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사용하여 주소서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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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0-12-06 19:52
*** 나를 사용하여 주소서 / 요한복음 1:1-3,14, 행 9:3-12
** 들어가는 말
사도행전 9:3-12, “3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5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6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7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있더라. 8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9 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 하니라. 10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이르시되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11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자를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12 그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요한복음 1:1-3,14,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여러분은 꿈에서라도 하나님을 뵌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뵙고 싶다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꿈에서라도 한 번 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한 적이 있습니까? 저는 꿈에서 주님의 모습을 뵌 적이 있습니다. 지금도 사랑하는 예수님을 뵙고 싶고 하나님의 나라를 보고 싶은 마음이 늘 소망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뵙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어떤 사람은 소망과 기쁨으로 만나 뵙게 될 것입니다. 주님과 우리의 만남이 기쁨이 넘치는 천국의 혼인잔치 자리가 되기 위하여 대강절이라는 절기를 만들고 그 일을 점검하는 것입니다. 아모스 4:12절에서 하나님께서 “그러므로 이스라엘아, 내가 이와 같이 네게 행하리라. 내가 이것을 네게 행하리니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만나기를 준비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과 만나는 날이 도망가고 싶은 두려움의 날이 되지 않기 위해서 말입니다.
고대 기독교사에 전해지는 전설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지상의 사명을 다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앞으로 가셨습니다. 하나님의 수종자들인 천사들이 예수님의 지상 사역이야기를 흥미 있게 들은 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을 통탄했습니다. 그 중 한 천사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담당하시던 사명은 이제 누가 담당하여 계속합니까?” 그러자 예수님은 “요한, 베드로, 야곱이 할 것이야.”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다시 그 천사가 “그들이 실패하면 누가 합니까?”라고 하자 예수님은 “바울, 바나바, 마태가 할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천사는 “그 사도라는 사람들이 불충실하면 어찌합니까?”
이 질문을 받은 예수님은 천사의 얼굴을 주시하며 “다른 방법은 없어. 사도들이 불충실하면 다른 길은 없어.”라고 말씀하시면서 머리를 흔드셨다는 이야기 입니다.
이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용하셔서 일하신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께 헌신된 충성스러운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십니다. 물론 악인들도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도구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피 값으로 세우신 주님의 몸 된 교회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생명을 걸고 순종한 성도들에 의해서 이어져 왔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사용되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자신을 어떻게 사용하기를 원하신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께 사용되기 위하여 어떻게 준비하고 있습니까? 주님 만나기를 준비하는 우리가 지금 주님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는지를 말씀을 통하여 자신을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 본문의 내용과 의미를 살펴봅시다.
먼저, 요한복음 본문은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태초에 말씀으로 사역하셨음을 나타내십니다. 이 말씀이신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던 때에 바로 그 말씀이십니다. 창세기 1:3절에서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하시니 빛이 있었고”라고 하셨는데, “빛이 있으라.”라고 하시는 이 말씀이 “빛”을 만드신 성자 하나님이셨습니다. 이 말씀이 사람의 육신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이십니다. 요한복음 본문 14절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셔야 했던 이유는 죄에 빠진 죽은 영혼의 사람들을 살려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셔서 살리기 위하여 그 일을 하기에 합당한 사람이 필요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인간이 되신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도구셨습니다. 그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셨고, 요한복음 6:38절에서는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사도행전 본문은 유대교에 심취하여 예수님을 박해하던 ‘사울’이라는 사람이 그리스도인들을 잡으려고 이웃나라인 수리아의 수도 다메섹으로 가다가 예수님을 만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에는 유대교도인 ‘사울’과 그리스도인인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 두 사람은 당시에는 서로 원수로 여겨졌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사람은 같은 일을 위하여 하나님께 사용된 사람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두 사람을 하나님의 역사를 위하여 사용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잡아서 심문하기 위하여 외국인 다메섹 도시까지 원정 가던 사울을 예수님이 만나주셨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사울을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하기 위하여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던 아나니아를 사용하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이들을 만나주셨습니다.
※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두 본문에서 공통적인 요소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용하셔서 뜻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성자 하나님을 사람으로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사울을 사용하시기 위하여 아나니아를 보내셨으며, 이방인의 사도로 사용하시려고 사울을 부르셨습니다. 사도행전 9:15절에서 주님은 아나니아에게 사울에 대하여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자리의 저나 여러분을 위하여 누군가가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었으며, 우리는 또 다른 누군가를 위한 도구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호주 동북쪽에는 ‘뉴 헤브리디스’ 제도(현, 바누아투공화국)가 있습니다. 포르투칼 사람인 ‘귀로스’가 17세기에 발견한 것으로 30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어느 섬에나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원주민들은 본래 식인종이었는데 백인들의 기만적인 취급을 받고는 더욱 포악해졌다고 합니다. 그 섬 중에 ‘성령의 섬’이라는 별명을 가진 섬이 있습니다.
1839년 ‘죤 윌리암스’ 선교사가 이 섬을 찾아갔는데, 육지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죽임을 당했습니다. 다음으로 간 ‘해리스’ 선교사도 맞아 죽었고, 세 번째로 간 ‘존 골든’ 선교사 부부는 약간 토인들과 접촉은 했지만 결국 또 먹히고 말았습니다. 네 번째 선교사인 ‘마크 에이너’는 병으로 쓰러졌고, 수년 후에 ‘존 골든’ 선교사의 동생이 다시 이 섬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다행히 약간 전도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원주민의 말을 연구하여 성경을 번역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펜이 사도행전 7장의 마지막 부분까지 왔을 때, 급한 환자가 있으니 와달라는 원주민의 말을 듣고 문을 열자마자 도끼에 맞아 죽고 말았습니다. 그 때, 그의 피가 번역 중이던 원고지에 튀어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는 구절을 적셨다고 합니다. 이 성경 초안은 지금도 캐나다의 박물관에 보존 되어 있습니다.
그 후, 일곱 번째인 ‘로버트’ 선교사가 건너가 복음을 전했는데, 40년 후에는 섬사람 전체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섬의 이름을 ‘성령의 섬’이라고 부릅니다. 성령이 살아 활동하신 섬이라는 뜻입니다.
저나 여러분들도 누군가의 희생적인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사람이 앞선 믿음의 사람일 수도 있고, 부모나 식구나 친구나 이웃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믿음의 사람이 되어 있는 지금의 우리도 또 다른 사람을 위하여 부름 받았음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디모데후서 2:1-2절에서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가운데서 강하고,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이 바울은 기독교 역사상 최고의 인물로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신약성경 27권 중에서 절반인 13권(히브리서를 포함하면 14권임)을 썼으며, 그의 회심 후 생애에서 유럽과 아시아 전역을 네 차례의 선교여행으로 채웠습니다. 그러나 이런 위대한 인물도 사울이었던 때에는 주님을 무척이나 핍박했던 무뢰한이었습니다.
사울은 유대교에 너무나 열정적인 나머지 당시의 유대교에 있어서는 이단이자 신흥종교로 치부된 기독교를 적극적으로 핍박했습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최초의 순교자인 ‘스데반’집사의 순교 현장에서 처형 증인으로 자처했습니다. 유대 지역에서의 핍박에도 만족하지 못하여, 박해를 피하여 흩어진 기독교인들을 찾아서 먼 이방 지역인 수리아의 수도 다메섹까지 원정을 갈 정도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잘못된 열정으로 가득한 사울을 도구로 사용하시려고 부르셨습니다. 살기등등한 기세로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주님이 그를 부르셨습니다. 사울은 너무나 강렬한 빛으로 인하여 눈이 먼 채로 부르짖습니다. “주여, 뉘시오니이까?” 주님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고 하시면서, 이미 사울을 위하여 길이 준비되어 있음을 알려주셨습니다.
지금 이 자리의 저나 여러분도 주님의 계획 속에서 택하심을 받았고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정하신 뜻을 알지 못할지라도 주님은 이미 우리의 모든 길을 준비해 두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되면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사용하실 것입니다. 시편 37:23절에서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하시나니”라고 하셨으며, 잠언 20:24절에서는 “사람의 걸음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니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으랴.”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부르심은 우리를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함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생명과 환경과 재능과 물질과 건강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도구입니다.
※ 내가 쓰임받기 위하여 어떻게 할까요?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께 쓰임받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디모데후서 2:20-21절을 봅시다.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그릇에 비유하셨습니다. 그릇은 사용된 재질이나 용도에 따라서 분류가 됩니다. 그런데 사람이 어떤 그릇을 사용하려고 하면 먼저 그 그릇의 청결 여부를 살펴보게 됩니다. 깨끗하게 씻겨서 준비되어 있는 그릇을 찾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이 되려면 반드시 두 가지가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하나는 쓰임새에 합당하도록 준비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선교사가 되기 위해서는 신학 과정을 거쳐서 그 나라의 언어나 문화를 익혀야 하며, 전도자가 되려면 복음을 아는 것과 믿음과 성령 충만함 등을 갖추어야 합니다. 사회의 특별한 분야에서 쓰임 받으려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질과 함께 그 분야의 지식을 갖추어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죄를 품고 있으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조차 들으시기 않으십니다. 시편 66:18절에서 “내가 나의 마음에 죄악을 품었더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고 하시며, 이사야 59:2절에서는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라고 하십니다.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암초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쓰임받기를 원한다면 자신의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여 정결하게 해야 하며, 모든 죄로부터 돌아서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싶어 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면 들으신다는 믿음만 가지고 기도하면서 은혜를 구합니다. 그들은 기도해도 응답받지 못한다고 불평하거나 포기해 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응답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아예 들으시지를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도록 준비도 하지 않은 채 구하기만 하기 때문에 기도의 응답도 못 받고, 은혜를 받지도 못하고 쓰임 받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4:2-3절에서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 못 구하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즉 쓰임 받기에 합당하게 준비되지 못했거나, 죄를 해결하지 못했거나, 잘 못 구하는 것 이 모두가 하나님과 담을 허물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싶거나 하나님께 쓰임 받고자 한다면 자신을 먼저 돌아보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준비해야 합니다.
※ 말씀을 정리합니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를 그릇으로 사용하기를 원하십니다.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쓰임 받은 사람이 있었듯이, 나 또한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사용되는 도구입니다. 그릇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준비되고, 자신을 깨끗하게 함으로서 하나님께 쓰임 받게 됩니다. 디모데후서 2:21절을 다시 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고 했습니다. 이 준비를 점검하도록 대강절이 있습니다. 저나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의 뜻에 나를 맞추며 순종하여, 자신을 깨끗하게 만들어 하나님의 영광의 그릇으로 쓰임 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사도행전 9:3-12, “3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5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6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7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있더라. 8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9 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 하니라. 10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이르시되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11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자를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12 그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요한복음 1:1-3,14,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여러분은 꿈에서라도 하나님을 뵌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뵙고 싶다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꿈에서라도 한 번 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한 적이 있습니까? 저는 꿈에서 주님의 모습을 뵌 적이 있습니다. 지금도 사랑하는 예수님을 뵙고 싶고 하나님의 나라를 보고 싶은 마음이 늘 소망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뵙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어떤 사람은 소망과 기쁨으로 만나 뵙게 될 것입니다. 주님과 우리의 만남이 기쁨이 넘치는 천국의 혼인잔치 자리가 되기 위하여 대강절이라는 절기를 만들고 그 일을 점검하는 것입니다. 아모스 4:12절에서 하나님께서 “그러므로 이스라엘아, 내가 이와 같이 네게 행하리라. 내가 이것을 네게 행하리니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만나기를 준비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과 만나는 날이 도망가고 싶은 두려움의 날이 되지 않기 위해서 말입니다.
고대 기독교사에 전해지는 전설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지상의 사명을 다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앞으로 가셨습니다. 하나님의 수종자들인 천사들이 예수님의 지상 사역이야기를 흥미 있게 들은 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을 통탄했습니다. 그 중 한 천사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담당하시던 사명은 이제 누가 담당하여 계속합니까?” 그러자 예수님은 “요한, 베드로, 야곱이 할 것이야.”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다시 그 천사가 “그들이 실패하면 누가 합니까?”라고 하자 예수님은 “바울, 바나바, 마태가 할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천사는 “그 사도라는 사람들이 불충실하면 어찌합니까?”
이 질문을 받은 예수님은 천사의 얼굴을 주시하며 “다른 방법은 없어. 사도들이 불충실하면 다른 길은 없어.”라고 말씀하시면서 머리를 흔드셨다는 이야기 입니다.
이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용하셔서 일하신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께 헌신된 충성스러운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십니다. 물론 악인들도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도구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피 값으로 세우신 주님의 몸 된 교회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생명을 걸고 순종한 성도들에 의해서 이어져 왔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사용되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자신을 어떻게 사용하기를 원하신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께 사용되기 위하여 어떻게 준비하고 있습니까? 주님 만나기를 준비하는 우리가 지금 주님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는지를 말씀을 통하여 자신을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 본문의 내용과 의미를 살펴봅시다.
먼저, 요한복음 본문은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태초에 말씀으로 사역하셨음을 나타내십니다. 이 말씀이신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던 때에 바로 그 말씀이십니다. 창세기 1:3절에서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하시니 빛이 있었고”라고 하셨는데, “빛이 있으라.”라고 하시는 이 말씀이 “빛”을 만드신 성자 하나님이셨습니다. 이 말씀이 사람의 육신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이십니다. 요한복음 본문 14절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셔야 했던 이유는 죄에 빠진 죽은 영혼의 사람들을 살려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셔서 살리기 위하여 그 일을 하기에 합당한 사람이 필요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인간이 되신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도구셨습니다. 그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셨고, 요한복음 6:38절에서는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사도행전 본문은 유대교에 심취하여 예수님을 박해하던 ‘사울’이라는 사람이 그리스도인들을 잡으려고 이웃나라인 수리아의 수도 다메섹으로 가다가 예수님을 만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에는 유대교도인 ‘사울’과 그리스도인인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 두 사람은 당시에는 서로 원수로 여겨졌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사람은 같은 일을 위하여 하나님께 사용된 사람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두 사람을 하나님의 역사를 위하여 사용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잡아서 심문하기 위하여 외국인 다메섹 도시까지 원정 가던 사울을 예수님이 만나주셨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사울을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하기 위하여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던 아나니아를 사용하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이들을 만나주셨습니다.
※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두 본문에서 공통적인 요소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용하셔서 뜻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성자 하나님을 사람으로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사울을 사용하시기 위하여 아나니아를 보내셨으며, 이방인의 사도로 사용하시려고 사울을 부르셨습니다. 사도행전 9:15절에서 주님은 아나니아에게 사울에 대하여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자리의 저나 여러분을 위하여 누군가가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었으며, 우리는 또 다른 누군가를 위한 도구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호주 동북쪽에는 ‘뉴 헤브리디스’ 제도(현, 바누아투공화국)가 있습니다. 포르투칼 사람인 ‘귀로스’가 17세기에 발견한 것으로 30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어느 섬에나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원주민들은 본래 식인종이었는데 백인들의 기만적인 취급을 받고는 더욱 포악해졌다고 합니다. 그 섬 중에 ‘성령의 섬’이라는 별명을 가진 섬이 있습니다.
1839년 ‘죤 윌리암스’ 선교사가 이 섬을 찾아갔는데, 육지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죽임을 당했습니다. 다음으로 간 ‘해리스’ 선교사도 맞아 죽었고, 세 번째로 간 ‘존 골든’ 선교사 부부는 약간 토인들과 접촉은 했지만 결국 또 먹히고 말았습니다. 네 번째 선교사인 ‘마크 에이너’는 병으로 쓰러졌고, 수년 후에 ‘존 골든’ 선교사의 동생이 다시 이 섬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다행히 약간 전도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원주민의 말을 연구하여 성경을 번역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펜이 사도행전 7장의 마지막 부분까지 왔을 때, 급한 환자가 있으니 와달라는 원주민의 말을 듣고 문을 열자마자 도끼에 맞아 죽고 말았습니다. 그 때, 그의 피가 번역 중이던 원고지에 튀어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는 구절을 적셨다고 합니다. 이 성경 초안은 지금도 캐나다의 박물관에 보존 되어 있습니다.
그 후, 일곱 번째인 ‘로버트’ 선교사가 건너가 복음을 전했는데, 40년 후에는 섬사람 전체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섬의 이름을 ‘성령의 섬’이라고 부릅니다. 성령이 살아 활동하신 섬이라는 뜻입니다.
저나 여러분들도 누군가의 희생적인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사람이 앞선 믿음의 사람일 수도 있고, 부모나 식구나 친구나 이웃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믿음의 사람이 되어 있는 지금의 우리도 또 다른 사람을 위하여 부름 받았음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디모데후서 2:1-2절에서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가운데서 강하고,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이 바울은 기독교 역사상 최고의 인물로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신약성경 27권 중에서 절반인 13권(히브리서를 포함하면 14권임)을 썼으며, 그의 회심 후 생애에서 유럽과 아시아 전역을 네 차례의 선교여행으로 채웠습니다. 그러나 이런 위대한 인물도 사울이었던 때에는 주님을 무척이나 핍박했던 무뢰한이었습니다.
사울은 유대교에 너무나 열정적인 나머지 당시의 유대교에 있어서는 이단이자 신흥종교로 치부된 기독교를 적극적으로 핍박했습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최초의 순교자인 ‘스데반’집사의 순교 현장에서 처형 증인으로 자처했습니다. 유대 지역에서의 핍박에도 만족하지 못하여, 박해를 피하여 흩어진 기독교인들을 찾아서 먼 이방 지역인 수리아의 수도 다메섹까지 원정을 갈 정도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잘못된 열정으로 가득한 사울을 도구로 사용하시려고 부르셨습니다. 살기등등한 기세로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주님이 그를 부르셨습니다. 사울은 너무나 강렬한 빛으로 인하여 눈이 먼 채로 부르짖습니다. “주여, 뉘시오니이까?” 주님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고 하시면서, 이미 사울을 위하여 길이 준비되어 있음을 알려주셨습니다.
지금 이 자리의 저나 여러분도 주님의 계획 속에서 택하심을 받았고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정하신 뜻을 알지 못할지라도 주님은 이미 우리의 모든 길을 준비해 두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되면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사용하실 것입니다. 시편 37:23절에서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하시나니”라고 하셨으며, 잠언 20:24절에서는 “사람의 걸음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니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으랴.”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부르심은 우리를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함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생명과 환경과 재능과 물질과 건강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도구입니다.
※ 내가 쓰임받기 위하여 어떻게 할까요?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께 쓰임받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디모데후서 2:20-21절을 봅시다.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그릇에 비유하셨습니다. 그릇은 사용된 재질이나 용도에 따라서 분류가 됩니다. 그런데 사람이 어떤 그릇을 사용하려고 하면 먼저 그 그릇의 청결 여부를 살펴보게 됩니다. 깨끗하게 씻겨서 준비되어 있는 그릇을 찾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이 되려면 반드시 두 가지가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하나는 쓰임새에 합당하도록 준비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선교사가 되기 위해서는 신학 과정을 거쳐서 그 나라의 언어나 문화를 익혀야 하며, 전도자가 되려면 복음을 아는 것과 믿음과 성령 충만함 등을 갖추어야 합니다. 사회의 특별한 분야에서 쓰임 받으려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질과 함께 그 분야의 지식을 갖추어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죄를 품고 있으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조차 들으시기 않으십니다. 시편 66:18절에서 “내가 나의 마음에 죄악을 품었더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고 하시며, 이사야 59:2절에서는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라고 하십니다.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암초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쓰임받기를 원한다면 자신의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여 정결하게 해야 하며, 모든 죄로부터 돌아서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싶어 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면 들으신다는 믿음만 가지고 기도하면서 은혜를 구합니다. 그들은 기도해도 응답받지 못한다고 불평하거나 포기해 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응답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아예 들으시지를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도록 준비도 하지 않은 채 구하기만 하기 때문에 기도의 응답도 못 받고, 은혜를 받지도 못하고 쓰임 받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4:2-3절에서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 못 구하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즉 쓰임 받기에 합당하게 준비되지 못했거나, 죄를 해결하지 못했거나, 잘 못 구하는 것 이 모두가 하나님과 담을 허물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싶거나 하나님께 쓰임 받고자 한다면 자신을 먼저 돌아보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준비해야 합니다.
※ 말씀을 정리합니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를 그릇으로 사용하기를 원하십니다.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쓰임 받은 사람이 있었듯이, 나 또한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사용되는 도구입니다. 그릇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준비되고, 자신을 깨끗하게 함으로서 하나님께 쓰임 받게 됩니다. 디모데후서 2:21절을 다시 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고 했습니다. 이 준비를 점검하도록 대강절이 있습니다. 저나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의 뜻에 나를 맞추며 순종하여, 자신을 깨끗하게 만들어 하나님의 영광의 그릇으로 쓰임 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