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 장로회
설교모음

이런 믿음을 가지라

작성자 배의신 댓글 / 조회: 6,273회 작성일 2010-06-21 13:17
*** 이런 믿음을 가지라  / 마태복음 15:21-28

** 들어가는 말

마태복음 15:21-28, “21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22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23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2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25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26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27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미국의 30대 대통령인 ‘캘빈 쿨리지(1923-1929)’ 때의 전해지는 이야기입니다.
백악관에 초대를 받아 아침 식사를 할 때, 초대 받은 많은 사람들이 당황했다고 합니다. 이유는 식사 때의 대통령 행동 때문입니다. 식사 때, 대통령이 커피 잔을 들어 받침 접시에 커피를 붓고, 설탕과 프림을 타는 것입니다. 초대 받은 사람들은 좀 이상하다 싶으면서도 그것을 따라했습니다. 그런데 곧 대통령이 그 접시를 고양이에게 주는 것입니다. 따라한 손님들이 그 커피를 어떻게 하겠습니까? 고양이에게 주겠습니까? 자기가 마시겠습니까? 정말 난감한 지경이지요.

우리나라의 민족성이 단일민족이어서 그런지 단결을 잘합니다. 좋은 의미에서는 예로부터 큰일을 치를 때마다 품앗이와 부조를 통해서 상부상조로 돕고 힘이 되어주었습니다. 그런데 좋지 않은 의미에서는 파벌을 만들어서 당파싸움으로 쓸데없이 힘을 낭비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에 와서는 모방하는 풍조가 되어서 유명한 사람이나 좋아 보이는 것을 무작정 따라하는 개성 없는 모습으로 발전을 했습니다. 이런 풍조는 신앙에 있어서도 예외 없이 큰 교회, 유명한 사역자들이 하는 것을 아무런 검증도 없고,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에도 상관없이 따라하는 것을 봅니다. 로마서 12:6절 이하에서 “6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7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하라고 하시며, 베드로전서 4:10절에서는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고 하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은사와 능력을 따라서 신앙의 개성가지고 섬기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주신 은사와 믿음은 모두 다릅니다. 주신 삶의 자리와 능력도 다릅니다. ‘달란트 비유’나 ‘므나 비유’에서처럼 각 사람에게 주신 은사와 재능이 있습니다. 그리고 은사와 재능과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믿음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우리 각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 즉 생명과 시간과 물질과 재능과 은사들이 최고의 능력을 발휘하도록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역의 삶을 골로새서 1:29절에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이는 자신의 모든 것을 최상으로 이끌어 내고 있음을 말합니다. 이렇게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능력을 최상으로 이끌어 낼 수 있게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분량을 크게 하는 것과 담대하게 믿음을 행하는 것이 자신의 삶을 가장 아름답고 효과 있게 하는 것입니다. 또한 자신에게 주어진 자신만의 고유한 은사와 믿음을 생활 속에서 담대하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 시간의 본문 말씀을 통하여 여러분에게 주어진 믿음을 담대하게 최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길을 찾으시기를 바랍니다.

※ 먼저, 본문의 내용과 의미를 살펴봅시다.

예수님께서 이방인 지역인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실 때였습니다. 어떤 여인이 예수님을 따라왔습니다. 이 여인을 본문에서는 ‘가나안 여인’이라고 했고, 마가복음에서는 ‘헬라인이며 수로보니게 족속’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이 여인이 예수님의 뒤를 따라오면서 ‘귀신들린 자신의 딸을 고쳐 달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르는 척 하시면서 하시던 일을 계속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따라오면서 계속해서 간청했습니다. 어찌나 시끄럽게 굴었든지 제자들이 “저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라고 예수님께 청했습니다. 이 말은 ‘너무 시끄러우니 빨리 소원을 들어주어 보내시지요.’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않았다.”라고 딱 잘라 거절하셨습니다.

사람이 한 평생을 살다보면 여러 가지 환경과 수많은 일들을 만나게 됩니다. 때로는 기쁨이 있고 흡족한 환경과 일이 있는가 하면, 원하지 않는 슬픔이나 아픔을 주는 환경과 일도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힘을 잃게 하고 마음이 서글퍼지게 하는 것은 환경이나 일이나 사람들로부터 받는 소외감과 무시와 차가운 냉대일 것입니다. ‘독불장군은 없다.’는 말처럼, 아무리 강인한 사람이라고 해도 혼자서는 어려운 세상을 헤쳐 나가기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두 명씩 세 명씩 짝을 지어서 보내셨습니다.

스코틀랜드의 ‘부르스’라는 왕이 이웃 왕국과의 싸움에서 패배했습니다. 좌절과 실의에 빠져 깊은 산골 조그만 오두막에 몰래 숨어 있었습니다. 오랜 싸움에 몹시 지친 왕은 절망 속에서 비통해 하고 있었습니다. “아! 정말 피곤하구나. 이젠 내 몸만 아니라 나라의 운명까지도 끝이구나!”라며 탄식했습니다. 이렇게 슬픔과 탄식으로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해질 무렵이었습니다. 은행 알만한 거미 한마리가 처마 끝에서 나오더니 열심히 거미줄을 치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런데 처마 밑이 꽤나 미끄러웠는지 거미줄 한 쪽 끝이 좀처럼 달라붙지를 않았습니다. 뒷다리로 거미줄 끝을 처마에 붙이고는 꽁무니에서 줄을 뽑으며 내려오다가는 ‘툭’ 떨어져 버립니다. 그러면 다시 벽을 타고 기어 올라가서 또 붙입니다. 한 번, 두 번, 다섯 번… 열 번… 거미는 끈질기게 시도한 끝에 마침내 성공하여 거미그물을 완성했습니다. 이를 끝까지 지켜 본 부르스 왕은 거미의 끈질긴 행동에 다시 용기를 내어 군사를 규합하고 훈련을 시켜 결국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라오던 가나안 여인이 그러했습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의 무시와 냉대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앞에 와서 길을 막고는 엎드려 절하면서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간청했습니다. 예수님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라고 냉대뿐만 아니라 무시하고 천대하는 표현을 서슴없이 사용하셨습니다. 가나안 여인은 그 무시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 사실을 인정하면서 간청합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주님은 그 여인의 끈질긴 믿음의 간청에 탄복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여인의 간청을 들어주셨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이런 믿음을 가질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 여인의 현실과 우리의 현실을 봅시다.

여인은 유대인에게 환영받을 수 없는 이방인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딸이 흉악한 귀신이 들려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딸의 고통을 바라만 보아야 하는 어머니의 가슴이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이 여인에게 있어서 유일한 희망은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소문을 통하여 예수님의 능력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기회가 왔습니다. 유일한 희망이던 예수님께서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을 지나가신다는 것입니다. 여인은 수많은 무리를 뚫고서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여인에게는 위신과 체면을 따질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르짖었습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렇게 기다리던 예수님을 만났지만 예수님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습니다. 계속되는 부르짖음에 오히려 무시와 서러운 냉대만 받았을 뿐입니다. 그러나 여인은 예수님 앞으로 가서 길을 막고 꿇어 엎드렸습니다.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간청합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딱 잘라서 거절하셨고 여인은 더 이상 가망이 없는 절망이 엄습했습니다.

가나안 여인이 예수님께 간청하던 그 날에도 예수님 주변에는 수많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서 예수님을 따라가고 있었겠습니까? 그들에게는 아무런 어려움도 소원도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별 의미 없이 예수님을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혹시 요행을 바라며 따라가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예수님의 주변을 서성거리고 있습니다. 나름대로는 주일이면 예배에 참석도 하고 여러 가지 봉사와 섬김의 일들을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름대로 자신의 소원과 소망을 품고 기도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가나안 여인처럼 자신의 믿음을 최고로 사용하지는 못합니다. 38년 된 병자가 있던 베데스다 연못가에 모여 있던 병자들이 전설만 믿고 요행을 기다리던 것처럼, 어쩌면 요행을 바라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남들 하는 만큼만 하자.”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요. 혹시 여러분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에게는 가나안 여인처럼 예수님께 간절하게 부르짖을 안타까운 일이나 소원이 없습니까?

※ 자신에게 주어진 믿음을 최고로 이끌어내십시오.

여인의 적극적이고 간곡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너무나 냉랭했습니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는 말씀은 바꾸어 말하면 ‘저 여인은 내 소관이 아니다.’라는 의미입니다. 이정도면 돌아서지 않겠습니까? 자존심이 상해서라도 돌아설 것입니다. 예수님은 한 번 더 여인을 자극합니다. “자녀들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하여 현대어성경을 봅시다. ‘자녀들이 먹을 떡을 강아지에게 주는 것은 옳지 않다.’라고 번역했습니다. ‘개’를 ‘강아지’로 번역한 것이 다른 데, 이는 거리를 배회하는 사납고 더러운 개가 아닌, 사람의 집에서 함께 사는 애완용 강아지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런 무시하는 듯 한 표현을 하신 것은 이 이방 여인이 당시의 관습을 잘 알고 있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는 이방인을 개로, 유대인 자신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언급하는 것이 유대인의 관습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이방인에 대한 관심이 따뜻하다는 것은 ‘개’를 ‘강아지’로 표현하신 것으로 보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나안 여인이 자신을 얼마나 신뢰하며 간절한지를 시험하신 것입니다.

여인은 주변의 따가운 시선과 무시와 냉대가 가득한 환경 속에서 오히려 자신의 믿음을 최고로 사용했습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가나안 여인에게는 한 가지 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딸을 고쳐야한다는 절박감입니다. 그리고 이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 것이라는 절박감입니다. 이런 절박감이 여인의 믿음을 최고로 이끌어 내게 했습니다. 여러분도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에게는 이런 절박한 소망이 없어서 예수님께 다가오기를 머뭇거리며 예수님 곁을 서성거리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29:12-13절에서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13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고 하시며, 33:2-3절에서는 “2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을 완전하게 신뢰하는 믿음을 가져야 하며, 그 믿음을 이끌어 내기 위하여 주님의 도우심을 의지해야 합니다. 주님의 도우심을 의지하는 길은 ‘기도’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내려 오셨을 때에 남아있던 제자들이 간질병들린 아들을 고치지 못하고 쩔쩔매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은 작은 까닭이라.”고 하시고,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믿음을 최고로 끌어내기 위하여 기도를 쉬지 않아야 합니다. 성도는 기도하지 않고는 세상을 이길 수 없습니다.

가나안 여인은 자신이 소망하는 믿음의 결과를 간절하게 기대했습니다. 여인의 간절함은 믿음으로 표현되었고, 어떤 소외감도 무시함도 냉대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여인의 소원이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은 ‘네 딸을 고쳐주겠다.’든지, ‘귀신을 명하여 나가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그 여인이 ‘기대하고 있는 소망대로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내가 너의 간청을 도저히 거절할 수 없으니, 네가 온 목적을 이루고 가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씀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가진 소망대로 이루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향해 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민 14:28) 그리고 마가복음 11:24절에서,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들으시는 말은 우리의 입술로 나오는 말만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생각까지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변의 환경이 어둡습니까? 아니면 소외당하고 무시당하고 냉대를 받고 있습니까? 이것은 주님께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기회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믿음을 최고로 이끌어 낼 수 있는 기회이며 동시에 소망을 이룰 수 있는 더 좋은 기회입니다. 가나안 여인처럼 주님을 향하는 신뢰와 더욱 간절함과 응답에 대한 기대로 주님의 선하신 응답을 얻는 복된 삶이 항상 이루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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