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지 곧은 믿음의 삶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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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1-08-22 21:43
*** 심지 곧은 믿음의 삶 / 역대하 16:7-12
** 들어가는 말
역대하 16:7-12, “7 그 때에 선견자 하나니가 유다 왕 아사에게 나와서 그에게 이르되 왕이 아람 왕을 의지하고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아람 왕의 군대가 왕의 손에서 벗어났나이다. 8 구스 사람과 룹 사람의 군대가 크지 아니하며, 말과 병거가 심히 많지 아니하더이까? 그러나 왕이 여호와를 의지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의 손에 넘기셨나이다. 9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이 일은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은즉 이 후부터는 왕에게 전쟁이 있으리이다. 하매 10 아사가 노하여 선견자를 옥에 가두었으니 이는 그의 말에 크게 노하였음이며 그 때에 아사가 또 백성 중에서 몇 사람을 학대하였더라. 11 아사의 처음부터 끝까지의 행적은 유다와 이스라엘 열왕기에 기록되니라. 12 아사가 왕이 된 지 삼십구 년에 그의 발이 병들어 매우 위독했으나 병이 있을 때에 그가 여호와께 구하지 아니하고 의원들에게 구하였더라.”
‘첫인상’이라고들 하지요?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서 느끼는 자기 주관적인 감정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다른 사람을 대할 때 받는 자신만의 느낌이 있습니다. ‘차갑게 보인다.’ ‘정이 많은 것 같다.’ ‘줏대가 없다.’ ‘건방지다’ ‘지적이다.’ 등등. 이렇게 다른 사람을 대할 때 판단하는 자신만의 기준도 있습니다. 그 기준에 따라서 분석하고 자신과의 관계 여부를 결정하게 됩니다. 만일 여러분이 회사를 경영하는 경영주라면 사원을 뽑을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을 뽑겠습니까? 이야기의 방향을 바꾸어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보실 때에, 또는 일군으로 사용하시려고 사람을 택하실 때에 어떤 기준을 가지고 계시겠습니까? 성경 말씀에 의하면 여러 기준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을 향한 신뢰성(믿음), 겸손, 성결, 순종 등등. 이 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기준이 되는 것이 ‘하나님을 향한 신뢰성(믿음)’일 것입니다. 즉 ‘흔들리지 않는 심지 곧은 믿음’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일군을 뽑으시는 면접장에 내가 있다고 생각하고,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이 되려면 어떤 것이 필요한지를 생각해 봅시다.
※ 먼저, 본문말씀을 이해하도록 합시다.
본문말씀에는 남 유다의 세 번째 왕인 ‘아사’가 등장합니다. 아사 왕은 41년 동안 왕위에 있으면서 비교적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적인 통치를 했습니다. 초기의 아사 왕의 업적에 대하여 역대하 14:2-5절에서 이렇게 증언합니다. “아사가 그의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선과 정의를 행하여, 이방 제단과 산당을 없애고,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상을 찍고, 유다 사람에게 명하여 그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게 하며, 그의 율법과 명령을 행하게 하고, 또 유다 모든 성읍에서 산당과 태양상을 없애매, 나라가 그 앞에서 평안함을 누리니라.” 이렇게 하나님을 경외하며 전국의 우상들을 다 파괴하고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기도록 했습니다. 구스의 백만 대군을 세라가 통솔하여 유다를 치러 왔을 때, 아사 왕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뢰했습니다. 그 결과 아사의 58만 병사가 백만 대군을 물리쳤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의지하는 아사 왕에게 평안을 주셨습니다. 주변 나라들이 싸움을 걸어오지도 못하도록 보호하신 것입니다. 아사 왕 35년까지 평화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사 왕 36년에 북 이스라엘의 바아사 왕이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그런데 아사 왕은 하나님께 의뢰하지 않고 이웃 강대국인 다메섹의 아람 왕 벤하닷 왕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아람 왕의 도움으로 전쟁은 면했지만 하나님의 징벌이 주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니 선지자를 통하여 “왕이 아람 왕을 의지하고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아람 왕의 군대가 왕의 손에서 벗어났나이다. … 이 후부터는 왕에게 전쟁이 있으리이다.”라고 하나님의 징계를 전했습니다. 바로 이 말씀이 본문말씀입니다. 아사 왕의 생애를 요약하면, “용두사미(龍頭蛇尾)”라는 말이 잘 어울립니다. 즉 시작은 잘 했지만 점점 마음이 변하고 생각이 바뀌면서 해가 갈수록 하나님을 떠나고, 결국 말년에는 하나님의 징계로 죽게 됩니다. 심지가 곧지 못했던 아사 왕입니다.
저는 본문을 포함하는 아사 왕의 일대기를 읽을 때마다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경우는 아사 왕뿐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사울 왕이나 솔로몬 왕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의 시작은 정말 좋았습니다. 하나님의 인정을 받으며 사람들의 축복 속에서 통치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결과는 모두가 비극이라는 공통점을 안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뿐만 아니라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일들 가운데 결과가 좋지 않은 이유를 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인생을 돌아보며, 남은 생애를 잘 설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심지 곧은 믿음의 삶은 마음이 일정해야 합니다.
마라톤 중계를 보다보면, 출발할 때에 경쾌하게 시작해서 ‘잘 달린다.’ 싶도록 선두를 유지하면서 달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반환점을 돌고 골인지점이 다가오면서 선두를 내어주다가 서서히 뒤로 처지면서 결국 우승을 내어 주고 마는 광경을 볼 때가 있습니다. 스포츠 경기에 있어서 출발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하지만 경기 내내 일정한 힘의 조절이 없다면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일의 시작이 중요하지만 마무리는 더욱 중요합니다. 그것이 우리 인생이라면 더 설명할 필요도 없이 중요합니다. 히브리서 3:14절에서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고 하십니다.
남 유다에서 비교적 선한 통치를 한 왕을 꼽는다면 그 중에 아사 왕도 포함됩니다. 솔로몬 왕도 그러했지만, 아사 왕도 시작은 하나님의 마음에 쏙 들었습니다. 아사 왕은 이방 제단과 산당을 없이하고 주상을 훼파하며 아세라 상을 찍는 종교개혁에 힘을 썼습니다. 그것도 전국을 돌면서 직접 개혁을 주도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백성들을 명하여 하나님을 찾게 하고 하나님의 명령과 율법을 행하게 했습니다.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는 자는 대소 남녀를 막론하고 죽이는 것이 마땅하다.’(대하 15:13)고 선포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그 표본으로 자신의 어머니가 만든 목상을 찍고 불살랐으며, 목상을 만든 어머니를 태후의 자리에서 폐위시켰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과감하게 개혁을 단행하는 아사 왕에게 “너희는 강하게 하라. 너희의 손이 약하지 않게 하라. 너희 행위에는 상급이 있음이라.”(대하 15:7)고 격려까지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사 왕의 35년까지 전쟁 없는 평화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런데 아사 왕 36년에 북 이스라엘의 바아사 왕이 침략해 왔습니다. 아사 왕은 그동안 하나님을 의지했던 마음은 간곳이 없고, 아람 왕인 ‘벤하닷’에게 성전과 왕궁의 금과 은을 주면서 북 이스라엘 군을 물리쳐 달라고 의뢰했습니다. 아사 왕은 더 이상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아사 왕의 마음이 이처럼 달라진 것은 나라가 든든하게 서게 되는 집권 초기 10년 이후부터였습니다. 아사 왕은 하나님의 은혜로 나라가 든든하게 서게 되자 서서히 세상적인 권력과 힘을 신뢰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결국 집권 36년에 전쟁이 일어나게 되자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의 힘을 의지했습니다. 이전에 구스의 군대 백만이 쳐들어 왔을 때에도 하나님을 의지했었는데, 이제는 자그마한 북 이스라엘이 쳐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의지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마음이 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견자 하나니를 아사 왕에게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본문 7-9절의 말씀에서 “네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으니, 이제부터는 전쟁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할 때 주셨던 평안이 하나님을 떠나면서 사라진 것입니다. 9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라고 하셨습니다. 결말이 좋지 않은 사람들의 공통점은 바로 시작과 끝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정도가 달랐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일천 번제를 드리기까지 했으며, 소원을 말하라는 하나님께 백성을 재판할 수 있는 ‘지혜’만을 구했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에 의하여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뽑히자 짐마차 뒤에 숨어버릴 정도로 겸손했습니다. 요한 계시록의 에베소 교회는 하나님과 사람을 향하는 깊은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육신의 삶에 빠져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사라졌으며, 세상적인 부귀영화와 권력을 의지했습니다. 이들은 결말도 역시 ‘패망’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은 처음과 끝이 항상 일정한 마음의 심지 곧은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 심지 곧은 믿음의 삶은 방향이 일정해야 합니다.
신앙이 깊은 장로님이 이름 있는 회사의 중역이었습니다. 한 날은 새벽 기도 후에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사장이 불교신자인데 공장을 새로 신축해서 준공식을 하는 날 고사를 지내는 데 자신이 사장과 함께 절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교회 중직자로서 절을 하자니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것이고, 또 절을 하지 않으면 사장의 뜻을 어기는 일이 되어서 회사를 그만 두어야 마땅하다는 생각으로 고민했습니다. 장로님은 목사님과 함께 기도하면서 결론을 얻었습니다. 갈라디아1:10절의 말씀을 생각했습니다.
“내가 주님을 기쁘게 하랴, 사람을 기쁘게 하랴,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하면 하나님의 종이 아니니라.”
다음 날, 장로님은 사장실을 방문해서 사직서를 제출했습니다. 회사 대표 중역의 급작스런 사직서를 보면서 사장이 사임하려는 이유를 물었습니다. 장로님은 “저는 교회의 직분을 맡은 사람입니다. 저는 사장님을 존경하고 또 모든 일에 성실하게 일했습니다. 그러나 절하는 것은 신앙 양심에 허락되지 않고, 사장님의 말씀을 따르지 못함을 죄송하게 생각하여 사임하려고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사장님은 장로님의 손을 잡으면서 “당신처럼 진실하고 성실한 사람이 내게 필요하오, 내가 대신 두 번 절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시오.”라며 사직서를 반려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 속의 장로님은 그 신앙의 방향이 오로지 하나님께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사 왕은 세상을 의지하면서부터 성격도 달라졌습니다. 난폭한 성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났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경고를 듣는 것조차 싫었습니다. 아사 왕은 화가 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견자 하나니를 옥에 가두어 버리고 백성들에게 화풀이를 했습니다. 결국 집권 말기인 39년에 하나님의 징계로 발에 심한 병이 나게 되었습니다. 본문 12절을 봅시다. “아사가 왕이 된 지 삼십구 년에 그의 발이 병들어 매우 위독했으나 병이 있을 때에 그가 여호와께 구하지 아니하고 의원들에게 구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아사가 왕이 된 초기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곧 법이었습니다. 구스의 세라가 군사 백만을 거느리고 싸움을 걸어 왔을 때에도 아사 왕은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중과부적의 위기에서도 사람의 도움을 구하지 않았던 아사 왕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사 왕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구스 군대를 전멸시키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자기 발에 난 병을 가지고도 하나님께 구하지 않고 의사를 찾았습니다. 그의 삶의 방향이 하나님께로 향하던 것이 세상으로 향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병이 났을 때에 병원에 가서도 안 되고, 약을 사용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까? 물론 아닙니다. 의사를 만드신 분도 하나님이시며, 약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누가복음을 기록한 ‘누가’는 의사였으며, 하나님께서 약 사용하는 것을 결코 막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우선권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께 먼저 구하느냐? 아니면 사람이나 세상적인 힘이나 약을 의지하느냐? 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먼저 구했을 때에, 하나님께서 의사를 통해서든지 약을 통해서든지 섭리하시는 것입니다. 아사 왕이 하나님께 구하지 않았다는 것은 더 이상 하나님을 신뢰하지도 의지하지도 않는다는 표현입니다.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예수님을 처음 믿었을 때보다 지금이 더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고 의지합니까? 그리고 무슨 일에든지 하나님께 먼저 구합니까? 혹시 시작은 좋았는데 세월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세상 쪽으로 기울지나 않았는지요.
유명한 설교가인 스펄전 목사님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할 일은 계산적인 믿음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는 것이다. 계산은 하나님께서 하신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자 한다면 사람의 생각으로 계산하지 말고,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을 결코 망하게 하지 않습니다. 시편 55:22절에서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라고 하십니다.
마지막 이야기 하나 하고 마치겠습니다.
사막을 탐험하려는 사람에게 그 경험을 가진 탐험가가 이런 충고를 했습니다. “사막에서 길을 잃으면 북극성을 보고 걸어라.” 탐험가는 자신의 경험과 지식과 모든 것을 동원하여 사막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분명히 가까운 곳에 마을이 있는 것 같은데 방향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앞서 간 발자국을 발견했습니다. 기대감에 기운을 차기고 그 발자국을 따라갔지만 마을은 없고, 같은 지역을 돌고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자신의 발자국을 좇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제야 탐험가는 선배의 충고를 기억하고 밤을 기다려 북극성을 찾아서 방향을 잡았고 얼마 후 마을을 찾았습니다.
앞날이 불투명할 때 자신의 경험, 자신의 지식, 믿을 수 없는 사람의 감각을 의지하지 말고 변하지 않는 그리스도를 찾아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과 삶의 방향이 일정하게 하나님께로 향하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의지하는 길 뿐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신앙의 삶이 예전과 같지 않거든 속히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을 의지했던 처음 사랑, 처음 믿음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를 받을 뿐만 아니라 끝까지 쓰임 받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 들어가는 말
역대하 16:7-12, “7 그 때에 선견자 하나니가 유다 왕 아사에게 나와서 그에게 이르되 왕이 아람 왕을 의지하고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아람 왕의 군대가 왕의 손에서 벗어났나이다. 8 구스 사람과 룹 사람의 군대가 크지 아니하며, 말과 병거가 심히 많지 아니하더이까? 그러나 왕이 여호와를 의지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의 손에 넘기셨나이다. 9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이 일은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은즉 이 후부터는 왕에게 전쟁이 있으리이다. 하매 10 아사가 노하여 선견자를 옥에 가두었으니 이는 그의 말에 크게 노하였음이며 그 때에 아사가 또 백성 중에서 몇 사람을 학대하였더라. 11 아사의 처음부터 끝까지의 행적은 유다와 이스라엘 열왕기에 기록되니라. 12 아사가 왕이 된 지 삼십구 년에 그의 발이 병들어 매우 위독했으나 병이 있을 때에 그가 여호와께 구하지 아니하고 의원들에게 구하였더라.”
‘첫인상’이라고들 하지요?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서 느끼는 자기 주관적인 감정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다른 사람을 대할 때 받는 자신만의 느낌이 있습니다. ‘차갑게 보인다.’ ‘정이 많은 것 같다.’ ‘줏대가 없다.’ ‘건방지다’ ‘지적이다.’ 등등. 이렇게 다른 사람을 대할 때 판단하는 자신만의 기준도 있습니다. 그 기준에 따라서 분석하고 자신과의 관계 여부를 결정하게 됩니다. 만일 여러분이 회사를 경영하는 경영주라면 사원을 뽑을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을 뽑겠습니까? 이야기의 방향을 바꾸어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보실 때에, 또는 일군으로 사용하시려고 사람을 택하실 때에 어떤 기준을 가지고 계시겠습니까? 성경 말씀에 의하면 여러 기준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을 향한 신뢰성(믿음), 겸손, 성결, 순종 등등. 이 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기준이 되는 것이 ‘하나님을 향한 신뢰성(믿음)’일 것입니다. 즉 ‘흔들리지 않는 심지 곧은 믿음’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일군을 뽑으시는 면접장에 내가 있다고 생각하고,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이 되려면 어떤 것이 필요한지를 생각해 봅시다.
※ 먼저, 본문말씀을 이해하도록 합시다.
본문말씀에는 남 유다의 세 번째 왕인 ‘아사’가 등장합니다. 아사 왕은 41년 동안 왕위에 있으면서 비교적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적인 통치를 했습니다. 초기의 아사 왕의 업적에 대하여 역대하 14:2-5절에서 이렇게 증언합니다. “아사가 그의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선과 정의를 행하여, 이방 제단과 산당을 없애고,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상을 찍고, 유다 사람에게 명하여 그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게 하며, 그의 율법과 명령을 행하게 하고, 또 유다 모든 성읍에서 산당과 태양상을 없애매, 나라가 그 앞에서 평안함을 누리니라.” 이렇게 하나님을 경외하며 전국의 우상들을 다 파괴하고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기도록 했습니다. 구스의 백만 대군을 세라가 통솔하여 유다를 치러 왔을 때, 아사 왕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뢰했습니다. 그 결과 아사의 58만 병사가 백만 대군을 물리쳤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의지하는 아사 왕에게 평안을 주셨습니다. 주변 나라들이 싸움을 걸어오지도 못하도록 보호하신 것입니다. 아사 왕 35년까지 평화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사 왕 36년에 북 이스라엘의 바아사 왕이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그런데 아사 왕은 하나님께 의뢰하지 않고 이웃 강대국인 다메섹의 아람 왕 벤하닷 왕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아람 왕의 도움으로 전쟁은 면했지만 하나님의 징벌이 주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니 선지자를 통하여 “왕이 아람 왕을 의지하고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아람 왕의 군대가 왕의 손에서 벗어났나이다. … 이 후부터는 왕에게 전쟁이 있으리이다.”라고 하나님의 징계를 전했습니다. 바로 이 말씀이 본문말씀입니다. 아사 왕의 생애를 요약하면, “용두사미(龍頭蛇尾)”라는 말이 잘 어울립니다. 즉 시작은 잘 했지만 점점 마음이 변하고 생각이 바뀌면서 해가 갈수록 하나님을 떠나고, 결국 말년에는 하나님의 징계로 죽게 됩니다. 심지가 곧지 못했던 아사 왕입니다.
저는 본문을 포함하는 아사 왕의 일대기를 읽을 때마다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경우는 아사 왕뿐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사울 왕이나 솔로몬 왕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의 시작은 정말 좋았습니다. 하나님의 인정을 받으며 사람들의 축복 속에서 통치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결과는 모두가 비극이라는 공통점을 안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뿐만 아니라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일들 가운데 결과가 좋지 않은 이유를 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인생을 돌아보며, 남은 생애를 잘 설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심지 곧은 믿음의 삶은 마음이 일정해야 합니다.
마라톤 중계를 보다보면, 출발할 때에 경쾌하게 시작해서 ‘잘 달린다.’ 싶도록 선두를 유지하면서 달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반환점을 돌고 골인지점이 다가오면서 선두를 내어주다가 서서히 뒤로 처지면서 결국 우승을 내어 주고 마는 광경을 볼 때가 있습니다. 스포츠 경기에 있어서 출발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하지만 경기 내내 일정한 힘의 조절이 없다면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일의 시작이 중요하지만 마무리는 더욱 중요합니다. 그것이 우리 인생이라면 더 설명할 필요도 없이 중요합니다. 히브리서 3:14절에서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고 하십니다.
남 유다에서 비교적 선한 통치를 한 왕을 꼽는다면 그 중에 아사 왕도 포함됩니다. 솔로몬 왕도 그러했지만, 아사 왕도 시작은 하나님의 마음에 쏙 들었습니다. 아사 왕은 이방 제단과 산당을 없이하고 주상을 훼파하며 아세라 상을 찍는 종교개혁에 힘을 썼습니다. 그것도 전국을 돌면서 직접 개혁을 주도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백성들을 명하여 하나님을 찾게 하고 하나님의 명령과 율법을 행하게 했습니다.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는 자는 대소 남녀를 막론하고 죽이는 것이 마땅하다.’(대하 15:13)고 선포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그 표본으로 자신의 어머니가 만든 목상을 찍고 불살랐으며, 목상을 만든 어머니를 태후의 자리에서 폐위시켰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과감하게 개혁을 단행하는 아사 왕에게 “너희는 강하게 하라. 너희의 손이 약하지 않게 하라. 너희 행위에는 상급이 있음이라.”(대하 15:7)고 격려까지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사 왕의 35년까지 전쟁 없는 평화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런데 아사 왕 36년에 북 이스라엘의 바아사 왕이 침략해 왔습니다. 아사 왕은 그동안 하나님을 의지했던 마음은 간곳이 없고, 아람 왕인 ‘벤하닷’에게 성전과 왕궁의 금과 은을 주면서 북 이스라엘 군을 물리쳐 달라고 의뢰했습니다. 아사 왕은 더 이상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아사 왕의 마음이 이처럼 달라진 것은 나라가 든든하게 서게 되는 집권 초기 10년 이후부터였습니다. 아사 왕은 하나님의 은혜로 나라가 든든하게 서게 되자 서서히 세상적인 권력과 힘을 신뢰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결국 집권 36년에 전쟁이 일어나게 되자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의 힘을 의지했습니다. 이전에 구스의 군대 백만이 쳐들어 왔을 때에도 하나님을 의지했었는데, 이제는 자그마한 북 이스라엘이 쳐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의지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마음이 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견자 하나니를 아사 왕에게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본문 7-9절의 말씀에서 “네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으니, 이제부터는 전쟁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할 때 주셨던 평안이 하나님을 떠나면서 사라진 것입니다. 9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라고 하셨습니다. 결말이 좋지 않은 사람들의 공통점은 바로 시작과 끝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정도가 달랐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일천 번제를 드리기까지 했으며, 소원을 말하라는 하나님께 백성을 재판할 수 있는 ‘지혜’만을 구했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에 의하여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뽑히자 짐마차 뒤에 숨어버릴 정도로 겸손했습니다. 요한 계시록의 에베소 교회는 하나님과 사람을 향하는 깊은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육신의 삶에 빠져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사라졌으며, 세상적인 부귀영화와 권력을 의지했습니다. 이들은 결말도 역시 ‘패망’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은 처음과 끝이 항상 일정한 마음의 심지 곧은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 심지 곧은 믿음의 삶은 방향이 일정해야 합니다.
신앙이 깊은 장로님이 이름 있는 회사의 중역이었습니다. 한 날은 새벽 기도 후에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사장이 불교신자인데 공장을 새로 신축해서 준공식을 하는 날 고사를 지내는 데 자신이 사장과 함께 절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교회 중직자로서 절을 하자니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것이고, 또 절을 하지 않으면 사장의 뜻을 어기는 일이 되어서 회사를 그만 두어야 마땅하다는 생각으로 고민했습니다. 장로님은 목사님과 함께 기도하면서 결론을 얻었습니다. 갈라디아1:10절의 말씀을 생각했습니다.
“내가 주님을 기쁘게 하랴, 사람을 기쁘게 하랴,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하면 하나님의 종이 아니니라.”
다음 날, 장로님은 사장실을 방문해서 사직서를 제출했습니다. 회사 대표 중역의 급작스런 사직서를 보면서 사장이 사임하려는 이유를 물었습니다. 장로님은 “저는 교회의 직분을 맡은 사람입니다. 저는 사장님을 존경하고 또 모든 일에 성실하게 일했습니다. 그러나 절하는 것은 신앙 양심에 허락되지 않고, 사장님의 말씀을 따르지 못함을 죄송하게 생각하여 사임하려고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사장님은 장로님의 손을 잡으면서 “당신처럼 진실하고 성실한 사람이 내게 필요하오, 내가 대신 두 번 절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시오.”라며 사직서를 반려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 속의 장로님은 그 신앙의 방향이 오로지 하나님께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사 왕은 세상을 의지하면서부터 성격도 달라졌습니다. 난폭한 성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났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경고를 듣는 것조차 싫었습니다. 아사 왕은 화가 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견자 하나니를 옥에 가두어 버리고 백성들에게 화풀이를 했습니다. 결국 집권 말기인 39년에 하나님의 징계로 발에 심한 병이 나게 되었습니다. 본문 12절을 봅시다. “아사가 왕이 된 지 삼십구 년에 그의 발이 병들어 매우 위독했으나 병이 있을 때에 그가 여호와께 구하지 아니하고 의원들에게 구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아사가 왕이 된 초기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곧 법이었습니다. 구스의 세라가 군사 백만을 거느리고 싸움을 걸어 왔을 때에도 아사 왕은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중과부적의 위기에서도 사람의 도움을 구하지 않았던 아사 왕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사 왕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구스 군대를 전멸시키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자기 발에 난 병을 가지고도 하나님께 구하지 않고 의사를 찾았습니다. 그의 삶의 방향이 하나님께로 향하던 것이 세상으로 향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병이 났을 때에 병원에 가서도 안 되고, 약을 사용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까? 물론 아닙니다. 의사를 만드신 분도 하나님이시며, 약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누가복음을 기록한 ‘누가’는 의사였으며, 하나님께서 약 사용하는 것을 결코 막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우선권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께 먼저 구하느냐? 아니면 사람이나 세상적인 힘이나 약을 의지하느냐? 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먼저 구했을 때에, 하나님께서 의사를 통해서든지 약을 통해서든지 섭리하시는 것입니다. 아사 왕이 하나님께 구하지 않았다는 것은 더 이상 하나님을 신뢰하지도 의지하지도 않는다는 표현입니다.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예수님을 처음 믿었을 때보다 지금이 더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고 의지합니까? 그리고 무슨 일에든지 하나님께 먼저 구합니까? 혹시 시작은 좋았는데 세월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세상 쪽으로 기울지나 않았는지요.
유명한 설교가인 스펄전 목사님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할 일은 계산적인 믿음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는 것이다. 계산은 하나님께서 하신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자 한다면 사람의 생각으로 계산하지 말고,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을 결코 망하게 하지 않습니다. 시편 55:22절에서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라고 하십니다.
마지막 이야기 하나 하고 마치겠습니다.
사막을 탐험하려는 사람에게 그 경험을 가진 탐험가가 이런 충고를 했습니다. “사막에서 길을 잃으면 북극성을 보고 걸어라.” 탐험가는 자신의 경험과 지식과 모든 것을 동원하여 사막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분명히 가까운 곳에 마을이 있는 것 같은데 방향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앞서 간 발자국을 발견했습니다. 기대감에 기운을 차기고 그 발자국을 따라갔지만 마을은 없고, 같은 지역을 돌고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자신의 발자국을 좇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제야 탐험가는 선배의 충고를 기억하고 밤을 기다려 북극성을 찾아서 방향을 잡았고 얼마 후 마을을 찾았습니다.
앞날이 불투명할 때 자신의 경험, 자신의 지식, 믿을 수 없는 사람의 감각을 의지하지 말고 변하지 않는 그리스도를 찾아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과 삶의 방향이 일정하게 하나님께로 향하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의지하는 길 뿐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신앙의 삶이 예전과 같지 않거든 속히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을 의지했던 처음 사랑, 처음 믿음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를 받을 뿐만 아니라 끝까지 쓰임 받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