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이 하는 대로가 아닙니다.
작성자 배의신 댓글
/ 조회: 5,796회
작성일
2011-03-17 12:58
*** 남들이 하는 대로가 아닙니다. / 마태복음 5:43-6:1
** 들어가는 말
마태복음 5:43-6:1, “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진실한 사람’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이런 일은 예로부터 늘 있어왔던 일입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고대 그리스의 한 철학자는 대낮에 아테네 거리를 등불을 들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는 한 벌을 옷과 지팡이 하나, 그리고 나무 통 속에서 잠을 자며, 늘 등불을 들고 다녔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왜 대낮에 등불을 들고 나니느냐?”고 물으면, “정직한 사람을 찾고 있소”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만큼 정직한 사람을 찾기가 어렵다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로마서 3:10-12절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탄식을 이렇게 전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한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이런 세상에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보내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리고 본문 48절에서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하시며,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닮은 사랑을 하라고 하십니다.
정말 엄청난 도전을 주시는 말씀입니다. 특히 본문 46-47절은 심각한 도전의식을 갖게 합니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또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를 한다면 남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공동번역) 쉽게 말해서 ‘남들이 하는 대로만 한다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너무도 쉽게 “저 사람들이 이렇게 했기 때문에 나도 이렇게 한다.”라는 말로 자신을 정당화합니다. 이처럼 남들이 하는 대로 나도 한다면 ‘하나님의 자녀’로는 인정받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감추면서 ‘그런 척’ 혹은 ‘안 그런 척’자신을 꾸미고 있습니다. 이것을 유식한 말로 ‘외식(外飾)’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외식하는 이유는 ‘의롭게 살아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실제로 그렇게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중인격(二重人格)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 율법사 등 지도자 그룹에서 특히 심했습니다. 이런 현상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은 지도자도 성도도 서로 모르는 척 하면서 그렇게 위선을 떨고 있습니다.
영국의 아동동화작가인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Robert Louis Stevenson)이 쓴 명작소설인 ‘지킬 박사와 하이드’(Strange case of Dr. Jekyll and Mr. Hyde)를 아시지요?
어느 마을에 마음씨 착하고 선한 일을 많이 하는 의사 ‘지킬’ 박사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존경하고 흠모한 나머지 ‘혹시 천사가 사람이 되어 내려온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 무렵 마을에서는 밤마다 무서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살인, 방화, 절도, 소녀 유괴 등. 끔찍한 범죄사건이 밤마다 일어나서 마을을 온통 공포로 몰아넣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칼’경이란 유명인사가 살해되었는데 살해도구가 단장(지팡이)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단장을 조사해본 결과 ‘앤더슨’이란 변호사가 ‘지킬’박사에게 준 것임이 밝혀졌습니다. 그러나 지킬 박사는 어느 곳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경찰이 지킬 박사의 집 문을 부수고 들어가 보았더니, ‘하이드’란 사람이 지킬 박사의 옷을 입고 자살한 시신으로 발견되었습니다. 결국 천사같이 착한 사람인 지킬 박사와 악마 같은 하이드는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지킬 박사는 밤마다 이상한 약을 먹고 마음도 얼굴도 흉악해져서 하이드란 사람이 되어 그런 끔찍한 죄를 즐기다가 결국 자살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 소설이 명작으로 불리는 이유는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두 성품을 사실적으로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선한성품’과 ‘악한성품’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도 로마서7:19절에서 자신을 표현하기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바 악을 행하는도다.”라고 했고, 21절에서는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라고 탄식했습니다. 이러한 이중적인 성품은 우리 모두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이중적인 성품대로 살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로마서 8:13절에서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라고 하시며, 6:12절에서는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라고 경고하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 남들이 하는 대로가 아니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본문 43-44절을 읽어봅시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 말씀에서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씀은 구약의 율법을 말합니다. 율법의 가르침은 레위기 24:20절에서 “파상은 파상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을지라. 남에게 손상을 입힌 대로 그에게 그렇게 할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이를 ‘동형보복(同形報復)’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사는 방식 그대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따르는 사람들에게 ‘남들이 하는 대로가 아니라,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새로운 계명을 주셨습니다. 이 계명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는 것입니다. 본문 45절에서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고 하십니다.
구약시대에 주신 율법은 ‘행위의 법’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그대로 지켜야 의롭게 되고 구원을 얻게 됩니다. 지금도 그 법을 지키는 유대인들과 그 친척들인 무슬림들은 ‘남들이 행한 그대로 갚아주는’ 동형보복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당한 만큼 보복하면서 끊임없이 싸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시대는 예수님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막을 내렸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법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남들이 행한 대로 갚아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감싸 안는 사랑을 가르치셨습니다. 이 사랑은 하나님께서 먼저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독생자 예수님을 인간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는 제물로 보내주신 것입니다. 요한일서 4:9-11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이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시대에 우리에게 주신 계명은 ‘사랑의 법’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 사랑을 깊이 생각하는 ‘사순절’을 지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나를 살리려 생명까지 주신 예수님을 우리의 생명을 다하여 사랑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사랑에 맞추어야 합니다. 즉 남들이 나에게 행하는 대로 갚는 것이 아니라,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감싸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구원을 받은 우리가 서로 사랑으로 돌보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십니다. 바꾸어 말하면 사랑으로 하지 않으면 허물이고 죄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서울의 어느 큰 교회에서 신앙세미나를 하면서 문학평론가로 유명한 모 교수를 강사로 초빙했습니다. 그런데 이 교수는 ‘나는 예수를 믿지 않는다.’고 분명히 공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을 초청한 이유는 ‘왜 예수를 믿지 않는지 그 이유를 듣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이 교수가 그날 강의한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자신은 미션 스쿨(기독교계통 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교수이고, 산상수훈도 나름대로 다 알고 있으며, 어떤 때는 연구도 해 본 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산상수훈은 그 자체가 훌륭한 것임을 인정했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참 놀랍게 생각하는 것은 산상수훈대로 사는 교인을 아직까지 만나지 못했고, 그것이 자기가 예수를 믿지 않는 이유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 믿는 사람은 말만 요란하게 떠들 뿐 실제 삶에서 예수 믿는 사람의 모습을 잘 보여주지 않는다.’고도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아주 비꼬는 투의 제안을 했습니다.
“만약에 여러분 중에 산상수훈대로 살고 있는 교회를 알고 있다면 저에게 소개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예수 믿겠습니다.”
참으로 기가 막히는 논리로 성도를 농락하는 이야기입니다. 이론은 그럴 듯하지만 주님께서 가르치신 말씀 자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는 가슴 답답하고 부끄러운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산상수훈은 마태복음5,6,7장의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별칭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본문도 산상수훈에 속하는 말씀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이렇게 그리스도인들을 농락하는 것은 사랑으로 행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놀림의 말을 듣지 않도록 내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나도 다른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5:12절에서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고 하십니다.
※ 사람에게가 아니라 하나님께 인정받도록 해야 합니다.
본문 6:1절에서 예수님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육신의 삶을 전부로 여기고 삽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인정받아 상 받고, 칭찬 받고,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애를 씁니다. 그렇기 때문에 너무도 당연하지만, 사람들이 보는 곳에서는 지킬 박사처럼 열심히, 성실하게, 진실하게 보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하이드처럼 자기의 욕망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과 뜻에 맞지 않으면 화를 낸다든지, 폭력을 행사한다든지, 가차 없이 버립니다. 이런 행태를 디모데후서 3:2-5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금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이 말씀을 생각해야 합니다. 즉 이 세상의 삶을 전부인 줄 알고 사는 사람들처럼 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의 삶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으로서, 신실하고 거룩한 삶으로 하나님께 인정받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의 상을 기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의 삶을 마치고 하나님 앞에 설 때에 내가 행한 대로 하나님이 준비해 두신 영원한 영광의 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6절에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하십니다. 만일 이 땅에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고, 상을 받으면 하나님께 받을 상이 없습니다. 바로 그 말씀이 본문 다음인 6:2절부터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상을 받고 싶습니까? 이 땅에서 사는 동안에 칭찬과 명성을 얻어 조금 더 평안한 삶을 살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아무 것도 없는 삶을 원합니까? 아니면 이 땅에서는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 조금은 서글프고 외롭지만,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광된 삶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하는 대로 하면 하나님을 뵙지 못합니다. 여러분, 세상에서의 짧은 즐거움이 아니라,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랑의 삶을 삽시다. 비록 세상에서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하게 주님만 바라보며 일하여 이름 없는 삶일지라도, 하나님의 나라에서 유명한 이름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 들어가는 말
마태복음 5:43-6:1, “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진실한 사람’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이런 일은 예로부터 늘 있어왔던 일입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고대 그리스의 한 철학자는 대낮에 아테네 거리를 등불을 들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는 한 벌을 옷과 지팡이 하나, 그리고 나무 통 속에서 잠을 자며, 늘 등불을 들고 다녔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왜 대낮에 등불을 들고 나니느냐?”고 물으면, “정직한 사람을 찾고 있소”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만큼 정직한 사람을 찾기가 어렵다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로마서 3:10-12절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탄식을 이렇게 전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한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이런 세상에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보내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리고 본문 48절에서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하시며,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닮은 사랑을 하라고 하십니다.
정말 엄청난 도전을 주시는 말씀입니다. 특히 본문 46-47절은 심각한 도전의식을 갖게 합니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또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를 한다면 남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공동번역) 쉽게 말해서 ‘남들이 하는 대로만 한다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너무도 쉽게 “저 사람들이 이렇게 했기 때문에 나도 이렇게 한다.”라는 말로 자신을 정당화합니다. 이처럼 남들이 하는 대로 나도 한다면 ‘하나님의 자녀’로는 인정받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감추면서 ‘그런 척’ 혹은 ‘안 그런 척’자신을 꾸미고 있습니다. 이것을 유식한 말로 ‘외식(外飾)’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외식하는 이유는 ‘의롭게 살아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실제로 그렇게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중인격(二重人格)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 율법사 등 지도자 그룹에서 특히 심했습니다. 이런 현상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은 지도자도 성도도 서로 모르는 척 하면서 그렇게 위선을 떨고 있습니다.
영국의 아동동화작가인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Robert Louis Stevenson)이 쓴 명작소설인 ‘지킬 박사와 하이드’(Strange case of Dr. Jekyll and Mr. Hyde)를 아시지요?
어느 마을에 마음씨 착하고 선한 일을 많이 하는 의사 ‘지킬’ 박사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존경하고 흠모한 나머지 ‘혹시 천사가 사람이 되어 내려온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 무렵 마을에서는 밤마다 무서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살인, 방화, 절도, 소녀 유괴 등. 끔찍한 범죄사건이 밤마다 일어나서 마을을 온통 공포로 몰아넣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칼’경이란 유명인사가 살해되었는데 살해도구가 단장(지팡이)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단장을 조사해본 결과 ‘앤더슨’이란 변호사가 ‘지킬’박사에게 준 것임이 밝혀졌습니다. 그러나 지킬 박사는 어느 곳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경찰이 지킬 박사의 집 문을 부수고 들어가 보았더니, ‘하이드’란 사람이 지킬 박사의 옷을 입고 자살한 시신으로 발견되었습니다. 결국 천사같이 착한 사람인 지킬 박사와 악마 같은 하이드는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지킬 박사는 밤마다 이상한 약을 먹고 마음도 얼굴도 흉악해져서 하이드란 사람이 되어 그런 끔찍한 죄를 즐기다가 결국 자살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 소설이 명작으로 불리는 이유는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두 성품을 사실적으로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선한성품’과 ‘악한성품’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도 로마서7:19절에서 자신을 표현하기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바 악을 행하는도다.”라고 했고, 21절에서는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라고 탄식했습니다. 이러한 이중적인 성품은 우리 모두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이중적인 성품대로 살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로마서 8:13절에서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라고 하시며, 6:12절에서는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라고 경고하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 남들이 하는 대로가 아니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본문 43-44절을 읽어봅시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 말씀에서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씀은 구약의 율법을 말합니다. 율법의 가르침은 레위기 24:20절에서 “파상은 파상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을지라. 남에게 손상을 입힌 대로 그에게 그렇게 할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이를 ‘동형보복(同形報復)’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사는 방식 그대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따르는 사람들에게 ‘남들이 하는 대로가 아니라,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새로운 계명을 주셨습니다. 이 계명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는 것입니다. 본문 45절에서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고 하십니다.
구약시대에 주신 율법은 ‘행위의 법’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그대로 지켜야 의롭게 되고 구원을 얻게 됩니다. 지금도 그 법을 지키는 유대인들과 그 친척들인 무슬림들은 ‘남들이 행한 그대로 갚아주는’ 동형보복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당한 만큼 보복하면서 끊임없이 싸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시대는 예수님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막을 내렸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법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남들이 행한 대로 갚아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감싸 안는 사랑을 가르치셨습니다. 이 사랑은 하나님께서 먼저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독생자 예수님을 인간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는 제물로 보내주신 것입니다. 요한일서 4:9-11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이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시대에 우리에게 주신 계명은 ‘사랑의 법’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 사랑을 깊이 생각하는 ‘사순절’을 지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나를 살리려 생명까지 주신 예수님을 우리의 생명을 다하여 사랑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사랑에 맞추어야 합니다. 즉 남들이 나에게 행하는 대로 갚는 것이 아니라,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감싸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구원을 받은 우리가 서로 사랑으로 돌보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십니다. 바꾸어 말하면 사랑으로 하지 않으면 허물이고 죄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서울의 어느 큰 교회에서 신앙세미나를 하면서 문학평론가로 유명한 모 교수를 강사로 초빙했습니다. 그런데 이 교수는 ‘나는 예수를 믿지 않는다.’고 분명히 공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을 초청한 이유는 ‘왜 예수를 믿지 않는지 그 이유를 듣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이 교수가 그날 강의한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자신은 미션 스쿨(기독교계통 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교수이고, 산상수훈도 나름대로 다 알고 있으며, 어떤 때는 연구도 해 본 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산상수훈은 그 자체가 훌륭한 것임을 인정했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참 놀랍게 생각하는 것은 산상수훈대로 사는 교인을 아직까지 만나지 못했고, 그것이 자기가 예수를 믿지 않는 이유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 믿는 사람은 말만 요란하게 떠들 뿐 실제 삶에서 예수 믿는 사람의 모습을 잘 보여주지 않는다.’고도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아주 비꼬는 투의 제안을 했습니다.
“만약에 여러분 중에 산상수훈대로 살고 있는 교회를 알고 있다면 저에게 소개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예수 믿겠습니다.”
참으로 기가 막히는 논리로 성도를 농락하는 이야기입니다. 이론은 그럴 듯하지만 주님께서 가르치신 말씀 자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는 가슴 답답하고 부끄러운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산상수훈은 마태복음5,6,7장의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별칭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본문도 산상수훈에 속하는 말씀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이렇게 그리스도인들을 농락하는 것은 사랑으로 행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놀림의 말을 듣지 않도록 내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나도 다른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5:12절에서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고 하십니다.
※ 사람에게가 아니라 하나님께 인정받도록 해야 합니다.
본문 6:1절에서 예수님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육신의 삶을 전부로 여기고 삽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인정받아 상 받고, 칭찬 받고,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애를 씁니다. 그렇기 때문에 너무도 당연하지만, 사람들이 보는 곳에서는 지킬 박사처럼 열심히, 성실하게, 진실하게 보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하이드처럼 자기의 욕망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과 뜻에 맞지 않으면 화를 낸다든지, 폭력을 행사한다든지, 가차 없이 버립니다. 이런 행태를 디모데후서 3:2-5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금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이 말씀을 생각해야 합니다. 즉 이 세상의 삶을 전부인 줄 알고 사는 사람들처럼 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의 삶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으로서, 신실하고 거룩한 삶으로 하나님께 인정받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의 상을 기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의 삶을 마치고 하나님 앞에 설 때에 내가 행한 대로 하나님이 준비해 두신 영원한 영광의 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6절에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하십니다. 만일 이 땅에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고, 상을 받으면 하나님께 받을 상이 없습니다. 바로 그 말씀이 본문 다음인 6:2절부터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상을 받고 싶습니까? 이 땅에서 사는 동안에 칭찬과 명성을 얻어 조금 더 평안한 삶을 살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아무 것도 없는 삶을 원합니까? 아니면 이 땅에서는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 조금은 서글프고 외롭지만,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광된 삶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하는 대로 하면 하나님을 뵙지 못합니다. 여러분, 세상에서의 짧은 즐거움이 아니라,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랑의 삶을 삽시다. 비록 세상에서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하게 주님만 바라보며 일하여 이름 없는 삶일지라도, 하나님의 나라에서 유명한 이름이 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