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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

작성자 늘푸른 댓글 / 조회: 938회 작성일 2024-05-26 16:39

***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 / 고린도후서 1:3-7

 

고린도후서 1:3-7, “3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6 우리가 환난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7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 들어가는 말

 

오래전, 미국의 ‘월스트리트 저널’이라는 유명한 경제 전문지에 이런 광고가 있었습니다. ‘유나이티드 테크놀로지(United Technology)’라는 회사의 광고였는데, 어떤 사람의 사진과 함께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습니다.

“만약 당신이 낙심해 있다면 이 사람을 생각해 보십시오. 학력은 국민학교를 중퇴했고, 시골에서 구멍가게를 열었지만 그나마 파산하였습니다. 빌린 돈을 갚는 데 15년 걸렸습니다. 장가를 갔지만, 악처를 만나 가정생활이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상원의원에 두 번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고, 하원의원 선거에도 두 번씩이나 고배를 마셨습니다. 역사에 길이 남을 유명한 연설을 했지만, 그 당시의 청중은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신문은 연일 그를 비난했고, 나라의 절반에서는 그를 벌레처럼 싫어했습니다. 그런데도 전 세계 곳곳에서 이 사람 때문에 고무를 받고 용기를 얻게 된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죽은 지 백 년이 훨씬 지났음에도 그의 존재는 더욱 새롭게 빛나고 있습니다. 그는 에이브러햄 링컨입니다.”

 

링컨 대통령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회고하기를 “힘겨운 전쟁을 치렀지만 아름다운 삶을 살았다.”라고 합니다. 신앙적으로 볼 때, 링컨 대통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사람을 생각할 줄 알았던 분입니다. 그는 실제로도 극진한 신앙의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은 후대의 사람들에게 여러분의 삶을 어떻게 평가되기를 원합니까? 우리 그리스도인의 롤 모델(role model) 즉 본보기는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요한복음 13:15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 11:1절에서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데살로니가전서 1:6-7절에서는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즉, 그리스도인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으며, 또 다른 사람에게 본이 되는 것입니다. 특히, 본문 말씀에는 환난의 때에 나타나는 그리스도인의 큰 특징을 나타냅니다. 본문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뜻을 찾아봅시다.

 

※ 본문 말씀의 배경과 내용을 봅시다.

 

고린도후서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두 번째 편지인데, 기록된 시기는 주후 55년경입니다. 이 시기는 로마제국의 제5대 황제인 네로가 통치하던 시기여서 기독교의 박해가 극심하던 때였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있는 고린도 시는 여러 민족이 섞여 있는 다민족 문화를 이루고 있었고, 상업이 발달하여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는 이기주의가 가득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돈이 많아 향락산업이 발달했고, 술의 신인 ‘디오뉴소스(박카스)’, 아폴로 신전, 아프로디테 여 신전, 등이 있어서 우상숭배가 극치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환경에 있는 고린도 교회도 여러 가지 죄악들을 용납하고 있어서 바울의 근심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첫 번째 편지를 보냈지만, 고린도 교회는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직접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여 책망하면서 말씀으로 가르쳤습니다. 그런데도 별로 달라지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 후에 ‘디도’로부터 ‘고린도 교회가 회개했으며, 사도 바울을 사모한다.’(고후 7:7)라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바울이 이 두 번째 편지를 썼습니다. 이 편지 서두에서 바울은 먼저 신앙을 지키기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고난을 무릅쓰고 믿음을 지켜가는 성도들을 위로합니다. 이러한 위로가 필요한 이유는 타락한 세상에서 믿음을 지키려면, 손해와 고난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진실하게 살고자 한다면, 세상에서 많은 고난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디모데후서 3:12절입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그러나 고난만 예고된 것은 아닙니다. 만일 고난만 있다면 무슨 맛으로 예수님을 따라가겠습니까?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고난은 분명한 목적이 있으며, 고난에 상응하는 위로와 보상도 보장해 주십니다.

 

※ 우리 삶의 본이 되시는 예수님

 

본문 말씀에서는 성부 하나님을 ‘위로의 하나님’으로 표현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친히 위로하시는 본보기로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합니다. 본문 3-5절입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그런데, 세상 적으로 본다면 예수께서는 인생의 실패자에 더 가깝습니다. 돈이 많았습니까? 명예를 얻었습니까? 권력을 가졌습니까? 학식이 많았습니까? 하다못해 추종자라도 많았습니까? 사실 사람들이 볼 때는 예수님은 가진 것도 이룬 것도 없었습니다. 젊은 나이인 33세에 동족들로부터 미움을 받아 처참하게 죽임을 당한 실패자입니다. 이사야 53:2-3절에서 이 사실을 잘 표현했습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하지만, 예수님의 3년이라는 짧은 공생애에서, 사람이 흉내 낼 수 없는 사랑과 긍휼, 관용하시는 최고의 인격의 삶을 본으로 남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무리 비천한 사람이라도 인정하고, 칭찬하고,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예컨대, 예수께서 잡히셨을 때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 예수께서 죽으신 후에 실망하고 낙심하여 고기잡이로 돌아갔던 제자들, 예수께서는 책망과 훈계보다는 삶으로 격려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밤새도록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하고 빈 배로 돌아왔을 때 부활하신 주님이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요한복음 21:9)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실패한 제자들을 책망하지 않으시고, 새벽에 빈 배로 돌아오는 제자들을 위하여 불을 피우시고 음식까지 준비하셔서 위로하고 격려하셨습니다. 나인성 과부의 독자가 죽었을 때도, 예수님은 상여를 멈추어 세우시고 독자를 살려주심으로 과부를 위로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에게도 하나님으로서의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나 옹졸합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 때를 따라 베푸시는 은혜는 헤아릴 수도 없는데, 우리는 너무 무관심하고 냉랭한 마음으로 주님을 대하고, 사람들을 대합니다. 예수께서는 이런 때를 염두에 두시고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마 24:12)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의 환경을 따르는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본으로 따르는 그리스도의 사람들입니다. 특히, 지금처럼 세상이 전쟁과 재난으로 흉흉하고 어지러울 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위로의 본을 따르며 실천해야 할 때입니다.

 

※ 우리는 예수님의 어떤 부분을 닮아야 합니까?


본문 말씀에는 “위로”라는 말이 무려 10번이나 사용되었습니다. 이 “위로”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parakaleo라고 합니다. 이 단어는 ‘가까이서 부르다.’, ‘위로하다.’, ‘용기를 북돋아 주다.’, ‘슬픔을 없애주는 행위’ 등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힘들고 어려울 때면 누군가가 곁에 있어 주고, 위로해주기를 바라게 됩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초상집에서 밤을 새워주는 그런 미덕이 있었습니다. 즐거울 때 함께 하기는 쉽지만, 힘들고 어려울 때 함께 하는 것은 하고 싶은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들도 경험하셨겠지만, 인생이 힘들 때 함께 했던 사람들이 오래 기억되고 감사하게 됩니다. 예수께서 공생애를 통하여 보이신 것도 이것이며, 사도들이나 초대교회 성도들의 모습도 이러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는 잘 되는 것, 성공, 부유한 삶, 높은 자리 등. 세상의 가치관과 똑같이 닮아가고 있습니다. 서로 참아주고, 믿어주고, 용서하고, 이해하고, 위로와 격려하는 모습은 고대 유물처럼 되어버렸습니다.

 

어느 장로님이 사업에 실패하여 많은 빚을 안고 도산했습니다. 온 가족이 이로 인하여 사람들에게 시달리고, 물질적으로도 많은 어려움에 빠졌습니다. 자신은 견딘다고 해도 가족들 생각하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어느 날, 괴로운 마음으로 밖에 나가서 밤늦도록 거리로, 강변으로 배회하면서 별의별 생각을 다했습니다. ‘아주 이대로 집을 나가버릴까, 아니면 그만 죽어버릴까’ 결국 밤 12시가 다 되어서야 힘없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집에는 온통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고 아내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내는 “왜 이렇게 늦으셨어요?”라며 반갑게 맞이합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손을 잡고는 방으로 데려갔습니다. 잠깐 함께 기도한 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온 세상 사람들이 당신을 보고 손가락질한다 해도 나는 당신의 진실을 믿습니다. 비록 부도가 나서 많은 빚을 졌지만, 당신의 진실은 부도나지 않았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당신은 결코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는 당신이 다시 일어난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그 옛날 욥이 다시 하나님의 복을 받아 일어난 것처럼, 당신도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 언젠가는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변함없이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지금의 당신을 가장 뜨겁게 사랑합니다.” 그 말을 들은 장로님은 체면이고 뭐고 가릴 것도 없이 아내를 안고는 울고 말았습니다. 자신을 믿어주는 아내가 너무나 고마웠습니다. 아내의 두 손을 맞잡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는 “온 세상 사람이 다 나를 죄인으로 보더라도 당신만 나의 진실을 믿어준다면, 나는 다시 일어날 것이오.”라고 했습니다. 그날 이후, 장로님은 다시 용기를 얻었고, 몇 년이 지난 후 사업을 다시 일으켜 세웠으며, 지금도 신실하게 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심리학자들은 한결같이 말하기를 “결함이 가장 많은 사람이 남을 가장 많이 비판한다.”라고 합니다. 미국에 이런 격언이 있습니다. “심장에 치명적인 것이 두 가지가 있다. 계단을 뛰어오르는 것과 남을 깎아내리는 것이다.” 즉 남의 약점과 실수를 꼬집는 것은 상대방과 자신을 동시에 죽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옛소련의 장수학자인 ‘구리아닌’ 교수는 자신의 논문에서 “단명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여러 사람이 모인 곳에서 대화를 석권하거나, 남을 헐뜯기 좋아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친하고 가깝다는 이유로 자기 뜻을 강요하거나 함부로 대할 때가 있습니다. 가족들이나 친한 친구들, 또는 친한 이웃들에게 악한 생각 없이 던진 말 한마디가 상처를 주는 일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가까운 사람일수록 더 많이 위로해야 하며 격려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가까운 사람일수록 생활이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으며, 그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면 그 영향은 곧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아름다운 위로자의 본으로 나타내셨습니다. 본문 3-4절입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께 받는 위로로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위로자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에서도 ‘핍박과 어려움으로 고통받는 성도들에게 부활과 영생의 소망을 전하여 위로하라.’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위로와 격려는 사람들에게 힘을 얻게 하며 세우는 것으로, 예수께서 본을 보이신 사랑의 묘약입니다.

 

어두울 때는 작은 빛이라도 밝게 빛납니다. 지금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위로와 격려로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해야 할 때입니다. 실천을 미루지 말고 이 시간 이후부터 가장 가까운 가족들부터 시작해서 위로와 격려와 인정하는 아름다운 삶으로 예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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