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소원과 하나님의 응답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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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1-09-01 14:25
*** 나의 소원과 하나님의 응답 / 고린도후서 12:1-10
** 들어가는 말
고린도후서 12:1-10, “1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2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3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4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5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아니하리라. 6 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말을 함이라.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 두노라. 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8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여러분 소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한 가지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하시면 어떤 것을 말하고 싶습니까? 아마도 고민이 되겠지요. 사람들은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이런 기적적인 일을 기대하는 소원을 한 번쯤은 가져보았을 것입니다. 크든지 작든지 사람마다 자신이 기대하는 소원은 있을 것입니다. 본문말씀에도 사도 바울의 소원이 들어있습니다. 본문내용은 사도 바울이 경험한 환상과 계시에 대한 말씀입니다. 바울은 어느 날, 성령님께 이끌려 하나님의 나라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엄청난 경험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그 신비로운 경험으로 교만해지지 않도록 ‘육체에 가시’를 주셨습니다. 육체에 가시란 육체의 고통을 뜻합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심했던지 ‘사탄의 사자’라고 표현했습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바울은 이 고통이 극심하여 하나님께 고쳐달라고 세 번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 하시면서 고쳐주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 약함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이 머문다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는 자신의 약함을 오히려 자랑한다고 했습니다. 이 사도 바울처럼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서 고통스럽거나 힘들고 어려움을 벗어나고자 하는 소망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응답하신 것처럼 성도들의 소원이라고 모두 들어주시는 것도 아닙니다.
어느 성도의 가정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저녁 무렵 가족들이 모이는 시간에 엄마는,
“지난밤에 돼지꿈을 꿨는데 이제야 생각이 나네. 당장 복권을 사야겠다.”
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딸은 ‘집사님이 돼지꿈을 꾸었다고 복권을 사겠다니 이게 웬 말이냐?’며 ‘그런 꿈은 잊어버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잠자리에 누운 딸의 머릿속에 복권 생각이 떠나지를 않았습니다. 급기야 ‘어쩌면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기회가 아닐까?!’라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때마침 딸은 가정의 어려운 경제문제를 놓고 기도하고 있던 터라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인 방법을 통하여 소원을 이루어 주시려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상상만 해도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그런데 어느새 머릿속에는 복권 당첨금의 사용 문제를 놓고서 의견이 대립되고 삐걱대는 가족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과연 복권에 당첨만 되면 행복할 수 있을까? 우리 가정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더욱 신앙생활을 잘하게 될까?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여러분도 복권 생각해 보신 적 있지요? 하지만 소원도 소원 나름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도 보면 소원에 대한 이야기가 대단히 많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소원을 크게 나누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육신적이며 세상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영적인 것이며 하늘에 속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본문의 바울을 생각해 봅시다. 바울은 하나님께 자신의 몸의 고통스러운 병을 고쳐달라고 기도 했습니다. 반면에 로마서 9:3절에서는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고 소원을 말합니다. 이 소원은 자신의 동족들이 구원 받기를 소망하는 영적인 소원입니다. 그러나 육신적이고 세상적인 소원이라고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육신을 가진 사람이 자신의 삶을 위하여 소원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6:33절에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먼저 구해야 할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다음으로는 빌립보서 4:6절의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는 말씀처럼 자신의 소원을 믿음으로 아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를 앞에 두고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 26:39) 라고 자신을 위하여 간구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육신적이거나 세상적인 소원이라 할지라도 ‘그 목적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31절에서는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분명한 목적을 제시하십니다. 그리고 야고보서 4:3절에서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고 목적에서 벗어난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음을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의 기도에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소원의 목적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아무렇게나 소원을 가지고, 또 그 소원을 위하여 기도한다고 다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어떤 소원은 하나님께서 기꺼이 받으시고 응답하셔서 큰 역사를 이루기도 하시며, 어떤 소원은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파멸을 부르기도 합니다. 앞의 예화처럼 복권에 당첨되는 것이 행복이 아니라 인생 파멸을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여러분의 소원을 바르게 조정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하나님의 선하신 응답을 얻는 소원이 있습니다.
한 가지 물어봅시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소원이 이루어졌습니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응답을 받지 못한 것입니까? 아니지요. 분명한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 응답이 “지금 그대로가 족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형편이 분명히 만족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현재 상태가 최선의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내 자신의 생각과 계획, 소원이 이루는 것만을 응답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소원을 말하기 전에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모든 소원을 이루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선하신 응답을 얻는 소원이 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하나님의 응답하심을 확실하게 믿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6절에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믿으라고 하셨습니까? 이사야 45:7절입니다.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고 하십니다. 즉 우리 인생에 관계된 모든 일을 계획하시고 인도하시고 이루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응답을 얻는 소원이 되기 위한 두 번째 조건은 구하는 자의 삶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것은 목적에도 관계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목적만 선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루는 과정이야 어떠하든지 목적만 선하다고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목적과 함께 모든 삶이 하나님 앞에서 선하고 아름다워야 합니다.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 선한 목적을 가지게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의 말씀처럼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맺힐 수는 없습니다. 나무가 좋아야 열매도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37:4절에서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고 하시며 145:19절에서는 “그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의 소원을 이루시며 또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사 구원하시리로다.”고 하십니다. 여러분의 소원을 이루기를 원하신다면 먼저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을 기쁘게 섬기는 중에 어느 사이엔가 우리가 소원하는 자리에 도달해 있을 것입니다. 시편 107:30절에서 “그들이 평온함을 말미암아 기뻐하는 중에 여호와께서 그들이 바라는 항구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응답을 얻는 소원이 되기 위한 세 번째 조건은 간절한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이지요. 소원을 이루려면 소원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기 위하여 사람들에게 소원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빌립보서 2:13절입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하나님을 향하는 열심 있는 마음을 가지십시오. 그렇게 하나님을 섬기는 생활 속에서 소원이 생기거든 주저 없이 하나님께 아뢰며 적극적으로 다가가십시오. 하나님께서 주신 소원은 여러분의 삶에서 반드시 이루게 하십니다.
요즈음 많은 성도들이 좋아하는 복음성가 중에 “야베스의 기도”라는 것이 있습니다. 역대상 4:9-10절에 나오는 내용인데 아주 짧은 기도이며, 잘 알려지지 않은 ‘야베스’라는 사람의 소원을 담고 있습니다. “야베스는 그의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 그의 어머니가 이름하여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이 곳 외에는 더 이상 야베스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앞의 설명으로 보아 그 어머니가 야베스를 낳으면서 고생을 많이 했으며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사람인 같습니다. 야베스가 하나님께 자신의 소원을 아뢰었고, 하나님께서는 응답하셨습니다.
사무엘상 1장에는 선지자 사무엘의 어머니인 ‘한나’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이를 낳지 못한 한나는 마음의 깊은 아픔과 함께 큰 소원이 있었습니다. 아들을 얻는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했고 서원의 기도를 했습니다. 서원이란 사람이 하나님께 어떤 것을 약속하는 것을 말합니다. 10-11절입니다.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서원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기도에 응답하셨고 일 년 후에 사무엘이라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한나는 서원대로 사무엘이 젖을 떼고 난 후에 하나님께 바쳐서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 대한 복으로 세 아들과 두 딸을 더 주셨습니다.
창세기 18:16절 이하에는 부지중에 하나님과 천사들을 대접한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 성읍에 대한 하나님께 간구하는 소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이 너무 커서 멸망시켜야겠다고 하시자 아브라함이 중보 합니다. “그곳에 의인 오십 명이 있어도 멸하시겠습니까?”라고 시작한 아브라함은 다섯 번이나 바꾸어가면서 결국 의인 열 명만 있어도 멸망시키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이는 소돔 지역에 살고 있는 조카 롯을 생각한 아브라함의 배려였습니다. 그러나 소돔과 고모라는 의인 열 명이 없어서 결국 멸망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응답에 대한 믿음이 있고, 자신의 삶을 정결하고 거룩하게 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이루고, 그 마음의 소원을 아뢰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고 이루게 하십니다.
2. 멸망을 초래하는 소원이 있습니다.
예전에 어느 목사님이 하신 간증입니다. 목사님이 어느 날 그 교회의 집사님으로부터 주식증권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이유인즉 집사님이 재산 중의 일부를 증권에 투자를 했는데 갑작스럽게 이민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식을 목사님께 드려서 수익이 생기면 교회를 위해서 사용하시도록 했습니다.
목사님은 그 때까지도 주식이나 증권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몰랐습니다. 뉴스 시간에 간간히 보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집사님으로부터 설명을 듣고는 그냥 팔아버려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전에는 전혀 관심도 없었던 주식동향을 전하는 시간에 관심이 갔습니다. 집사님이 주고 간 그 회사의 주식이 조금씩 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장 파는 것을 미루고 좀 더 오를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목사님이 TV앞에 있는 시간이 많아졌고, 급기야 증권시장까지 들락거리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교회를 돌보는 시간이 적어졌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기도하는 중에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주식에 푹 빠져버린 모습을 보고는 당장 그 날로 모든 주식을 팔아버리고 마음을 돌렸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눈앞의 현물에는 너무나 약합니다. 처음의 이야기처럼 정말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에 로또 복권이라도 당첨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을 것입니다. 재산이 늘어가는 재미에 빠져서 신앙을 잃어버리는 사람들은 어렵잖게 보아왔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하나님께서 모르시겠습니까?
열왕기상 2:16-17절에는 다윗의 아들 아도니야의 소원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도니야는 위치상 자신이 왕위를 계승할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신복들 몇몇과 함께 스스로 왕이 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그 왕위가 자신의 이복동생인 솔로몬에게로 넘어갔습니다. 아도니야는 목숨을 위하여 성전으로 도망을 쳤으며, 솔로몬의 배려로 목숨을 건졌습니다. 솔로몬이 왕이 된 후에 아도니야는 솔로몬의 모친인 밧세바를 통하여 왕에게 자신의 소원을 전했습니다. 그 소원이란 다윗 왕의 말년에 수종들었던 수넴 여자 ‘아비삭’을 자신의 아내로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응답이 열왕기상 2;23절에 있습니다. “여호와를 두고 맹세하여 이르되 아도니야가 이런 말을 하였은즉 그의 생명을 잃지 아니하면 하나님은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이다.” 즉 자신이 행한 반역의 일을 생각지도 않고 분수에 지나친 요구를 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아도니야는 죽임을 당했습니다. 자신의 소원이 자신을 죽게 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돈을 가지려고 소원했던 가룟 유다는 스승인 예수님까지 팔았으며,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약속하고서도 돈을 보자 욕심이 생겼던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돈의 일부를 숨기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가룟 유다는 양심의 가책으로 스스로 죽음을 택했으며,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하나님의 징계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육신의 욕망이 근거가 된 소원은 결국 자신의 파멸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디모데전서 6:10절에서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고 하십니다. 사람이 소원하고 마음에 품은 생각이 그 미래를 결정합니다. 헛된 욕망과 탐심을 품음으로서 비극을 초래하기도 하고, 선한 소원을 품음으로서 하나님의 선하신 응답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이미 받은 것에 감사하고, 분수에 맞는 것을 구하며 선한 동기와 선한 방법을 추구해야 합니다. 빌립보서 4:6절의 말씀처럼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는 말씀을 기억하면서 모든 소원과 필요를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처럼 자신의 소원을 아뢰고 하나님의 응답을 들었을 때, 비록 자신의 뜻대로 된 것이 아니었지만 오히려 자랑했던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 소원을 이루기에 급급할 것이 아니라,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먼저 살피고, 그 소원을 이룰 수 있는 길을 먼저 확보해야 합니다. 우리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 길을 인도하시는 분은 거룩하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에게 소원을 주시고 이루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을 신뢰합시다.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으로 선한 목적을 추구합시다. 그리고 주님 안에서 소원(비전)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나아가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는 삶을 이루시기를 축복합니다.
** 들어가는 말
고린도후서 12:1-10, “1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2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3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4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5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아니하리라. 6 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말을 함이라.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 두노라. 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8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여러분 소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한 가지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하시면 어떤 것을 말하고 싶습니까? 아마도 고민이 되겠지요. 사람들은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이런 기적적인 일을 기대하는 소원을 한 번쯤은 가져보았을 것입니다. 크든지 작든지 사람마다 자신이 기대하는 소원은 있을 것입니다. 본문말씀에도 사도 바울의 소원이 들어있습니다. 본문내용은 사도 바울이 경험한 환상과 계시에 대한 말씀입니다. 바울은 어느 날, 성령님께 이끌려 하나님의 나라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엄청난 경험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그 신비로운 경험으로 교만해지지 않도록 ‘육체에 가시’를 주셨습니다. 육체에 가시란 육체의 고통을 뜻합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심했던지 ‘사탄의 사자’라고 표현했습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바울은 이 고통이 극심하여 하나님께 고쳐달라고 세 번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 하시면서 고쳐주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 약함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이 머문다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는 자신의 약함을 오히려 자랑한다고 했습니다. 이 사도 바울처럼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서 고통스럽거나 힘들고 어려움을 벗어나고자 하는 소망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응답하신 것처럼 성도들의 소원이라고 모두 들어주시는 것도 아닙니다.
어느 성도의 가정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저녁 무렵 가족들이 모이는 시간에 엄마는,
“지난밤에 돼지꿈을 꿨는데 이제야 생각이 나네. 당장 복권을 사야겠다.”
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딸은 ‘집사님이 돼지꿈을 꾸었다고 복권을 사겠다니 이게 웬 말이냐?’며 ‘그런 꿈은 잊어버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잠자리에 누운 딸의 머릿속에 복권 생각이 떠나지를 않았습니다. 급기야 ‘어쩌면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기회가 아닐까?!’라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때마침 딸은 가정의 어려운 경제문제를 놓고 기도하고 있던 터라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인 방법을 통하여 소원을 이루어 주시려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상상만 해도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그런데 어느새 머릿속에는 복권 당첨금의 사용 문제를 놓고서 의견이 대립되고 삐걱대는 가족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과연 복권에 당첨만 되면 행복할 수 있을까? 우리 가정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더욱 신앙생활을 잘하게 될까?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여러분도 복권 생각해 보신 적 있지요? 하지만 소원도 소원 나름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도 보면 소원에 대한 이야기가 대단히 많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소원을 크게 나누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육신적이며 세상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영적인 것이며 하늘에 속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본문의 바울을 생각해 봅시다. 바울은 하나님께 자신의 몸의 고통스러운 병을 고쳐달라고 기도 했습니다. 반면에 로마서 9:3절에서는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고 소원을 말합니다. 이 소원은 자신의 동족들이 구원 받기를 소망하는 영적인 소원입니다. 그러나 육신적이고 세상적인 소원이라고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육신을 가진 사람이 자신의 삶을 위하여 소원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6:33절에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먼저 구해야 할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다음으로는 빌립보서 4:6절의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는 말씀처럼 자신의 소원을 믿음으로 아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를 앞에 두고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 26:39) 라고 자신을 위하여 간구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육신적이거나 세상적인 소원이라 할지라도 ‘그 목적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31절에서는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분명한 목적을 제시하십니다. 그리고 야고보서 4:3절에서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고 목적에서 벗어난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음을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의 기도에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소원의 목적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아무렇게나 소원을 가지고, 또 그 소원을 위하여 기도한다고 다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어떤 소원은 하나님께서 기꺼이 받으시고 응답하셔서 큰 역사를 이루기도 하시며, 어떤 소원은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파멸을 부르기도 합니다. 앞의 예화처럼 복권에 당첨되는 것이 행복이 아니라 인생 파멸을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여러분의 소원을 바르게 조정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하나님의 선하신 응답을 얻는 소원이 있습니다.
한 가지 물어봅시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소원이 이루어졌습니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응답을 받지 못한 것입니까? 아니지요. 분명한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 응답이 “지금 그대로가 족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형편이 분명히 만족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현재 상태가 최선의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내 자신의 생각과 계획, 소원이 이루는 것만을 응답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소원을 말하기 전에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모든 소원을 이루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선하신 응답을 얻는 소원이 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하나님의 응답하심을 확실하게 믿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6절에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믿으라고 하셨습니까? 이사야 45:7절입니다.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고 하십니다. 즉 우리 인생에 관계된 모든 일을 계획하시고 인도하시고 이루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응답을 얻는 소원이 되기 위한 두 번째 조건은 구하는 자의 삶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것은 목적에도 관계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목적만 선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루는 과정이야 어떠하든지 목적만 선하다고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목적과 함께 모든 삶이 하나님 앞에서 선하고 아름다워야 합니다.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 선한 목적을 가지게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의 말씀처럼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맺힐 수는 없습니다. 나무가 좋아야 열매도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37:4절에서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고 하시며 145:19절에서는 “그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의 소원을 이루시며 또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사 구원하시리로다.”고 하십니다. 여러분의 소원을 이루기를 원하신다면 먼저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을 기쁘게 섬기는 중에 어느 사이엔가 우리가 소원하는 자리에 도달해 있을 것입니다. 시편 107:30절에서 “그들이 평온함을 말미암아 기뻐하는 중에 여호와께서 그들이 바라는 항구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응답을 얻는 소원이 되기 위한 세 번째 조건은 간절한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이지요. 소원을 이루려면 소원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기 위하여 사람들에게 소원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빌립보서 2:13절입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하나님을 향하는 열심 있는 마음을 가지십시오. 그렇게 하나님을 섬기는 생활 속에서 소원이 생기거든 주저 없이 하나님께 아뢰며 적극적으로 다가가십시오. 하나님께서 주신 소원은 여러분의 삶에서 반드시 이루게 하십니다.
요즈음 많은 성도들이 좋아하는 복음성가 중에 “야베스의 기도”라는 것이 있습니다. 역대상 4:9-10절에 나오는 내용인데 아주 짧은 기도이며, 잘 알려지지 않은 ‘야베스’라는 사람의 소원을 담고 있습니다. “야베스는 그의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 그의 어머니가 이름하여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이 곳 외에는 더 이상 야베스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앞의 설명으로 보아 그 어머니가 야베스를 낳으면서 고생을 많이 했으며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사람인 같습니다. 야베스가 하나님께 자신의 소원을 아뢰었고, 하나님께서는 응답하셨습니다.
사무엘상 1장에는 선지자 사무엘의 어머니인 ‘한나’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이를 낳지 못한 한나는 마음의 깊은 아픔과 함께 큰 소원이 있었습니다. 아들을 얻는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했고 서원의 기도를 했습니다. 서원이란 사람이 하나님께 어떤 것을 약속하는 것을 말합니다. 10-11절입니다.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서원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기도에 응답하셨고 일 년 후에 사무엘이라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한나는 서원대로 사무엘이 젖을 떼고 난 후에 하나님께 바쳐서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 대한 복으로 세 아들과 두 딸을 더 주셨습니다.
창세기 18:16절 이하에는 부지중에 하나님과 천사들을 대접한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 성읍에 대한 하나님께 간구하는 소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이 너무 커서 멸망시켜야겠다고 하시자 아브라함이 중보 합니다. “그곳에 의인 오십 명이 있어도 멸하시겠습니까?”라고 시작한 아브라함은 다섯 번이나 바꾸어가면서 결국 의인 열 명만 있어도 멸망시키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이는 소돔 지역에 살고 있는 조카 롯을 생각한 아브라함의 배려였습니다. 그러나 소돔과 고모라는 의인 열 명이 없어서 결국 멸망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응답에 대한 믿음이 있고, 자신의 삶을 정결하고 거룩하게 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이루고, 그 마음의 소원을 아뢰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고 이루게 하십니다.
2. 멸망을 초래하는 소원이 있습니다.
예전에 어느 목사님이 하신 간증입니다. 목사님이 어느 날 그 교회의 집사님으로부터 주식증권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이유인즉 집사님이 재산 중의 일부를 증권에 투자를 했는데 갑작스럽게 이민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식을 목사님께 드려서 수익이 생기면 교회를 위해서 사용하시도록 했습니다.
목사님은 그 때까지도 주식이나 증권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몰랐습니다. 뉴스 시간에 간간히 보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집사님으로부터 설명을 듣고는 그냥 팔아버려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전에는 전혀 관심도 없었던 주식동향을 전하는 시간에 관심이 갔습니다. 집사님이 주고 간 그 회사의 주식이 조금씩 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장 파는 것을 미루고 좀 더 오를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목사님이 TV앞에 있는 시간이 많아졌고, 급기야 증권시장까지 들락거리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교회를 돌보는 시간이 적어졌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기도하는 중에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주식에 푹 빠져버린 모습을 보고는 당장 그 날로 모든 주식을 팔아버리고 마음을 돌렸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눈앞의 현물에는 너무나 약합니다. 처음의 이야기처럼 정말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에 로또 복권이라도 당첨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을 것입니다. 재산이 늘어가는 재미에 빠져서 신앙을 잃어버리는 사람들은 어렵잖게 보아왔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하나님께서 모르시겠습니까?
열왕기상 2:16-17절에는 다윗의 아들 아도니야의 소원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도니야는 위치상 자신이 왕위를 계승할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신복들 몇몇과 함께 스스로 왕이 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그 왕위가 자신의 이복동생인 솔로몬에게로 넘어갔습니다. 아도니야는 목숨을 위하여 성전으로 도망을 쳤으며, 솔로몬의 배려로 목숨을 건졌습니다. 솔로몬이 왕이 된 후에 아도니야는 솔로몬의 모친인 밧세바를 통하여 왕에게 자신의 소원을 전했습니다. 그 소원이란 다윗 왕의 말년에 수종들었던 수넴 여자 ‘아비삭’을 자신의 아내로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응답이 열왕기상 2;23절에 있습니다. “여호와를 두고 맹세하여 이르되 아도니야가 이런 말을 하였은즉 그의 생명을 잃지 아니하면 하나님은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이다.” 즉 자신이 행한 반역의 일을 생각지도 않고 분수에 지나친 요구를 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아도니야는 죽임을 당했습니다. 자신의 소원이 자신을 죽게 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돈을 가지려고 소원했던 가룟 유다는 스승인 예수님까지 팔았으며,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약속하고서도 돈을 보자 욕심이 생겼던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돈의 일부를 숨기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가룟 유다는 양심의 가책으로 스스로 죽음을 택했으며,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하나님의 징계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육신의 욕망이 근거가 된 소원은 결국 자신의 파멸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디모데전서 6:10절에서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고 하십니다. 사람이 소원하고 마음에 품은 생각이 그 미래를 결정합니다. 헛된 욕망과 탐심을 품음으로서 비극을 초래하기도 하고, 선한 소원을 품음으로서 하나님의 선하신 응답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이미 받은 것에 감사하고, 분수에 맞는 것을 구하며 선한 동기와 선한 방법을 추구해야 합니다. 빌립보서 4:6절의 말씀처럼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는 말씀을 기억하면서 모든 소원과 필요를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처럼 자신의 소원을 아뢰고 하나님의 응답을 들었을 때, 비록 자신의 뜻대로 된 것이 아니었지만 오히려 자랑했던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 소원을 이루기에 급급할 것이 아니라,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먼저 살피고, 그 소원을 이룰 수 있는 길을 먼저 확보해야 합니다. 우리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 길을 인도하시는 분은 거룩하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에게 소원을 주시고 이루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을 신뢰합시다.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으로 선한 목적을 추구합시다. 그리고 주님 안에서 소원(비전)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나아가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는 삶을 이루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