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존귀한 하나님의 사람
*** 존귀한 하나님의 사람 / 마태복음 10:24-33
마태복음 10:24-33, “24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25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 26 그런즉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27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 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말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 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29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30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31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32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 들어가는 말
본문 말씀은 예수께서 어려운 환경과 고통스러운 상황을 대비하는 영성 강화에 관하여 예고하신 말씀입니다. 인생의 가장 억울하고도 깊은 고난을 말하는 욥기 5:7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람은 고생을 위하여 났으니, 불꽃이 위로 날아가는 것 같으니라.” 사람이 살면서 고난을 겪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다가오는 고난은 의미가 깊습니다. 시편 119:71절에서는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했으며, 베드로전서 4:1-2절에서는 고난의 의미를 이렇게 풀어주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마치 비가 온 후에 땅이 굳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한여름, 벼가 한창 자랄 때, 가끔 논에 물이 바짝 말라 있을 때가 있습니다. ‘논 주인이 물 대는 것을 잊어버렸나?’라고 생각했었지요. 어느 날, 논 주인을 만났을 때 물어보았습니다. 주인의 말은 “벼는 가끔 며칠씩 논을 말려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계속 영양분이 공급되면 벼가 웃자라서 볏대가 힘이 없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끔 논물을 말리면, 볏대가 강해져서 웬만한 바람에도 잘 쓰러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본문 28-31절에서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혼을 결단코 손대지 못하는 세상의 환경이나 상황을 두려워하지 말고, 영혼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담대해야 합니다. 우리는 춥고 힘든 겨울을 지날 때, 그것이 인생의 전부라고 여기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리 겨울이 혹독하다고 할지라도 겨울은 지나갈 것이고 봄이 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택하신 성도들을 존귀하게 여기십니다.
※ 본문 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본문 말씀은 앞의 16절에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일꾼들이 앞으로 받게 될 것을 미리 알고 준비하라.’라는 경고성 말씀들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앞으로 닥칠 고난들을 어떻게 이겨내며 그 가운데서도 어떻게 자기 일을 계속 수행해나갈 것인가.’를 가르치십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실 때는, 현재의 사명이 아니라 먼 후일에 있게 될 것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가장 큰 주제는 ‘지금까지의 고난보다 더 극심한 고난들을 기대해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이 앞으로 만나게 될 고난들이 어떤 것인지를 알고 미리 적절하게 준비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본문과 병행구절인 누가복음 21:12절입니다. “이 모든 일 전에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하며, 회당과 옥에 넘겨주며, 임금들과 집권자들 앞에 끌려가려니와” 16-17절입니다. “심지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이 너희를 넘겨주어 너희 중의 몇을 죽이게 하겠고,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이런 일은 대환난 전에 그리스도인들에게 닥친다고 하십니다. 말만 들어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다리가 떨리는 이런 두려운 일이 닥칠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두려워하지 않도록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두려워하지 않아야 할 이유가 본문 말씀에 들어 있습니다. 본문 28절입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그리고 32-33절입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이 말씀 속에서 그리스도인이 세상의 현상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아야 할 이유를 ‘영원한 생명 때문이다.’라고 하십니다. 만일 세상의 현상을 두려워하여 그것에 굴복하여 하나님을 떠나게 되면, 하나님 자녀의 권세가 소멸합니다. ‘유비무환(有備無患)’이라고 했듯이 다가올 일을 미리 알고 대비하면 능히 이길 수 있게 됩니다.
※ 이 시대에 내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인터넷 ‘힘이 되는 좋은 글’에 올라온 글 중에 ‘사람이 죽을 때 후회하는 세 가지’라는 제목의 글이 있었습니다.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지내온 일생을 회고하면서 보편적으로 세 가지를 회고한다고 합니다.
첫째. 베풀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입니다. ‘가난하게 산 사람이든 부유하게 산 사람이든 죽을 때가 되면 좀 더 주면서 살 수 있었는데, 이렇게 긁어모으고, 움켜쥐어 봐도 별 것 아니었는데 왜 좀 더 나누어 주지 못했고 베풀며 살지 못했을까?’라는 후회입니다.
둘째. 참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입니다. ‘그때 내가 조금만 더 참았더라면 좋았을 걸 왜 쓸데없는 말을 하고 쓸데없이 행동했던가?’라고 후회하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내가 옳았습니다. 그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나고 보니 좀 더 참을 수 있었고, 조금만 더 여유를 가졌더라면 삶이 달라졌을 것을 후회합니다.
셋째. 좀 더 행복하게 살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입니다. ‘왜 그렇게 빡빡하고 재미없게 살았던가? 왜 그렇게 짜증스럽고 힘겹고 어리석게 살았던가? 얼마든지 기쁘고 즐겁게 살 수 있었는데’라는 후회입니다.
히브리서 3:13절입니다.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이 말씀은 저의 좌우명 중의 하나입니다. 저의 경건의 일기 표지에 크게 ‘오늘’이라고 되어 있고, ‘오늘, 이 하루 후회는 없는가?’라고 기록해 두었습니다. 이 시대에 내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오늘을 성실하고 진실하게 후회 없이 사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서 예수께서 마지막 때를 사는 사람들을 위하여 경각심을 일깨우신 것은, 하나님 앞에 서는 날,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후회하지 않으려면, 매일 삶을 결산해야 합니다. 저는 기억력이 떨어지는 것을 보완하려고, 기록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계획이나 약속, 처리해야 할 일들, 만나야 할 사람, 통화해야 할 사람 등. 그리고 또 하나는, 생각하는 즉시, 처리하는 것입니다. ‘조금 있다가 하지!’라고 미루는 순간, 그 일은 까맣게 잊어버릴 확률이 90%입니다. 친구 목사와 ‘요즘 기억력이 자꾸 떨어진다.’라는 이야기를 하던 중, ‘나는 이렇게 기록해 둔다.’라고 하자, 친구가 하는 말이 ‘나는 그 적어둔 것조차 까먹는다.’라고 해서 웃었던 적이 있습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한 이유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삶의 정산을 미루지 말고 신속하게 해야 함을 일깨우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은 내가 잊어버린다고 없어지지 않습니다. 모아 두었다가 한꺼번에 하려 하지 말고 즉시 처리하십시오. 그리고 순종해야 할 일도 역시, 미루지 말고 즉시 하십시오. 이것이 하나님께 존귀한 사람이 되는 길입니다.
특히, 본문 말씀에서 주님께서는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라고 하십니다. 이는 우리는 주님보다 앞설 수 없고, 주님이 가신 길을 벗어날 수도 없다는 뜻입니다. 세상이 예수님을 욕하고, 무시하고, 시기하고, 오해했듯이, 세상이 우리에게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30-31절에서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라고 하십니다. 즉, 예수께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머리털까지 세시듯이 세밀하게 살피시며, 보호하시며, 인도하신다는 확증입니다. 시편 16:3절에서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라고 하시며, 116:15절에서는 “그의 경건한 자들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로다.”라고 하십니다. 어둡고 혼란한 시대를 살면서 힘들고 어려운 환경을 헤쳐 가는 그리스도인들을 주님께서는 깊은 관심으로 눈여겨보십니다. 그러므로 당장 눈앞의 환경에 연연하지 않고 우리 삶의 모든 부분을 주관하시며 인도하시는 주님을 신뢰하며 이겨가야 합니다. 우리의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미국 젊은이들에게 큰 영향력을 끼친 지체 장애인 ‘체스터 스워’박사가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지체 장애인이면서도 주님을 몹시도 전하고 싶어서 전국을 돌아다녔습니다. 그는 청소년 시절부터 헌신적이고, 활동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자주 자신의 신앙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내가 가진 최선의 것으로 나는 하나님을 섬길 것이며, 내가 그분을 필요로 할 때 그분이 그곳에 계실 것을 나는 압니다.”
어느 날, 조지아주 아덴스 시에서 그가 탄 차가 참혹한 사고를 냈습니다. 그는 사고 차에서 비집고 나와 길가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졌습니다. 그는 피를 많이 흘려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사고 지점을 첫 번째로 지나가던 차에는 뜻밖에도 의사와 간호사가 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스워 박사를 응급 처치하여 병원으로 데려왔습니다. 그는 생명을 구했을 뿐만 아니라, 그가 퇴원했을 때는 그의 손발이 이전의 장애 때보다 훨씬 더 나은 상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존귀하게 여기시는 우리는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이 하나님의 시선 아래에 있습니다. 때로는 이해하지 못할 일들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위하여 일하시며 돌보십니다. 주께서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세시고 계심을 믿고 담대하게 믿음으로 나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