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다 더 중요한 것
작성자 배의신 댓글
/ 조회: 7,076회
작성일
2011-02-22 19:50
*** 보다 더 중요한 것 / 누가복음 10:38-42
** 들어가는 말
누가복음 10:38-42, “38 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39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40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하소서.’ 41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42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아놀드’라는 의사가 있었습니다. 그 마을에는 ‘그랜불’이라는 큰 부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지금처럼 봄이 오려는 어느 날, 시골에 왕진을 하고 돌아오던 의사가 부잣집 골목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부잣집 대문 앞에서 어떤 나그네가 급하게 문을 두드리고 있었습니다. 다음날, 의사 아놀드는 다시 왕진을 가면서 그 부잣집 앞을 지나는데 어제 그 나그네가 아직도 문을 두드리고 있었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의사는 그 나그네에게 물었습니다. “아니, 지금까지 여기 계십니까?” 그러자 나그네는 “예, 어제부터 문을 두드리고 있는데 도무지 대문을 열어주지 않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의사는 “무슨 일로 그러십니까?”라고 다시 물었습니다. 그 사람은 “예, 이 집에는 아주 급한 일이 닥쳐오고 있습니다. 내가 그 소식을 알려주려고 왔는데 이 집 사람들이 문을 열어 주려고 하지 않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의사는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그렇게 지나갔습니다. 화창한 봄이 지나고, 여름도 지나고, 가을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부자의 집은 거두어들인 곡식들이 집안 곳곳에 산더미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 해 추운 겨울날, 의사 아놀드는 왕진 가방을 들고 그 부잣집 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순간 의사는 몸이 얼어붙는 듯 했습니다. 지난봄에 그 집 대문을 두드리던 그 이상한 나그네가 또 대문을 두드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추위 때문에 나그네의 모습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부잣집 대문이 열리면서 그랜불이 몽둥이를 든 험상궂은 얼굴로 하인들과 함께 나왔습니다. 그리고는 문을 두드리던 나그네를 순식간에 때려눕히고는 대문을 잠그고 들어가 버렸습니다.
이 모습을 본 의사는 급히 달려가서 땅에 쓰러져 있는 나그네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리고 나그네를 부축하면서 “오늘밤은 나와 함께 집에 가서 몸을 좀 녹이고 쉬도록 합시다.”라고 강청하며 나그네의 손목을 잡아끌었습니다. 그런데 나그네의 손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깜짝 놀란 의사가 치료를 하려고 자세히 보니, 나그네의 두 손바닥에는 못 자국이 똑똑하게 보였습니다. 의사 아놀드는 그 자리에 엎드려 “오, 주님! 당신이었군요?”라며 그 나그네를 쳐다보는 순간, 그 나그네의 모습은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날 밤, 자신이 겪은 꿈같은 일을 생각하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리면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문을 열자 어제 보았던 그 부잣집 하인들이 서있었습니다. 그들은 “우리 주인이 갑자기 쓰러져 숨을 못 쉬고 있으니 빨리 함께 가 주십시오.”라고 다급하게 간청했습니다. 의사가 그랜불의 집에 도착했을 때, 부자의 아내가 그랜불을 붙잡고 울고 있었습니다. 의사는 그 부자가 임종을 맞고 있음을 직감했습니다. 그때 그 부자가 의사에게 겨우 들릴락 말락 하는 소리로 애원했습니다. “제발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나의 기도를 듣지 않으십니다. … 당신의 기도라면 들어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잠시 후, 그 부자는 그 큰집과 그 많은 재산을 남겨둔 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자기 집에 도움을 청하러 오는 사람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언제나 대문을 잠가두었습니다. 그리고 뒷문으로 몰래 출입을 하며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주님께서 그토록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시려 했지만 그는 거절했고 결국 주님 없는 끔찍한 죽음을 당한 것입니다.
어리석은 인생의 한 단면입니다. 자신의 미래를 조금만이라도 알 수 있다면 부자 그랜불처럼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조금은 더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생은 바로 한 순간의 앞도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어진 매일의 삶에서 ‘보다 더 중요한 것을 선택하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이 어리석은 부자처럼 영원한 생명이 아니라, 돈과 재물과 이 세상의 즐거움을 선택하면,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이 찾아왔을 때 절망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서 9:12절에서 “분명히 사람은 자기의 시기도 알지 못하나니, 물고기가 재난의 그물에 걸리고, 새들이 올무에 걸림같이, 인생들도 재앙의 날이 그들에게 홀연히 임하면 거기에 걸리느니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알듯이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에는 아무 것도 가지고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이 땅에서 살 때에 자신이 살았던 삶에 따라서 보응을 받을 것입니다. 로마서 2:6절에서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라고 하시며, 요한계시록 20:13절에서는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은 지금 보다 더 중요한 것을 선택해서 살고 있습니까?
※ 먼저, 본문말씀의 내용과 의미를 살펴봅시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베다니’라는 작은 마을에 들리셨습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 동쪽으로 약 2.7㎞ 거리에 있으며, 감람산의 기슭에 있는 작은 마을입니다. 이 마을에는 마르다, 마리아, 그리고 그의 오빠 나사로가 살고 있었는데, 예수님은 사역 말기에 종종 여기에 오셨습니다. ‘베다니’라는 이름은 ‘번민하는 자의 집’ 또는 ‘가난한 자의 집’이라는 의미입니다. 탈무드에 의하면 ‘푸른 과일의 집’이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이 이름에서 풍기는 것처럼 베다니는 가난하고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베다니에 오시자 가장 먼저 반긴 사람이 마르다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로와 마르다, 마리아 세 남매를 많이 아끼셨습니다. 나사로가 병들어 죽었을 때에 찾아오신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이것을 본 유대인들이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였는가?”(요 11:36)라고 했습니다.
이 자그마한 가정은 예수님의 등장으로 갑자기 분주해졌습니다. 사랑하는 소중한 손님이신 예수님을 대접하기 위해서입니다. 엄마역할을 했던 마르다가 바빴습니다. 그런데 동생인 마리아는 언니의 바쁨도 제쳐두고 예수님 발아래 앉아서 예수님의 말씀만 듣고 있었습니다. 보다 못한 언니 마르다는 예수님께 하소연하러 왔습니다.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보시고도 왜 가만히 계십니까 ? 어서 저를 도와주라고 말씀해주십시오”(현대어성경)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뜻밖이었습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하여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가져야 하는 근본적인 관심이 무엇인지를 가르치십니다. 바꾸어 말하면, 그리스도인들이 살면서 보다 더 중요한 것을 선택해야 함을 가르치십니다.
※ 보다 더 중요한 것을 선택하려면, 상황을 분별하는 지혜가 있어야합니다.
현대인은 무엇이 그리 바쁜지 바쁘게 설치다가 더 중요한 일을 놓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영국 속담에 “흐트러진 둥지에는 성한 알이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미 새가 알을 품을 때는 먼저 집을 튼튼하게 보수하고, 부드럽고 따뜻하도록 마른 풀과 깃털을 깝니다. 그리고 알을 가운데로 모아서 어미 새의 가슴으로 품습니다. 만일 둥지가 어수선하고 알들이 이리저리 흩어져 있으면 부화를 기대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들도 자신이 처한 상황을 분별하지 못하고 쓸데없는 일들만 잔뜩 벌여놓고 있다면 얻을 수 있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본문 40절에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고 했습니다. 마르다는 가정주부로서 예수님 일행을 대접하기 위해 바쁘게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너무도 사랑하는 예수님을 대접하기 위해 많은 것을 준비하려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본문 41절에서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라고 하십니다. 대접하는 것은 나무랄 것 없는 선한 일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일이라 할지라도 보다 더 중요한 본래의 의미를 놓칠 정도로 치중해서는 안 됩니다. 사자성어에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했습니다. ‘정도를 지나침은 미치지 못함과 같다.’는 뜻입니다. 마르다는 대접하는 일 때문에 보다 더 중요한 예수님의 생명의 말씀을 듣지 못했습니다.
예전에 부교역자 시절에 성도들 가정에 심방을 가면 안타까운 마음이 들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심방을 가면 먼저 예배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예배 중에 자리를 뜨는 분들이 종종 있었습니다. 주로 기도할 때에 그렇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예배 후에 대접할 음식을 준비하느라 주방에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상처가 될까 해서 그 자리에서는 말을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심방은 음식을 대접받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심방의 목적은 그 가정의 형편을 살피면서 신앙을 격려하고, 위로하고, 영적인 새 힘을 공급하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음식을 준비하느라 말씀을 제대로 못 듣는다든지 함께 기도로 힘을 얻지 못한다면 심방의 의미를 잃게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음식은 잘 준비하지 못하더라도 말씀으로 위로받고 신앙의 길을 찾으며, 기도로 새 힘을 얻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한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이 처한 상황을 잘 분별하여 의미에 합당하게 행동하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이런 지혜를 어떻게 얻을 수 있습니까? 역시 하나님께 구하면 됩니다. 야고보서 1:5절에서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너무 바빠서 기도하는 시간을 내는 것조차 쉽지 않습니다.
2006년에 독일의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도서전에서 최대의 화제를 모으면서 단숨에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된 ‘단순하게 살아라.’는 책이 있습니다. 독일의 목사이자 저널리스트인 ‘베르너 티키 퀴스텐마허’가 자신의 강의와 경험을 집대성한 3권의 시리즈물입니다. 저자는 “복잡한 삶을 단순하게 살라.”고 말합니다. 즉 33 가지의 제안을 통해서 삶을 단순화시키고 역량을 집중하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가지고 있는 물건들을 줄여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평균적으로 1만개의 물건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그는 먼저 서랍 속부터 정리하라고 하면서, '이 물건을 지난 3년 동안 쓴 일이 있나?' 스스로 물어보고 없다면 과감하게 버리라고 합니다. 가정편에서는 저자와 그의 아내 ‘마리온 퀴스텐마허’는 아침마다 아이에게 옷을 입히느라 한바탕 치러야 하는 전쟁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비롯하여 아이들과 여유 있게 식사를 즐길 수 있는 법 등을 설명합니다. 그리고 환경을 단순하게 하라. 재정을 단순하게 하라. 시간과 인간관계와 가정, 그리고 자신의 생활을 단순화시키고 좋은 습관을 구체화시키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핵심가치에 집중하여 살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교회로서의 가치에 집중하고, 사람은 자신만의 가치에 집중하라는 것입니다. 즉 쓸데없는 군더더기들을 버리고 본래의 의미와 핵심적인 가치를 찾아서 집중적으로 가꾸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려면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정확하게 분별하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현대인들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살면서 혼란스러움에 빠져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바빠하니까 자신은 바쁜 것도 없으면서 덩달아서 바빠지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일러, 옛말에 “남이 장에 가니 거름지고 장에 간다.”고 했습니다. 이는 밭으로 일하러 가던 농부가 다른 사람들이 장날이 되어 물건을 팔러 장에 가는 것을 보고 자신은 지고 갈 것이 없으니 밭에 있던 거름을 지고 따라나선 꼴을 일컫는 말입니다. 이건 정말 상황분별이 안 되고, 대책 없는 모양새입니다.
이렇게 쓸데없는 일에 바쁘게 되면 짜증스럽고 불평과 원망이 일어납니다. 마르다가 그러했습니다.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하소서.”라고 불평하고 바쁜 자신을 돕지 않는 동생을 원망했습니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너무 바빠서 마음에 근심이 생기고 피곤에 지쳐 불평과 원망이 생기게 되면 신앙의 위기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의 일을 할 때는 감사와 기쁨이 넘쳐나야 하는데, 만약 그렇지 않다면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사업에, 직장 일에, 가정 일에,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서 성경 잃을 시간이 없고, 기도할 틈이 없다면 여러분은 생명을 잃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무엇이 더 중요합니까? 분별의 지혜를 구하십시오. 마태복음 16:26절에서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라고 하십니다.
※ 상황에 알맞은 자신의 자리를 찾아야합니다.
마르다의 동생 마리아는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라고 했습니다. 마리아는 은혜의 자리를 찾았습니다. 그에게는 지금 예수님의 말씀이 더 갈급했고 중요했습니다. 물론 언니의 원망을 들을 줄 알면서도 예수님의 발치에 자리를 깔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마리아도 그렇게 얌체 짓만 하는 사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오셔서 말씀하시는 그 시간이 마리아에게는 너무나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지금 무엇이 더 중요하고 급한 것인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마리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을 그 무엇과도 바꿀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할 말씀의 자리는 곧 생명의 자리입니다. 말씀을 듣지 못하는 기갈의 시대가 오기 전에 말씀의 자리를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은혜의 자리는 아무 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사야 55:6절에서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고 하시며, 고린도후서 6:2절에서는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라고 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때가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기회는 아무 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기회가 있을 때, 건강이 있고, 시간이 있고, 물질이 있고, 여건이 주어지는 이 좋은 상황을 잃지 말고 자신의 자리를 찾아야 합니다. 앞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부자 그랜블처럼 기회가 지나가버리면 돌이킬 수가 없습니다. 기회가 주어질 때에 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잘 분별하여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지 말고 차지하십시오. 마태복음 11:12절에서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빼앗는 사람이 차지하게 됩니다. 즉 이 세상의 것에 마음을 두고 이 세상에 자신의 모든 것을 투자하게 되면 하나님의 나라는 없습니다. 그 대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절제하고 인내하면서 주님을 따른 사람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세상의 것은 잃어버려도 잠시 불편하고 사는 것이 힘이 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잃어버린 영혼은 영원한 고통과 저주에 빠져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보다 더 중요한 것을 선택하고 차지하시기를 응원하고 축복합니다.
** 들어가는 말
누가복음 10:38-42, “38 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39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40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하소서.’ 41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42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아놀드’라는 의사가 있었습니다. 그 마을에는 ‘그랜불’이라는 큰 부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지금처럼 봄이 오려는 어느 날, 시골에 왕진을 하고 돌아오던 의사가 부잣집 골목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부잣집 대문 앞에서 어떤 나그네가 급하게 문을 두드리고 있었습니다. 다음날, 의사 아놀드는 다시 왕진을 가면서 그 부잣집 앞을 지나는데 어제 그 나그네가 아직도 문을 두드리고 있었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의사는 그 나그네에게 물었습니다. “아니, 지금까지 여기 계십니까?” 그러자 나그네는 “예, 어제부터 문을 두드리고 있는데 도무지 대문을 열어주지 않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의사는 “무슨 일로 그러십니까?”라고 다시 물었습니다. 그 사람은 “예, 이 집에는 아주 급한 일이 닥쳐오고 있습니다. 내가 그 소식을 알려주려고 왔는데 이 집 사람들이 문을 열어 주려고 하지 않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의사는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그렇게 지나갔습니다. 화창한 봄이 지나고, 여름도 지나고, 가을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부자의 집은 거두어들인 곡식들이 집안 곳곳에 산더미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 해 추운 겨울날, 의사 아놀드는 왕진 가방을 들고 그 부잣집 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순간 의사는 몸이 얼어붙는 듯 했습니다. 지난봄에 그 집 대문을 두드리던 그 이상한 나그네가 또 대문을 두드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추위 때문에 나그네의 모습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부잣집 대문이 열리면서 그랜불이 몽둥이를 든 험상궂은 얼굴로 하인들과 함께 나왔습니다. 그리고는 문을 두드리던 나그네를 순식간에 때려눕히고는 대문을 잠그고 들어가 버렸습니다.
이 모습을 본 의사는 급히 달려가서 땅에 쓰러져 있는 나그네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리고 나그네를 부축하면서 “오늘밤은 나와 함께 집에 가서 몸을 좀 녹이고 쉬도록 합시다.”라고 강청하며 나그네의 손목을 잡아끌었습니다. 그런데 나그네의 손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깜짝 놀란 의사가 치료를 하려고 자세히 보니, 나그네의 두 손바닥에는 못 자국이 똑똑하게 보였습니다. 의사 아놀드는 그 자리에 엎드려 “오, 주님! 당신이었군요?”라며 그 나그네를 쳐다보는 순간, 그 나그네의 모습은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날 밤, 자신이 겪은 꿈같은 일을 생각하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리면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문을 열자 어제 보았던 그 부잣집 하인들이 서있었습니다. 그들은 “우리 주인이 갑자기 쓰러져 숨을 못 쉬고 있으니 빨리 함께 가 주십시오.”라고 다급하게 간청했습니다. 의사가 그랜불의 집에 도착했을 때, 부자의 아내가 그랜불을 붙잡고 울고 있었습니다. 의사는 그 부자가 임종을 맞고 있음을 직감했습니다. 그때 그 부자가 의사에게 겨우 들릴락 말락 하는 소리로 애원했습니다. “제발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나의 기도를 듣지 않으십니다. … 당신의 기도라면 들어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잠시 후, 그 부자는 그 큰집과 그 많은 재산을 남겨둔 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자기 집에 도움을 청하러 오는 사람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언제나 대문을 잠가두었습니다. 그리고 뒷문으로 몰래 출입을 하며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주님께서 그토록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시려 했지만 그는 거절했고 결국 주님 없는 끔찍한 죽음을 당한 것입니다.
어리석은 인생의 한 단면입니다. 자신의 미래를 조금만이라도 알 수 있다면 부자 그랜불처럼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조금은 더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생은 바로 한 순간의 앞도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어진 매일의 삶에서 ‘보다 더 중요한 것을 선택하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이 어리석은 부자처럼 영원한 생명이 아니라, 돈과 재물과 이 세상의 즐거움을 선택하면,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이 찾아왔을 때 절망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서 9:12절에서 “분명히 사람은 자기의 시기도 알지 못하나니, 물고기가 재난의 그물에 걸리고, 새들이 올무에 걸림같이, 인생들도 재앙의 날이 그들에게 홀연히 임하면 거기에 걸리느니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알듯이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에는 아무 것도 가지고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이 땅에서 살 때에 자신이 살았던 삶에 따라서 보응을 받을 것입니다. 로마서 2:6절에서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라고 하시며, 요한계시록 20:13절에서는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은 지금 보다 더 중요한 것을 선택해서 살고 있습니까?
※ 먼저, 본문말씀의 내용과 의미를 살펴봅시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베다니’라는 작은 마을에 들리셨습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 동쪽으로 약 2.7㎞ 거리에 있으며, 감람산의 기슭에 있는 작은 마을입니다. 이 마을에는 마르다, 마리아, 그리고 그의 오빠 나사로가 살고 있었는데, 예수님은 사역 말기에 종종 여기에 오셨습니다. ‘베다니’라는 이름은 ‘번민하는 자의 집’ 또는 ‘가난한 자의 집’이라는 의미입니다. 탈무드에 의하면 ‘푸른 과일의 집’이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이 이름에서 풍기는 것처럼 베다니는 가난하고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베다니에 오시자 가장 먼저 반긴 사람이 마르다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로와 마르다, 마리아 세 남매를 많이 아끼셨습니다. 나사로가 병들어 죽었을 때에 찾아오신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이것을 본 유대인들이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였는가?”(요 11:36)라고 했습니다.
이 자그마한 가정은 예수님의 등장으로 갑자기 분주해졌습니다. 사랑하는 소중한 손님이신 예수님을 대접하기 위해서입니다. 엄마역할을 했던 마르다가 바빴습니다. 그런데 동생인 마리아는 언니의 바쁨도 제쳐두고 예수님 발아래 앉아서 예수님의 말씀만 듣고 있었습니다. 보다 못한 언니 마르다는 예수님께 하소연하러 왔습니다.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보시고도 왜 가만히 계십니까 ? 어서 저를 도와주라고 말씀해주십시오”(현대어성경)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뜻밖이었습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하여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가져야 하는 근본적인 관심이 무엇인지를 가르치십니다. 바꾸어 말하면, 그리스도인들이 살면서 보다 더 중요한 것을 선택해야 함을 가르치십니다.
※ 보다 더 중요한 것을 선택하려면, 상황을 분별하는 지혜가 있어야합니다.
현대인은 무엇이 그리 바쁜지 바쁘게 설치다가 더 중요한 일을 놓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영국 속담에 “흐트러진 둥지에는 성한 알이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미 새가 알을 품을 때는 먼저 집을 튼튼하게 보수하고, 부드럽고 따뜻하도록 마른 풀과 깃털을 깝니다. 그리고 알을 가운데로 모아서 어미 새의 가슴으로 품습니다. 만일 둥지가 어수선하고 알들이 이리저리 흩어져 있으면 부화를 기대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들도 자신이 처한 상황을 분별하지 못하고 쓸데없는 일들만 잔뜩 벌여놓고 있다면 얻을 수 있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본문 40절에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고 했습니다. 마르다는 가정주부로서 예수님 일행을 대접하기 위해 바쁘게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너무도 사랑하는 예수님을 대접하기 위해 많은 것을 준비하려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본문 41절에서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라고 하십니다. 대접하는 것은 나무랄 것 없는 선한 일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일이라 할지라도 보다 더 중요한 본래의 의미를 놓칠 정도로 치중해서는 안 됩니다. 사자성어에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했습니다. ‘정도를 지나침은 미치지 못함과 같다.’는 뜻입니다. 마르다는 대접하는 일 때문에 보다 더 중요한 예수님의 생명의 말씀을 듣지 못했습니다.
예전에 부교역자 시절에 성도들 가정에 심방을 가면 안타까운 마음이 들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심방을 가면 먼저 예배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예배 중에 자리를 뜨는 분들이 종종 있었습니다. 주로 기도할 때에 그렇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예배 후에 대접할 음식을 준비하느라 주방에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상처가 될까 해서 그 자리에서는 말을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심방은 음식을 대접받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심방의 목적은 그 가정의 형편을 살피면서 신앙을 격려하고, 위로하고, 영적인 새 힘을 공급하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음식을 준비하느라 말씀을 제대로 못 듣는다든지 함께 기도로 힘을 얻지 못한다면 심방의 의미를 잃게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음식은 잘 준비하지 못하더라도 말씀으로 위로받고 신앙의 길을 찾으며, 기도로 새 힘을 얻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한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이 처한 상황을 잘 분별하여 의미에 합당하게 행동하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이런 지혜를 어떻게 얻을 수 있습니까? 역시 하나님께 구하면 됩니다. 야고보서 1:5절에서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너무 바빠서 기도하는 시간을 내는 것조차 쉽지 않습니다.
2006년에 독일의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도서전에서 최대의 화제를 모으면서 단숨에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된 ‘단순하게 살아라.’는 책이 있습니다. 독일의 목사이자 저널리스트인 ‘베르너 티키 퀴스텐마허’가 자신의 강의와 경험을 집대성한 3권의 시리즈물입니다. 저자는 “복잡한 삶을 단순하게 살라.”고 말합니다. 즉 33 가지의 제안을 통해서 삶을 단순화시키고 역량을 집중하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가지고 있는 물건들을 줄여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평균적으로 1만개의 물건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그는 먼저 서랍 속부터 정리하라고 하면서, '이 물건을 지난 3년 동안 쓴 일이 있나?' 스스로 물어보고 없다면 과감하게 버리라고 합니다. 가정편에서는 저자와 그의 아내 ‘마리온 퀴스텐마허’는 아침마다 아이에게 옷을 입히느라 한바탕 치러야 하는 전쟁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비롯하여 아이들과 여유 있게 식사를 즐길 수 있는 법 등을 설명합니다. 그리고 환경을 단순하게 하라. 재정을 단순하게 하라. 시간과 인간관계와 가정, 그리고 자신의 생활을 단순화시키고 좋은 습관을 구체화시키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핵심가치에 집중하여 살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교회로서의 가치에 집중하고, 사람은 자신만의 가치에 집중하라는 것입니다. 즉 쓸데없는 군더더기들을 버리고 본래의 의미와 핵심적인 가치를 찾아서 집중적으로 가꾸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려면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정확하게 분별하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현대인들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살면서 혼란스러움에 빠져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바빠하니까 자신은 바쁜 것도 없으면서 덩달아서 바빠지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일러, 옛말에 “남이 장에 가니 거름지고 장에 간다.”고 했습니다. 이는 밭으로 일하러 가던 농부가 다른 사람들이 장날이 되어 물건을 팔러 장에 가는 것을 보고 자신은 지고 갈 것이 없으니 밭에 있던 거름을 지고 따라나선 꼴을 일컫는 말입니다. 이건 정말 상황분별이 안 되고, 대책 없는 모양새입니다.
이렇게 쓸데없는 일에 바쁘게 되면 짜증스럽고 불평과 원망이 일어납니다. 마르다가 그러했습니다.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하소서.”라고 불평하고 바쁜 자신을 돕지 않는 동생을 원망했습니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너무 바빠서 마음에 근심이 생기고 피곤에 지쳐 불평과 원망이 생기게 되면 신앙의 위기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의 일을 할 때는 감사와 기쁨이 넘쳐나야 하는데, 만약 그렇지 않다면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사업에, 직장 일에, 가정 일에,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서 성경 잃을 시간이 없고, 기도할 틈이 없다면 여러분은 생명을 잃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무엇이 더 중요합니까? 분별의 지혜를 구하십시오. 마태복음 16:26절에서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라고 하십니다.
※ 상황에 알맞은 자신의 자리를 찾아야합니다.
마르다의 동생 마리아는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라고 했습니다. 마리아는 은혜의 자리를 찾았습니다. 그에게는 지금 예수님의 말씀이 더 갈급했고 중요했습니다. 물론 언니의 원망을 들을 줄 알면서도 예수님의 발치에 자리를 깔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마리아도 그렇게 얌체 짓만 하는 사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오셔서 말씀하시는 그 시간이 마리아에게는 너무나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지금 무엇이 더 중요하고 급한 것인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마리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을 그 무엇과도 바꿀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할 말씀의 자리는 곧 생명의 자리입니다. 말씀을 듣지 못하는 기갈의 시대가 오기 전에 말씀의 자리를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은혜의 자리는 아무 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사야 55:6절에서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고 하시며, 고린도후서 6:2절에서는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라고 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때가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기회는 아무 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기회가 있을 때, 건강이 있고, 시간이 있고, 물질이 있고, 여건이 주어지는 이 좋은 상황을 잃지 말고 자신의 자리를 찾아야 합니다. 앞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부자 그랜블처럼 기회가 지나가버리면 돌이킬 수가 없습니다. 기회가 주어질 때에 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잘 분별하여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지 말고 차지하십시오. 마태복음 11:12절에서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빼앗는 사람이 차지하게 됩니다. 즉 이 세상의 것에 마음을 두고 이 세상에 자신의 모든 것을 투자하게 되면 하나님의 나라는 없습니다. 그 대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절제하고 인내하면서 주님을 따른 사람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세상의 것은 잃어버려도 잠시 불편하고 사는 것이 힘이 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잃어버린 영혼은 영원한 고통과 저주에 빠져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보다 더 중요한 것을 선택하고 차지하시기를 응원하고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