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하나님의 은혜가 이르는 길
*** 하나님의 은혜가 이르는 길 / 마태복음 6:3-6, 16-18
마태복음 6:3-6, 16-18, “3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4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5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16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17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18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 들어가는 말
세상에는 수많은 종류의 길이 있습니다. 사람이 다니는 길인 인도(人道), 차가 다니는 차도(車道), 물이 다니는 수로(水路), 전기가 다니는 전선(電線) 등. 모든 길은 연결되어 있어야 길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만일, 어느 부분이 끊어진다면, 길의 역할을 원활하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생명처럼 중요한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영이 하나님과 소통하는 영도(靈道)입니다. 즉, 영이 통하는 길인데, 흔히 기도(祈禱)가 영도(靈道)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능력이 임하는 길입니다. 이 길은 마치 우리 몸의 혈관과 같아서, 온몸과 영에 생명과 활력을 공급하는 생명 길입니다. 이 길은 하나님의 관심과 나의 관심이 같아지는 소통의 길입니다. 이 시간의 본문 말씀이 이 사실을 확실하게 각인시킵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이르는 소통의 길에 관하여 살펴보려 합니다.
※ 본문 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본문 말씀은 익히 잘 아시는 산상수훈의 중간 부분에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세상의 문학가들조차도 ‘문학의 백미’라고 부르는 산상수훈은 예수께서 가르치신 하나님의 자녀들의 생활수칙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중심적인 자리를 차지하는 ‘은밀하게 행해야 할 세 가지’가 본문 말씀입니다. 구제와 기도와 금식, 이 세 가지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임과 동시에 그리스도인들이 특별히 자랑하고 싶어 하는 것들입니다. 구제는 다른 사람에 대한 표현이며,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표현이고, 금식은 자신의 의도를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세 가지 대표적인 신앙적 표현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이르는 길’에 관하여 말씀합니다. 바꾸어 말하면‘하나님과 소통하는 관심의 일치’를 말씀합니다. 하나님과의 관심이 일치하는 길은 ‘은밀하게 행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과의 소통의 길이 끊어지는 것은, ‘자기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통의 길이 끊어지면, 그 결과는 하나님 은혜의 단절입니다. 본문 5절에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라고 하십니다. 즉, 하나님께서 갚으실 것이 없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세 가지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소통과 불통에 대하여 가르치십니다.
※ 하나님과의 소통을 이루는 길은 어떤 것입니까?
본문 말씀에서 주님은 두 부분을 명확하게 구분하십니다. 이 둘은 하나님의 관심과 나의 관심입니다. 사람은 눈앞의 일에 먼저 관심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일을 할 때, 하나님과의 관계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눈앞에 보이는 것들을 먼저 생각하게 됩니다. 생활 속에서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자기의 경험, 지식,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해결하려 합니다. 예수께서 풍랑을 잔잔하게 하신 이적 이야기에서도 예수님 제자들의 이러한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호수 동쪽 광야 지역으로 가기 위해 배에 올랐습니다. 예수께서는 배의 고물에서 주무셨습니다. 갑자기 큰 광풍이 일어나 배에 물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제자들 가운데는 갈릴리 호수의 어부 출신들이 넷이나 있었기 때문에 나름대로 문제에 대처했습니다. 그러나 워낙 거센 풍랑이어서 배가 더는 견디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우면서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막 4:38)라고 다급하게 소리쳤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곁에 모시고 있었지만, 제자들은 자신들의 경험과 지식을 먼저 의지했습니다. 만일, 풍랑이 일어날 때, 먼저 주님을 깨웠더라면, 그런 두려움과 고생을 하지는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만 아니라, 오늘 우리도 그렇게 행동하고 있습니다.
예전 총회 실행위원회가 서울 holiday Inn 호텔에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호텔의 창업 배경이 아주 흥미롭습니다. 이 호텔의 창업자는 미국의 신앙인인 ‘케몬스 윌슨(K. Wilson)’이라는 분입니다. 이 사람은 원래 제재소 직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에 출근해보니 자기의 책상 위에 해고통지서가 있었습니다. 아무런 설명도 없이 황당하게 해고된 그는 화가 났습니다. 직장과 자기 상관에 대한 복수심이 끓어올랐습니다. 그는 제재소 옆에 똑같은 제재소를 만들어 볼까 생각해 보았지만, 자본이 없었습니다. 그는 자포자기한 나머지 무작정 집을 떠났습니다. 여러 달 동안 방황하면서 모든 것을 잊으려 했지만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가진 돈을 모두 다 써버리고 다시 집에 돌아와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나는 자살하고 싶어. 모든 노력을 다 해보았지만, 아무것도 되는 일이 없어.” 이때 아내는 남편을 향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당신이 한 가지 시도해 보지 않은 일이 있어요. 당신은 당신이 처한 이 상황과 문제에 대해서 진지하게 기도해 본적이 없잖아요.” 아내의 말 한마디는 그에게 큰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맞아, 나는 기도해 본 적이 없지.’ 그 후 그는 아내와 더불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도하는 동안 신기하게도 자기 마음에 있었던 직장과 상사에 대한 미움과 복수심이 모두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그의 머리에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솟아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자기 집을 담보로 융자를 얻어서 조그마한 건축업을 시작했는데, 건축업이 너무 잘되어 5년 만에 은행 빚을 다 갚았고, 자기 기업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에 새로운 소원을 주셨습니다. “하나님, 제가 건축을 하면서 여러 곳을 여행하다 보니 마음에 드는 호텔이 없습니다. 좋은 호텔은 있지만 너무 비싸고 작은 호텔은 너무 분위기가 좋지 않더군요. 제가 호텔을 지어보고 싶습니다. 저는 사람들에게 좋은 서비스를 하고 아주 깨끗하며 적절한 가격에 쉼을 제공할 수 있는 그런 호텔을 짓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그는 하나 둘 호텔을 짓기 시작하였고, 그것이 전 세계 3500개의 호텔을 운영하는 적인 체인이 되어 인터콘티넨탈 호텔 그룹이 되었습니다.
우리 인생의 모든 일은 하나님께 달려있습니다. 잠언 5:21절에서 “대저 사람의 길은 여호와의 눈앞에 있나니, 그가 그 사람의 모든 길을 평탄하게 하시느니라.”라고 하셨으며, 19:21절에서는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서리라.”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관심을 가지시도록 은밀하게 행하라.’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관심을 두지 않고 사람에게 관심을 두어서 “사람에게 보이려고” 행하면, 하나님의 관심은 끊어집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한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자기 의를 드러내기 위한 자랑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본주의(人本主義)입니다. 지금의 교회들이 너무 잘못하고 있는 것이 육적인 감각에 의존하는 생활입니다. 자신의 눈에 보이는 것, 느낄 수 있는 것, 이해할 수 있는 것들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존재하고, 지옥도 존재하는 것을 믿으며, 예수님의 구원 사역과 세상에 다시 오실 약속도 믿습니다. 하지만 생활에는 이 믿음이 전혀 반영되지 않고 있습니다. ‘믿는다.’라는 것과 ‘생활 속에서 실천한다.’라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히브리서 4:2절에서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귀한 복음이지만 믿음과 결부시키지 못하면 유익이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소통을 이루려면,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에 더 무게를 두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4:18절에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거듭하여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마음을 두어야 하는 일은 영원한 생명에 관계되는 신앙의 일들입니다.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구제와 기도와 금식은 앞서 말씀드렸듯이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가져야 할 이웃과 하나님과 자신에 대한 신앙의 자세를 대표적으로 가르치는 예입니다. 주님께서는 ‘구제는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고’ ‘기도는 골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 하고’ ‘금식은 얼굴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하라.’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무조건 은밀하게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의 중심은 ‘사람들에게 보이지 말고 하나님께 보이도록 하라.’라는 것입니다. 즉 ‘지나친 형식주의를 배격하라.’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한 일을 알아주지 않으면 섭섭하게 여깁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라는 말이 있듯이, 사람들은 그만큼 알아주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영적인 일마저 사람의 눈을 의식하여 형식적으로 치우치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은밀한 중에 계시는 하나님께서만 보시도록 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누가 보든지 보지 않든지 오직 하나님께로 향하는 신실하고 충성된 삶을 이루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소통을 이루게 하는 길입니다.
하나님과의 소통은 어렵고 힘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깨달아 아는 대로 하나씩 순종하고 실천하기를 힘쓰면 됩니다. 넘어지고 실패하면 다시 일어나서 다시 시작하면 됩니다. 내가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하고자 하는 마음만 확실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을 바로 알아주십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얻었다고 할지라도 영원한 생명을 잃는다면 무엇이 유익하겠습니까? 세상에는 마음을 빼앗는 일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면, 하나님께 관심을 둘 수 없게 되고, 영의 생명이 위태롭게 됩니다. 혼탁한 시대이지만, 하나님의 관심에 내 관심을 맞추어서 모든 일에 하나님과의 소통으로 형통한 삶을 이루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