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할 수 없는 은혜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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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0-04-29 18:49
*** 피할 수 없는 은혜 / 빌레몬서 1:8-16
** 들어가는 말
빌레몬서 1:8-16, “8 이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아주 담대하게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도 있으나 9 도리어 사랑으로써 간구하노라. 나이가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 10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11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12 네게 그를 돌려보내노니 그는 내 심복이라. 13 그를 내게 머물러 있게 하여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 14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것도 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라. 15 아마 그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너로 하여금 그를 영원히 두게 함이리니 16 이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저는 자주 하나님께서 내게 베푸신 은혜와 가족이나 교회, 나라와 인류에 베푸신 은혜를 생각하곤 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감히 헤아릴 수 없도록 크고 놀라울 뿐입니다. 그에 비하면 그 은혜를 받은 우리 인생들이 하나님께로 향하는 응답과 감사는 참으로 보잘 것 없는 것임을 늘 깨닫습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와 그에 응답하는 우리 인생들의 응답은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환경과 삶의 자리와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이루시고 베푸신 은혜입니다. 욥기 41:11절에서 하나님께서 욥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누가 먼저 내게 주고 나로 하여금 갚게 하겠느냐?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든 것을 자신이 이룩한 것이며, 자신의 소유물인 듯이 착각하면서 삽니다. 베풀어 주신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도 않고 감사하지도 않고 말입니다. 이러한 인생들을 그래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께서 매일의 삶에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이 은혜가 바로 ‘피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내가 잘나서도 아니고 하나님의 마음에 들어서도 아닙니다. 요한복음 15:16절에서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지금 여기 있는 우리 모두는 이렇게 하나님께서 베푸신 전적인 은혜를 입은 사람들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은혜를 베푸시는 것일까요? 방금 읽었던 요한복음 15:16절 하반절에서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고 하십니다. 즉 그 목적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예배하며 영화롭게 할 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선한행실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게 하시며, 생명의 복음을 전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 내용을 에베소서 1:3-14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3-6절까지를 읽어봅시다.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은혜를 어떻게 받고 있는지!
결혼한 지 오래도록 아이가 없는 어떤 가정에서 “만약 아이를 허락하시면 아이를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라고 하나님께 서원기도를 했습니다. 얼마 후 정말로 이 부부에게 아이가 생겼습니다. 기쁨은 말로다 할 수 없었습니다. 달이 차서 아이를 낳았는데 아들이었습니다. 이 아이가 자라면서 천재의 징후를 보였습니다. 학교에서 전체 수석에다가 운동도 못하는 것이 없고 동료를 리드하는 리더십까지 갖추었습니다.
아이가 성장할수록 부모는 다른 생각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아들이 의대를 지망해서 의사가 되는 것이 하나님께 더 좋은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하고는 아들을 의대에 보냈고 모든 것이 순조로웠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하루아침에 정신이상이 되었습니다. 미쳐도 보통 미친것이 아니어서 대낮에도 옷을 벗고 알몸으로 바깥으로 무작정 뛰어나가는 것이었습니다. 하루는 그 날도 다 큰 아들이 알몸으로 뛰쳐나가는 것을 본 어머니가 다급하게 소리 지르며 따라갑니다.
“하나님, 하나님, 저기 주의 종이 뛰어가나이다! 주의 종을 붙들어주소서!”
자신들의 욕망 때문에 하나님께 서원한 것도 저버리고 의대에 보낼 때는 언제이고, 다급할 때는 ‘주의 종’이라고 부르는 심사는 또 무엇이란 말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으면서도 그들은 그 은혜를 자신의 욕심으로 응답한 것입니다. 확실히 사람은 믿을 것이 못됩니다. 급할 때는 ‘하나님’을 찾다가 형편이 나아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자기욕심’을 따르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며 끊임없는 은혜를 베푸십니다. 이시간의 본문말씀이 바로 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여러분 자신은 하나님의 은혜에 성실하고 정직하게 응답을 하고 있는지를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 본문의 내용을 살펴봅시다.
빌레몬서는 사도 바울이 인생 말년에 로마감옥에서 골로새 교회의 부유한 성도인 ‘빌레몬’에게 보낸 개인 편지입니다. 편지의 목적은 로마 감옥에서 만나 복음을 전한 ‘오네시모’라는 종 때문이었습니다. 빌레몬은 골로새 시에 살고 있는 부유한 사람으로서 아마 바울에 의하여 복음을 받아들인 듯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집에 교회를 받아들이고 바울을 성실하게 추종했습니다.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노예였습니다. 오네시모가 빌레몬의 집에서 왜 도망갔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도망친 후 로마에서 생활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연유에서인지 로마의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 로마 감옥에는 로마 황제에게 상소를 하여 예루살렘으로부터 압송되어 온 나이 많은 사도 바울이 있었습니다. 오네시모는 바울과의 만남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됩니다. 골로새서 4:9절에서 바울은 오네시모를 “신실하고 사랑받는 형제”로 부르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도망자 오네시모를 이제는 그 주인으로부터 인정받는 자유인으로 만들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네시모의 주인인 ‘빌레몬’도 역시 바울에 의하여 복음을 받게 되었고 이제는 바울의 좋은 동역자가 되어 있었습니다(17절). 바울은 오네시모의 근황과 함께 그를 보증하면서 빌레몬을 대신하여 오네시모가 노년의 바울을 도울 수 있도록 허락해 주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그 편지가 이 빌레몬서입니다.
※ 하나님의 은혜를 피하여 도망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쿼바디스’라는 영화에서 핍박이 극심한 로마를 빠져나와 도망하는 ‘베드로’를 보게 됩니다. 그런데 도망하던 베드로가 로마로 향해 가시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베드로는 “쿼바디스 도미니?(주여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그때 주님은 ‘네가 버리고 온 로마로 내가 다시 십자가를 지러 간다.’고 하십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가겠다고 하며 오던 길로 돌아섭니다. 그리고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순교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피하여 도망할 곳은 없습니다. 시편 139:7-10절에서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라고 고백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피하여 어디에서도 평안을 얻지 못합니다. 니느웨로 가서 회개를 전파하라고 보냄을 받은 선지자 요나가 하나님을 피하여 다시스로 도망을 갔습니다. 배 밑창에 숨어서 하나님을 피해보려 했지만 하나님을 피할 수도 없었고 그로 인하여 당한 고난은 말로다 할 수 없었습니다.
오네시모는 빌레몬 집의 노예였습니다. 당시의 팔레스틴과 온 유럽이 노예 제도를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는 기독교인들도 노예를 소유하고 있었지만 일반인들과는 달리 노예에 대한 대우가 달랐습니다. 일반적으로 노예는 주인의 소유물이었고, 노예를 사고팔거나 죽일 수 있는 권한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빌레몬의 노예인 오네시모가 도망을 쳤습니다. 그것도 도망을 치면서 주인의 돈이나 재산을 훔쳤습니다. 오네시모의 도망은 자신으로부터의 도망이었습니다. 그가 빌레몬의 집에 있는 동안에는 노예의 신분을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주인이 아무리 잘해 주었지만 여전히 노예신분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알고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을 쳤습니다. 자유와 편안한 삶을 향하여 말입니다. 그러나 오네시모는 결국 다시 잡히는 신세가 되었고, 이전보다 더 악화된 환경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도망칠 곳이 없습니다. 모세도 요나 선지자도 예레미야 선지자도 하나님의 명령이 부담스럽고 싫어서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쳐보려 했지만 결코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왜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피하려고 하겠습니까? 그것은 자신의 생각이나 뜻과는 다르며, 희생과 헌신과 자기 버림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부담스럽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예레미야 20:9절입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면 평안할 줄로 여기지만 결코 육신적으로나 영적으로나 평안이 없습니다. 평안은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요한복음 14:27절에서 주님은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은 혹시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피해보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 하나님은 결코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인생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분명합니다. 민수기 23:19절에서,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고 하시며, 이사야 55:11절에서는,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들은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집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알았을 것이지만 오히려 그 은혜의 자리에서 도망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로마 감옥에서 다시 사도 바울을 만난 것입니다. 바울은 순교하기 직전인 로마 감옥에서 오네시모에게 복음을 전했고 오네시모는 하나님의 은혜로 돌아왔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며 인생의 절망의 순간까지도 기회를 주십니다. 인간으로서 더 이상 할 수 없을 때에도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는 열려있으며 기다리고 계십니다. 탕자를 기다리시는 아버지처럼 말입니다. 아버지는 탕자가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자신의 모든 욕망과 기대가 무너지도록 기다리신 것입니다. 오네시모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순간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그토록 자신의 신분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그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얻은 것입니다. 자유와 평화 그리고 넘치는 기쁨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요한복음 8:36절에서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쓸모없는 인생을 가치 있는 인생으로 만드시며 무익한 인생을 유익하게 만드십니다. 여러분의 생애가 빛나고 가치 있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피하려 하지 말고 받아들이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를 피해서 오히려 핍박했던 사울에게 예수님께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행 26:14)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피해 다니는 것이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고생길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고 했는데,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결코 피할 수 없을 테니까 하나님께 모든 생애를 맡기십시오. 그리하면 인생이 새롭게 여겨지고 자신이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대신 죽으시고 생명을 얻은 보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여러분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이 하나님의 은혜를 거듭 거부한다면 인생을 더욱 비참하게 하는 징계만 계속될 뿐입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설령 나 자신의 생각과 뜻과 다르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은 결코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오네시모처럼 순종으로 행복을 누릴 수도 있지만, 요나 선지자나 가룟 유다처럼 고통과 파멸에까지 이를 수 있음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여기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뜻이 임할 때에 순종하심으로 주님 안에서의 기쁨과 행복을 마음껏 누릴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 들어가는 말
빌레몬서 1:8-16, “8 이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아주 담대하게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도 있으나 9 도리어 사랑으로써 간구하노라. 나이가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 10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11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12 네게 그를 돌려보내노니 그는 내 심복이라. 13 그를 내게 머물러 있게 하여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 14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것도 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라. 15 아마 그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너로 하여금 그를 영원히 두게 함이리니 16 이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저는 자주 하나님께서 내게 베푸신 은혜와 가족이나 교회, 나라와 인류에 베푸신 은혜를 생각하곤 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감히 헤아릴 수 없도록 크고 놀라울 뿐입니다. 그에 비하면 그 은혜를 받은 우리 인생들이 하나님께로 향하는 응답과 감사는 참으로 보잘 것 없는 것임을 늘 깨닫습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와 그에 응답하는 우리 인생들의 응답은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환경과 삶의 자리와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이루시고 베푸신 은혜입니다. 욥기 41:11절에서 하나님께서 욥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누가 먼저 내게 주고 나로 하여금 갚게 하겠느냐?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든 것을 자신이 이룩한 것이며, 자신의 소유물인 듯이 착각하면서 삽니다. 베풀어 주신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도 않고 감사하지도 않고 말입니다. 이러한 인생들을 그래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께서 매일의 삶에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이 은혜가 바로 ‘피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내가 잘나서도 아니고 하나님의 마음에 들어서도 아닙니다. 요한복음 15:16절에서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지금 여기 있는 우리 모두는 이렇게 하나님께서 베푸신 전적인 은혜를 입은 사람들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은혜를 베푸시는 것일까요? 방금 읽었던 요한복음 15:16절 하반절에서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고 하십니다. 즉 그 목적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예배하며 영화롭게 할 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선한행실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게 하시며, 생명의 복음을 전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 내용을 에베소서 1:3-14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3-6절까지를 읽어봅시다.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은혜를 어떻게 받고 있는지!
결혼한 지 오래도록 아이가 없는 어떤 가정에서 “만약 아이를 허락하시면 아이를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라고 하나님께 서원기도를 했습니다. 얼마 후 정말로 이 부부에게 아이가 생겼습니다. 기쁨은 말로다 할 수 없었습니다. 달이 차서 아이를 낳았는데 아들이었습니다. 이 아이가 자라면서 천재의 징후를 보였습니다. 학교에서 전체 수석에다가 운동도 못하는 것이 없고 동료를 리드하는 리더십까지 갖추었습니다.
아이가 성장할수록 부모는 다른 생각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아들이 의대를 지망해서 의사가 되는 것이 하나님께 더 좋은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하고는 아들을 의대에 보냈고 모든 것이 순조로웠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하루아침에 정신이상이 되었습니다. 미쳐도 보통 미친것이 아니어서 대낮에도 옷을 벗고 알몸으로 바깥으로 무작정 뛰어나가는 것이었습니다. 하루는 그 날도 다 큰 아들이 알몸으로 뛰쳐나가는 것을 본 어머니가 다급하게 소리 지르며 따라갑니다.
“하나님, 하나님, 저기 주의 종이 뛰어가나이다! 주의 종을 붙들어주소서!”
자신들의 욕망 때문에 하나님께 서원한 것도 저버리고 의대에 보낼 때는 언제이고, 다급할 때는 ‘주의 종’이라고 부르는 심사는 또 무엇이란 말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으면서도 그들은 그 은혜를 자신의 욕심으로 응답한 것입니다. 확실히 사람은 믿을 것이 못됩니다. 급할 때는 ‘하나님’을 찾다가 형편이 나아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자기욕심’을 따르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며 끊임없는 은혜를 베푸십니다. 이시간의 본문말씀이 바로 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여러분 자신은 하나님의 은혜에 성실하고 정직하게 응답을 하고 있는지를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 본문의 내용을 살펴봅시다.
빌레몬서는 사도 바울이 인생 말년에 로마감옥에서 골로새 교회의 부유한 성도인 ‘빌레몬’에게 보낸 개인 편지입니다. 편지의 목적은 로마 감옥에서 만나 복음을 전한 ‘오네시모’라는 종 때문이었습니다. 빌레몬은 골로새 시에 살고 있는 부유한 사람으로서 아마 바울에 의하여 복음을 받아들인 듯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집에 교회를 받아들이고 바울을 성실하게 추종했습니다.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노예였습니다. 오네시모가 빌레몬의 집에서 왜 도망갔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도망친 후 로마에서 생활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연유에서인지 로마의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 로마 감옥에는 로마 황제에게 상소를 하여 예루살렘으로부터 압송되어 온 나이 많은 사도 바울이 있었습니다. 오네시모는 바울과의 만남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됩니다. 골로새서 4:9절에서 바울은 오네시모를 “신실하고 사랑받는 형제”로 부르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도망자 오네시모를 이제는 그 주인으로부터 인정받는 자유인으로 만들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네시모의 주인인 ‘빌레몬’도 역시 바울에 의하여 복음을 받게 되었고 이제는 바울의 좋은 동역자가 되어 있었습니다(17절). 바울은 오네시모의 근황과 함께 그를 보증하면서 빌레몬을 대신하여 오네시모가 노년의 바울을 도울 수 있도록 허락해 주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그 편지가 이 빌레몬서입니다.
※ 하나님의 은혜를 피하여 도망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쿼바디스’라는 영화에서 핍박이 극심한 로마를 빠져나와 도망하는 ‘베드로’를 보게 됩니다. 그런데 도망하던 베드로가 로마로 향해 가시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베드로는 “쿼바디스 도미니?(주여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그때 주님은 ‘네가 버리고 온 로마로 내가 다시 십자가를 지러 간다.’고 하십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가겠다고 하며 오던 길로 돌아섭니다. 그리고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순교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피하여 도망할 곳은 없습니다. 시편 139:7-10절에서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라고 고백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피하여 어디에서도 평안을 얻지 못합니다. 니느웨로 가서 회개를 전파하라고 보냄을 받은 선지자 요나가 하나님을 피하여 다시스로 도망을 갔습니다. 배 밑창에 숨어서 하나님을 피해보려 했지만 하나님을 피할 수도 없었고 그로 인하여 당한 고난은 말로다 할 수 없었습니다.
오네시모는 빌레몬 집의 노예였습니다. 당시의 팔레스틴과 온 유럽이 노예 제도를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는 기독교인들도 노예를 소유하고 있었지만 일반인들과는 달리 노예에 대한 대우가 달랐습니다. 일반적으로 노예는 주인의 소유물이었고, 노예를 사고팔거나 죽일 수 있는 권한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빌레몬의 노예인 오네시모가 도망을 쳤습니다. 그것도 도망을 치면서 주인의 돈이나 재산을 훔쳤습니다. 오네시모의 도망은 자신으로부터의 도망이었습니다. 그가 빌레몬의 집에 있는 동안에는 노예의 신분을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주인이 아무리 잘해 주었지만 여전히 노예신분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알고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을 쳤습니다. 자유와 편안한 삶을 향하여 말입니다. 그러나 오네시모는 결국 다시 잡히는 신세가 되었고, 이전보다 더 악화된 환경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도망칠 곳이 없습니다. 모세도 요나 선지자도 예레미야 선지자도 하나님의 명령이 부담스럽고 싫어서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쳐보려 했지만 결코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왜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피하려고 하겠습니까? 그것은 자신의 생각이나 뜻과는 다르며, 희생과 헌신과 자기 버림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부담스럽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예레미야 20:9절입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면 평안할 줄로 여기지만 결코 육신적으로나 영적으로나 평안이 없습니다. 평안은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요한복음 14:27절에서 주님은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은 혹시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피해보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 하나님은 결코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인생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분명합니다. 민수기 23:19절에서,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고 하시며, 이사야 55:11절에서는,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들은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집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알았을 것이지만 오히려 그 은혜의 자리에서 도망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로마 감옥에서 다시 사도 바울을 만난 것입니다. 바울은 순교하기 직전인 로마 감옥에서 오네시모에게 복음을 전했고 오네시모는 하나님의 은혜로 돌아왔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며 인생의 절망의 순간까지도 기회를 주십니다. 인간으로서 더 이상 할 수 없을 때에도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는 열려있으며 기다리고 계십니다. 탕자를 기다리시는 아버지처럼 말입니다. 아버지는 탕자가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자신의 모든 욕망과 기대가 무너지도록 기다리신 것입니다. 오네시모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순간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그토록 자신의 신분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그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얻은 것입니다. 자유와 평화 그리고 넘치는 기쁨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요한복음 8:36절에서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쓸모없는 인생을 가치 있는 인생으로 만드시며 무익한 인생을 유익하게 만드십니다. 여러분의 생애가 빛나고 가치 있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피하려 하지 말고 받아들이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를 피해서 오히려 핍박했던 사울에게 예수님께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행 26:14)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피해 다니는 것이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고생길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고 했는데,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결코 피할 수 없을 테니까 하나님께 모든 생애를 맡기십시오. 그리하면 인생이 새롭게 여겨지고 자신이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대신 죽으시고 생명을 얻은 보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여러분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이 하나님의 은혜를 거듭 거부한다면 인생을 더욱 비참하게 하는 징계만 계속될 뿐입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설령 나 자신의 생각과 뜻과 다르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은 결코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오네시모처럼 순종으로 행복을 누릴 수도 있지만, 요나 선지자나 가룟 유다처럼 고통과 파멸에까지 이를 수 있음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여기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뜻이 임할 때에 순종하심으로 주님 안에서의 기쁨과 행복을 마음껏 누릴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