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자리
***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자리 / 여호수아 6:15-25
여호수아 6:15-25, “15 일곱째 날 새벽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서 전과 같은 방식으로 그 성을 일곱 번 도니 그 성을 일곱 번 돌기는 그 날뿐이었더라. 16 일곱 번째에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외치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 성을 주셨느니라. 17 이 성과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은 여호와께 온전히 바치되 기생 라합과 그 집에 동거하는 자는 모두 살려 주라. 이는 우리가 보낸 사자들을 그가 숨겨 주었음이니라. 18 너희는 온전히 바치고 그 바친 것 중에서 어떤 것이든지 취하여 너희가 이스라엘 진영으로 바치는 것이 되게 하여 고통을 당하게 되지 아니하도록 오직 너희는 그 바친 물건에 손대지 말라. 19 은금과 동철 기구들은 다 여호와께 구별될 것이니 그것을 여호와의 곳간에 들일지니라.’ 하니라. 20 이에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 소리를 들을 때에 크게 소리 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백성이 각기 앞으로 나아가 그 성에 들어가서 그 성을 점령하고 21 그 성안에 있는 모든 것을 온전히 바치되 남녀노소와 소와 양과 나귀를 칼날로 멸하니라. 22 여호수아가 그 땅을 정탐한 두 사람에게 이르되 ‘그 기생의 집에 들어가서 너희가 그 여인에게 맹세한 대로 그와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어내라.’ 하매, 23 정탐한 젊은이들이 들어가서 라합과 그의 부모와 그의 형제와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어 내고 또 그의 친족도 다 이끌어 내어 그들을 이스라엘의 진영 밖에 두고, 24 무리가 그 성과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을 불로 사르고 은금과 동철 기구는 여호와의 집 곳간에 두었더라. 25 여호수아가 기생 라합과 그의 아버지의 가족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살렸으므로 그가 오늘까지 이스라엘 중에 거주하였으니 이는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정탐하려고 보낸 사자들을 숨겼음이었더라.”
** 들어가는 말
세상 만물에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창조 원리가 많이 있습니다. 나무는 위를 향하여 자라고 뿌리는 땅으로 향하는 것, 따듯한 공기는 위로 차가운 공기는 아래로 향하는 것, 물은 0도에서 얼고 100도에서 끊어 기체가 되는 것,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르는 등.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에도 원리가 있습니다. 잠언 3:34절입니다.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 야고보서 4:6절에서도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라고 하십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는 낮은 자리로 임하십니다. 제가 자주 사용하는 예화 중 하나입니다.
하버드대 신학대학 교수인 ‘헨리 나우엔(Henri J. M. Nouwen, 1932-1996)'박사는 지적장애자 공동체인 ‘라르쉬 데이브레이크(L' arche Daybreak)’에서 봉사했습니다. 그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신학자이며 존경받는 교수였습니다. 어느 날, 그는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장애자 공동체의 봉사자로 들어갔습니다. 이 ‘라르쉬’공동체는 헨리 나우웬 교수가 봉사자로 있으면서 유명해졌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전도유망한 길을 버리고 갑자기 왜 그러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쓴 ‘예수님의 이름으로’라는 책에서 ‘왜 라르쉬 공동체의 봉사자로 오게 되었는지’를 밝히면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그동안 올라가는 길만을 추구했습니다.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해 ‘천재’, ‘신동’이라는 칭찬을 받으면서 자랐고, 하버드대학의 교수가 되기까지 줄곧 올라왔습니다. 지금까지 오직 성공만을 향하여, 다시 말하자면 꼭대기를 향하여 오르막길만을 달려왔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정신지체인 ‘아담’을 만났을 때, ‘이런 사람들의 아픔에 동참하는 내리막길을 통하여 예수님을 바로 알 수 있다.’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복지시설의 봉사자로 들어왔습니다. 지금까지의 오르막길에서는 예수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내리막길에서 나는 복음서에 나타난 진정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대부분이 더 나은 삶, 더 높은 자리, 더 많은 소유를 추구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하면서도 십자가는 외면하고 영광만을 바라봅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영원한 영광을 이루는 삶은 좁은 문, 좁은 길로 가는 믿음과 용기가 있어야 하며, 이 길에는 고난과 불편함이 따른다고 하셨습니다. 즉 안전하고, 편안하고, 만사형통을 최고로 아는 세상에서 통용되는 상식으로는, 영원한 영광의 길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도 이르지 못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본문 말씀에 나오는 여리고 성의 기생 라합의 이야기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 본문 말씀의 내용과 의미를 봅시다.
성경에는 이스라엘을 이루는 족보가 나옵니다. 이 족보에는 특별한 다섯 명의 여인이 들어 있습니다. 다말, 라합, 룻,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 마리아입니다. 다말은 유다의 며느리였지만, 시아버지의 아들을 낳았고, 라합은 본문에 나오는 대로 여리고의 기생이었고, 룻은 모압 여인이었고, 밧세바는 우리야의 아내였지만 다윗이 빼앗았던 여인이었으며, 마리아는 처녀의 몸으로 성자 예수님을 낳았던 여인입니다. 이는 성경이 편견 없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음을 나타내며, 동시에 역사 속에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합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가나안의 첫 성인 ‘여리고’에 사는 기생 라합은 천한 인생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도 멸시받는 천한 인생이 어떻게 믿음의 전당인 히브리서 11장에 언급이 되고, 예수님의 족보에까지 오를 수 있었겠습니까?
라합의 이야기는 여호수아 2장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본문 말씀에 그 결과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간단하게 내용을 봅시다.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 군대가 여리고 성을 정복할 때였습니다. 여호수아는 싯딤에서 여리고 성으로 두 정탐꾼을 보냈습니다. 두 정탐꾼은 가장 숨기 쉬운 성벽 위에 있는 기생 라합의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라합은 이들이 이스라엘 정탐꾼임을 알면서도 위험을 무릅쓰고 자기 집에 유숙시켰습니다. 정탐꾼이 침투했다는 보고를 들은 여리고 왕은 라합에게 군사를 보내어 ‘네 집에 유숙한 이스라엘의 간첩을 끌어내라.’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라합은 이들을 지붕에 숨기고 ‘그들이 왔었지만 해가 질 무렵에 떠났다.’라고 허위 보고를 했습니다. 그 후, 라합은 정탐꾼이 숨어 있는 지붕에 올라가서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알기 때문에 나나 이 땅 백성이 두려워한다. 우리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 홍해를 마르게 하시고, 아모리의 두 왕을 전멸시킨 일을 다 들었기 때문에 정신을 잃었다. 그러니 내가 너희를 선대 한 것처럼, 후에 내 부모 형제들을 살려 주겠다고 여호와 앞에 맹세하고 진실한 표를 내라.”라고 요구했습니다. 라합은 이스라엘의 정탐꾼임을 알고도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을 위하여 위험한 모험을 한 것입니다. 정탐꾼들로부터 약속을 받은 라합은 그들을 줄로 성벽 아래로 달아내려 도피시켰습니다. 정탐꾼들은 라합에게 전쟁이 시작되거든 창문에 붉은 줄을 매어 표시하면 그 집에 있는 사람은 다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했습니다. 그 결과가 본문 25절에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기생 라합과 그의 아버지의 가족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살렸으므로 그가 오늘까지 이스라엘 중에 거주하였으니…” 라합의 죽음의 위험까지도 감내하는 용기 있는 행동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겸손한 삶이 예수님의 족보에 오르는 영광을 이루게 했습니다.
※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자리가 어디입니까?
라합의 삶은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천하게 여겨졌습니다. 성벽 위에 집을 짓고 지나가는 나그네들을 끌어들여 먹고 사는 천한 기생의 신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여리고 성에 사는 그 누구도 갖지 못했던 진정한 삶의 가치관이 있었습니다. 여리고 백성은 광야를 여행하는 나그네들을 통하여 당시에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애굽을 나온 것과 홍해에서 애굽 군대를 몰살시키는 기적이 일어난 것도 알았습니다. 그리고 최근에 일어난 강한 아모리의 두 왕인 시혼과 옥을 죽이고 정복한 일까지도 알았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라합은 이 모든 일이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행하셨다는 것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 2:9-11절에서 이 사실을 말하는데, 11절에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라는 표현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라합이 “하나님 여호와”라고 불렀다는 것은, 하나님을 알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라합이 하나님을 알았다고 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라합은 자기의 믿음을 행동으로 나타냈습니다. 여리고의 왕이 명령하여 라합의 집을 수색하게 했을 때, 라합은 이스라엘 정탐꾼 두 명을 지붕에 숨겼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이 이미 떠났다고 했습니다. 라합의 이런 행동은 죽음을 부르는 위험천만한 것이었습니다. 만일 정탐꾼을 숨긴 것이 들통난다면, 목숨을 부지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위험을 무릅쓸 수 있었던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께서 이루실 모든 계획을 확신했었기 때문입니다. 라합의 이런 믿음의 행동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게 했습니다. 즉 라합은 ‘죽으면 죽으리라.’라는 에스더처럼, 하나님의 뜻을 온전하게 믿었고 겸손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위험까지도 감내하는 믿음의 용기가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14:26-27절에서는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을 확실하게 믿고, 순종하는 사람이 아니면 결코 행동하지 못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행동으로 옮긴 사람이 바로 라합입니다. 라합은 하나님을 믿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자기 생명을 내놓고 따를 최상의 가치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모든 것을 걸고 소유했습니다. 마태복음 13:14-16절에서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라고 했습니다.
뻐드렁니 때문에 놀림을 많이 당하는 여자아이가 있었습니다. 아이가 8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9살 때에는 남동생이 죽고, 다음 해에는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이에게는 불행이 끊이지를 않았습니다. 원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가족을 모두 잃고 혼자가 되어버린 어린 소녀는 어렵게 학교에 다녀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비관하지 않았습니다. 어른이 되어 결혼하고 자식을 가졌습니다. 여섯 명의 자식 중 한 명이 요절했을 때도 그녀는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사랑해줘야 할 아이가 아직 다섯이나 있어.’라며 위안을 삼았습니다. 그녀의 남편이 아직 한창 젊은 39살의 나이에 하반신이 마비되어 휠체어를 타게 되었을 때도 그녀는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남편을 끝없이 독려하고 현명하게 내조하여 남편이 미국의 대통령으로 당선될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안나 엘리너 루스벨트’입니다. 미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4선 대통령(32대)인 ‘프랭클린 델러노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의 부인이며, 미국이 가장 사랑하는 영부인입니다.
안나 엘리너 루스벨트처럼 어떤 환경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일어서는 힘을 세상에서는 ‘회복탄력성(resilience)’이라고 합니다. 회복탄력성은 ‘크고 작은 다양한 역경과 시련과 실패에 대한 인식을 도약의 발판으로 삼아 더 높이 뛰어오르는 마음의 근력’을 의미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라합처럼 믿음에 대한 회복탄력성이 강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가만히 앉아서 얻을 수 있는 값싼 것이 아닙니다. 자기 생명과 모든 것을 내어놓고라도 차지해야 할 가장 값비싼 것입니다. 마음과 생각은 자기중심에서 하나도 바뀌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원한다면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 확신하는 믿음과 용기 있는 실천적인 삶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