무관심하고 자기 뜻에 맞지 않으면 외면하고 미워하는 일이 여사로 행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끝까지 지켜가야 하는 것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라는 사실을 모두 알고 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는 고린도전서 13장을 통하여 ‘사랑으로 행하지 않는 어떤 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6:14절에서도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사실 한 가지 더, 본문 17절에서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라고 하신 대로, 심판의 날에 두려운 없이 주님 앞에 설 수 있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에게는 그 어떤 것보다 가장 필요한 것이 사랑의 삶입니다.

※ 지금 세상은 사랑을 찾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만족하게 해 줄 사랑을 찾고 있습니다. 어린아이도 청년도 어른들도 노인들도 모두 사랑 고픈 사람들입니다. 사랑이 없는 삶은 인조인간처럼 기계적인 삶이 될 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랑을 찾아다닙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완전한 사랑도 만족한 사랑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돈을 모으고, 술을 마시고, 육체의 즐거움을 쫓고, 자식에 투자하면서 대리 만족을 하려합니다. 하지만 세상의 어떤 것도 진정한 사랑으로 채워져야 할 빈 자리를 대신 할 것은 없습니다.

설교 후에 부를 찬송인 503장의 원제목은 Do you know the world is dying?입니다. 번역하면, ‘이 세상이 죽어가는 것을 당신은 아십니까?’ 라는 말입니다. 가사 내용을 되새겨 봅시다. “1. 세상 모두 사랑 없어 냉랭함을 아느냐 곳곳마다 사랑 없어 탄식소리 뿐일세. 2. 곳곳마다 번민함은 사랑 없는 연고요 측은하게 손을 펴고 사랑받기 원하네. 3. 어떤 사람 우상 앞에 복을 빌고 있으며 어떤 사람 자연 앞에 사랑 요구하도다. 4. 기갈 중에 있는 영혼 사랑받기 원하며 아이들도 소리 질러 사랑받기 원하네.”

소설가 이동철 씨의 글 중에 ‘어둠의 자식들’이라는 논픽션이 있습니다. 그 소설 중간에 주위의 창녀들 때문에 교회에 지장이 있다고 경찰에 신고하여 창녀들을 쫓아버린 교회 이야기가 나옵니다. 교회 때문에 영업을 못하게 된 한 창녀가 교회에 항의를 합니다. 그 창녀는 술에 잔뜩 취해 알몸으로 교회 철문에 매달려 고함을 지릅니다. “이 자식들아! 우리가 너희보고 밥을 달라고 했니? 떡을 달라고 했니? 내 몸 팔아 내가 먹고 사는데 너희들이 웬 상관이냐? 우리들 다 먹여 살려라.”고 말입니다.

이 창녀의 처절한 몸부림은 사랑을 잃은 사람의 절규이며, 사랑이 메마른 교회에 대한 항의입니다. 예수님께서 계셨던 그 때에도 세리와 창녀, 종들과 병든 자들 등 사회로부터 소외당하여 사랑이 필요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눈먼 자, 문둥병자, 귀신들린 자, 거지 바디매오, 세리장 삭개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 온 여인, 일곱 귀신들렸던 마리아,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만난 창녀, 고아와 과부 등.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귀찮다고, 더럽다고 외면하거나 내쫓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다가가셨고, 정죄보다는 연민의 정과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그들에게 다가가셨고, 품으시고, 고쳐주시고, 먹을 것을 주셨습니다. 진리와 복음만 전하신 것이 아니라 먼저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셨습니다. 인간의 육신의 약함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주님은 그 일을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사랑을 찾는 세상을 사랑으로 품으라고 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시며,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5)고 하십니다. 그리고 본문 20-21절에서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21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당연한데 우리는 이런 사랑을 하기에는 우리 자신들이 너무 메말라 있습니다.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에프스끼’의 작품인 ‘카라마조프의 형제’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귀부인이 교회의 장로님에게로 와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장로님, 나는 전 세계의 문둥병자의 발에 무릎을 꿇고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상처에 입 맞출 정도의 사랑이 마음에 가득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한 밤중 내가 잠자려 하고 있는데, 옆방에서 계속 울어대는 갓난아이가 있으면 나는 그 갓난아이를 목 졸라 죽이고만 싶습니다. 나의 사랑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이 이야기에 나오는 부인과 똑 같은 경험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 부인의 고백에 공감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랑은 분명히 주님이 원하시는 그런 진실한 사랑이 아닙니다. 본문 20절에서 그런 사랑이 거짓 사랑이라고 단정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주님처럼 대가 없이 베푸는 진실한 사랑을 할 수는 없는 것일까요? 물론 우리가 주님처럼 똑 같은 사랑은 할 수 없겠지만 주님의 사랑을 닮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면 주님의 사랑을 닮는 길을 찾아봅시다.

※ 우리 이렇게 해 봅시다.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닮을 수 있는 길은 무엇이겠습니까? 주님의 사랑을 닮을 수 있는 길은 주님의 사랑을 내 속에 충만하게 채우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19절에서처럼 사랑의 시작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내게 채우는 길은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대적하고 미워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이 너무 부담스럽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1954년 인도에서 발견된 소년 ‘라무’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라무’는 약 6년가량 늑대에 의하여 길러졌습니다. 11세 전후에 부모와 극적으로 상봉했지만, 사람을 무서워했고 늑대에게 애착을 표했습니다. 라무는 결국 1968년 한 병원에서 사망했습니다. 사람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소년 라무는 결국 인간사회에 적응할 수 없었습니다.

인간은 혼자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사회적 동물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래서 자라가면서 자신이 태어난 사회나 공동체의 삶의 방식을 배우는‘사회화(socialization)’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사회화 과정을 거치면서 사람은 공동체 속에서 유대관계를 맺어 갑니다. 이 과정에서 사랑을 받는 것과 사랑하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세상의 사랑에 젖게 되면 하나님의 사랑에 적응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세상의 사랑에 만족하지도 못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요한일서 4:8절의 말씀대로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알고 받아들이고 자신의 마음에 채우기 시작하면서부터 사람을 향한 진정한 사랑을 하게 됩니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사랑으로 충만할 때 우리가 서로 사랑할 수 있는 진정한 사랑으로 채워지게 됩니다. 본문 앞 쪽의 10-12절을 봅시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그러면 우리가 할 일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받아들이고 한 걸음씩 가까이 다가가는 것입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 위해서는 그 사랑을 기록한 말씀을 읽고 묵상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깨달은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 사랑에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영의 일은 성령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2:13절에서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고 하십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은 기도로 구할 수 있습니다.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이렇게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기도로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한다 할지라도 하루아침에 하나님의 사랑으로 채워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꾸준하게 마음을 정하고 계속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사랑이 스며들게 됩니다. 마치 콩나물시루에 물을 붓는 것과 같습니다. 물을 붓자마자 금방 물이 다 빠져나가지만 콩나물은 자라는 것과 같습니다. 이 사실을 예수님은 마가복음 4:26-29절에서 ‘자라는 씨 비유’로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이 일을 하다가 속히 되지 않는다고 실망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처음 마음을 잃지 않고 계속하면 됩니다. 갈라디아서 6:9절에서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속에 조금씩 채워지면 다른 사람을 보는 눈이 달라지고, 대하는 마음이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서로를 사랑하는 사랑의 시작입니다. 이처럼 사랑의 눈이 뜨이기 시작하면 행동이 달라지고 생활이 달라지면서 주변에 사람들이 모이게 됩니다. 따뜻함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3:35절에서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지만 할 만한 가치가 충분하게 있습니다. 이 사실은 우리가 주님 앞에 서게 되는 날에 분명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기독교 성자인 ‘어거스틴’은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를 결정짓는데 있어서 유일한 표증은 사랑이다. 사랑만이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를 구별한다.”고 했습니다.
스위스의 교육학자인 ‘페스탈로치(Pestalozzi, Johann Heinrich)’는 “사람들이 서로 사랑 속에 있을 때 하나님이 가까이 오신다.”고 했습니다.
러시아의 문학자인 ‘톨스토이(Lev Nikolaevich Tolstoi)’는 “어디서도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으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은 우리 품안에 깃들게 될 것이다.”고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기독교 철학자인 ‘프란시스 쉐이퍼’ 박사는 “사랑은 그리스도의 제자의 뺏지”라고 했습니다.
독일의 시인인 ‘괴테’가 그의 친구인 ‘슈타인’ 여사에게 보낸 글에서 “우리들은 어디로부터 태어났을까? -사랑으로부터/ 우리들은 어떻게 되어 멸망할까? -사랑이 없기 때문에/ 우리들은 무엇으로 자기를 이길까? -사랑에 의하여/ 우리들도 사랑을 찾아낼 수 있을까? -사랑에 의하여/ 오랫동안 울지 않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사랑 때문에/ 우리들을 항상 연결하는 것은 무엇인가? -사랑이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온전한 사랑이며 이렇게 위대한 능력이 있습니다. 온전한 사랑은 자신의 생명까지도 맡기는 신뢰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한 가족끼리도 서로 신뢰하지 못하는 일이 허다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온전한 사랑은 자기희생적인 사랑입니다. 즉 온전한 사랑은 ‘너를 위해서 나를 포기하는 삶’입니다.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나’를 강조하면 사랑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명령하셨고,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랑의 삶’을 만들어 갑시다. 이 사랑의 삶은 하나님이 기꺼이 받으시는 진정한 감사의 삶을 이루게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땅에서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서는 날 까지 두려움이 없고 담대한 삶을 이루어가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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