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온전한 부활을 바라는 사람
*** 온전한 부활을 바라는 사람 / 로마서 6:6-11
로마서 6:6-11, “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9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10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 들어가는 말
해마다 돌아오는 부활절. 사실 기독교의 가장 큰 명절은 부활절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삶의 길을 열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5:20절 말씀을 소망의 열쇠 되는 말씀으로 기억하게 됩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이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터는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죽음을 ‘죽은 자’로 표현하지 않는 것은, 예수께서 이미 우리를 대신하여 죽음의 자리에 가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리스도인의 죽음을 ‘죽었다’라고 하지 않고, ‘잠잔다.’라고 표현하셨습니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도 ‘나사로가 잠들었다.’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 그리스도인은 육신의 생명이 끝나더라도 불신자들처럼 영적인 죽음의 자리에 가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5:24절에 정확하게 이유를 밝히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믿는 사람은 이미 죽음의 자리에서 생명의 자리로 옮겨져서 영생을 소유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부활의 사람입니다. 하지만 온전한 부활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아직 육신은 부활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온전한 부활이란, 영과 육신 모두의 부활을 말합니다. 이 시간에는 이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 본문 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본문 말씀은 예수께서 지셨던 십자가, 그 십자가의 죽음 그리고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신 이 사건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를 말씀합니다. 6절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나에게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알려줍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즉 예수님의 죽음은 곧 나의 옛사람의 죽음이며,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내가 죄에 매어 살지 않도록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리고 8절에서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라고 하십니다. 이는 예수님의 부활이 나에게 어떻게 관계되는지를 말씀합니다. 즉 예수님의 부활은 곧 나의 부활입니다. 이 말씀에는 주의해야 할 단서가 붙어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이라는 조건입니다. 이는 예수께서 내 모든 죄를 다 가지고 가심을 믿고, 나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존재로 산다는 것입니다. 말씀의 핵심은 11절에 있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죄에 대하여 죽은 존재가 된 나는, 이제부터 하나님만 따르는 존재로 살아야 함을 말씀합니다. 이 믿음이 지금 내 삶의 현실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 우리가 바라는 온전한 부활은 어떤 것입니까?
앞에서 잠깐 말씀드렸듯이, 온전한 부활이란, 영과 육신 모두의 부활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반쪽만 부활한 사람입니다. 반쪽짜리 부활? 그런 것도 있나요? 부활은 영의 부활과 육의 부활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영접하여 회개하면 성령께서 임재(臨在)하시는데, 이것이 첫 번째 부활인 영의 부활입니다(행 2:38,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계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두 번째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육신이 다시 살아나는 육의 부활입니다. 우리는 아직 육신의 생명이 있으므로, 만일 이렇게 육의 생명이 있을 때 주님이 재림하시면 죽음을 보지 않고 변화되어 주님을 영접하게 됩니다(살전 4:16-17,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지금의 그리스도인은 영의 부활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영의 부활을 이루고 있는 지금의 우리는 온전한 부활을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는 예수께서 세상에 다시 오실 때, 주님의 사람으로 부활하기 위하여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합니다. 본문 말씀이 여기에 관하여 말씀하십니다. 즉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있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삶은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생활입니다. 소망은 그리스도인에게는 보험과 같습니다. 요즘, 한두 가지 보험에 가입하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보험은 환경이 좋을 때, 장래의 좋지 않은 상황에 대비하여 미리 준비해 두는 보장입니다. 그러나 건강보험이라고 건강을 보증해 주는 것이 아니며, 생명보험이라고 해서 생명을 보장해 줄 수도 없습니다. 생명보험은 단지 죽었을 때 보험금을 지급해 줄 수 있을 뿐입니다. 결코, 보험이 사람의 미래를 보장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영원한 미래를 보장하는 것은 오직 하나, 하나님의 복음뿐입니다. 앞서 보았던 요한복음 5:24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순종하는 삶이 가장 확실한 미래를 보장하는 길입니다. 우리가 소망하는 그 미래는 ‘부활’입니다. 죽음의 저주를 벗어버리고 영원한 생명의 부활에 참여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보장된 미래입니다. 이러한 미래가 없다면 이 땅에서의 부귀영화 명예 권세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히브리서 10:26-27절에서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되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보장된 미래를 원한다면, 온전한 부활을 소망하며 끝까지 지켜가야 합니다.
온전한 부활을 소망하고 끝까지 지켜가는 길은, 부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부활은 해마다 지키는 절기도 아니고, 액자 속의 표어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실제이듯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부활 소망은 영이 살아있는 사람으로서 실재하는 생활입니다. 이를 두고 ‘부활신앙’이라고 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의 생명이 회복된 부활의 그리스도인으로 세상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부활의 신비를 설명하면서 그 결론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5:57-58절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이처럼 부활은 이미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절반이 이루어졌으므로 당연히 영이 살아있는 사람으로 세상과는 다른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 생활 속에서 이런 부활의 삶을 이룰 수 있습니까?
2015년 2월 17일. 미국 오스틴에서 열린 풀코스 마라톤 대회가 있었습니다. 이 경기에서 많은 사람들을 감동하게 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 경기에 출전한 케냐 출신 마라토너 ‘하이븐 응게티치(Hyvon Ngetich, 29)’라는 여자 선수가 있었습니다. 하이븐은 37Km 지점까지 선두를 달리고 있었는데, 골인 지점을 5Km 정도 남겨둔 곳에서 갑자기 탈수증세를 보이며 쓰러졌습니다. 함께 따라가던 의료진이 급하게 달려가서 그녀를 살폈고 ‘더 이상의 경기 진행은 불가하다.’라고 판단하여 그녀에게 휠체어에 앉을 것을 권했습니다. 그러나 하이븐은 휠체어를 거부하고 무릎으로 남은 거리를 기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의료진이 양옆에서 따라갔고, 그녀의 양 무릎은 까져서 피가 흘렀지만, 포기 대신 완주를 선택했습니다. 그녀의 완주 기록은 3시간 04분 02초, 불과 3초 차이로 3위에 머물렀지만, 관중들은 축하와 환호를 보냈습니다.
이 마라토너가 자신의 경기에서 포기해도 될 이유가 있었지만, 끝까지 완주한 것은 철저한 스포츠맨십(sports·man·ship)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포기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의 영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 영성의 중심은 어떤 환난과 고난, 어떤 상황에서도 영원한 생명을 포기하지 않는 부활 소망입니다. 왜냐하면, 온갖 능력과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다고 할지라도, 다시 사는 부활에 이르지 못한다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 사실을 고린도전서 15:17-19절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이처럼, 부활의 소망은 우리의 진정한 소망이며, 끝까지 잡고 있어야 할 영생의 보장입니다. 이 부활에 관하여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10-14절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 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사도 바울은 ‘온전한 부활에 이르는 소망을 위하여, 지나간 일을 모두 잊어버리고 오직 부활의 소망을 향하여 달려간다.’라고 했습니다. “달려간다.”라는 표현은 내 모든 생활의 초점을 온전한 부활의 삶에 둔다는 것입니다. 이 우화를 들어보세요.
어느 집의 창가에 새장이 걸려 있었습니다. 그 새장에 갇힌 새 한 마리가 낮에는 조용히 있다가 밤만 되면 처량하게 울었습니다. 밤마다 지나가던 박쥐가 가여운 생각이 들어서 새장 가까이 다가가서 물었습니다.
“너는 왜 낮에는 울지 않고 밤에만 우니?” “응, 다 이유가 있지. 낮에 울다가 잡혀 왔거든.” 그러자 박쥐가 말했습니다. “얘, 지금 조심해야 소용없어. 잡히기 전에 조심했어야지.”
박쥐의 말에 울림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3:49-50절입니다.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리라.” 생명의 기회가 지나가 버리면, 이를 갈며 울어도 소용없습니다. 내게 주어진 생명의 기회가 있을 때, 온전한 부활의 삶을 준비해야 합니다. 이 기회는 생각하지도 못할 때, 끝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지금 내게 기회가 주어져 있을 때, 선한 일에 힘써야 합니다.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영이 살아있는 사람으로서 올바른 판단과 행동으로 생명의 길을 준비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인정하시는 온전한 생명의 부활을 위하여 고생과 희생, 땀과 눈물까지도 감내하면서 주어진 삶을 성실하게 최선을 다합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보장된 안전하고 행복한 삶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