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 장로회
설교모음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가자

작성자 배의신 댓글 / 조회: 8,021회 작성일 2011-01-15 20:18
***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가자 / 히 10:19-25

**  들어가는 말

히브리서 10:19-25, “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21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을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23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24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우리가 사는 세계는 5대양 6대주에 245개국(비독립국 포함)이 있으며, 2010년 말에는 68억 9천만 명을 넘어 섰다고 했습니다. 유엔에서는 2011년 말에는 70억을 돌파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나라는 현재 4850만 명으로 세계에서 스물여섯 번째로 인구가 많은 나라입니다. 이 많은 나라와 민족은 나름대로의 문화를 가지고 있으며, 70억에 이르는 사람들은 저마다의 개성과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단 한 사람도 같은 지문이나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이처럼 사람 개개인에게 독창적인 성격과 재능들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며, 서로가 인정하고 존중해야 할 인격입니다.

어떤 사람이 수염이 텁수룩하게 난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왜 수염을 그렇게 기릅니까?” 그런데 뜻밖에도 그는 “수염을 기르다니요? 나는 수염을 기르지 않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서 그가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저는 면도를 하지 않은 것뿐입니다.”

‘수염을 기르는 것’과 ‘면도를 하지 않는 것’은 같은 말 같지만 분명한 관점의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의 생각이 다를 때에 “당신 생각이 틀렸어.”라는 반응이 먼저 나타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보는 견해가 달라서 나타나는 생각의 차이이지 ‘틀렸다.’고 할 만큼 ‘잘못된 생각’은 아닙니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강대국들 사이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어 왔던 탓에 조금만 다르면 ‘흑과 백’, ‘내편과 네 편’으로 나누는 일을 해왔습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의 시각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시각입니다. 하나님 안에서의 인생은 모두가 평등합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 안에 있는 믿음의 사람들의 신분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합니다. 갈라디아서 3:26-29절입니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고 하십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하나 된 사람으로서 믿음으로 나아가야 함을 말합니다.

2011년에는 우리 모두가 삶의 방향을 이렇게 정해봅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는 눈으로, 우리도 사람을 대하는 것입니다. 즉 인간적인 사사로운 감정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고, 하나님 안에서 서로를 인정하고 서로의 인격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기 위함입니다. 만일 우리가 서로 차별하고 사사로이 판단하게 되면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운 마음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야고보서 2:1절에서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고 하시며, 4절에서는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아니냐”고 하시며, 13절에서는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피로 새롭게 된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서로를 사랑하고 인정하고 존중하는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갈 길을 찾아야 합니다. 지금 하나님 말씀 안에서 우리가 가야할 길을 찾아봅시다.

※ 먼저, 본문의 배경을 살펴봅시다.

히브리서는 초대교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시대는 유대교도들의 위협이 극심했고, 황제숭배와 우상숭배의 위협 등. 핍박과 박해로 유대 그리스도인들의 예배나 모임 자체가 위협을 당했습니다. 매일같이 순교자가 나오는 그런 생명의 위협 속에서 많은 성도들은 모이기를 피하고 자신의 안전을 도모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환난이 많은 환경이지만 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새로운 약속이 주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 약속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 얻은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만나 주시려고 문을 여신 것이며,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특권입니다. 불과 얼마 전인 구약시대에는 짐승의 피를 가지고 성소에 나아가야 했지만,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를 믿는 믿음만 가지면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막혔던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휘장을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찢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를 믿는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신분의 변화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도우심을 받을 수 있는 권세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세상의 핍박과 환난으로 인하여 세상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이 귀중한 것을 잃어버릴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이런 위기 앞에 있는 성도들에게 22절에서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23절에서 “믿는 도리의 소망을 굳게 잡아”, 24절에서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라고 거듭 권면합니다. 만일 위기를 당하여 모이는 것을 기피하고 예배를 멀리한다면, 자녀로서의 특권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까지도 함께 잃어버릴 것입니다. 그래서 25절에서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라고 격려하고 있습니다. 이는 믿음을 지켜가지 힘든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서로를 돌아보며, 위로하고 격려하여 주님 안에서 하나 됨을 지켜가야 함을 말합니다.

※ 우리는 서로를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대해야 합니다.

우리는 남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자매이며 한 가족이기 때문에 서로를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대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완전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우리가 서로의 관계에서 먼저 온전한 관계를 이루어야 합니다. 요한일서 4:20절에서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를 인정하고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기 전에 우리 서로가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긍휼과 은총을 입을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대하는 것입니까? 본문 23-25절을 읽어봅시다.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첫째, 믿는 도리의 소망을 굳게 잡고 둘째,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고 셋째, 힘들수록 모이기를 힘쓰라.’는 것입니다. “믿는 도리의 소망”이란 ‘우리 소망의 고백’이라는 말입니다. 즉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면서 했던 고백이며, 세례식 때에 했던 고백이기도 합니다. 그 고백은 우리 주님의 재림 때에 이루어질 구원의 소망을 말합니다. 이 소망을 놓치면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삶을 놓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소망을 굳게 잡아 어떤 환경에서도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성실하게 수행하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16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요한일서 2:9-10절에서는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3:35절에서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격려(激勵 / encouragement)’라는 말을 국어대사전에서는, “남에게 용기나 의욕을 자아내도록 힘차게 북돋아 줌.”이라고 풀이했습니다. 헬라어 성경에서도 paroxusmo;n(파록시스몬)이라는 단어로서, ‘자극’, ‘유발’, ‘격동’이라는 의미로 번역이 됩니다. 본문에서의  의미를 보면, ‘서로 돌아보아 사랑하고 선행을 하도록 고취시키고 자극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격려입니까?

첫째는 그 사람 자신을 신뢰하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격려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을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서로 비교되는 것을 싫어합니다. 자신은 고유한 존재로서 인정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나 사회에서 자신이 인정받는다는 것은 그 어떤 것보다 큰 힘이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 사람이 행한 일에 대하여 감사하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한 일을 인정받는 것은 큰 용기와 자신감이 생기는 것입니다. 만일 자신이 최선을 다해서 한 일을 “그것도 일이라고 했어?”라는 평가를 받는다면 일에 대한 자신감을 잃어버릴 것입니다. 다소 잘못했더라도 “수고하셨습니다. 열심히 했군요. 이 부분만 보완하면 완벽하겠습니다.”라는 표현은 큰 격려가 될 것입니다. 세 번째는 도움이 필요한 부분에 대하여 실질적인 도움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돌아보아”라고 했는데, 이는 그 사람의 형편과 환경과 상황을 살펴서 필요를 채우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2:15,16절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즉 도움이 필요할 때 실질적인 도움을 제공하는 것은 큰 격려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잊지 않아야 할 것은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권한다.’, ‘격려한다.’는 말은 ‘보혜사’(요14:26)라는 말과 어근이 같습니다. 이는 곧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많은 일 가운데 성도를 돕고, 위로하고, 격려하는 사역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소개하시면서 요한복음 14:16절에서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保惠師)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라고 하셨습니다. ‘보혜사’라는 말은 ‘다른 사람을 돕거나 변호하기 위하여 부름 받은 스승’이라는 의미입니다. 다른 말로는 ‘위로자, 대언자, 중보자’등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세상에서 살아가는 성도를 돕고, 위로하고, 격려하는 일을 성령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인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고 도울 수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3-4절입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온전한 사랑과 위로와 격려는 성령의 능력을 힘입을 때에 가능합니다.

사람의 심리를 연구하는 심리학자들의 연구보고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학자들은 사람이 고통에 견딜 수 있는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측정하기 위하여 실험을 했습니다.
실험은 체격 조건이나 건강 상태가 다른 여러 연령층의 남자와 여자를 선발하여 맨발로 얼음 물 속에 서 있게 했습니다. 그리고 사람에 따라서 여러 가지 다른 상황을 연출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들보다 거의 두 배나 더 오래 있었습니다.
여러분 생각에는 어떤 사람이 그렇게 오래 서 있을 것 같습니까? 해답은 ‘격려’였습니다. 누군가가 그 곁에 서서 계속적으로 해주는 격려를 받는 사람은 홀로 서 있는 사람들에 비하여 고통을 견디는 힘이 무려 두 배나 높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육신의 질병이나 생활의 어려움이나 환경적인 고통 속에서 있는 사람들이 더 오래 견딜 수 있게 하는 것은 격려입니다. ‘아담스’는 “격려는 영혼의 산소”라고 했으며, ‘괴테’는 “바로 잡는 일은 많은 도움을 주지만, 책망 후의 격려는 소나기 후의 태양과 같다.”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격려는 필요한 것이지만, 특히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격려가 더욱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이 가는 길이 그리 쉬운 것이 아니며, 더욱이 가는 길이 다른 세상에서의 위로와 격려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일은 서로 자주 만나고 대화함으로서 효력이 커지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전도서 4:12절의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는 말씀처럼, 함께 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힘은 커지고, 어려움을 이길 능력도 커지게 됩니다.

초대교회와 같은 핍박과 박해는 지금 없지만, 물질과 쾌락과 안일로 인한 신앙의 이탈은 더욱 심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오실 날은 더욱 가까워진 때입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가 서로 돌아보면서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고, 돕고 위로하면서 이 땅에 주님의 교회를 세워갑시다. 나 자신의 태도에 따라서 우리 교회공동체는 달라집니다. 서로 자신의 잣대로 판단하고 비난하고, 업신여기면 미움과 분열이 있을 뿐입니다. 뿐만 아니라 미움과 비판은 주님 말씀대로 그대로 다시 돌아옵니다. 그러나 이해와 관용과 사랑으로 서로를 돌아보고 감싸면 그곳이 바로 작은 천국이 될 것입니다. 2011년에는 우리 교회도, 가정도, 직장과 사업장에서도 우리 서로가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행하여 작은 천국을 이루는 복된 해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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