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하는 삶
작성자 배의신 댓글
/ 조회: 6,700회
작성일
2010-08-19 13:27
*** 승리하는 삶 / 마가복음 10:35-45
** 들어가는 말
마가복음 10:35-45, “35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36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37 여짜오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3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 39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40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41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화를 내거늘 42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43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44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오늘은 광복 65주년이 되는 날이며, 교회는 광복절 기념주일로 지킵니다. 36년이라는 긴 시간을 주권도 자유도 없이 노예처럼 살았던 우리 민족에게 하나님께서 자유를 주신 날입니다. 고통과 고난의 긴 터널을 지나서 밝고 희망이 있는 승리의 삶을 주신 것입니다. 이 승리의 삶을 위하여 수많은 선조들이 피를 흘리고 희생 했습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노예처럼 살던 애굽에서 나와서 광야 40년을 지나 자유와 희망의 땅 가나안에 입성한 것과 같습니다. 이 땅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이처럼 자유와 희망이 있는 승리의 삶을 살고 싶어 할 것입니다. 그리고 매일의 생활이 승리하는 삶을 이루고자 힘쓰고 땀 흘리며 수고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인생의 마지막이 승리하는 삶이 되게 하려고 자신을 독려하면서 목표를 향하여 달려간다고 했습니다. 빌립보서 3:10-12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고 고백합니다.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도 사도 바울이 가졌던 그 목표와 동일한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는 사람들입니다. 진정한 기쁨과 자유와 행복과 영원한 참 생명이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목표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진정한 승리는 이 목표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 최후의 승리를 위하여 우리는 매일의 삶을 승리하는 삶이 되게 해야 합니다. 매일의 삶이 승리하는 삶이 되게 하려면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하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믿음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요한일서 5:4절에서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우리의 매일의 삶이 승리하는 광복의 삶이 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 먼저, 본문 말씀의 내용과 의미를 살펴봅시다.
본문 내용은 예수님의 마지막 여정으로서 예루살렘 입성을 바로 앞에 두고 있는 시점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말씀하셨을 때에 야고보와 요한 형제가 예수님께 자신들의 소원을 들어달라고 살짝 이야기 했습니다. 이들 형제가 말한 소원은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예수님께서 왕이 되실 때에 우리 형제를 예수님 다음 가는 이인자의 자리를 달라.’는 것입니다. 이 형제는 전혀 상황파악을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말씀하시는데 야고보와 요한은 세상의 명예와 권세를 꿈꾸고 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뿐만 아니라 다른 제자들도 똑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형제의 말을 듣고는 화를 낸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께서 지실 십자가와 그 고난을 너희들이 감당할 수 있겠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형제는 “할 수 있습니다.”라고 장담합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던가요. 야고보와 요한이 그 꼴이었습니다. 지금 예수님과 제자들은 ‘동상이몽(同床異夢)’의 상태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대속의 제물로 바쳐서 인류를 구원하실 소망을 말씀하시는데, 제자들은 세상의 명예와 권력을 꿈꾸고 있습니다. 그러니 동문서답(東問西答)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은 이해도 못하는 제자들이지만 앞으로 그들이 받게 될 고난의 삶을 암시하셨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영광의 자리는 이미 예약이 되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은 세상에서의 삶의 이치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가르치시면서 예수님 당신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야고보와 요한 또는 다른 제자들처럼 동상이몽을 꾸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길이 만사형통하고 마냥 행복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좋으면 무조건 잘 살고 잘돼야 한다고 여깁니다. 즉 부지런히 예배에 참석하고 봉사도 하고 기도와 말씀을 묵상하는 신앙생활의 목적이 이 땅에서의 형통한 삶을 꿈꾸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명예권세를 가지는 것이 승리하는 삶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는 말씀이 그것을 깨우치시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매일의 삶에서 승리하는 삶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 승리하는 삶을 원한다면 집착을 버려야 합니다.
프랑스의 소설가 ‘피에르 로티 (Pierre Loti, 1850~1923)’는 프랑스 해군 장교로서 소설가였습니다. 이 분이 쓴 ‘늙은 죄수의 사랑’이란 작품이 있습니다.
늙은 죄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평생 감옥을 전전하면서 늙었고, 가족이나 친척도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늙은 죄수는 감옥의 작은 창으로 날아온 참새 한 마리와 사귀게 됩니다. 그는 마른 빵 조각을 떼어두었다가 참새에게 나누어주곤 했습니다. 참새도 늙은 죄수와 친하게 되자 창문을 열면 감방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참새는 늙은 죄수가 손바닥으로 내미는 빵 부스러기를 쪼아 먹으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늙은 죄수에게는 칠십 평생에 처음으로 생기 찬 나날이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행복이 그렇듯이 그에게도 행복한 날들이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습니다. 늙은 죄수가 바다 깊숙한 섬으로 이감되게 된 것입니다. 며칠을 두고 생각한 노인은 결국 참새를 데려가기로 결심합니다. 그는 작업하러 밖으로 나갈 때마다 나무개비와 철사부스러기를 주워 와서 자그마한 조롱을 만들었습니다.
드디어 이감되는 날이 되어서 배를 타려는 노인은 허술한 조롱을 가슴에 품고 참새를 소중히 보호했습니다. 그러나 우악스러운 죄수들이 밀고 당기는 혼잡 속에서 노인의 허술한 조롱은 부서져버렸습니다. 놀란 참새가 푸르르 날아올랐지만 이내 수면으로 떨어져버렸습니다. 그것은 참새가 달아날까봐 노인이 참새의 꼬리를 잘라버렸기 때문입니다. “아아! 저 참새를 건져줘요!” 늙은 죄수가 부르짖었지만 우렁차게 울리는 뱃고동 소리에 묻혀버리고, 죄수를 실은 배는 미끄러지듯 항구를 빠져나갔습니다.
이 소설은 늙은 죄수의 쓰라린 고통을 목격한 간수가 친구에게 들려주는 형식으로 전개되는데 이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친구는 \"좋은 새를 구해서 그 가엾은 죄수에게 줘야겠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간수는 \"소용없는 일이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새를 갖다 주더라도 늙은 죄수의 슬픔은 달랠 길이 없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알듯이 사랑이란 결코 다른 것으로 대치할 수 없습니다. 늙은 죄수에게는 그 참새가 아름다운 새냐 아니냐가 문제가 아니라 오직 사랑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소유하려고 했을 때 결국 그 사랑은 사라져버렸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이 이와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의 세상은 사랑의 대상이며, 생명을 전해야 할 대상입니다. 즉 세상의 어떤 것도 잠시 지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소유하거나 마음을 둘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7:31절에서,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요한일서 2:15-17절에서는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문제는 사람의 육신적인 소유욕에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겨야 하며, 복음의 대상으로서 세상을 보아야 하며, 세상의 물질보다 영원한 천국의 소망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육신은 눈에 보이는 것을 가지고 싶고, 누리고 싶은 욕망이 앞섭니다. 야고보와 요한처럼 말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베드로와 함께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세 사람에 속하는 제자들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에게도 ‘세상적인 성공의 삶’은 구미가 당기는 차원을 넘어서, ‘차지해야겠다.’는 유혹거리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이야 부를 쌓거나, 권력을 잡거나, 많은 학식으로 명예를 얻거나, 자녀들의 출세 등등. 모두 육신적인 것들을 ‘성공’의 개념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마저 성공집착증에 빠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대속적인 십자가의 죽음을 말씀하셨지만,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한 야고보와 요한은 “할 수 있나이다.”라고 장담했습니다. 예수님이 받으실 잔인 ‘인류 구원을 위한 십자가의 죽음’은 예수님 외에 어느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공에 몸이 달아오른 제자들에게는 그것이 어떤 것인가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버려야 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오로지 하는 일마다 잘 풀리고, 평안하고 행복한 것, 돈 잘 벌고, 자식 건강하고 출세하고, 자신의 뜻대로 되는, 어려움이 없는 삶에 대한 자신의 욕망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여러분,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 승리하는 삶을 원한다면 하나님의 뜻으로 채우십시오.
승리하는 삶을 원한다면 자신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는 그 자리에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으로 채워야 합니다. 요한일서 5:4-5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라고 하십니다. 이는 예수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모시는 삶을 말합니다.
제자들이 세상적인 성공에 마음을 두자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진정한 승리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가르치십니다. 본문 43-44절을 봅시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예수님은 ‘자기 겸손’과 ‘자기희생’을 말씀하십니다. 즉 자신을 낮추고 자신의 수고로 남을 섬기고 봉사하는 삶이 결국 승리하는 삶이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제자의 길입니다. 그리고 이 길은 주님이시며 선생님이신 예수님께서 먼저 가신 길입니다. 그 말씀이 본문 45절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루어야 할 성부 하나님의 뜻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간구하셨던 기도에서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으로 채우셨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이 없습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도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주님을 믿습니다. 주님은 요한복음 16:33절에서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약함을 아시고 함께하시며 도우시며 격려하십니다. 주님을 의지하십시오.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에게 주신 모든 것을 소유하고 움켜쥐려 하지 말고, 나누고 베풀고 섬기는데 사용하십시오. 그리하면 풍성하게 채우실 뿐만 아니라 승리하는 삶을 이루게 하실 것입니다.
미국의 기독실업인 가운데, 경영과 재력 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성공한 대표적 인물 중에 ‘아더 디마스’라는 장로님이 있습니다. 이분은 신앙에 있어서도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간증 가운데서 세상적인 성공의 비결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그는
“하나님은 그 자녀가 성공하고 형통하기를 원하시는데, 사람이 하나님의 원칙대로 순종하지 않기 때문에 성공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위하여, 주님으로 하여금 사업주가 되게 하는 것이 성공의 비결이라.”고 하면서 자신의 생활 철학을 여섯 가지로 요약했습니다. 주일을 철저히 성수 하라. 하루의 첫 시간은 기도로 주님께 바쳐라. 십일조를 드려라. 더 많은 시간, 더 많은 돈을 주님을 위해 쓰라. 예수님이 가정의 주인이 되시게 하라. 사업의 모든 문제와 필요를 주님이 해결하시도록 하라.
여러분도 자신의 삶에서 승리하는 삶을 이루고자 한다면 먼저 비워야 할 것을 비우십시오. 비우지 않고는 다른 것으로 채울 수 없습니다. 집착하고 있는 세상의 것들을 주님 앞에 내려놓으십시오. 주님께 맡기십시오. 그리고 그 빈자리에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으로 채우십시오. 그리고 그 뜻대로 성실하게 순종하고 따라가면 주님께서 매일을 승리하는 삶으로 채우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능력의 사람으로 진정한 자유와 소망으로 당당하게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 들어가는 말
마가복음 10:35-45, “35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36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37 여짜오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3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 39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40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41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화를 내거늘 42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43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44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오늘은 광복 65주년이 되는 날이며, 교회는 광복절 기념주일로 지킵니다. 36년이라는 긴 시간을 주권도 자유도 없이 노예처럼 살았던 우리 민족에게 하나님께서 자유를 주신 날입니다. 고통과 고난의 긴 터널을 지나서 밝고 희망이 있는 승리의 삶을 주신 것입니다. 이 승리의 삶을 위하여 수많은 선조들이 피를 흘리고 희생 했습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노예처럼 살던 애굽에서 나와서 광야 40년을 지나 자유와 희망의 땅 가나안에 입성한 것과 같습니다. 이 땅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이처럼 자유와 희망이 있는 승리의 삶을 살고 싶어 할 것입니다. 그리고 매일의 생활이 승리하는 삶을 이루고자 힘쓰고 땀 흘리며 수고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인생의 마지막이 승리하는 삶이 되게 하려고 자신을 독려하면서 목표를 향하여 달려간다고 했습니다. 빌립보서 3:10-12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고 고백합니다.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도 사도 바울이 가졌던 그 목표와 동일한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는 사람들입니다. 진정한 기쁨과 자유와 행복과 영원한 참 생명이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목표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진정한 승리는 이 목표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 최후의 승리를 위하여 우리는 매일의 삶을 승리하는 삶이 되게 해야 합니다. 매일의 삶이 승리하는 삶이 되게 하려면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하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믿음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요한일서 5:4절에서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우리의 매일의 삶이 승리하는 광복의 삶이 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 먼저, 본문 말씀의 내용과 의미를 살펴봅시다.
본문 내용은 예수님의 마지막 여정으로서 예루살렘 입성을 바로 앞에 두고 있는 시점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말씀하셨을 때에 야고보와 요한 형제가 예수님께 자신들의 소원을 들어달라고 살짝 이야기 했습니다. 이들 형제가 말한 소원은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예수님께서 왕이 되실 때에 우리 형제를 예수님 다음 가는 이인자의 자리를 달라.’는 것입니다. 이 형제는 전혀 상황파악을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말씀하시는데 야고보와 요한은 세상의 명예와 권세를 꿈꾸고 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뿐만 아니라 다른 제자들도 똑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형제의 말을 듣고는 화를 낸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께서 지실 십자가와 그 고난을 너희들이 감당할 수 있겠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형제는 “할 수 있습니다.”라고 장담합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던가요. 야고보와 요한이 그 꼴이었습니다. 지금 예수님과 제자들은 ‘동상이몽(同床異夢)’의 상태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대속의 제물로 바쳐서 인류를 구원하실 소망을 말씀하시는데, 제자들은 세상의 명예와 권력을 꿈꾸고 있습니다. 그러니 동문서답(東問西答)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은 이해도 못하는 제자들이지만 앞으로 그들이 받게 될 고난의 삶을 암시하셨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영광의 자리는 이미 예약이 되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은 세상에서의 삶의 이치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가르치시면서 예수님 당신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야고보와 요한 또는 다른 제자들처럼 동상이몽을 꾸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길이 만사형통하고 마냥 행복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좋으면 무조건 잘 살고 잘돼야 한다고 여깁니다. 즉 부지런히 예배에 참석하고 봉사도 하고 기도와 말씀을 묵상하는 신앙생활의 목적이 이 땅에서의 형통한 삶을 꿈꾸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명예권세를 가지는 것이 승리하는 삶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는 말씀이 그것을 깨우치시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매일의 삶에서 승리하는 삶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 승리하는 삶을 원한다면 집착을 버려야 합니다.
프랑스의 소설가 ‘피에르 로티 (Pierre Loti, 1850~1923)’는 프랑스 해군 장교로서 소설가였습니다. 이 분이 쓴 ‘늙은 죄수의 사랑’이란 작품이 있습니다.
늙은 죄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평생 감옥을 전전하면서 늙었고, 가족이나 친척도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늙은 죄수는 감옥의 작은 창으로 날아온 참새 한 마리와 사귀게 됩니다. 그는 마른 빵 조각을 떼어두었다가 참새에게 나누어주곤 했습니다. 참새도 늙은 죄수와 친하게 되자 창문을 열면 감방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참새는 늙은 죄수가 손바닥으로 내미는 빵 부스러기를 쪼아 먹으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늙은 죄수에게는 칠십 평생에 처음으로 생기 찬 나날이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행복이 그렇듯이 그에게도 행복한 날들이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습니다. 늙은 죄수가 바다 깊숙한 섬으로 이감되게 된 것입니다. 며칠을 두고 생각한 노인은 결국 참새를 데려가기로 결심합니다. 그는 작업하러 밖으로 나갈 때마다 나무개비와 철사부스러기를 주워 와서 자그마한 조롱을 만들었습니다.
드디어 이감되는 날이 되어서 배를 타려는 노인은 허술한 조롱을 가슴에 품고 참새를 소중히 보호했습니다. 그러나 우악스러운 죄수들이 밀고 당기는 혼잡 속에서 노인의 허술한 조롱은 부서져버렸습니다. 놀란 참새가 푸르르 날아올랐지만 이내 수면으로 떨어져버렸습니다. 그것은 참새가 달아날까봐 노인이 참새의 꼬리를 잘라버렸기 때문입니다. “아아! 저 참새를 건져줘요!” 늙은 죄수가 부르짖었지만 우렁차게 울리는 뱃고동 소리에 묻혀버리고, 죄수를 실은 배는 미끄러지듯 항구를 빠져나갔습니다.
이 소설은 늙은 죄수의 쓰라린 고통을 목격한 간수가 친구에게 들려주는 형식으로 전개되는데 이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친구는 \"좋은 새를 구해서 그 가엾은 죄수에게 줘야겠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간수는 \"소용없는 일이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새를 갖다 주더라도 늙은 죄수의 슬픔은 달랠 길이 없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알듯이 사랑이란 결코 다른 것으로 대치할 수 없습니다. 늙은 죄수에게는 그 참새가 아름다운 새냐 아니냐가 문제가 아니라 오직 사랑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소유하려고 했을 때 결국 그 사랑은 사라져버렸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이 이와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의 세상은 사랑의 대상이며, 생명을 전해야 할 대상입니다. 즉 세상의 어떤 것도 잠시 지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소유하거나 마음을 둘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7:31절에서,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요한일서 2:15-17절에서는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문제는 사람의 육신적인 소유욕에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겨야 하며, 복음의 대상으로서 세상을 보아야 하며, 세상의 물질보다 영원한 천국의 소망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육신은 눈에 보이는 것을 가지고 싶고, 누리고 싶은 욕망이 앞섭니다. 야고보와 요한처럼 말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베드로와 함께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세 사람에 속하는 제자들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에게도 ‘세상적인 성공의 삶’은 구미가 당기는 차원을 넘어서, ‘차지해야겠다.’는 유혹거리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이야 부를 쌓거나, 권력을 잡거나, 많은 학식으로 명예를 얻거나, 자녀들의 출세 등등. 모두 육신적인 것들을 ‘성공’의 개념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마저 성공집착증에 빠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대속적인 십자가의 죽음을 말씀하셨지만,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한 야고보와 요한은 “할 수 있나이다.”라고 장담했습니다. 예수님이 받으실 잔인 ‘인류 구원을 위한 십자가의 죽음’은 예수님 외에 어느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공에 몸이 달아오른 제자들에게는 그것이 어떤 것인가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버려야 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오로지 하는 일마다 잘 풀리고, 평안하고 행복한 것, 돈 잘 벌고, 자식 건강하고 출세하고, 자신의 뜻대로 되는, 어려움이 없는 삶에 대한 자신의 욕망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여러분,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 승리하는 삶을 원한다면 하나님의 뜻으로 채우십시오.
승리하는 삶을 원한다면 자신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는 그 자리에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으로 채워야 합니다. 요한일서 5:4-5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라고 하십니다. 이는 예수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모시는 삶을 말합니다.
제자들이 세상적인 성공에 마음을 두자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진정한 승리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가르치십니다. 본문 43-44절을 봅시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예수님은 ‘자기 겸손’과 ‘자기희생’을 말씀하십니다. 즉 자신을 낮추고 자신의 수고로 남을 섬기고 봉사하는 삶이 결국 승리하는 삶이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제자의 길입니다. 그리고 이 길은 주님이시며 선생님이신 예수님께서 먼저 가신 길입니다. 그 말씀이 본문 45절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루어야 할 성부 하나님의 뜻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간구하셨던 기도에서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으로 채우셨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이 없습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도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주님을 믿습니다. 주님은 요한복음 16:33절에서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약함을 아시고 함께하시며 도우시며 격려하십니다. 주님을 의지하십시오.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에게 주신 모든 것을 소유하고 움켜쥐려 하지 말고, 나누고 베풀고 섬기는데 사용하십시오. 그리하면 풍성하게 채우실 뿐만 아니라 승리하는 삶을 이루게 하실 것입니다.
미국의 기독실업인 가운데, 경영과 재력 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성공한 대표적 인물 중에 ‘아더 디마스’라는 장로님이 있습니다. 이분은 신앙에 있어서도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간증 가운데서 세상적인 성공의 비결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그는
“하나님은 그 자녀가 성공하고 형통하기를 원하시는데, 사람이 하나님의 원칙대로 순종하지 않기 때문에 성공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위하여, 주님으로 하여금 사업주가 되게 하는 것이 성공의 비결이라.”고 하면서 자신의 생활 철학을 여섯 가지로 요약했습니다. 주일을 철저히 성수 하라. 하루의 첫 시간은 기도로 주님께 바쳐라. 십일조를 드려라. 더 많은 시간, 더 많은 돈을 주님을 위해 쓰라. 예수님이 가정의 주인이 되시게 하라. 사업의 모든 문제와 필요를 주님이 해결하시도록 하라.
여러분도 자신의 삶에서 승리하는 삶을 이루고자 한다면 먼저 비워야 할 것을 비우십시오. 비우지 않고는 다른 것으로 채울 수 없습니다. 집착하고 있는 세상의 것들을 주님 앞에 내려놓으십시오. 주님께 맡기십시오. 그리고 그 빈자리에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으로 채우십시오. 그리고 그 뜻대로 성실하게 순종하고 따라가면 주님께서 매일을 승리하는 삶으로 채우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능력의 사람으로 진정한 자유와 소망으로 당당하게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