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소망하는 것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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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1-03-23 15:10
*** 내가 소망 하는 것 / 요한복음 5:1-9
** 들어가는 말
요한복음 5:1-9, “1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2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3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4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5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8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독일 튀빙겐 대학교 명예교수인 세계적인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J. Moltmann) 박사가 2009년 5월 11일 한신대학교의 초청으로 방한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몰트만 박사는 ‘희망의 신학자’로 불리며, 40여년을 세상에 희망을 전하기 위해 노력한 학자입니다.
몰트만 박사가 강연을 한 후 많은 질문이 이어졌습니다. 그 중에 어떤 질문자는 ‘현재의 심각한 국제정세를 말하면서 이런 세상에서 우리가 희망을 말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박사는 독일의 속담을 말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독일 속담인 “끝이 좋으면 모든 것이 좋다.”는 말을 뒤집어서 소개했습니다. 즉 “시작이 좋으면 모든 것이 좋다.”고 했습니다. 박사는 ‘희망은 시작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라고 하면서 ‘그 힘은 마침내 아름다운 결말을 가져오게 한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이루지 못한 것을 희망사항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몰트만 박사는 ‘희망이 마침표가 아니라 출발점’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소망이란 미래를 맞이하는 힘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6:13절 이하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약속은 결코 변함이 없음’을 말씀하면서 19절에서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라고 하십니다. 즉 소망이라는 것은 세상의 어떤 힘들고 어려운 환경에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이르게 하는 능력이 된다는 뜻입니다. 아마도 지금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치고 소망이 없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사람은 소망 속에서 사는 존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바라는 소망은 무엇입니까?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동화 중에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라고 소개된 동화가 있습니다. 이 동화는 주인공인 엘리스가 아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신비로운 세계를 여행하는 이야기입니다. 이 동화에는 ‘체셔 캣’이라는 말재주가 좋고 꾀가 많은 고양이가 등장합니다.
엘리스는 이상한 나라에서 빠져나가는 길을 찾다가 갈림길에서 ‘체셔 캣’을 만납니다. 엘리스가 중얼거리듯이 “어떤 길로 가야하나?”라고 묻자, 체셔 캣은 엘리스에게 “어디로 가는데?”라고 되묻습니다. 엘리스는 “모른다.”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체셔 캣은 웃으면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면 아무 데도 갈 수가 없어!”라고 대답합니다.
동화 속의 아이처럼 자신이 가고자 하는 곳을 모르거나,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른다면, 자신이 지금 하는 모든 일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삶은 단지 동물적인 생을 사는 것일 뿐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고, 무엇을 바라는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바라는 것을 이루기 위하여 목적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욥은 원인을 알 수 없는 고난 속에서도 그 고난의 의미를 욥기 23:10절에서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고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 인생에게는 분명하게 정하신 길이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잠언 16:9절에서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고 했으며, 시편 37:23절에서는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라고 하십니다. 이는 모든 인생에게는 반드시 자신만이 가야하는 길이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소망이 무엇이며, 어디를 향하여 가는지 알고 있습니까? 오늘 말씀을 통하여 자신의 소망을 분명하게 찾으시기를 바랍니다.
※ 본문말씀의 내용을 살펴봅시다.
본문말씀은 예루살렘에 있는 ‘베데스다’라고 하는 연못에서 일어난 일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베데스다란 ‘은혜의 집’이라는 뜻을 가진 저수지로서 예루살렘 북쪽 성문인 양문(羊門) 곁에 있었습니다. 이 연못은 길이가 100m 넓이가 60m쯤 되는 꽤 큰 직사각형의 연못입니다. 이 연못은 본래 빗물을 받아놓기 위한 저수지였는데, 그 바닥으로 간헐천이 흐르고 있어서 가끔씩 뜨거운 온천수를 뿜어 올리곤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이런 현상을 보고, 천사가 내려와서 물을 움직이는 것으로 생각한 듯 합니다. 그리고 그 물이 움직이고 있을 때에 가장 먼저 물 속에 들어가면 어떤 병이든지 낫는다는 소문이 전설처럼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그 저수지 주변에는 사람들이 쉴 수 있는 행각 다섯이 있었고, 그 행각에는 갖가지 질병으로 고생하는 많은 병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전설로 내려오는 이야기를 믿고 병을 고쳐볼까 하는 요행을 기다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느 명절에 예수님께서 이 연못 곁을 지나시다가 38년 동안 병으로 고생하는 사람을 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 병자는 예수님의 물음에 엉뚱하게도 “물이 움직일 때에 넣어주는 사람이 없다.”고 대답합니다. 이는 ‘병이 낫기를 바라지만 도저히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고 하소연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더 이상 묻지 않으시고 그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이 베데스다의 모습은 무엇인가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하염없이 기다리며, 요행을 바라는 안타까운 삶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중에서도 가장 소망이 없는 한 사람을 찾으셨고 그를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이적을 통하여 우리 인생이 참으로 가장 절실하게 소망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치십니다.
※ 지금 내가 소망하는 것이 허무한 것은 아닙니까?
베데스다에는 육신의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요행을 바라며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베데스다는 주님 없이 살아가는 세상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광경입니다. 이 베데스다가 위치하고 있는 장소는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가까운 곳입니다. 양문(羊門)이란 성전에서 제사할 때 사용되는 제물용 양이 들어오는 문입니다. 이 양문으로 들어서면 곧 성전 뜰에 이르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성전이 가까이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어쩌다가 한 번씩 일어나는 확실하지도 않은 연못의 요행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생을 향하여 탄식하십니다. 이사야 1:4-6절을 봅시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패역을 거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거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부드럽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몸도 마음도 온통 병들고, 삶은 고통스럽고, 환경은 어두워만 가는데 여전히 형식적인 예배의식에만 빠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사 1:12)고 탄식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아뢰면 될 일을 제쳐두고, 허망하고도 아무 보장도 없는 외식적인 종교의식에 매달려 요행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베데스다 못 가의 요행을 기다리는 병자들도 예수님의 소식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주님보다 지금까지의 습관에 젖어서 여전히 헛된 기다림에만 빠져 있었습니다. 오늘도 이러한 현상은 여전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야 더 말할 것도 없지만,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의 은혜를 아는 그리스도인들조차 이런 어리석음에 빠져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말씀을 통하여 수없이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기도하라.’고 말씀하시지만, 성도들은 여전히 염려하며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습니다. 도와달라고 주님께 손만 내밀면 되는데, 자신의 경험과 세상적인 재물과 권력을 의지하려고 합니다. 이런 인생을 향하여 이사야 2:22절에서는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라고 하시며, 시편 146:3,4절에서는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허망한 인생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시편 37:40절에서 “여호와께서 저희를 도와 건지시되 악인에게서 건져 구원하심은 그를 의지한 연고로다.”고 하시며, 나훔 1:7절에서는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의뢰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고 하십니다. 전기 시설이 다 갖추어진 방에서 어둡다고 탄식하며 앉아 있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겠습니까? 잠시 일어서서 전등의 스위치만 켜면 밝아질 텐데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의뢰하는 사람을 아시고 함께 하시고 그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십니다. 언제라도 기도한다면 들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도 이러한 하나님을 외면하고, 확실하지도 않은 허무한 것을 기대하고, 바라고, 기다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하려면 하나님을 소망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현장에 오셨습니다. 진정으로 소망해야 할 바를 알지 못하고 허무한 것에 마음을 빼앗긴 사람들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런데 그 수많은 병자들 중에서 단 한 사람, 38년 된 병자만을 만나셨습니다. 이 병자는 병 고침을 받을만한 믿음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며, 예수님의 능력을 알고 믿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왜 이런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셨겠습니까? 그 이유를 분명하게 밝혀주고 있지는 않지만, 19절 이하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나타내시기 위함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가 ‘도움이 가장 절실한 사람’이었음을 말씀하십니다.
왜 도움이 가장 절실한 사람을 택하셨을까요?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힘이 있을 때에는 다른 것을 의지하려는 마음이 많지 않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 무엇인가를 이루어보겠다는 교만한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병자를 고치실 때마다 그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간절함이 있는지를 보셨습니다. 그리고는 ‘네 믿은 대로 되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소망하는 간절한 마음을 찾고 계십니다. 잠언 8:17절에서는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고 하셨으며, 예레미야 29:13절에서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고 약속하십니다.
만일 여러분이 38년 동안이나 중병으로 누워있다면 건강하게 되는 것을 바라고 또 바라지 않겠습니까? 38년 된 병자는 스스로는 잘 움직이지도 못하면서 그래도 물에 들어갈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그곳에 누워 있었습니다. 이것이 간절함입니다. 주님께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그는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라고 소망은 있지만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간절한 심정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소망하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반드시 만나주시고 이루게 하십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예술로 유명한 이태리 밀라노의 한 성당에는 의미심장한 글이 적혀 있다고 합니다. 성당 입구의 문 오른편에는 장미 화환 조각이 있는데. 그 조각 밑에 “우리를 즐겁게 하는 것은 모두 순간적인 것이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왼쪽에는 가시 십자가 조각이 있고 그 밑에는 “우리를 괴롭게 하는 것은 모두 순간적인 것이다.”라고 적혀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문 위쪽에는 “영원한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라는 글이 적혀 있다고 합니다.
이 땅의 즐거움은 그리 길지 않습니다. 휴가는 금방 끝나며. 새 옷은 금방 닳아지고, 달콤한 아이스크림은 금방 녹아버립니다. 세상일에 매어 있다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만들면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고린도후서 6:1절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죄로 인한 저주의 죽음에서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이 값비싼 은혜를 잠시 있다가 없어질 세상의 헛된 부귀영화와 쾌락을 얻는데 허비해서는 안 됩니다. 이 생명의 은혜는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이를 때까지 지켜가야 합니다. 세상의 허망한 것을 소망하면서 세상의 요행을 기다리지 말고, 우리의 생명과 능력이 되시는 주님을 소망하고 의지합시다. “하나님의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푯대를 향하여 달려간다,”고 고백한 사도 바울처럼, 우리도 내가 소망하는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기까지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며 나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들어가는 말
요한복음 5:1-9, “1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2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3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4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5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8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독일 튀빙겐 대학교 명예교수인 세계적인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J. Moltmann) 박사가 2009년 5월 11일 한신대학교의 초청으로 방한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몰트만 박사는 ‘희망의 신학자’로 불리며, 40여년을 세상에 희망을 전하기 위해 노력한 학자입니다.
몰트만 박사가 강연을 한 후 많은 질문이 이어졌습니다. 그 중에 어떤 질문자는 ‘현재의 심각한 국제정세를 말하면서 이런 세상에서 우리가 희망을 말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박사는 독일의 속담을 말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독일 속담인 “끝이 좋으면 모든 것이 좋다.”는 말을 뒤집어서 소개했습니다. 즉 “시작이 좋으면 모든 것이 좋다.”고 했습니다. 박사는 ‘희망은 시작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라고 하면서 ‘그 힘은 마침내 아름다운 결말을 가져오게 한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이루지 못한 것을 희망사항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몰트만 박사는 ‘희망이 마침표가 아니라 출발점’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소망이란 미래를 맞이하는 힘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6:13절 이하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약속은 결코 변함이 없음’을 말씀하면서 19절에서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라고 하십니다. 즉 소망이라는 것은 세상의 어떤 힘들고 어려운 환경에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이르게 하는 능력이 된다는 뜻입니다. 아마도 지금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치고 소망이 없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사람은 소망 속에서 사는 존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바라는 소망은 무엇입니까?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동화 중에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라고 소개된 동화가 있습니다. 이 동화는 주인공인 엘리스가 아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신비로운 세계를 여행하는 이야기입니다. 이 동화에는 ‘체셔 캣’이라는 말재주가 좋고 꾀가 많은 고양이가 등장합니다.
엘리스는 이상한 나라에서 빠져나가는 길을 찾다가 갈림길에서 ‘체셔 캣’을 만납니다. 엘리스가 중얼거리듯이 “어떤 길로 가야하나?”라고 묻자, 체셔 캣은 엘리스에게 “어디로 가는데?”라고 되묻습니다. 엘리스는 “모른다.”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체셔 캣은 웃으면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면 아무 데도 갈 수가 없어!”라고 대답합니다.
동화 속의 아이처럼 자신이 가고자 하는 곳을 모르거나,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른다면, 자신이 지금 하는 모든 일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삶은 단지 동물적인 생을 사는 것일 뿐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고, 무엇을 바라는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바라는 것을 이루기 위하여 목적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욥은 원인을 알 수 없는 고난 속에서도 그 고난의 의미를 욥기 23:10절에서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고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 인생에게는 분명하게 정하신 길이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잠언 16:9절에서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고 했으며, 시편 37:23절에서는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라고 하십니다. 이는 모든 인생에게는 반드시 자신만이 가야하는 길이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소망이 무엇이며, 어디를 향하여 가는지 알고 있습니까? 오늘 말씀을 통하여 자신의 소망을 분명하게 찾으시기를 바랍니다.
※ 본문말씀의 내용을 살펴봅시다.
본문말씀은 예루살렘에 있는 ‘베데스다’라고 하는 연못에서 일어난 일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베데스다란 ‘은혜의 집’이라는 뜻을 가진 저수지로서 예루살렘 북쪽 성문인 양문(羊門) 곁에 있었습니다. 이 연못은 길이가 100m 넓이가 60m쯤 되는 꽤 큰 직사각형의 연못입니다. 이 연못은 본래 빗물을 받아놓기 위한 저수지였는데, 그 바닥으로 간헐천이 흐르고 있어서 가끔씩 뜨거운 온천수를 뿜어 올리곤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이런 현상을 보고, 천사가 내려와서 물을 움직이는 것으로 생각한 듯 합니다. 그리고 그 물이 움직이고 있을 때에 가장 먼저 물 속에 들어가면 어떤 병이든지 낫는다는 소문이 전설처럼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그 저수지 주변에는 사람들이 쉴 수 있는 행각 다섯이 있었고, 그 행각에는 갖가지 질병으로 고생하는 많은 병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전설로 내려오는 이야기를 믿고 병을 고쳐볼까 하는 요행을 기다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느 명절에 예수님께서 이 연못 곁을 지나시다가 38년 동안 병으로 고생하는 사람을 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 병자는 예수님의 물음에 엉뚱하게도 “물이 움직일 때에 넣어주는 사람이 없다.”고 대답합니다. 이는 ‘병이 낫기를 바라지만 도저히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고 하소연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더 이상 묻지 않으시고 그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이 베데스다의 모습은 무엇인가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하염없이 기다리며, 요행을 바라는 안타까운 삶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중에서도 가장 소망이 없는 한 사람을 찾으셨고 그를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이적을 통하여 우리 인생이 참으로 가장 절실하게 소망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치십니다.
※ 지금 내가 소망하는 것이 허무한 것은 아닙니까?
베데스다에는 육신의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요행을 바라며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베데스다는 주님 없이 살아가는 세상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광경입니다. 이 베데스다가 위치하고 있는 장소는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가까운 곳입니다. 양문(羊門)이란 성전에서 제사할 때 사용되는 제물용 양이 들어오는 문입니다. 이 양문으로 들어서면 곧 성전 뜰에 이르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성전이 가까이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어쩌다가 한 번씩 일어나는 확실하지도 않은 연못의 요행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생을 향하여 탄식하십니다. 이사야 1:4-6절을 봅시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패역을 거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거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부드럽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몸도 마음도 온통 병들고, 삶은 고통스럽고, 환경은 어두워만 가는데 여전히 형식적인 예배의식에만 빠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사 1:12)고 탄식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아뢰면 될 일을 제쳐두고, 허망하고도 아무 보장도 없는 외식적인 종교의식에 매달려 요행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베데스다 못 가의 요행을 기다리는 병자들도 예수님의 소식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주님보다 지금까지의 습관에 젖어서 여전히 헛된 기다림에만 빠져 있었습니다. 오늘도 이러한 현상은 여전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야 더 말할 것도 없지만,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의 은혜를 아는 그리스도인들조차 이런 어리석음에 빠져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말씀을 통하여 수없이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기도하라.’고 말씀하시지만, 성도들은 여전히 염려하며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습니다. 도와달라고 주님께 손만 내밀면 되는데, 자신의 경험과 세상적인 재물과 권력을 의지하려고 합니다. 이런 인생을 향하여 이사야 2:22절에서는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라고 하시며, 시편 146:3,4절에서는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허망한 인생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시편 37:40절에서 “여호와께서 저희를 도와 건지시되 악인에게서 건져 구원하심은 그를 의지한 연고로다.”고 하시며, 나훔 1:7절에서는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의뢰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고 하십니다. 전기 시설이 다 갖추어진 방에서 어둡다고 탄식하며 앉아 있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겠습니까? 잠시 일어서서 전등의 스위치만 켜면 밝아질 텐데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의뢰하는 사람을 아시고 함께 하시고 그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십니다. 언제라도 기도한다면 들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도 이러한 하나님을 외면하고, 확실하지도 않은 허무한 것을 기대하고, 바라고, 기다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하려면 하나님을 소망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현장에 오셨습니다. 진정으로 소망해야 할 바를 알지 못하고 허무한 것에 마음을 빼앗긴 사람들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런데 그 수많은 병자들 중에서 단 한 사람, 38년 된 병자만을 만나셨습니다. 이 병자는 병 고침을 받을만한 믿음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며, 예수님의 능력을 알고 믿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왜 이런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셨겠습니까? 그 이유를 분명하게 밝혀주고 있지는 않지만, 19절 이하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나타내시기 위함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가 ‘도움이 가장 절실한 사람’이었음을 말씀하십니다.
왜 도움이 가장 절실한 사람을 택하셨을까요?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힘이 있을 때에는 다른 것을 의지하려는 마음이 많지 않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 무엇인가를 이루어보겠다는 교만한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병자를 고치실 때마다 그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간절함이 있는지를 보셨습니다. 그리고는 ‘네 믿은 대로 되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소망하는 간절한 마음을 찾고 계십니다. 잠언 8:17절에서는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고 하셨으며, 예레미야 29:13절에서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고 약속하십니다.
만일 여러분이 38년 동안이나 중병으로 누워있다면 건강하게 되는 것을 바라고 또 바라지 않겠습니까? 38년 된 병자는 스스로는 잘 움직이지도 못하면서 그래도 물에 들어갈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그곳에 누워 있었습니다. 이것이 간절함입니다. 주님께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그는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라고 소망은 있지만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간절한 심정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소망하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반드시 만나주시고 이루게 하십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예술로 유명한 이태리 밀라노의 한 성당에는 의미심장한 글이 적혀 있다고 합니다. 성당 입구의 문 오른편에는 장미 화환 조각이 있는데. 그 조각 밑에 “우리를 즐겁게 하는 것은 모두 순간적인 것이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왼쪽에는 가시 십자가 조각이 있고 그 밑에는 “우리를 괴롭게 하는 것은 모두 순간적인 것이다.”라고 적혀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문 위쪽에는 “영원한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라는 글이 적혀 있다고 합니다.
이 땅의 즐거움은 그리 길지 않습니다. 휴가는 금방 끝나며. 새 옷은 금방 닳아지고, 달콤한 아이스크림은 금방 녹아버립니다. 세상일에 매어 있다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만들면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고린도후서 6:1절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죄로 인한 저주의 죽음에서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이 값비싼 은혜를 잠시 있다가 없어질 세상의 헛된 부귀영화와 쾌락을 얻는데 허비해서는 안 됩니다. 이 생명의 은혜는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이를 때까지 지켜가야 합니다. 세상의 허망한 것을 소망하면서 세상의 요행을 기다리지 말고, 우리의 생명과 능력이 되시는 주님을 소망하고 의지합시다. “하나님의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푯대를 향하여 달려간다,”고 고백한 사도 바울처럼, 우리도 내가 소망하는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기까지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며 나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