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삶의 가시
작성자 배의신 댓글
/ 조회: 5,170회
작성일
2010-05-17 15:36
*** 행복한 삶의 가시 / 누가복음 1:5-13, 18-20
** 들어가는 말
누가복음 1:5-13, 18-20, “5 유대 왕 헤롯 때에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한 사람이 있었으니 이름은 사가랴요 그의 아내는 아론의 자손이니 이름은 엘리사벳이라. 6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 7 엘리사벳이 잉태를 못하므로 그들에게 자식이 없고 두 사람의 나이가 많더라. 8 마침 사가랴가 그 반열의 차례대로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의 직무를 행할새 9 제사장의 전례를 따라 제비를 뽑아 주의 성전에 들어가 분향하고 10 모든 백성은 그 분향하는 시간에 밖에서 기도하더니 11 주의 사자가 그에게 나타나 향단 우편에 선지라. 12 사가랴가 보고 놀라며 무서워하니 13 천사가 그에게 이르되 사가랴여 무서워하지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18 사가랴가 천사에게 이르되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가 많으니이다. 19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가브리엘이라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받았노라. 20 보라. 이 일이 되는 날까지 네가 말 못하는 자가 되어 능히 말을 못하리니 이는 제가 내 말을 믿지 아니함이거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니루어지리라. 하더라.”
‘행복’이라는 말은 그 말 자체만으로도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만큼 사람들은 행복을 누리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간절하게 행복을 원하는 만큼 행복을 가로막고 방해하는 요소들도 많습니다. 그 요소들 중의 하나가 ‘의심’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있어서 ‘의심’이라는 요소는 심각한 불신앙의 표현이며, 징벌을 불러들이는 죄의 요소입니다. 로마서 14:23절에서는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믿음을 따라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고 하시며, 야고보서 1:6-7절에서는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의심은 믿음의 반대되는 개념이지만 실생활에 있어서는 담 하나를 경계로 하는 바로 이웃사이입니다.
채필근 목사님의 일화입니다. 채 목사님은 만주 일대를 돌아다니며 교회를 순회하곤 했는데, 가끔 선교부 돈을 가지고 각 교회에 나누어 주곤 했습니다. 한번은 돈을 잔뜩 넣고 순회하는 도중 외딴 곳에 이르러 여관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손님들이 많아서 작은 방에 두 사람이 함께 묵어야만 했습니다. 잠자리에 누웠으나 두 사람은 서로가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목사님은 목사님대로, 또 다른 나그네는 그 사람대로, ‘혹시 저놈이 내가 잠든 사이에 돈을 훔쳐가지 않을까?!’하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새웠습니다. 다음날 아침, 주인이 차려다 준 상에서 겸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둘은 할 수 없이 서로 마주 앉아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채 목사님이 식사기도를 하고 막 수저를 들었을 때, 마주 앉았던 사람이 “선생님, 예수 믿는 어른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채 목사님은 “네, 저는 채필근 목사입니다.”라고 자기소개를 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깜짝 놀라면서, “저는 00교회 장로입니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들끼리 방을 사용하도록 배려하셨지만, 작은 의심 때문에 온 밤을 불편과 죄로 지새웠던 것입니다. 의심이란 이렇게 믿음의 자리에서 한 발자국만 떼면 만날 수 있는 이웃입니다. 물 위를 걷던 베드로도,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뵙지 못했던 도마도 이 의심병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이들뿐이겠습니까? 이 시대를 사는 성도들도 믿음보다는 의심하는 일들이 더 많을 것입니다. 직장에서 사용자와 노동자가 서로 의심하고, 정부와 국민이 서로 불신하며, 가정에서는 의부증, 의처증 그리고 자녀와 부모가 서로 불신하는 이런 현상으로 이 시대가 어둡습니다. 이런 의심이 지배하는 삶은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본문말씀을 통하여 행복한 삶을 가로막는 가시를 뽑아 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 본문의 내용을 살펴봅시다.
성경에는 하나님으로부터 의인으로 인정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노아나 욥, 다니엘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 중에서 구약 시대를 마감하고 신약 시대를 여는 과도기의 인물인 ‘사가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세례요한의 아버지이자 이 시간의 주인공입니다. 사가랴는 아론의 후손으로 제사장이었으며, 역시 아론의 후손인 엘리사벳과 결혼했습니다. 이 부부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흠이 없이 행하는 의인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인정받는 의인이었지만 이 둘 사이에는 늙도록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 당시에 자식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으로 치부되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큰 근심거리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가랴 부부의 근심이 깊은 것은 그들이 더 이상 자녀를 생산할 수 없는 나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믿음의 사람이라도 마음에 인간적인 소망이 사라지게 될 때 근심에 싸이게 됩니다. 사가랴는 제사장 가문으로써 대가 끊어지는 가문의 단절의 위기를 맞았습니다. 아마 사가랴보다도 엘리사벳의 마음이 더욱 아프고 근심이 깊었을 것입니다. 후에 요한을 잉태한 엘리사벳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25절입니다. “주께서 나를 돌아보시는 날에 인간에 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행하심이라.” 이처럼 하나님께 의인으로 인정받아서 큰일에 쓰임 받은 사가랴도 인간세상의 불가능한 현실 앞에서는 의심이 일어났습니다.
이 일이 일어난 경로는 이렇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장들은 24팀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이들은 팀별로 돌아가면서 성전에서 봉사했습니다. 그리고 봉사담당 팀의 제사장들 중에서 제비를 뽑아서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도록 했습니다. 마침 사가랴가 소속된 팀에서 직무를 수행할 순서가 되었는데, 사가랴가 제비에 뽑혀서 성소에서 분향하게 되었습니다. 사가랴가 성소에 들어가서 분향할 때에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천사는 “사가랴여 무서워하지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고 알렸습니다. 그러나 사가랴는 자신과 아내가 모두 수태할 수 없는 상태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 많으니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라는 표현입니다. 사가랴는 하나님의 뜻을 의심했기 때문에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벙어리가 되는 벌을 받았습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여러분 속에서 행복한 삶을 가로막는 가시를 찾아내서 제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행복한 삶을 가로막는 가시는 ‘현실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본문 7절에서 “엘리사벳이 잉태를 못하므로 그들에게 자식이 없고 두 사람의 나이가 많더라. ”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삶의 현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자식이 없고 두 사람의 나이가 많더라.”는 말씀은 그들이 직면한 환경을 보여줍니다. 사람이 걱정과 근심에 싸이게 되는 이유는 인간적인 환경에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들마저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생각하지 못하거나 의심하게 됩니다. 인간적인 면에서는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사가랴 부부는 이 일로 많이 기도했습니다. 13절에서 천사는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자식을 구하는 기도를 많이 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했겠습니까? 이는 사가랴가 인간적인 환경에 집착했기 때문입니다. 사가랴가 당면한 환경은 ‘자신이나 아내가 더 이상 자녀를 생산할 수 없는 상태’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천사에게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내 아내도 나이 많으니이다.”라고 불신적인 답변을 한 것입니다.
인간적인 환경에 집착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인간의 환경을 초월합니다. 사가랴는 아브라함과 사라의 일을 알았을 것입니다. 환경을 초월한 믿음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이삭을 얻게 했다는 것을 사가랴가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자신에게 일어났을 때는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처럼 의심은 사람들의 환경을 타고 소리 없이 찾아들어 사람의 영을 어둡게 합니다. 히브리서 11:1절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했습니다. 즉 믿음은 환경을 초월하는 것임을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실을 보지 못하고 말로만 들었던 도마가 ‘자신의 눈으로 보고, 자신의 감각으로 느껴야 믿겠다.’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이처럼 환경에 갇힌 도마에게 예수님은 자신을 보이시고 또한 느껴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고 하셨습니다. 모세는 자신이 말을 조리 있게 하지 못한다는 상태를 고집하면서 거듭하여 소명을 거절했습니다. 답답하신 하나님께서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누가 말 못하는 자나, 못 듣는 자나, 눈 밝은 자나, 맹인이 되게 하였느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라고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전능자이시며 창조주이심을 거듭 강조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환경을 초월하지 못하는 것은 그 환경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의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불신앙은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지 못하도록 막습니다. 즉 인간적인 환경에 집착하는 것이 행복한 삶의 가시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시는 어떤 것입니까? “나는 때문에 안 돼!”라고 불가능하게 보이는 현실에 집착하는 것은 없습니까? 돈이나, 자식, 남편이나 아내, 직장, 건강, 등등.
※ 행복한 삶을 가로막는 가시를 빼는 길은 ‘믿음’뿐입니다.
의심을 몰아내는 길은 오직 믿음입니다. 의심은 온갖 근심과 걱정, 두려움, 불신앙과 불순종을 불러들입니다. 그리고 세상적인 근심은 그 결말이 죽음입니다. 고린도후서 7:10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 하십니다.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공통으로 지고 있는 짐이 근심, 염려, 걱정들입니다. 근심이나 걱정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해도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걱정에 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하시며, 시편 55:22절에서는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라고 권고하시지만 그래도 우리는 근심하고 염려하고 걱정합니다. 지금 여러분에게도 염려거리들이 있지요? 그 근심거리들을 어떻게 하시렵니까? 하던 대로 계속 걱정만 하고 있으시렵니까? 잠언 17:22절에서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육신의 삶에 대한 근심들은 분명히 해결해야 합니다. 그 해결의 열쇠는 믿음입니다.
누가복음 1장 끝부분에는 아들을 얻은 사가랴가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아 예언을 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 예언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긍휼을 베푸셔서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메시아를 보내주심에 대한 찬양도 나옵니다. 즉 사가랴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회복한 것입니다. 사가랴는 깨닫지 못할 때에는 의심했을지라도,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한 후에는 철저하게 순종했습니다. 우리도 살아가다보면 의심에 빠지게 되고 근심과 걱정에 싸이게 됩니다. 그러나 그 속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있으면 더 깊이 빠질 뿐입니다. 신속하게 믿음을 회복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어떻게 믿음을 회복합니까? 하나님 말씀을 읽고 듣는 일에 계속 힘쓰는 것입니다. 또한 기도하기를 쉬지 않아야 합니다. 고통스럽고 괴로운 때, 염려가 쌓일 때는 기도조차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짧은 문구라도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도와주십시오.” “성령님 역사해 주십시오.” “나를 긍휼히 여겨 주셔서 회복하게 해 주십시오.” “주님 의지합니다.” 등등. 간절하게 부르짖고 또 부르짖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18:1-8절 내용에 나오는 과부처럼 이룰 때까지 간구해야 합니다. 예레미야 29:13절에서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고 약속하십니다.
그러므로 삶이 힘들 때에라도 믿음을 잃지 않도록 힘써야 합니다. 나의 믿음이 약하다는 사실을 하나님은 아십니다. 다만 하나님께 그 사실을 겸손하게 내어놓기만 하면 됩니다. 세상에 사는 인간 중에는 의로운 자가 없습니다. 설령 의롭다고 하더라도 허물은 있기 마련입니다. 그 사실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도 근심과 걱정, 여러 가지 염려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의심할 수 있지만, 그 의심이 죄로 연결되어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자리까지 가서는 안 됩니다.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을 의지하여 말씀과 기도로 의심을 물리치고 믿음의 삶을 이루어야 합니다. 이것이 부부가 행복하고 가정이 행복할 수 있는 비결입니다. 오늘 어버이 주일과 이번 가정의 달 5월이 성도들의 가정과 우리 교회가 여러분이 머무는 모든 곳에 행복을 만들어 갑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도우심과 함께 하심으로 인한 감격스럽고 행복한 삶을 날마다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들어가는 말
누가복음 1:5-13, 18-20, “5 유대 왕 헤롯 때에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한 사람이 있었으니 이름은 사가랴요 그의 아내는 아론의 자손이니 이름은 엘리사벳이라. 6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 7 엘리사벳이 잉태를 못하므로 그들에게 자식이 없고 두 사람의 나이가 많더라. 8 마침 사가랴가 그 반열의 차례대로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의 직무를 행할새 9 제사장의 전례를 따라 제비를 뽑아 주의 성전에 들어가 분향하고 10 모든 백성은 그 분향하는 시간에 밖에서 기도하더니 11 주의 사자가 그에게 나타나 향단 우편에 선지라. 12 사가랴가 보고 놀라며 무서워하니 13 천사가 그에게 이르되 사가랴여 무서워하지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18 사가랴가 천사에게 이르되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가 많으니이다. 19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가브리엘이라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받았노라. 20 보라. 이 일이 되는 날까지 네가 말 못하는 자가 되어 능히 말을 못하리니 이는 제가 내 말을 믿지 아니함이거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니루어지리라. 하더라.”
‘행복’이라는 말은 그 말 자체만으로도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만큼 사람들은 행복을 누리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간절하게 행복을 원하는 만큼 행복을 가로막고 방해하는 요소들도 많습니다. 그 요소들 중의 하나가 ‘의심’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있어서 ‘의심’이라는 요소는 심각한 불신앙의 표현이며, 징벌을 불러들이는 죄의 요소입니다. 로마서 14:23절에서는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믿음을 따라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고 하시며, 야고보서 1:6-7절에서는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의심은 믿음의 반대되는 개념이지만 실생활에 있어서는 담 하나를 경계로 하는 바로 이웃사이입니다.
채필근 목사님의 일화입니다. 채 목사님은 만주 일대를 돌아다니며 교회를 순회하곤 했는데, 가끔 선교부 돈을 가지고 각 교회에 나누어 주곤 했습니다. 한번은 돈을 잔뜩 넣고 순회하는 도중 외딴 곳에 이르러 여관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손님들이 많아서 작은 방에 두 사람이 함께 묵어야만 했습니다. 잠자리에 누웠으나 두 사람은 서로가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목사님은 목사님대로, 또 다른 나그네는 그 사람대로, ‘혹시 저놈이 내가 잠든 사이에 돈을 훔쳐가지 않을까?!’하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새웠습니다. 다음날 아침, 주인이 차려다 준 상에서 겸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둘은 할 수 없이 서로 마주 앉아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채 목사님이 식사기도를 하고 막 수저를 들었을 때, 마주 앉았던 사람이 “선생님, 예수 믿는 어른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채 목사님은 “네, 저는 채필근 목사입니다.”라고 자기소개를 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깜짝 놀라면서, “저는 00교회 장로입니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들끼리 방을 사용하도록 배려하셨지만, 작은 의심 때문에 온 밤을 불편과 죄로 지새웠던 것입니다. 의심이란 이렇게 믿음의 자리에서 한 발자국만 떼면 만날 수 있는 이웃입니다. 물 위를 걷던 베드로도,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뵙지 못했던 도마도 이 의심병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이들뿐이겠습니까? 이 시대를 사는 성도들도 믿음보다는 의심하는 일들이 더 많을 것입니다. 직장에서 사용자와 노동자가 서로 의심하고, 정부와 국민이 서로 불신하며, 가정에서는 의부증, 의처증 그리고 자녀와 부모가 서로 불신하는 이런 현상으로 이 시대가 어둡습니다. 이런 의심이 지배하는 삶은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본문말씀을 통하여 행복한 삶을 가로막는 가시를 뽑아 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 본문의 내용을 살펴봅시다.
성경에는 하나님으로부터 의인으로 인정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노아나 욥, 다니엘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 중에서 구약 시대를 마감하고 신약 시대를 여는 과도기의 인물인 ‘사가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세례요한의 아버지이자 이 시간의 주인공입니다. 사가랴는 아론의 후손으로 제사장이었으며, 역시 아론의 후손인 엘리사벳과 결혼했습니다. 이 부부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흠이 없이 행하는 의인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인정받는 의인이었지만 이 둘 사이에는 늙도록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 당시에 자식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으로 치부되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큰 근심거리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가랴 부부의 근심이 깊은 것은 그들이 더 이상 자녀를 생산할 수 없는 나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믿음의 사람이라도 마음에 인간적인 소망이 사라지게 될 때 근심에 싸이게 됩니다. 사가랴는 제사장 가문으로써 대가 끊어지는 가문의 단절의 위기를 맞았습니다. 아마 사가랴보다도 엘리사벳의 마음이 더욱 아프고 근심이 깊었을 것입니다. 후에 요한을 잉태한 엘리사벳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25절입니다. “주께서 나를 돌아보시는 날에 인간에 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행하심이라.” 이처럼 하나님께 의인으로 인정받아서 큰일에 쓰임 받은 사가랴도 인간세상의 불가능한 현실 앞에서는 의심이 일어났습니다.
이 일이 일어난 경로는 이렇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장들은 24팀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이들은 팀별로 돌아가면서 성전에서 봉사했습니다. 그리고 봉사담당 팀의 제사장들 중에서 제비를 뽑아서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도록 했습니다. 마침 사가랴가 소속된 팀에서 직무를 수행할 순서가 되었는데, 사가랴가 제비에 뽑혀서 성소에서 분향하게 되었습니다. 사가랴가 성소에 들어가서 분향할 때에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천사는 “사가랴여 무서워하지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고 알렸습니다. 그러나 사가랴는 자신과 아내가 모두 수태할 수 없는 상태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 많으니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라는 표현입니다. 사가랴는 하나님의 뜻을 의심했기 때문에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벙어리가 되는 벌을 받았습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여러분 속에서 행복한 삶을 가로막는 가시를 찾아내서 제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행복한 삶을 가로막는 가시는 ‘현실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본문 7절에서 “엘리사벳이 잉태를 못하므로 그들에게 자식이 없고 두 사람의 나이가 많더라. ”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삶의 현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자식이 없고 두 사람의 나이가 많더라.”는 말씀은 그들이 직면한 환경을 보여줍니다. 사람이 걱정과 근심에 싸이게 되는 이유는 인간적인 환경에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들마저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생각하지 못하거나 의심하게 됩니다. 인간적인 면에서는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사가랴 부부는 이 일로 많이 기도했습니다. 13절에서 천사는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자식을 구하는 기도를 많이 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했겠습니까? 이는 사가랴가 인간적인 환경에 집착했기 때문입니다. 사가랴가 당면한 환경은 ‘자신이나 아내가 더 이상 자녀를 생산할 수 없는 상태’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천사에게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내 아내도 나이 많으니이다.”라고 불신적인 답변을 한 것입니다.
인간적인 환경에 집착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인간의 환경을 초월합니다. 사가랴는 아브라함과 사라의 일을 알았을 것입니다. 환경을 초월한 믿음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이삭을 얻게 했다는 것을 사가랴가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자신에게 일어났을 때는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처럼 의심은 사람들의 환경을 타고 소리 없이 찾아들어 사람의 영을 어둡게 합니다. 히브리서 11:1절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했습니다. 즉 믿음은 환경을 초월하는 것임을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실을 보지 못하고 말로만 들었던 도마가 ‘자신의 눈으로 보고, 자신의 감각으로 느껴야 믿겠다.’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이처럼 환경에 갇힌 도마에게 예수님은 자신을 보이시고 또한 느껴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고 하셨습니다. 모세는 자신이 말을 조리 있게 하지 못한다는 상태를 고집하면서 거듭하여 소명을 거절했습니다. 답답하신 하나님께서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누가 말 못하는 자나, 못 듣는 자나, 눈 밝은 자나, 맹인이 되게 하였느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라고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전능자이시며 창조주이심을 거듭 강조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환경을 초월하지 못하는 것은 그 환경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의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불신앙은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지 못하도록 막습니다. 즉 인간적인 환경에 집착하는 것이 행복한 삶의 가시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시는 어떤 것입니까? “나는 때문에 안 돼!”라고 불가능하게 보이는 현실에 집착하는 것은 없습니까? 돈이나, 자식, 남편이나 아내, 직장, 건강, 등등.
※ 행복한 삶을 가로막는 가시를 빼는 길은 ‘믿음’뿐입니다.
의심을 몰아내는 길은 오직 믿음입니다. 의심은 온갖 근심과 걱정, 두려움, 불신앙과 불순종을 불러들입니다. 그리고 세상적인 근심은 그 결말이 죽음입니다. 고린도후서 7:10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 하십니다.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공통으로 지고 있는 짐이 근심, 염려, 걱정들입니다. 근심이나 걱정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해도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걱정에 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하시며, 시편 55:22절에서는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라고 권고하시지만 그래도 우리는 근심하고 염려하고 걱정합니다. 지금 여러분에게도 염려거리들이 있지요? 그 근심거리들을 어떻게 하시렵니까? 하던 대로 계속 걱정만 하고 있으시렵니까? 잠언 17:22절에서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육신의 삶에 대한 근심들은 분명히 해결해야 합니다. 그 해결의 열쇠는 믿음입니다.
누가복음 1장 끝부분에는 아들을 얻은 사가랴가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아 예언을 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 예언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긍휼을 베푸셔서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메시아를 보내주심에 대한 찬양도 나옵니다. 즉 사가랴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회복한 것입니다. 사가랴는 깨닫지 못할 때에는 의심했을지라도,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한 후에는 철저하게 순종했습니다. 우리도 살아가다보면 의심에 빠지게 되고 근심과 걱정에 싸이게 됩니다. 그러나 그 속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있으면 더 깊이 빠질 뿐입니다. 신속하게 믿음을 회복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어떻게 믿음을 회복합니까? 하나님 말씀을 읽고 듣는 일에 계속 힘쓰는 것입니다. 또한 기도하기를 쉬지 않아야 합니다. 고통스럽고 괴로운 때, 염려가 쌓일 때는 기도조차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짧은 문구라도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도와주십시오.” “성령님 역사해 주십시오.” “나를 긍휼히 여겨 주셔서 회복하게 해 주십시오.” “주님 의지합니다.” 등등. 간절하게 부르짖고 또 부르짖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18:1-8절 내용에 나오는 과부처럼 이룰 때까지 간구해야 합니다. 예레미야 29:13절에서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고 약속하십니다.
그러므로 삶이 힘들 때에라도 믿음을 잃지 않도록 힘써야 합니다. 나의 믿음이 약하다는 사실을 하나님은 아십니다. 다만 하나님께 그 사실을 겸손하게 내어놓기만 하면 됩니다. 세상에 사는 인간 중에는 의로운 자가 없습니다. 설령 의롭다고 하더라도 허물은 있기 마련입니다. 그 사실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도 근심과 걱정, 여러 가지 염려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의심할 수 있지만, 그 의심이 죄로 연결되어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자리까지 가서는 안 됩니다.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을 의지하여 말씀과 기도로 의심을 물리치고 믿음의 삶을 이루어야 합니다. 이것이 부부가 행복하고 가정이 행복할 수 있는 비결입니다. 오늘 어버이 주일과 이번 가정의 달 5월이 성도들의 가정과 우리 교회가 여러분이 머무는 모든 곳에 행복을 만들어 갑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도우심과 함께 하심으로 인한 감격스럽고 행복한 삶을 날마다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