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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운 듯 어려운 자리

작성자 늘푸른 댓글 / 조회: 994회 작성일 2024-07-14 17:23

*** 쉬운 듯 어려운 자리 / 누가복음 14:7-14

 

누가복음 14:7-14, “7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 택함을 보시고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8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9 너와 그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끝자리로 가게 되리라. 10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이 있으리라. 11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12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 13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14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하시더라.

 

※ 들어가는 말

 

여러분은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할 때, 가장 어렵다고 여기는 것은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자기를 낮추는 겸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겸손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사람과의 관계에서나 하나님 앞에서 반드시 갖추어야 하는 덕목입니다. 예수께서 마태복음 18:3절에서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 싶다면, 아무리 어려워도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라.’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실천하기가 어렵습니다. 예컨대, 정말 보잘것없는 사람을 만났을 때, 그 사람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그 사람을 나보다 낫게 여길 수 있겠습니까? 오늘의 교회에서 물의가 일어나는 많은 부분이 자신을 낮추지 못하는 교만함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무시당하고 있다고 여기면, 아무리 힘없는 사람이라도 화가 나고 분쟁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많은 약속 가운데, 겸손한 사람에게 하신 약속이 가장 풍성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예수께서 본문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가르치십니다.

 

※ 본문 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본문 말씀을 포함하는 14장은 예수께서 안식일에 어느 바리새인의 지도자 집에 식사 초대를 받았을 때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께서는 초대받은 사람들이 서로 높은 자리에 앉으려는 것을 보았습니다. 통상적으로 유대인들의 식탁은 디귿 자 형태의 자리로 되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자리가 높은 사람에게 주어지는 상석입니다. 사람들은 그 높은 자리 가까이에 앉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 자리가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는 자리(head table)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그 모습을 보시고 ‘낮은 마음의 삶’을 가르치셨습니다. 이 말씀에는 겸손한 삶에 대한 비유적 가르침과 실천적인 가르침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가장 핵심적인 구절이 11절의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라는 말씀입니다. 비유의 요점은 이렇습니다. 초대를 받았을 때 높은 자리에 가서 앉으면, 초대받은 사람들 가운데 자기보다 더 높은 사람이 있으면, 그 자리를 내줘야 하므로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됩니다. 하지만, 아예 낮은 자리에 앉으면, 주인이 와서 윗자리로 모시게 되는데, 그때 사람들 앞에서 영광이 됩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높이면 주님이 낮추시지만,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면 주님께서 높여주십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자기를 초대한 주인의 마음을 읽으시고,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삶의 원리를 가르치십니다. 주인은 자신의 신분을 과시하기 위하여 높은 사람들과 부유한 사람들, 즉 그 마을에서 유지들을 초대한 것입니다. 또 다른 속셈은, 여기 초대받았던 사람들이 다음에는 자기를 초대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예수께서는 이것을 경계하셨습니다. 이렇게 서로를 초대하여 갚음이 되면, 하나님께서 갚으실 것이 없게 됩니다. 그래서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갚으실 것이 있도록,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초대하라.’라고 하십니다. 이런 일은 지금의 우리가 실천하기도 힘든 것입니다. 우리 가정에 경사가 있어서 사람들을 초대한다면, 당연히 자신의 신분을 높여줄 높은 지위의 사람들과 부유한 사람들, 명망 있는 사람들을 초대할 것입니다. 예수께서 마태복음 6:1절에서도 경고하십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그래서 하나님께 인정받는 겸손한 마음의 낮은 자리는 쉬운 듯하지만, 실천하기가 어려운 자리입니다.

 

※ 하나님의 자녀가 머물러야 할 삶의 자리가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새 중의 왕은 독수리라고 하지요. 그런데 유일하게 독수리를 공격하는 새가 있습니다. 바로 까마귀입니다. 독수리가 까마귀 영역에 들어오면 까마귀는 가차 없이 독수리를 공격합니다. 그런데, 공격당하는 독수리는 전혀 개의치 않고 위로 솟구쳐 올라갑니다. 왜냐하면, 독수리는 높은 하늘이 자기 영역이지만, 까마귀는 높이 올라가면 호흡을 할 수가 없어서 죽게 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자기 영역이 있습니다. 심지어 천사들도 지켜야 할 영역이 있습니다. 유다서 6절입니다.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여기서 “지위”라는 단어를 헬라어로 알켄(ajrch;n)이라고 했는데, 영어로 first estate(영국의 3신분 중 제1신분인 성직족)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이는 ‘첫 토지, 첫 소유지, 첫 신분’ 등의 뜻인데,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신분의 자리’를 의미합니다. 독수리의 영역이 있고, 까마귀의 영역이 있으며, 천사가 지켜야 할 신분과 위치가 있고, 우리 각 사람이 지켜야 할 신분과 위치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광야 생활할 때, 레위 지파인 고라, 다단, 아비람이 모세와 아론을 거슬러 대적했습니다. 그 때 모세는 “이렇게 하라. 너 고라와 네 모든 무리는 향로를 가져다가, 내일 여호와 앞에서 그 향로에 불을 담고 그 위에 향을 두라. 그 때에 여호와께서 택하신 자는 거룩하게 되리라. 레위 자손들아, 너희가 너무 분수에 지나치느니라.”(민 16:7)라고 했습니다. 결국, 자기 신분과 자리를 지키지 않고 모세와 아론을 시기했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멸망시키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 7:20절에서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라고 했으며, 에베소서 4:7절에서는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 각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벗어나서는 안 되는 신분과 자리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이 지켜야 할 신분과 자리는 무엇입니까? 앞서 보았던 고린도전서 7:20절에서 “부르심의 자리”라고 했습니다. 이 자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시면서 각 사람에게 주신 은사이며 직분입니다. 이것은 말씀 그대로 ‘부르심의 자리’입니다. 즉, 내가 마땅하게 감당해야 할 사명의 자리입니다. 그런데, 이 시간의 말씀에서는 사명의 자리가 아니라, 사명을 감당하는 삶의 자리에 관한 말씀입니다. 좀 더 이해하기 쉽게 빌립보서 2:5-8절을 봅시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과 사람으로 나타나신 목적과 그 성취 즉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자리를 나타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목적을 이루시는 삶의 모습은 요한복음 13:13-15절에서 나타내십니다.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예수께서 친히 본을 보이신 낮은 자리의 삶이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입니다. 예수께서는 신분이 하나님의 본체이시면서 자기를 비워 사람이 되셨고, 속죄 제물이 되셨습니다. 이 자체도 겸손의 모습이지만, 이 땅에서 사역하시며 보이신 삶의 모습도 낮은 자리에서의 겸손한 삶이셨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1:29절에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인이 따라야 할 삶의 자리가 낮은 자리의 겸손임을 사실적으로 나타내신 것이 본문 말씀입니다. 그래서 본문 8절에서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라고 하시며, 본문 12-13절에서는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라고 하십니다. 이는 그리스도인이 자기에게 주어진 신분과 지위를 행할 때, 자기를 드러내지 않는 낮은 자리를 택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답은 간단합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하셨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주님의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계시는 곳에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만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0:27-28절에서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라고 하시며, 17:24절에서는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주님을 따르는 길은 영광스러운 자리이지만, 이 세상에서 이렇게 살기에는 힘이 듭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이 영광을 위하여 자기를 버려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여정을 no cross no crown!, ‘십자가 없이는 영광도 없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어려움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밝히신 많은 약속 가운데, 겸손한 사람에게 약속하신 것이 가장 많고 좋은 것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대표적인 몇 구절을 봅시다. 잠언 15:33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지혜의 훈계라.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 22:4절에서는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상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 스바냐 2:3절입니다.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베드로전서 5:5-6절입니다.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무엇보다 중요한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역대하 7:14절입니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라고 하십니다. 겸손한 성도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기쁘게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가 남을 위해 살고 남을 위해 헌신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더욱 어려운 것은 ‘남모르게 헌신하고 희생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나타내고,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는 명예욕이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도 자신이 한 일을 알아주지 않거나, 남보다 뒷자리에 있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주님께서는 사람들의 이러한 마음을 잘 아십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22:27절에서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라고 우리를 독려하십니다.

 

어떤 젊은이가 늙은 율법 학자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아주 궁금한 것이 있어 그러는데, 질문해도 좋겠습니까?” 늙은 율법 학자가 흔쾌히 대답했습니다. “좋아, 뭐든 물어보게나.” “선생님, 옛날의 그 황금 시절에는 사람들이 그들의 눈으로 신을 보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신과 만났으며, 신은 땅 위를 걸어 다녔다고 합니다. 신은 그들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불렀으며, 사람들은 신과 매우 가깝게 지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요? 왜 신은 땅을 버렸는가요? 왜 신은 이제 땅 위를 걷지 않는가요? 왜 신은 몸부림치는 사람들의 손을 잡아 주지 않는 걸까요?” 늙은 율법 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보게 젊은이, 신은 아직도 살아계신다네. 그런데 사람들이 그를 볼 수 있을 만큼 낮게 구부리는 법을 잊어서 그렇다네.”

 

겸손은 천국의 삶의 방식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주님께서 본을 보이시면서 까지 가르치신 겸손과 낮은 자리를 거부하기 때문에, 하나님도 사람들의 기대를 거절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구하려면 그 사람의 마음에 들도록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물건을 빌리든지 돈을 빌리려면 주는 사람의 조건에 따라야 합니다. 요한복음 12:26절입니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주님을 따르는 자도 주님의 뜻에 따라야 합니다. 마태복음 6:1-18절까지의 말씀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갚으시도록 구제와 기도와 금식, 이 세 가지를 은밀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들의 요점은 ‘사람에게 갚음을 바라지 말고 하라.’라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을 바라는 낮은 자리의 삶이 하나님의 은혜가 보장된 삶의 자리입니다. 지금 주님과 함께 하는 이 자리가 행복이 약속된 자리이며 곧 주님을 높이는 겸손한 삶의 자리입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낮은 자리에서 섬기고 봉사하고 헌신한 일들을 오직 하나님께서 받으시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의 수고와 헌신을 반드시 기억하시고 갚아주십니다. 하나님의 상급을 받을 수 있는 낮은 자리, 겸손한 섬김의 자리가 여러분이 머물고 일하는 자리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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