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 에베소서 2:11-22
에베소서 2:11-22, “11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 들어가는 말
요즘 세상은 아이러니(irony)한 일이 참 많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는 관계성의 아이러니입니다. 세계는 날이 갈수록 소통의 방법이 발달하면서 언어와 풍습이 다르면서도 하나를 이루고 있습니다. 서로 지구 반대편에 있지만, 실시간으로 소통하면서 마치 한 가족처럼 관계가 개선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SNS(social network service) 하나쯤은 사용하실 것입니다. 이 SNS를 ‘사회관계망’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나라에서 주로 통용되는 SNS에는 페이스북(facebook), 카카오스토리(kakaostory), 인스타그램(instargram), 밴드(band), 트위트(twiter) 등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관계망을 통하여 자신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과 공유하고 소통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전혀 모르는 사람들과는 쉽게 소통하면서, 가장 가까운 가족이나 일가친척, 친구, 성도들과는 소통이 먹통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정의 달을 지나면서 우리도 조금 더 고민해야겠습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은 본문 14-15절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된 가족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예수께서 십자가로 이루신 화목의 말씀을 통하여 관계 회복을 고민해보려 합니다.
※ 본문 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에베소서는 교회의 성격과 교회가 해야 하는 일에 관하여 소상하게 밝히는 책입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에베소라는 도시는 소아시아의 서해안에 있는 에게해에 접한 항구도시입니다. 그래서 고대로부터 교통이 발달하고 교역이 활발하여, 상업과 정치와 종교의 중심지로, 고대 아시아 최대의 도시를 이루었습니다. 에베소는 종종 그리스도 신앙의 셋째 가는 도시라고 불렸습니다. 예루살렘이 첫째이고 안디옥이 둘째였는데, 이 중에서 에베소는 가장 부유한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이곳에는 다이아나(Diana, 로마신화의 ‘사냥의 여신’ ‘달의 여신’ ‘자연의 여신’) 신전을 비롯한 거대한 신전들이 있으며, 난잡한 우상 숭배가 생활처럼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곳에 있는 에베소 교회는 신앙을 지키기가 정말 어려웠습니다. 사도 바울은 2차와 3차전도 여행 때, 이곳에 들러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습니다. 바울은 다른 어떤 도시보다 오래 에베소에 머물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수께서 요한계시록 2:2절에서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인내를 알고”라고 하셨는데, 이는 ‘부귀영화가 있고 타락한 도시에서 신앙을 지킨다는 것이 그만큼 힘들고 어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에베소 성도들은 신앙에 대하여 조금만 눈감고 세상과 타협하면 부와 쾌락을 누리며 평안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잘 아는 사도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에베소 교회를 염려하며 편지를 썼습니다. 바울의 염려하는 마음이 사도행전 20:31절에 “그러므로 너희가 일 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라고 하는 말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편지가 바로 에베소서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사람과 사람,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 회복의 이유와 당위성, 그리고 회복의 결과를 말씀합니다.
※ 관계 회복이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전에 목회자들이 어느 식당에서 식사할 때였습니다. 건너편 쪽의 방에서 회식하는듯한 단체 손님이 있었습니다. 왁자지껄 시끄럽게 떠드는 걸 보니 술판이 벌어진 것 같았습니다. 한 참 후 건배를 하는데, 한 사람이 ‘우리가 남이가!’라고 선창을 하고 뒤이어 합창으로 ‘우리가 남이가!’를 외쳤습니다. 그 말을 들은 우리 일행 중 한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래, 술 마실 때는 남이 아니지, 내일 아침에 깨고 봐라. 그때도 남이 아닌가?!’ 인간 세상에서 하나 된 관계를 이룬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두 사람만 모여도 티격태격 의견충돌이 생기 마련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안정되고 평안이 있는 곳이 가정입니다. 예전에 home sweet home(즐거운 나의 집)이라는 노래가 있지요?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뿐이리, 내 나라 내 기쁨 길이 쉴 곳도 꽃 피고 새우는 집 내 집뿐이리.’ 마음이 울컥하게 하는 노래인데, 이런 집이 지금은 찾아보기조차 어렵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 되지 못하고 티격태격하던 때를 본문에서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다.”라고 표현합니다.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다.”라고 하십니다. 즉, 마음이 하나 되지 못하여 멀어졌던 관계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관계 회복을 말씀합니다.
‘존 그레이(John Gray)’ 박사가 쓴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남녀관계의 바이블로 통하는 사랑에 관한 지침서입니다. 이 책은 30여 년간 부부들을 위한 상담센터를 운영하면서, 부부 사이의 갈등의 원인과 치유법 연구에 몰두해온 그레이 박사의 ‘화성 남자, 금성 여자 시리즈’에 속합니다. 이 책에서는 남녀가 다른 행성에서 왔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갈등이 시작되고 있다고 봅니다. 남자가 왜 연인과 어느 정도의 거리감이 있어야 하는지, 여자는 왜 변덕이 심한 것처럼 보이는지 등, 남녀의 근본적인 차이를 다양한 실례를 통해 재미나게 풀어갑니다. 화성에서 온 사람 같은 남자, 그리고 금성에서 온 사람 같은 여자. 이처럼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들이 만나서 사랑하고 결혼하게 됩니다. 좋을 때는 오히려 서로 다르다는 것을 통해서 매력을 느낍니다. 단점까지도 사랑스럽고 좋습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 ‘왜 다르냐? 나를 닮아라.’, ‘왜 여자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느냐?’라며 싸우고 미워합니다. 서로 사이가 좋을 때는 전부 같은 것뿐이고, 그래서 서로 하나가 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식고 나면 서로 다른 것만 보이고 갈등이 일어납니다.
존 그레이 박사는 하나 되려면 ‘이런 서로의 다른 점을 이해해야 한다.’라고 합니다. 아예 ‘처음부터 화성에서 온 남자와 금성에서 온 여자가 만났다는 전제를 두어야 한다.’라는 말입니다. 이처럼 서로의 다른 환경을 이해하게 되면, 소통되고 관계가 회복되어 하나를 이룰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 생활의 실제에 있어서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을 풀어낸 것입니다. 이 상황을 근본적으로 해결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서 관계 회복을 이루셨다고 하십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대속(代贖) 제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목적이 관계 회복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회복을 먼저 말씀하시고, 이어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 회복을 말씀하십니다. 이는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관계 회복의 순서입니다. 본문 14-16절을 봅시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그리고 이렇게 관계를 회복해야 하는 목적을 18절과 21-22절에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과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스위스의 철학자인 ‘힐티’는 ‘특별한 인간 행복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했습니다. 아무리 인간적인 방법과 논리, 그리고 지식을 가지고 행복을 추구하려 해도 이는 추상적인 것에 불과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힐티는 성경을 읽었고, 성경 안에서 참다운 행복론을 깨달았습니다. 그 후, 그는 모든 사람에게 추앙받는 행복론자가 되었습니다. 77년이라는 인생을 살면서 그는 그리스도를 발견한 그때부터 매일같이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감사하고, 찬송하는 생활을 되풀이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바로 주님 안에 있는 시간이 가장 행복한 시간이며, 찬송하는 시간이 평화로운 시간임을 경험했습니다. 이 사실을 자신의 행복론에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77세로 세상을 떠날 때, 그의 책상머리에는 빛바랜 낡은 성경과 ‘영원한 평화’라는 논문을 쓰다 둔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힐티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이 진정한 평화와 행복을 추구했지만, 세상의 것으로는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죄가 있는 곳에는 진정한 평화도 행복도 없기 때문입니다. 죄는 불법과 거짓을 만들고, 불법과 거짓은 갈등을 일으키며, 이러한 갈등의 골이 깊어지면 관계는 끊어집니다. 사람들은 갈등과 단절의 근본적인 원인을 해결하지 않고, 자신의 욕망만 채우려고 합니다. 죄가 해결되지 않은 곳에는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장벽은 결단코 없어지지 않습니다. 본문 12절의 “그 때에”라는 접속사가 이러한 죄로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를 나타냅니다. 즉, 예수 믿기 전의 우리의 상태가 ‘우상과 미련한 세상 풍습과 육체를 따라서 살아갔던 이방인이었다.’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했고 어두움 가운데서 무의미한 삶을 살아가야만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4:3절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하였더니” 예수 그리스도 없이 살아가는 어떠한 삶도 참된 소망이나 만족이나 행복이 없는 길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죄 아래서 소망도 없이 갈등과 단절과 고달픈 삶을 사는 인류에게 참된 소망과 행복을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로마서 5:8절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예수님의 사역이 죄의 장벽에 갇혀 단절된 우리를 해방하시고 끊어진 관계를 회복시키셨습니다. 본문 13-18절입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3절의 “이제는”이라는 접속사는 상황의 반전을 나타냅니다. 즉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관계가 정립되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기를 원한다면, 사람과의 관계를 먼저 회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 사이에 갈등과 단절이 해결되지 않고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지 않으면, 세상에서의 행복도, 영원한 생명의 보장도 없습니다.
결론으로 본문 19-22절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과의 관계, 사람과의 관계를 회복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요약하면, “우리는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한 가족이다.”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누구에게든지 원망듣거나, 갈등으로 관계사 소원해진 가족이나 일가친척, 친구, 이웃들은 없습니까?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관계를 회복합시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복을 누리며, 소망에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이루게 합니다. 히브리서 12:14절입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이번 가정의 달에 모든 관계를 회복하여 주님이 이루시는 기쁨과 평화를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