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것을 얻고자 하십니까?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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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0-11-23 15:38
*** 좋은 것을 얻고자 하십니까? / 예레미야 17:5-11
** 들어가는 말
예레미야 17:5-11, (현대어성경) “5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나를 버리고 떠나가서 인간의 도움으로 나를 대신하고,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인간의 도움을 의지하는 자는 저주를 받은 인간이다. 6 그런 인간은 사람도 살 수 없이 외롭고 거친 땅, 돌덩이만 쌓여 있는 광야와 모래 바람만 휘몰아치는 광야에서 볼품도 없이 가시덩굴만 내뻗치는 한그루의 관목과 같다. 그는 언제까지나 좋은 일을 보지 못하고 행운을 얻지 못할 것이다. 7 그러나 나 여호와만을 의지하는 자에게는 틀림없이 좋은 때가 온다. 그에게는 분명히 복 받을 때가 온다. 8 그는 물댄 동산에서 자라는 과일나무와 같다. 아무리 가물어도 그는 수로를 향하여 뿌리를 내뻗을 수가 있다. 그는 길고 지루한 가뭄도 무섭지 않고 여름철의 뙤약볕도 두렵지 않다. 그 나무의 잎사귀는 언제나 푸르고 싱싱하다. 오랫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도 그에게는 전혀 고통스러울 것이 없고 여전히 열매를 맺으며 무성할 것이다.' 9 여호와께서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인간의 마음보다 더 간사하고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것이 없다. 인간의 마음은 거짓과 재앙으로 가득 차 있다. 누가 그것을 투시할 수 있겠는가? 10 인간의 속마음을 들여다보는 자는 바로 나 여호와이다. 인간이 아무리 깊은 소원을 품더라도 나는 이미 그것을 알고 있다. 사람이 행동한 것에 따라 그대로 갚아 주는 자가 바로 나 여호와이다. 11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쌓는 사람은 다른 새가 낳은 알을 품었다가 새끼들이 도망가는 꼴을 보는 자고새와 같아질 것이다. 그는 인생의 가장 좋은 시절에 모든 재산을 내주게 되고 말년에는 빈손으로 죽어 갈 것이다.”
오래 전의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어느 목사님이 월요일 아침 일찍 집을 나와 시내 중심가에 있는 교회에 가기 위해 버스를 탔습니다. 운전기사에게 차비를 내면서도 목사님은 교회 일 생각에 골몰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자리에 앉아서야 그 운전사가 거스름돈을 더 준 것을 알았습니다.
동전들을 만지작거리면서 얼핏 떠오른 생각은 ‘하나님께서 내게 돈을 더 주시는구나.’하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자리에 앉아 있을수록 자꾸만 불편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양심이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드디어 교회 근처에 이르러 차에서 내리려고 문 앞으로 걸어 나온 목사님은 운전기사에게 조용히 말했습니다. “아까 기사 양반이 잘못해서 내게 거스름돈을 더 주었더군요.” 이때 운전사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잘못 거슬러 드린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어제 목사님 교회에 가서 정직에 관한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한번 시험해 보려고 그랬습니다. 죄송합니다. 목사님.”
이 말을 들은 목사님은 순간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혹시 이런 갈등을 겪어보지 않으셨습니까? 우리 옛말에 “천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자신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신비한 자리입니다. 그 위대한 사도 바울도 ‘하나님을 따르고자 하는 자신의 마음에 상관없이 육신의 욕망을 따르는 또 다른 마음이 자신을 괴롭게 한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본문 9절에서 “인간의 마음보다 더 간사하고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것이 없다. 인간의 마음은 거짓과 재앙으로 가득 차 있다. 누가 그것을 꿰뚫어 볼 수 있겠는가?”라고 인간의 죄악 된 마음을 지적 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은 헤아릴 수조차 없는 사람의 깊은 마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꿰뚫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의 작은 움직임조차 놓치지 않으시며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소원까지도 알고 계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의 생각과 행동을 살피시고 그 행동한 것에 따라 그대로 갚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지금 예배하는 여러분의 마음을 읽고 계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겠습니까? 오늘 말씀을 통하여 그 답을 찾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답을 찾는데 그치지 마시고 순종하고 실천해서 좋은 것을 얻고자 하는 여러분의 소망을 이룰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살펴봅시다.
본문말씀을 포함하는 예레미야의 글은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레미야는 남 유다가 하나님께 범죄하여 멸망의 길을 걷는 것을 막으려고 눈물로 호소했던 선지자였습니다. 끊임없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 사는 길이라.’고 외쳤습니다. 오늘 본문말씀도 남 유다의 죄를 지적하면서 그 죄악 된 마음을 하나님이 알고 계시므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호소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남 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끝내 돌아오지 않았고 멸망을 당했습니다.
본문말씀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한 부분은 본문 5-8절로서,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힘을 삼고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떠난 사람과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는 사람이 받을 보응에 대하여 각각 말씀하십니다. 다른 한 부분은 본문 9-11절로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 깊은 곳을 살피시면서 그 행위와 행실대로 갚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불의를 행하며 세상을 따라가는 사람은 모든 것을 다 잃을 것이고 결국은 어리석은 자로 멸망에 이를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본문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은 ‘좋은 것을 얻고자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라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마음 깊은 생각과 의도를 아시는 하나님께 어떻게 해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풍성하고 좋은 것을 얻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멸망당하지 않고 살기를 바라시며,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좋은 것들을 풍성하게 누리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간절한 바램이십니다. 여러분이 듣고 깨닫고 순종하여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 좋은 것을 얻고 싶다면 하나님의 공급통로를 아십시오.
지금 우리 마을에 도시가스 공사가 한창입니다. 왜 불편하게 도로를 파고 굵은 파이라인을 설치하고, 집집마다 파이프와 계량기를 바꾸고 가스레인지 노즐을 바꿉니까? 그 이유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당연히 편리하고 값싼 도시가스를 사용하기 위하여 많은 돈을 들이면서 까지 불편을 감수하고 공사를 합니다. 만일 ‘나는 비싼 공사비와 불편이 싫어서 설치하지 못하겠다.’고 하면 도시가스를 사용할 수 없습니다.
지금도 전국에는 수많은 도로 공사를 하고 있습니다. 많은 돈을 들여서 터널을 뚫고 계곡을 잇는 다리를 놓고 포장을 하고 넓은 도로를 건설하는 이유는 사람이나 물류의 통행을 빠르고 안전하고 원활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분이 많은 수고와 돈을 들여서 자녀들을 가르치는 이유도 자녀들이 잘되기를 바라는 목적입니다.
이처럼 파이프라인 공사나 터널이나 도로를 건설하는 것이나 자녀를 가르치는 모든 것은 ‘좋은 것을 얻을 수 있는 통로’입니다. 즉 이 모든 수고와 투자는 ‘좋은 것을 얻고자 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영의 삶을 추구하는 우리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도 이 원리는 똑같이 적용됩니다. 즉 하나님께서 가지신 모든 좋은 것을 얻고자 한다면 당연히 그것을 얻을 수 있는 통로가 준비되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의 것들로 통로를 만들지만, 하나님의 사람들은 영적인 통로가 열려야 하나님의 것을 공급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풍성한 것을 공급받을 수 있는 통로를 어떻게 만들 수 있습니까?
하나님과의 연결통로를 개설할 수 있는 방법을 알기 전에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소유이며, 하나님의 뜻대로 세우기도 하시고 헐기도 하시며, 주기도 하시고 거두기도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사야 45:7절에서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고 하시며, 예레미야 33:2절에서도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고 하시며, 45:4절에서는 “너는 그에게 이르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보라. 나는 내가 세운 것을 헐기도 하며 내가 심은 것을 뽑기도 하나니 온 땅에 그리하겠거늘”이라고 하십니다. 즉 우리가 추구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손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추구하는 좋은 것을 얻을 수 있는 통로를 어디에서 찾아야 하겠습니까?
위대한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어 하는 어린 소녀가 있었습니다. 그 아이가 칠 수 있는 유일한 곡은 손가락 두 개로 치는 ‘젓가락 곡’이었습니다. 아이의 부모는 딸이 피아노를 잘 칠 수 있도록 가르칠 훌륭한 피아노의 대가를 찾아주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물론 아이는 그 이야기를 듣고는 너무나 기뻐했습니다.
부모는 아이를 데리고 유명한 피아니스트의 집에 첫 레슨을 위해 도착했습니다. 그 집에의 거실에는 협주에 쓰이는 아름다운 그랜드 피아노가 놓여 있었습니다. 아이는 부모가 말릴 틈도 없이 피아노로 뛰어가더니 자신이 유일하게 칠 수 있는 ‘젓가락 곡’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당황한 부모는 뒤따라가서 아이를 피아노에서 떼어놓으려 했습니다. 마침 피아니스트가 거실로 오면서 아이가 계속 치도록 두라고 오히려 부모를 말렸습니다.
피아니스트는 아이 옆에 앉더니 아이의 곡에 맞추어 연탄을 시작했습니다. 아이는 여전히 두 개의 손가락으로 ‘젓가락 곡’을 치고 있었는데, 피아니스트가 함께 연주하자 너무나 아름다운 연탄곡이 되었습니다. 아이의 부모는 귀를 의심했습니다. 그 연탄곡이 너무나 아름다웠기 때문입니다. 그 아름다운 피아노 연탄 곡은 ‘젓가락 행진곡’이었습니다.
아이 혼자서는 그저 띵띵거리는 소리만 낼 수 있었지만 실력 있는 피아니스트가 함께 하니까 아름다운 화음을 이루는 연주로 바뀌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지 않는 삶은 띵띵거리는 불편한 소리에 불과합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이 능력의 길을 알게 하기 위하여 기도하면서 에베소서 1:20절에서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라고 하며 그 능력이 어떤 통로를 통하여 역사하는지를 가르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구원도, 삶의 능력도, 영원한 소망도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성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가 되셨습니다. 중보란, 둘 사이를 이어주는 다리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은 예수님을 전적으로 의지해야 합니다. 자나 깨나 예수님을 사모하고 사랑하고 의지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모든 풍성한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로로 하여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곁에 주님이 계실 자리를 마련해 보십시오. 주님이 함께 내 인생을 연주할 때에는 아름답고 훌륭한 삶을 만들어 내실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안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4:19절에서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고 했으며, 13절에서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고백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이 공급통로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 좋은 것을 얻고 싶다면 온 마음으로 주님을 의지하십시오.
왜 온 마음으로 주님을 의지해야 합니까? 본문 10절을 봅시다. (현대어성경) “인간의 속마음을 들여다보는 자는 바로 나 여호와이다. 인간이 아무리 깊은 소원을 품더라도 나는 이미 그것을 알고 있다. 사람이 행동한 것에 따라 그대로 갚아 주는 자가 바로 나 여호와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 속 깊은 것까지도 아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그런 척 하든지 안 그런 척 해도 진심을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마음을 투시하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투시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는 ‘척’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진실한 마음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으로 광야를 40년 동안 헤매게 하신 것도 교만하고 거짓된 마음을 꺾고 진실한 마음을 찾기 위함이었습니다. 신명기 8:2절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즉 광야생활은 가나안을 주시기 전에 그곳에 합당한지의 여부를 시험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바라고 기도한 것들을 주시기에 합당한지를 시험하십니다. 그 시험대를 통과해야만 우리는 그것을 받아 누릴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부모에게 어떤 것을 요구할 때에 아이가 그것을 사용하기에 합당한지를 먼저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장성한 어른들에게는 칼이 유용한 도구이지만, 칼을 잘 알지 못하는 어린아이에게는 위험한 도구입니다. 아이에게 칼을 잘 쓸 수 있을 때까지 칼을 주는 것을 유예하는 것과 같습니다. 젖을 먹는 어린아이에게는 단단한 식물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무작정 자신의 소원을 들어달라고 기도할 것이 아닙니다. 먼저 기도와 말씀과 예배와 섬김을 통하여 자신의 믿음의 분량을 키워가야 합니다. 부지런히 영적인 성장을 해서 영적인 성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좋은 것, 소망하는 것, 또한 주어진 일에 합당한 능력도 주시는 것입니다.
학교 앞 체육관에 다니는 운동선수들이 멋진 운동복을 입고 운동장을 한 줄로 뛰어가는 것을 본 동네 꼬마가 엄마를 졸라서 운동복을 샀습니다. 자기도 운동복을 입고는 학교 운동장에 가서 뛰었습니다. 그런데 한 바퀴도 체 못 뛰고는 숨이 차서 하는 말이 “엄마! 이거 입어도 선수가 안 되는구나” 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아이는 좋은 운동복을 입으면 금방 선수로 변하는 줄 알았나 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모양만 갖추었다고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믿음을 키워가야 합니다. 믿음은 누가 키워주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힘쓰고 노력해야 합니다. 성실한 예배, 매일 말씀과 기도를 가장 중요한 일로 여기고 행하며, 섬기고 봉사하는 일로 신앙을 실천해야 합니다. 이 땅에서의 모든 좋은 것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과 보배롭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가 수고하고 애쓰며 눈물로 인내하는 노력 없이 주어지겠습니까? 그래서 고린도전서 9:24절에서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성도가 하나님 나라를 향한 달음질을 멈추고 세상을 향하게 되면 가장 보배로운 생명을 잃는 어리석은 자가 됩니다. 본문 5-8절 말씀에서 너무나 확실하게 밝히 보여주십니다.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힘을 삼고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떠난 사람과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는 사람이 받을 보응에 대하여 각각 말씀하십니다. 물가에 심겨진 나무가 어떤 환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풍성한 결실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전적으로 의지하고 자신의 전부를 맡기는 사람이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좋은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세상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어리석은 자고새와 같습니다. 자고새는 ‘메추라기’인데, 메추라기는 다른 새의 알을 품고 있다가 알이 부화하면 그 새끼 새는 떠나가 버립니다. 이것처럼 성도가 세상적인 방법으로 살면 나중에 그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제, 여러분 자신이 원하는 좋은 것을 얻을 수 있는 길을 깨달았습니까? 깨달은 대로 실천하여 많은 사람을 영과 육의 모든 것에서 부요하게 하는 하나님의 풍성함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 들어가는 말
예레미야 17:5-11, (현대어성경) “5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나를 버리고 떠나가서 인간의 도움으로 나를 대신하고,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인간의 도움을 의지하는 자는 저주를 받은 인간이다. 6 그런 인간은 사람도 살 수 없이 외롭고 거친 땅, 돌덩이만 쌓여 있는 광야와 모래 바람만 휘몰아치는 광야에서 볼품도 없이 가시덩굴만 내뻗치는 한그루의 관목과 같다. 그는 언제까지나 좋은 일을 보지 못하고 행운을 얻지 못할 것이다. 7 그러나 나 여호와만을 의지하는 자에게는 틀림없이 좋은 때가 온다. 그에게는 분명히 복 받을 때가 온다. 8 그는 물댄 동산에서 자라는 과일나무와 같다. 아무리 가물어도 그는 수로를 향하여 뿌리를 내뻗을 수가 있다. 그는 길고 지루한 가뭄도 무섭지 않고 여름철의 뙤약볕도 두렵지 않다. 그 나무의 잎사귀는 언제나 푸르고 싱싱하다. 오랫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도 그에게는 전혀 고통스러울 것이 없고 여전히 열매를 맺으며 무성할 것이다.' 9 여호와께서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인간의 마음보다 더 간사하고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것이 없다. 인간의 마음은 거짓과 재앙으로 가득 차 있다. 누가 그것을 투시할 수 있겠는가? 10 인간의 속마음을 들여다보는 자는 바로 나 여호와이다. 인간이 아무리 깊은 소원을 품더라도 나는 이미 그것을 알고 있다. 사람이 행동한 것에 따라 그대로 갚아 주는 자가 바로 나 여호와이다. 11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쌓는 사람은 다른 새가 낳은 알을 품었다가 새끼들이 도망가는 꼴을 보는 자고새와 같아질 것이다. 그는 인생의 가장 좋은 시절에 모든 재산을 내주게 되고 말년에는 빈손으로 죽어 갈 것이다.”
오래 전의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어느 목사님이 월요일 아침 일찍 집을 나와 시내 중심가에 있는 교회에 가기 위해 버스를 탔습니다. 운전기사에게 차비를 내면서도 목사님은 교회 일 생각에 골몰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자리에 앉아서야 그 운전사가 거스름돈을 더 준 것을 알았습니다.
동전들을 만지작거리면서 얼핏 떠오른 생각은 ‘하나님께서 내게 돈을 더 주시는구나.’하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자리에 앉아 있을수록 자꾸만 불편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양심이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드디어 교회 근처에 이르러 차에서 내리려고 문 앞으로 걸어 나온 목사님은 운전기사에게 조용히 말했습니다. “아까 기사 양반이 잘못해서 내게 거스름돈을 더 주었더군요.” 이때 운전사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잘못 거슬러 드린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어제 목사님 교회에 가서 정직에 관한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한번 시험해 보려고 그랬습니다. 죄송합니다. 목사님.”
이 말을 들은 목사님은 순간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혹시 이런 갈등을 겪어보지 않으셨습니까? 우리 옛말에 “천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자신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신비한 자리입니다. 그 위대한 사도 바울도 ‘하나님을 따르고자 하는 자신의 마음에 상관없이 육신의 욕망을 따르는 또 다른 마음이 자신을 괴롭게 한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본문 9절에서 “인간의 마음보다 더 간사하고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것이 없다. 인간의 마음은 거짓과 재앙으로 가득 차 있다. 누가 그것을 꿰뚫어 볼 수 있겠는가?”라고 인간의 죄악 된 마음을 지적 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은 헤아릴 수조차 없는 사람의 깊은 마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꿰뚫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의 작은 움직임조차 놓치지 않으시며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소원까지도 알고 계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의 생각과 행동을 살피시고 그 행동한 것에 따라 그대로 갚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지금 예배하는 여러분의 마음을 읽고 계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겠습니까? 오늘 말씀을 통하여 그 답을 찾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답을 찾는데 그치지 마시고 순종하고 실천해서 좋은 것을 얻고자 하는 여러분의 소망을 이룰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살펴봅시다.
본문말씀을 포함하는 예레미야의 글은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레미야는 남 유다가 하나님께 범죄하여 멸망의 길을 걷는 것을 막으려고 눈물로 호소했던 선지자였습니다. 끊임없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 사는 길이라.’고 외쳤습니다. 오늘 본문말씀도 남 유다의 죄를 지적하면서 그 죄악 된 마음을 하나님이 알고 계시므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호소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남 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끝내 돌아오지 않았고 멸망을 당했습니다.
본문말씀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한 부분은 본문 5-8절로서,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힘을 삼고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떠난 사람과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는 사람이 받을 보응에 대하여 각각 말씀하십니다. 다른 한 부분은 본문 9-11절로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 깊은 곳을 살피시면서 그 행위와 행실대로 갚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불의를 행하며 세상을 따라가는 사람은 모든 것을 다 잃을 것이고 결국은 어리석은 자로 멸망에 이를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본문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은 ‘좋은 것을 얻고자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라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마음 깊은 생각과 의도를 아시는 하나님께 어떻게 해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풍성하고 좋은 것을 얻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멸망당하지 않고 살기를 바라시며,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좋은 것들을 풍성하게 누리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간절한 바램이십니다. 여러분이 듣고 깨닫고 순종하여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 좋은 것을 얻고 싶다면 하나님의 공급통로를 아십시오.
지금 우리 마을에 도시가스 공사가 한창입니다. 왜 불편하게 도로를 파고 굵은 파이라인을 설치하고, 집집마다 파이프와 계량기를 바꾸고 가스레인지 노즐을 바꿉니까? 그 이유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당연히 편리하고 값싼 도시가스를 사용하기 위하여 많은 돈을 들이면서 까지 불편을 감수하고 공사를 합니다. 만일 ‘나는 비싼 공사비와 불편이 싫어서 설치하지 못하겠다.’고 하면 도시가스를 사용할 수 없습니다.
지금도 전국에는 수많은 도로 공사를 하고 있습니다. 많은 돈을 들여서 터널을 뚫고 계곡을 잇는 다리를 놓고 포장을 하고 넓은 도로를 건설하는 이유는 사람이나 물류의 통행을 빠르고 안전하고 원활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분이 많은 수고와 돈을 들여서 자녀들을 가르치는 이유도 자녀들이 잘되기를 바라는 목적입니다.
이처럼 파이프라인 공사나 터널이나 도로를 건설하는 것이나 자녀를 가르치는 모든 것은 ‘좋은 것을 얻을 수 있는 통로’입니다. 즉 이 모든 수고와 투자는 ‘좋은 것을 얻고자 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영의 삶을 추구하는 우리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도 이 원리는 똑같이 적용됩니다. 즉 하나님께서 가지신 모든 좋은 것을 얻고자 한다면 당연히 그것을 얻을 수 있는 통로가 준비되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의 것들로 통로를 만들지만, 하나님의 사람들은 영적인 통로가 열려야 하나님의 것을 공급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풍성한 것을 공급받을 수 있는 통로를 어떻게 만들 수 있습니까?
하나님과의 연결통로를 개설할 수 있는 방법을 알기 전에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소유이며, 하나님의 뜻대로 세우기도 하시고 헐기도 하시며, 주기도 하시고 거두기도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사야 45:7절에서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고 하시며, 예레미야 33:2절에서도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고 하시며, 45:4절에서는 “너는 그에게 이르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보라. 나는 내가 세운 것을 헐기도 하며 내가 심은 것을 뽑기도 하나니 온 땅에 그리하겠거늘”이라고 하십니다. 즉 우리가 추구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손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추구하는 좋은 것을 얻을 수 있는 통로를 어디에서 찾아야 하겠습니까?
위대한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어 하는 어린 소녀가 있었습니다. 그 아이가 칠 수 있는 유일한 곡은 손가락 두 개로 치는 ‘젓가락 곡’이었습니다. 아이의 부모는 딸이 피아노를 잘 칠 수 있도록 가르칠 훌륭한 피아노의 대가를 찾아주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물론 아이는 그 이야기를 듣고는 너무나 기뻐했습니다.
부모는 아이를 데리고 유명한 피아니스트의 집에 첫 레슨을 위해 도착했습니다. 그 집에의 거실에는 협주에 쓰이는 아름다운 그랜드 피아노가 놓여 있었습니다. 아이는 부모가 말릴 틈도 없이 피아노로 뛰어가더니 자신이 유일하게 칠 수 있는 ‘젓가락 곡’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당황한 부모는 뒤따라가서 아이를 피아노에서 떼어놓으려 했습니다. 마침 피아니스트가 거실로 오면서 아이가 계속 치도록 두라고 오히려 부모를 말렸습니다.
피아니스트는 아이 옆에 앉더니 아이의 곡에 맞추어 연탄을 시작했습니다. 아이는 여전히 두 개의 손가락으로 ‘젓가락 곡’을 치고 있었는데, 피아니스트가 함께 연주하자 너무나 아름다운 연탄곡이 되었습니다. 아이의 부모는 귀를 의심했습니다. 그 연탄곡이 너무나 아름다웠기 때문입니다. 그 아름다운 피아노 연탄 곡은 ‘젓가락 행진곡’이었습니다.
아이 혼자서는 그저 띵띵거리는 소리만 낼 수 있었지만 실력 있는 피아니스트가 함께 하니까 아름다운 화음을 이루는 연주로 바뀌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지 않는 삶은 띵띵거리는 불편한 소리에 불과합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이 능력의 길을 알게 하기 위하여 기도하면서 에베소서 1:20절에서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라고 하며 그 능력이 어떤 통로를 통하여 역사하는지를 가르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구원도, 삶의 능력도, 영원한 소망도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성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가 되셨습니다. 중보란, 둘 사이를 이어주는 다리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은 예수님을 전적으로 의지해야 합니다. 자나 깨나 예수님을 사모하고 사랑하고 의지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모든 풍성한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로로 하여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곁에 주님이 계실 자리를 마련해 보십시오. 주님이 함께 내 인생을 연주할 때에는 아름답고 훌륭한 삶을 만들어 내실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안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4:19절에서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고 했으며, 13절에서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고백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이 공급통로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 좋은 것을 얻고 싶다면 온 마음으로 주님을 의지하십시오.
왜 온 마음으로 주님을 의지해야 합니까? 본문 10절을 봅시다. (현대어성경) “인간의 속마음을 들여다보는 자는 바로 나 여호와이다. 인간이 아무리 깊은 소원을 품더라도 나는 이미 그것을 알고 있다. 사람이 행동한 것에 따라 그대로 갚아 주는 자가 바로 나 여호와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 속 깊은 것까지도 아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그런 척 하든지 안 그런 척 해도 진심을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마음을 투시하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투시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는 ‘척’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진실한 마음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으로 광야를 40년 동안 헤매게 하신 것도 교만하고 거짓된 마음을 꺾고 진실한 마음을 찾기 위함이었습니다. 신명기 8:2절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즉 광야생활은 가나안을 주시기 전에 그곳에 합당한지의 여부를 시험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바라고 기도한 것들을 주시기에 합당한지를 시험하십니다. 그 시험대를 통과해야만 우리는 그것을 받아 누릴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부모에게 어떤 것을 요구할 때에 아이가 그것을 사용하기에 합당한지를 먼저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장성한 어른들에게는 칼이 유용한 도구이지만, 칼을 잘 알지 못하는 어린아이에게는 위험한 도구입니다. 아이에게 칼을 잘 쓸 수 있을 때까지 칼을 주는 것을 유예하는 것과 같습니다. 젖을 먹는 어린아이에게는 단단한 식물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무작정 자신의 소원을 들어달라고 기도할 것이 아닙니다. 먼저 기도와 말씀과 예배와 섬김을 통하여 자신의 믿음의 분량을 키워가야 합니다. 부지런히 영적인 성장을 해서 영적인 성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좋은 것, 소망하는 것, 또한 주어진 일에 합당한 능력도 주시는 것입니다.
학교 앞 체육관에 다니는 운동선수들이 멋진 운동복을 입고 운동장을 한 줄로 뛰어가는 것을 본 동네 꼬마가 엄마를 졸라서 운동복을 샀습니다. 자기도 운동복을 입고는 학교 운동장에 가서 뛰었습니다. 그런데 한 바퀴도 체 못 뛰고는 숨이 차서 하는 말이 “엄마! 이거 입어도 선수가 안 되는구나” 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아이는 좋은 운동복을 입으면 금방 선수로 변하는 줄 알았나 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모양만 갖추었다고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믿음을 키워가야 합니다. 믿음은 누가 키워주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힘쓰고 노력해야 합니다. 성실한 예배, 매일 말씀과 기도를 가장 중요한 일로 여기고 행하며, 섬기고 봉사하는 일로 신앙을 실천해야 합니다. 이 땅에서의 모든 좋은 것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과 보배롭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가 수고하고 애쓰며 눈물로 인내하는 노력 없이 주어지겠습니까? 그래서 고린도전서 9:24절에서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성도가 하나님 나라를 향한 달음질을 멈추고 세상을 향하게 되면 가장 보배로운 생명을 잃는 어리석은 자가 됩니다. 본문 5-8절 말씀에서 너무나 확실하게 밝히 보여주십니다.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힘을 삼고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떠난 사람과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는 사람이 받을 보응에 대하여 각각 말씀하십니다. 물가에 심겨진 나무가 어떤 환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풍성한 결실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전적으로 의지하고 자신의 전부를 맡기는 사람이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좋은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세상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어리석은 자고새와 같습니다. 자고새는 ‘메추라기’인데, 메추라기는 다른 새의 알을 품고 있다가 알이 부화하면 그 새끼 새는 떠나가 버립니다. 이것처럼 성도가 세상적인 방법으로 살면 나중에 그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제, 여러분 자신이 원하는 좋은 것을 얻을 수 있는 길을 깨달았습니까? 깨달은 대로 실천하여 많은 사람을 영과 육의 모든 것에서 부요하게 하는 하나님의 풍성함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