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 장로회
설교모음

우리는 나아가는 길 뿐입니다.

작성자 배의신 댓글 / 조회: 5,504회 작성일 2010-12-22 20:53
*** 우리는 나아가는 길 뿐입니다. / 유다서 1:20-23

** 들어가는 말

유다서 1:20-23, “20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21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 22 어떤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 23 또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 또 어떤 자를 그 육체로 더럽힌 옷까지도 미워하되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
(공동번역성경) “20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은 여러분의 가장 고귀한 믿음의 터전 위에 스스로를 세우고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기도하십시오. 21 그리고 언제나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으면서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를 기다리십시오. 22 의심을 품는 사람들을 동정해 주고 23 죄악의 불구덩이에 빠진 사람들을 끌어내어 구해 주십시오. 또 본능적인 욕정에 빠진 사람들에 대해서는 욕정으로 더럽혀진 그들의 속옷까지도 미워하되 조심스럽게 자비를 베푸십시오.”

세상에는 수많은 길들이 있습니다. 어느 목표지점으로 가기 위하여 하나의 길을 선택하더라도 주변에는 여러 우회도로가 있습니다. 즉 꼭 그 길이 아니더라도 목표지점으로 갈 수 있는 다른 길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동물들도 은신처인 굴을 팔 때에는 위기에 처했을 때에 빠져 나갈 수 있는 다른 통로를 여럿 만들어 놓습니다. 안전을 위한 방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정책을 세우든지, 사업을 하든지, 인생의 어떤 목표를 설정할 때면 반드시 차선책도 동시에 마련합니다. 한 가지가 안 되면 준비 한 다른 방법을 사용하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의 일들은 사람이든지 동물들이든지 안전한 길들을 준비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푯대로 하여 나아가는 신앙의 길은 어떠하겠습니까?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는 길도 우회할 수 있는 길이나 차선책이 있겠습니까? 한 마디로 없습니다. 사도행전 4:12절에서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고 했습니다.

고대 스페인에 ‘헤르만 크르테스’라고 하는 유명한 장군이 있었습니다. 이 장군은 군사를 이끌고 북대서양과 맥시코 만을 거쳐서 멕시코에 상륙했습니다. 그런데 상대방인 멕시코 군은 수적으로 우세했고 위치마저 스페인 군이 불리했습니다. 상황이 불리하게 되자 스페인 군사들이 사기가 떨어지면서 고향으로 돌아가자고 아우성이었습니다. 나아가지도 후퇴하지도 못할 진퇴양난(進退兩難)에 빠져 난처하게 된 장군은 그날 밤에 충복 몇 사람을 불러서 ‘자신들이 타고 온 배들을 모조리 불질러버리라.’고 명령했습니다. 배들이 모두 불타 버리자 장군은 군사들에게 선언했습니다.
“자, 우리는 이제 정복을 하거나 죽거나, 둘 중에 하나다. 돌아가는 길은 없다!”
그러면서 진군을 명령했습니다. 결국 스페인은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이를 수 있는 길은 하나뿐입니다.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 돌아갈 수 있는 영적인 우회의 길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럽다고 돌아갈 수도 없습니다. 돌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포기하고 바깥 어두운 곳 파멸의 불구덩이로 향하는 길일뿐입니다. 영원한 생명과 행복을 소망한다면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히브리서 10:38-39절에서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12-14절에서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을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고 고백했습니다. 여러분의 신앙의 길은 어떻습니까? 오로지 삶의 목표를 하나님의 나라에 두고 나아가고 있습니까?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며 믿음을 점검하는 이 대강절 기간에 이 시간의 말씀을 통하여 여러분의 신앙의 길을 면밀하게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는 지금 우리의 신앙의 길은 어떠합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가나안 땅을 향할 때의 모습을 보면 배울 점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애굽에서 노예로 살아가는 힘겨운 삶을 보시고 조상들에게 약속하셨던 언약을 기억하셨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을 노예에서 해방시켜 약속하신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려고 모세를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출애굽한 유대인들이 광야생활을 하면서 걸핏하면 예전의 노예생활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비록 노예생활이었지만 지금의 힘들고 고통스러운 생활보다는 나았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순간적인 생활로 본다면 광야의 생활보다 노예 때의 생활이 더 편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노예생활은 보장된 미래가 없습니다. 기껏해야 지금보다는 덜 고생하고 먹을 것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회상하는 것을 봅시다. 출애굽기 16:3절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라고 원망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이러한 원망과 불평은 삶이 고되고 어려움이 닥칠 때면 여지없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이 이처럼 불평과 원망이 많았던 것은 목표를 향하는 정한 마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에 대한 신뢰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도 없었습니다. 오로지 지금의 생활이 힘들고 고달프다는 것만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큰 이적과 능력을 보고 체험하면서 놀라워하고 기뻐하기도 했지만 잠시뿐이었습니다. 광야의 황량함과 고달픈 길과 불편한 잠자리, 박한 음식, 목마름의 현실을 만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다시 눈앞의 현실에 매달려 불평하고 원망했습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에 대한 소망도 기대도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당장 현실의 편안함과 풍족함이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물이 해결되고 음식이 주어지면 좋아하다가 더 좋은 것이 주어지지 않으면 불평하고 원망했습니다. 이 사실을 시편 기자는 78:37절에서 “이는 하나님께 향하는 그들의 마음이 정함이 없으며 그의 언약에 성실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두 마음을 품어 정함이 없는 삶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결코 주어지지 않습니다. 야고보서 1:6-8절에서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정함이 없는 자로다.”라고 하십니다.

지금 여러분의 신앙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출애굽하여 광야를 지나는 이스라엘 자손들처럼 눈앞에 보이는 것을 추구하며 그것을 만족으로 삼지는 않습니까? 지금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 중에는 돈과 세상 물건, 편안함과 배부름, 좋은 직장, 사업의 형통, 유명하게 되는 것 등. 이 세상의 것들에 매여 웃고 우는 사람들이 정말 많습니다. 이런 것을 두고 잘되는 것, 복만 구하는 기복신앙이라고 합니다. 돈 잘 벌고, 건강하고, 만사형통하면 얼굴이 밝아지고 감사를 표하지만,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고 삶이 힘들고 고달프면 감사는커녕 불평하고 원망하며 신앙의 길을 떠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퇴보하는 신앙이며 쓰레기 신앙입니다. 이 길의 끝은 바깥 어두운 곳 불구덩이에 떨어지는 멸망입니다. 로마서 8:17절에서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고 하셨고, 빌립보서 1:29절에서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십니다. 죽음 없는 부활이 있을 수 없듯이, 고난 없는 영광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얻기 위한 사랑의 수고와 헌신과 섬김과 물질적인 드림은 고난이 아닌 거룩한 부담입니다. 본문 22-23절을 봅시다.(공동번역성경) “의심을 품는 사람들을 동정해 주고, 죄악의 불구덩이에 빠진 사람들을 끌어내어 구해 주십시오. 또 본능적인 욕정에 빠진 사람들에 대해서는 욕정으로 더럽혀진 그들의 속옷까지도 미워하되 조심스럽게 자비를 베푸십시오.”바로 이러한 사랑의 수고입니다.

※ 우리가 지금 나아가야 할 길은 어떤 길입니까?

마지막 때를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권면하는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한 믿음위에 자신을 든든하게 세우라고 권면하십니다. 본문 20-21절을 봅시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 이는 하나님의 약속을 향하여 나아가는 확고한 신앙의 삶을 권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입니다. 예전에는 세상이 그리스도인들을 비난하고 박해하고 배척했습니다. 그래도 성도들의 믿음은 더 진실했고, 꾸준히 늘어만 갔습니다. 그런데 오늘에 와서는 박해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고, 비난과 배척보다는 무관심이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의 믿음은 해이해지고, 숫자는 줄어들고, 오히려 다른 종교로 전향하는 사람들마저 생겨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예전에 노방전도를 할 때나, 이 마을에서 교회를 개척하고 가장 많이 들었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에이, 예수쟁이들 못쓴다.” “말만 잘하는 사람들” “자기들끼리만 다 해먹는다.” 등. 이런 부정적인 시각을 나타내는 종류의 이야기들입니다. 어느 점잖게 보이는 노신사는 “예수는 좋은데 예수 믿는 사람들이 싫어서 안 간다.”고도 했습니다. 그들의 말이 모두 옳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에게 비쳐진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안타까운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제자다운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에 비난을 받고 배척을 당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이런 이중적인 삶의 모습이 너무나 흔해지면서 사람들은 무관심해져 버렸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 자신들과 별로 다를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라”고 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믿는 믿음 위에 자신을 세워야 함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반석 위에 집을 세워야 폭풍이 불고 홍수가 나도 무너지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이 ‘반석’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지켜 행하는 것이 반석 위에 세운 집입니다. 물론 폭풍과 홍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닥치는 어려움과 고난의 일들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세워지는 우리의 집과 이 땅에서의 성도의 삶의 기초는 하나님의 사랑이며,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고린도전서 3:11절에서,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세상에서 어떤 일을 당해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확실한 믿음과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는 소망에서 흔들리지 않기를 축복합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소망이란, 자신의 기분이나 세상의 환경에 관계없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입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처럼 죽음 앞에서도 주님을 당당히 선언할 수 있는 그런 소망이며 믿음입니다. 이 길에서 멈추거나 돌아서면 이를 갈며 슬퍼해야 할 영원한 고통이 기다릴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나아가는 길뿐입니다.

어떻게 자신을 세워갑니까?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이는 자신을 세워가는 방식입니다. “성령으로 기도하는 것”은 성령 안에서 하는 기도입니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통달하셔서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를 위하여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중보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령 안에서가 아니면 하나님의 뜻대로 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성령님께서 내 안에 충만하시기를 구해야 합니다. 성령님이 내 안에 충만하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이 내 삶이 방식이 되는 것입니다. 즉 성령께서 내 마음의 소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도록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생활이 자신의 영의 삶을 든든하게 세워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인 삶의 원리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는 것”은 세상에서 살지만 세상에 물들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으로 모든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이는 육신적인 삶의 원리입니다. 이러한 사랑으로 행하는 삶은 사람에게나 하나님께도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삶입니다. 골로새서 3:14절에서 ‘사랑은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고 하셨고, 고린도전서 13:2-3절에서는,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결론적으로 고린도전서 16:14절에서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원리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자신을 세우는 영과 육신의 삶의 건축원리입니다.

훗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우리가 지은 집이 하나님의 공력 심판대를 통과할 것입니다. 공력 심판대에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설계되었는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재료를 사용했는지 등을 판별할 것입니다. 공력을 밝히는 방법은 ‘하나님의 불’입니다. 고린도전서 3:12-13절에서.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이 건축원리를 생각하면서 세상에서 자신을 세워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나아가는 사람은 뒤를 돌아보면 안 됩니다. 즉 세상의 것들에 미련을 두면 안 됩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결사각오로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을 기억하면서 세상을 이끌어가는 당당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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