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울수록 풍성하게 되는 삶
작성자 배의신 댓글
/ 조회: 5,818회
작성일
2010-10-18 17:52
*** 비울수록 풍성하게 되는 삶 / 누가복음 14:25-33
** 들어가는 말
누가복음 14:25-33, “25 수많은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28 너희 중의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29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30 이르되 ‘이 사람이 공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31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 명으로써 저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32 만일 못할 터이면 그가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33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여기에 모인 우리의 중요한 공통점을 몇 가지 꼽는다면, 첫째는 성삼위 하나님을 믿고 섬긴다는 것, 둘째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예수님의 보혈로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 셋째는 천국의 영원한 기쁨을 누리는 보장을 받고 이 땅에서 성도로 사는 것 등일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영과 육신의 풍성한 삶을 말합니다. 새삼스럽게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러한 영과 육신의 삶이 더욱 풍성하게 되는 유일한 길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읽은 본문말씀에서 시작 부분과 마지막 부분의 말씀에서 똑 같이 “…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는 말씀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즉 가운데 피력된 말씀대로 행하지 아니하면 풍성한 삶을 고사하고 천국에도 못 들어간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정말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 말씀을 통하여 확실하게 우리의 삶을 정립하도록 합시다.
※ 먼저 말씀의 내용과 의미를 살펴봅시다.
예수님의 공생애를 통하여 많은 이적을 경험하거나 들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몰려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또 다른 이적을 경험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 또는 자신의 병을 고치고자 하는 사람들, 꼬투리를 잡으려 하는 사람들 등.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있음을 아셨습니다. 물론 진정으로 주님을 따르려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참 생명을 얻는 제자의 길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제자의 길은 간단했습니다. 본문 26-27절의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고, 또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요약하면 본문 33절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려야만 내 제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외적인 소유를 버리고 내적인 자신의 모든 사상과 의지를 비우는 것입니다. “철저한 무소유의 삶”을 말합니다.
‘살기 좋은 부산’이라는 지역 기독교 신문, 2008년 8월 셋째주간에 이런 기사가 실렸습니다. ‘장기기증 운동본부’에서 실은 기독교성결회 총회장을 지냈던 지금은 고인이 된 ‘김용은’목사님에 대한 글입니다.
“홀로 외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배고픈 사람들의 옆에 있었습니다. 몸이 불편한 사람들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나는 본향으로 갑니다. 나는 집도 땅도 통장도 없습니다. 나는 본향 집으로 갑니다. 가족들과 성도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 천국에서 우리 다시 만납시다.”
김용은 목사님의 유서입니다. 평생을 무주택, 무통장, 무토지, 무패물이라는 4무(無)의 신념으로 목회생활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유일한 자신의 소유였던 몸까지 기증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시신과 각막을 사랑의 장기기증 운동본부에 기증한 것입니다.
김용은 목사님은 이 세상을 철저하게 나그네로 사셨던 분입니다. 모든 것을 본향에다 투자하고 57년의 목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옮겨놓으신 분입니다. 이 목사님은 행복의 기준을 ‘하늘 본향’에 두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늘 본향을 너무나 사모했고, 그 본향에 이 땅에서의 모든 것을 몽땅 투자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서 투자를 합니다. 물질 뿐만 아니라 자신의 시간, 노력, 재능, 힘 등. 모든 것을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곳에 투자를 하게 됩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한다.’고 말한다 하더라도, 세상에 투자를 하고 있다면 그는 세상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6:43-44절에서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고 하십니다. 즉 그 사람의 행동이 그 사람의 생각과 삶과 가치관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복의 기준을 ‘하늘 본향’에 두고, 그렇게 삶으로 나타내야 합니다. 만일 그렇게 하지 못할 것 같으면 일찌감치 제자의 길을 포기해야 합니다.
바로 이 내용을 설명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망대를 건축하는 사람의 비유’와 ‘전쟁에 임하는 임금의 비유’를 하신 것입니다. 이 두 비유는 같은 의미를 전하는 ‘쌍둥이 비유’입니다. 즉 ‘시작하기 전에 선후를 잘 분별하여 신중하게 하라.’는 뜻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시작을 했으면 끝까지 달리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이왕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을 선택했다면, 천국에 이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본문의 의미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각오를 가지고 지금 주님을 따르고 있습니까? 만일 하나님과 세상을 적당히 오가면서 요행을 바라는 생활이라면 지금 말씀을 들으면서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 주님의 제자로서 풍성한 삶을 원하면 먼저 비워야 합니다.
이 주제는 이미 자주 언급한 내용입니다. 이 진리는 재론할 필요도 없이 너무도 당연한 이치입니다. 물이 가득 들어 있는 컵에 다른 음료수를 부어서 마시려면 먼저 컵의 물을 비워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가 아닙니까? 내 마음의 생각과 모든 생활에서 세상의 것으로 가득 차 있다면, 아무리 좋은 천국의 것이라 해도 채울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과 행복으로 채우려면 먼저 자신의 영과 육신, 마음과 생활의 모든 자신의 것을 비워야 합니다. 만일 세상의 것으로 가득한 마음 그대로를 가지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브라이언’이라는 열일곱 살짜리 학생이 경험한 것을 간증한 내용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이 학생이 사고를 당해서 죽음 직전에 천국에 가서 어떤 방을 보고 온 내용입니다.
저는 꿈과 현실의 중간 정도에서, 어떤 방 안에 있는 제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그곳에는 어떤 특정한 사람이나 사물은 없었습니다. 다만 한쪽 벽면에 작은 카드들이 꽂혀 있는 서류 정리함 같은 것들이 있었습니다. 각 파일에는 행위의 제목들이 적혀 있었고, 안에는 제가 세상에서 행했던 모든 행위들이 다 적혀 있었습니다. 그 일들이 커든지 작든지 하나하나 세밀하게 적혀 있었습니다. 제가 기억하고 있는 것과는 전혀 비교가 되지 않았습니다.
\"친구들\" 이라는 파일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내가 배반한 친구들\" 이라고 써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제목들은 일렬로 죽 있었습니다. \"내가 읽은 책들\", \"평안함, 위안을 주었을 때\", \"내가 웃었던 농담들\", 어떤 것들은 너무나도 정확한 나머지 웃음까지 나왔습니다. \"내가 내 형제들에게 고함질렀던 것\" 그 밖의 것들은 웃을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화가 났을 때 했던 것들\", \"내가 나의 부모님들 앞에서 중얼거리며 속삭인 말들\", 그 안에 써져 있던 내용물들 때문에 놀라움은 끝이 없었습니다. 그곳에는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기록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제가 살아온 인생 때문에 당황스러웠습니다. 저는 그때의 그 순간이 기록되어 있는 것에 대해서 너무나 메스꺼웠습니다. 한편으론 이런 마음이 저를 지배했습니다. 아무도 이 카드들을 봐서는 않되! 아무도 이 방을 보아서도 않되! 나는 이 방을 없애버려야겠어! 저는 극도로 흥분하여 파일들을 잡아 당겼습니다. 크기가 얼마큼 컸던 간에 저는 이 카드들을 다 꺼내어 불태워버려야 했습니다. 제가 파일들을 잡아 당겨서 바닥에 내려치기 시작했지만, 저는 단 하나의 카드도 없애지 못했습니다.
\"내가 본 T.V 쑈\" 라고 써져있는 파일을 꺼내보았습니다. 저는 이 파일들이 그것에 해당하는 자료들을 담기 위해 계속해서 커져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카드들은 단단한 팩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2-3(약2-3미터) 야드 후에는 저는 파일의 끝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닫았습니다. 창피했습니다. 제가 본 T.V 쑈들의 질 때문이라기 보다는 제가 T.V를 본 시간이 너무나도 거대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복음을 함께 나눈 사람들\"이란 제목을 잡아당기는 손잡이가 다른 것들의 손잡이 보다 더욱 빛이 났습니다. 그리고 거의 사용하지 않은 새 손잡이였습니다. 저는 그 손잡이를 잡아당겼습니다. 그리고 3 인치(약 8cm)도 안 되는 카드 박스가 제 손안에 떨어졌습니다. 저는 카드의 수를 셀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눈물이 났습니다. 저는 흐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너무나 깊이 운 까닭에 아파왔습니다. 그 아픔은 제 배에서 부터 시작해서 저를 꿰뚫어 지나갔습니다. 저는 무릎을 꿇고 울었습니다. 저는 창피함에 울었습니다.
이 학생의 결말은 예수님의 긍휼히 여기시는 은혜를 입어 새로운 삶의 기회를 얻었습니다. 이 학생은 세상의 것을 비우지 못하고 세상의 것으로 가득한 채로 주님 앞에 섰던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세상을 떠나서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면 여러분의 삶을 기록한 방에는 어떤 내용들의 파일들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만일 브라이언 학생처럼 자신을 비우지 못한 채로 세상의 것들로 가득 차 있다면 주님의 책망과 함께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달란트 비유를 하시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을 묻어둔 채로 세상 것으로 채웠던 종에게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5:30절입니다.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왜 세상의 것들을 버리고 비우라고 하십니까? 요한일서 2:15절에서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라고 하시며, 고린도전서 7:31절에서는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고 하십니다.
* 그렇다면 어떻게 버리고 비워야 합니까?
예수님은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대가를 치루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즉 자기의 모든 혈육과 심지어는 자기 자신까지도 미워해야 합니다. 여기서 “미워한다.”는 것은 ‘조금사랑하다’, ‘덜 사랑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로서, ‘상대적로 다른 것보다 덜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뜻합니다. 결국 예수의 말씀은 무리들에게 ‘제자가 되려고 하는 이유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인지 아니면 예수님을 따르려는 것인지를 분명히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님께서 자신의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그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의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하십니다. 자신의 몫의 십자가는 자신 외에는 어느 누구도 질 수 없습니다. 마태복음 16:24절에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버리고 비워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본문 33절을 봅시다.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여기에서 “모든 소유”라 함은 ‘자기 일가친척들과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본문 26,27절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이 소유에는 ①인간적인 혈육의 관계 ②생명 ③주어지는 모든 물질까지를 포함합니다. 이 모든 것을 예수님보다 덜 소중하게 여기며, 덜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소유에 대한 집착은 구원에 이르는 것을 방해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됩니다. 본문 앞쪽의 18-20절을 보십시오. 그 비참함을 이미 보여주셨습니다. 누가복음 18:18절 이하에 나오는 ‘부자 청년’도 소유의 집착으로 인하여 영원한 생명의 풍성한 삶의 길을 포기하고 돌아섰던 사람입니다.
버려야 할 것은 세상적인 물질만이 아닙니다. 자신의 생각과 사상까지도 비워야 합니다. 로마서 10:2-3절에서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라 한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는 것에도 자신의 생각이나 뜻을 내세우게 되면 하나님께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즉 주님을 따르는 길은 자신의 뜻이나 의지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버리고 비워야 할지는 여러분 자신이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십시오.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해 달라고 간구하십시오. 말씀을 많이 읽고 들으십시오. 그 속에 여러분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들어 있습니다.
※ 말씀을 정리합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지옥에 가면 안 됩니다. 하나님 나라에 가려면 세상의 것을 버리고 비워야 합니다. 그래야 영과 육신의 모든 삶이 하나님의 것으로 풍성하게 채워집니다. 세상에서의 주어지는 모든 소유는 ‘내가 이 땅에 머무는 동안 한시적으로 위임된 것’임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나 삶까지도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것을 아깝게 여기지 말고 천국의 영원한 삶을 위하여 사용하고 비우십시오. 수십개의 저금통장과 아무리 소유가 많아도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손짓 한 번이면 모든 것은 안개처럼 사라질 것입니다. 그래도 세상의 것이 좋아서 따라가렵니까? 이제는 확실하게 결정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그 결정은 지금 하셔야 합니다. 본문 33절의 ‘버리다(아포타쎄타이)’라는 단어는 현재형으로서 그 ‘포기’가 지금 당장 결단해야 할 성질의 것임을 말합니다.
지옥과 천국은 비교 대상이 되지를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옥과 천국은 상상의 세계나 망령들의 세계가 아닌, 지금 이 현실의 느낌보다 더 강렬하고 확실한 세상입니다. 천국과 지옥에 대한 확실한 이야기를 듣고 싶으면 오늘 저녁예배에 오십시오. 이제 더 끌지 말고 망설이지 말고 세상의 것 버리고 비워서 주님을 붙잡으십시오. 여러분이 비우는 만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더욱 풍성하게 채워질 것입니다. 여러분의 결단으로 풍성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 들어가는 말
누가복음 14:25-33, “25 수많은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28 너희 중의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29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30 이르되 ‘이 사람이 공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31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 명으로써 저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32 만일 못할 터이면 그가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33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여기에 모인 우리의 중요한 공통점을 몇 가지 꼽는다면, 첫째는 성삼위 하나님을 믿고 섬긴다는 것, 둘째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예수님의 보혈로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 셋째는 천국의 영원한 기쁨을 누리는 보장을 받고 이 땅에서 성도로 사는 것 등일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영과 육신의 풍성한 삶을 말합니다. 새삼스럽게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러한 영과 육신의 삶이 더욱 풍성하게 되는 유일한 길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읽은 본문말씀에서 시작 부분과 마지막 부분의 말씀에서 똑 같이 “…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는 말씀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즉 가운데 피력된 말씀대로 행하지 아니하면 풍성한 삶을 고사하고 천국에도 못 들어간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정말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 말씀을 통하여 확실하게 우리의 삶을 정립하도록 합시다.
※ 먼저 말씀의 내용과 의미를 살펴봅시다.
예수님의 공생애를 통하여 많은 이적을 경험하거나 들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몰려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또 다른 이적을 경험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 또는 자신의 병을 고치고자 하는 사람들, 꼬투리를 잡으려 하는 사람들 등.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있음을 아셨습니다. 물론 진정으로 주님을 따르려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참 생명을 얻는 제자의 길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제자의 길은 간단했습니다. 본문 26-27절의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고, 또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요약하면 본문 33절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려야만 내 제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외적인 소유를 버리고 내적인 자신의 모든 사상과 의지를 비우는 것입니다. “철저한 무소유의 삶”을 말합니다.
‘살기 좋은 부산’이라는 지역 기독교 신문, 2008년 8월 셋째주간에 이런 기사가 실렸습니다. ‘장기기증 운동본부’에서 실은 기독교성결회 총회장을 지냈던 지금은 고인이 된 ‘김용은’목사님에 대한 글입니다.
“홀로 외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배고픈 사람들의 옆에 있었습니다. 몸이 불편한 사람들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나는 본향으로 갑니다. 나는 집도 땅도 통장도 없습니다. 나는 본향 집으로 갑니다. 가족들과 성도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 천국에서 우리 다시 만납시다.”
김용은 목사님의 유서입니다. 평생을 무주택, 무통장, 무토지, 무패물이라는 4무(無)의 신념으로 목회생활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유일한 자신의 소유였던 몸까지 기증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시신과 각막을 사랑의 장기기증 운동본부에 기증한 것입니다.
김용은 목사님은 이 세상을 철저하게 나그네로 사셨던 분입니다. 모든 것을 본향에다 투자하고 57년의 목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옮겨놓으신 분입니다. 이 목사님은 행복의 기준을 ‘하늘 본향’에 두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늘 본향을 너무나 사모했고, 그 본향에 이 땅에서의 모든 것을 몽땅 투자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서 투자를 합니다. 물질 뿐만 아니라 자신의 시간, 노력, 재능, 힘 등. 모든 것을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곳에 투자를 하게 됩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한다.’고 말한다 하더라도, 세상에 투자를 하고 있다면 그는 세상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6:43-44절에서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고 하십니다. 즉 그 사람의 행동이 그 사람의 생각과 삶과 가치관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복의 기준을 ‘하늘 본향’에 두고, 그렇게 삶으로 나타내야 합니다. 만일 그렇게 하지 못할 것 같으면 일찌감치 제자의 길을 포기해야 합니다.
바로 이 내용을 설명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망대를 건축하는 사람의 비유’와 ‘전쟁에 임하는 임금의 비유’를 하신 것입니다. 이 두 비유는 같은 의미를 전하는 ‘쌍둥이 비유’입니다. 즉 ‘시작하기 전에 선후를 잘 분별하여 신중하게 하라.’는 뜻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시작을 했으면 끝까지 달리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이왕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을 선택했다면, 천국에 이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본문의 의미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각오를 가지고 지금 주님을 따르고 있습니까? 만일 하나님과 세상을 적당히 오가면서 요행을 바라는 생활이라면 지금 말씀을 들으면서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 주님의 제자로서 풍성한 삶을 원하면 먼저 비워야 합니다.
이 주제는 이미 자주 언급한 내용입니다. 이 진리는 재론할 필요도 없이 너무도 당연한 이치입니다. 물이 가득 들어 있는 컵에 다른 음료수를 부어서 마시려면 먼저 컵의 물을 비워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가 아닙니까? 내 마음의 생각과 모든 생활에서 세상의 것으로 가득 차 있다면, 아무리 좋은 천국의 것이라 해도 채울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과 행복으로 채우려면 먼저 자신의 영과 육신, 마음과 생활의 모든 자신의 것을 비워야 합니다. 만일 세상의 것으로 가득한 마음 그대로를 가지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브라이언’이라는 열일곱 살짜리 학생이 경험한 것을 간증한 내용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이 학생이 사고를 당해서 죽음 직전에 천국에 가서 어떤 방을 보고 온 내용입니다.
저는 꿈과 현실의 중간 정도에서, 어떤 방 안에 있는 제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그곳에는 어떤 특정한 사람이나 사물은 없었습니다. 다만 한쪽 벽면에 작은 카드들이 꽂혀 있는 서류 정리함 같은 것들이 있었습니다. 각 파일에는 행위의 제목들이 적혀 있었고, 안에는 제가 세상에서 행했던 모든 행위들이 다 적혀 있었습니다. 그 일들이 커든지 작든지 하나하나 세밀하게 적혀 있었습니다. 제가 기억하고 있는 것과는 전혀 비교가 되지 않았습니다.
\"친구들\" 이라는 파일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내가 배반한 친구들\" 이라고 써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제목들은 일렬로 죽 있었습니다. \"내가 읽은 책들\", \"평안함, 위안을 주었을 때\", \"내가 웃었던 농담들\", 어떤 것들은 너무나도 정확한 나머지 웃음까지 나왔습니다. \"내가 내 형제들에게 고함질렀던 것\" 그 밖의 것들은 웃을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화가 났을 때 했던 것들\", \"내가 나의 부모님들 앞에서 중얼거리며 속삭인 말들\", 그 안에 써져 있던 내용물들 때문에 놀라움은 끝이 없었습니다. 그곳에는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기록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제가 살아온 인생 때문에 당황스러웠습니다. 저는 그때의 그 순간이 기록되어 있는 것에 대해서 너무나 메스꺼웠습니다. 한편으론 이런 마음이 저를 지배했습니다. 아무도 이 카드들을 봐서는 않되! 아무도 이 방을 보아서도 않되! 나는 이 방을 없애버려야겠어! 저는 극도로 흥분하여 파일들을 잡아 당겼습니다. 크기가 얼마큼 컸던 간에 저는 이 카드들을 다 꺼내어 불태워버려야 했습니다. 제가 파일들을 잡아 당겨서 바닥에 내려치기 시작했지만, 저는 단 하나의 카드도 없애지 못했습니다.
\"내가 본 T.V 쑈\" 라고 써져있는 파일을 꺼내보았습니다. 저는 이 파일들이 그것에 해당하는 자료들을 담기 위해 계속해서 커져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카드들은 단단한 팩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2-3(약2-3미터) 야드 후에는 저는 파일의 끝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닫았습니다. 창피했습니다. 제가 본 T.V 쑈들의 질 때문이라기 보다는 제가 T.V를 본 시간이 너무나도 거대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복음을 함께 나눈 사람들\"이란 제목을 잡아당기는 손잡이가 다른 것들의 손잡이 보다 더욱 빛이 났습니다. 그리고 거의 사용하지 않은 새 손잡이였습니다. 저는 그 손잡이를 잡아당겼습니다. 그리고 3 인치(약 8cm)도 안 되는 카드 박스가 제 손안에 떨어졌습니다. 저는 카드의 수를 셀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눈물이 났습니다. 저는 흐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너무나 깊이 운 까닭에 아파왔습니다. 그 아픔은 제 배에서 부터 시작해서 저를 꿰뚫어 지나갔습니다. 저는 무릎을 꿇고 울었습니다. 저는 창피함에 울었습니다.
이 학생의 결말은 예수님의 긍휼히 여기시는 은혜를 입어 새로운 삶의 기회를 얻었습니다. 이 학생은 세상의 것을 비우지 못하고 세상의 것으로 가득한 채로 주님 앞에 섰던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세상을 떠나서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면 여러분의 삶을 기록한 방에는 어떤 내용들의 파일들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만일 브라이언 학생처럼 자신을 비우지 못한 채로 세상의 것들로 가득 차 있다면 주님의 책망과 함께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달란트 비유를 하시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을 묻어둔 채로 세상 것으로 채웠던 종에게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5:30절입니다.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왜 세상의 것들을 버리고 비우라고 하십니까? 요한일서 2:15절에서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라고 하시며, 고린도전서 7:31절에서는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고 하십니다.
* 그렇다면 어떻게 버리고 비워야 합니까?
예수님은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대가를 치루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즉 자기의 모든 혈육과 심지어는 자기 자신까지도 미워해야 합니다. 여기서 “미워한다.”는 것은 ‘조금사랑하다’, ‘덜 사랑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로서, ‘상대적로 다른 것보다 덜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뜻합니다. 결국 예수의 말씀은 무리들에게 ‘제자가 되려고 하는 이유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인지 아니면 예수님을 따르려는 것인지를 분명히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님께서 자신의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그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의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하십니다. 자신의 몫의 십자가는 자신 외에는 어느 누구도 질 수 없습니다. 마태복음 16:24절에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버리고 비워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본문 33절을 봅시다.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여기에서 “모든 소유”라 함은 ‘자기 일가친척들과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본문 26,27절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이 소유에는 ①인간적인 혈육의 관계 ②생명 ③주어지는 모든 물질까지를 포함합니다. 이 모든 것을 예수님보다 덜 소중하게 여기며, 덜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소유에 대한 집착은 구원에 이르는 것을 방해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됩니다. 본문 앞쪽의 18-20절을 보십시오. 그 비참함을 이미 보여주셨습니다. 누가복음 18:18절 이하에 나오는 ‘부자 청년’도 소유의 집착으로 인하여 영원한 생명의 풍성한 삶의 길을 포기하고 돌아섰던 사람입니다.
버려야 할 것은 세상적인 물질만이 아닙니다. 자신의 생각과 사상까지도 비워야 합니다. 로마서 10:2-3절에서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라 한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는 것에도 자신의 생각이나 뜻을 내세우게 되면 하나님께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즉 주님을 따르는 길은 자신의 뜻이나 의지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버리고 비워야 할지는 여러분 자신이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십시오.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해 달라고 간구하십시오. 말씀을 많이 읽고 들으십시오. 그 속에 여러분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들어 있습니다.
※ 말씀을 정리합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지옥에 가면 안 됩니다. 하나님 나라에 가려면 세상의 것을 버리고 비워야 합니다. 그래야 영과 육신의 모든 삶이 하나님의 것으로 풍성하게 채워집니다. 세상에서의 주어지는 모든 소유는 ‘내가 이 땅에 머무는 동안 한시적으로 위임된 것’임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나 삶까지도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것을 아깝게 여기지 말고 천국의 영원한 삶을 위하여 사용하고 비우십시오. 수십개의 저금통장과 아무리 소유가 많아도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손짓 한 번이면 모든 것은 안개처럼 사라질 것입니다. 그래도 세상의 것이 좋아서 따라가렵니까? 이제는 확실하게 결정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그 결정은 지금 하셔야 합니다. 본문 33절의 ‘버리다(아포타쎄타이)’라는 단어는 현재형으로서 그 ‘포기’가 지금 당장 결단해야 할 성질의 것임을 말합니다.
지옥과 천국은 비교 대상이 되지를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옥과 천국은 상상의 세계나 망령들의 세계가 아닌, 지금 이 현실의 느낌보다 더 강렬하고 확실한 세상입니다. 천국과 지옥에 대한 확실한 이야기를 듣고 싶으면 오늘 저녁예배에 오십시오. 이제 더 끌지 말고 망설이지 말고 세상의 것 버리고 비워서 주님을 붙잡으십시오. 여러분이 비우는 만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더욱 풍성하게 채워질 것입니다. 여러분의 결단으로 풍성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