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통한 삶의 길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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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1-07-12 12:22
*** 형통한 삶의 길 / 요한복음 16:12-24
** 들어가는 말
요한복음 16:12-24, “12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13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니라. 15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하였노라. 16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니 17 제자 중에서 서로 말하되 ‘우리에게 말씀하신바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며 또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하신 것이 무슨 말씀이냐?’ 하고 18 또 말하되 ‘조금 있으면이라 하신 말씀이 무슨 말씀이냐?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거늘 19 예수께서 그 묻고자 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내 말이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므로 서로 문의하느냐?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21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 22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23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오늘은 교회력에서 감사절기로 지키는 ‘맥추절’입니다. 또 다른 이름으로는 ‘칠칠절’ 혹은 ‘초실절’이라고도 합니다. 이는 그 해의 첫 추수로써 보리를 추수한 후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지금은 산업사회로 농사를 하지 않는 사람이 더 많아서 의미로만 사용돠고 있습니다. 즉 일년 중 전반기 동안의 직장이나 사업을 통하여 얻은 수익과 하나님의 인도하시고 보호하신 은혜를 감사하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감사의 절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주심과 변함없으신 사랑으로 품으시고 인도하신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감사’는 하나님의 사랑을 얻는 길이며, 형통한 삶의 길이 되기도 합니다. 시편 50:23절에서는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형통의 길이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려합니다.
※ 본문의 내용과 의미를 살펴봅시다.
본문의 내용은 13장에서 시작되는 ‘다락방 강화’의 마지막 결론 부분이면서,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곧 십자가를 지고 속죄의 죽음을 당하실 시간이 다가옴을 아셨습니다. 그 일이 닥치면 제자들은 많이 당황하게 될 것이고, 뿔뿔이 흩어지게 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제자들을 위로할 뿐만 아니라 마음을 준비하도록 배려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직 믿음도 약하고 영적 진리에 대하여는 어린아이와 같은 제자들을 어떻게 이해시켜야 할지를 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제자들에게 ‘성령님’을 소개하시면서 성령님의 역할을 가르치셨습니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리고 계속해서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가르치시면서, 더불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성령강림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조금 있으면”이라는 말씀으로 곧 다가올 이러한 일들을 설명하셨습니다.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할 것이요”라는 말씀은 ‘십자가의 죽음’을 말씀하시며,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니”라는 말씀은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며, 22절의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는 말씀은 또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님의 강림하심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곧 겪게 될 새 시대의 큰 변화를 미리 말씀으로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일시적인 죽음은 부활로 이어지고, 또한 승천과 성령강림으로 이어지게 되는 이 길이 영원토록 제자들과 함께 하는 길임을 말씀하십니다.
이 길을 깨닫게 될 때에, 제자들의 근심이 기쁨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깨달은 날부터는 예수님께 묻지도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님께서 낱낱이 알려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기만 하면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무엇이든지 받게 될 것이며, 그로 인해 제자들은 기쁨이 충만해질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의 진정한 기쁨이며 형통함입니다.
※ 형통한 삶의 길은 성령님으로 말미암습니다.
본문 13절을 봅시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22-23절을 봅시다.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영과 육신의 온 삶을 주관하시고 인도하시는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말씀하십니다. ‘형통함’이란, ‘나의 삶에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이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을 우리의 삶에서 이루게 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이 본문말씀은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 인한 기쁨의 충만을 말씀합니다. 그러나 모든 성도들이 이런 경험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이런 경험을 쉽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신앙의 길을 포기하거나 좌절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처음부터 너무 크고 완벽한 것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미국과 캐나다 사이에 있는 나이아가라 폭포. '천둥소리' 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이 폭포는 말 그대로 땅을 뒤흔드는 굉음과 구름처럼 피어오르는 물안개, 그리고 주변의 절경으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이 폭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매력아 ‘Rainbow Bridge(무지개 다리)'입니다. 레인보우 브릿지는 244미터나 되는 험한 협곡에 놓인 다리입니다. 어떻게 그곳에 다리를 놓았겠습니까? 그런데 다리를 놓는 과정은 의외로 간단했습니다.
1847년, 현수교 설계시공 전문가인 ‘찰스 엘렛 주니어(Charles Ellet Jr)’는 우선 연을 띄워 연줄로 계곡 양쪽을 연결했습니다. 다음으로 그 연줄에 가는 코일을 매달아 잡아당겼고, 다음에는 가는 코일에 약간 더 강한 철사를, 그 다음에는 철사에 밧줄을 매달아 당겼습니다. 마지막으로 밧줄에 쇠로 만든 케이블을 매달아 잡아당겼습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쇠줄을 이용해 구름다리를 놓기 시작했고, 마침내 사람들이 원하던 대로 나이아가라 폭포 위에 레인보우 브리지가 놓이게 됐습니다.
나이아가라 폭포의 험한 협곡 위에 다리를 놓을 수 있다는 것을 믿었던 사람은 별로 없었을 것입니다. 그 아름답고 웅장한 다리도 연을 띄운 작은 실 한 올로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께로 향하는 우리의 신앙도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작은 한 걸음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겠다.’는 약속을 하시고, 성령께서 오시면 하시는 일을 가르치셨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를 진리의 길로 인도하실 것이며, 예수님께서 가르치셨던 말씀들을 생각나게 하시며, 장래의 일들을 알게 하시고, 그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즉 제자들은 임재하신 성령님을 잘 따르고 순종하면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우리도 똑 같습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면 성령님을 선물로 주십니다. 사도행전 2:38절에서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임재하시면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된 증거가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8:15-16절입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는 이것이 성령께서 여러분 속에 임재하신 증거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임재하심은 우리가 하나님의 상속자이며, 하나님의 풍성하신 모든 것을 상속할 자녀라는 사실입니다. 로마서 8:17절에서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라고 하시며, 32절에서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의심할 여지없이 우리의 삶이 형통하기를 원한다면 성령님 안에 있어야 합니다.
※ 형통한 삶의 길은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따르는 길입니다.
두 딸을 가진 사람이 있었습니다. 결혼시킬 나이가 되어 큰 딸은 야채농사를 하는 사람에게 보냈고, 둘째 딸은 옹기를 굽는 사람에게 보냈습니다. 몇 년이 지난 후, 아버지는 큰 딸네 집으로 가서 딸에게 ‘내게 원하는 것이 있느냐?’고 물으면서, ‘내가 하나님께 기도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큰 딸은 ‘채소가 잘 자라도록 비를 적당하게 내려주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습니다. 둘째 딸에게도 역시 같은 것을 물었더니 그 딸은 ‘흙으로 만든 그릇들이 잘 마르도록 적당한 바람과 맑은 날을 주시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고민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그럼 나는 하나님께 뭐라고 빌면 되지?”
여러분이 이런 경우라면 하나님께 어떻게 기도하겠습니까? 본문 23-24절을 봅시다.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님의 임재하심으로 말미암는 확신과 기쁨이 분명합니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도우시는 성령님이 임하시면 그 때에는 하나님 아버지께 무엇이든지 구하라.’고 하십니다. 즉 기도는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구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께 구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아시는 분은 성령님뿐이십니다. 고린도전서 2:10절에서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고 하시며, 로마서 8:27절에서는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고 하십니다.
진정한 기도는 성령님 안에서 하는 기도입니다. 즉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아시는 성령님께서 우리가 기도할 때에 하나님의 뜻대로 아뢰도록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하는 일조차도 제대로 알지 못할 때가 더 많습니다. 지금이 채소가 잘 되어야 할 때인지, 옹기가 잘 말라야 할 때인지를 분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모든 일의 때와 시기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전도서 3:1절에서는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라고 하시며, 11절에서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라고 하십니다. 즉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과 그것이 있어야 할 때를 정확하게 아십니다. 그러므로 성령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가는 것이 형통한 삶을 이루는 길이 됩니다.
그러면 ‘성령님께서 인도하시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하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우리 인생들이 낱낱이 알 수는 없습니다. 요한복음 3:8절에서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성령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고 하십니다. 바람이 불면 우리가 바람을 느낄 수는 있지만 보거나 잡을 수는 없습니다. 성령님의 역사하심도 이와 같습니다. 다만 성령께서 임재하시고 충만할수록 우리 속에서 기쁨과 평안이 충만하게 됩니다. 내가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성령께서 내 안에 거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성령님께서 내 안에 충만하셔서 모든 영과 육신의 삶을 다스리시도록 의뢰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충만하심은 기도로써 이루어집니다. 즉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11:13절에서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의 충만하심과 인도하심을 항상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구했으면,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 길이 형통한 삶의 길입니다.
성자 칭호를 받은 ‘알로이시오’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23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알로이시오가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던 어느 날, 휴식 시간이었습니다. 모두들 즐겁게 놀다가 잠시 스승과 한자리에 모이게 되었습니다. 이때 스승이 학생들에게 물었습니다. “혹시 지금 당장 세상의 종말을 당하게 된다면 자네들은 어떻게 무슨 일을 하겠는가?”
첫째 학생은 ‘빨리 교회에 달려가서 기도를 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둘째 학생은 ‘집에 가서 부모님을 찾아뵙고 함께 종말을 준비하겠다.’고 했고, 셋째 학생은 ‘어제 대화하다가 마음 상한 친구를 찾아가서 화해하겠다.’고 했습니다. 알로이시오는 주저하지 않고 “지금은 휴식시간이니까, 이대로 놀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준비 된 사람의 여유로운 모습입니다. 우리의 형통한 삶도 이와 같습니다. 매일 매 순간의 삶을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산다면 매일, 모든 삶이 기적을 이루는 형통한 삶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감사와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삶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형통한 삶의 길을 이루시기를 축복합니다.
** 들어가는 말
요한복음 16:12-24, “12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13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니라. 15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하였노라. 16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니 17 제자 중에서 서로 말하되 ‘우리에게 말씀하신바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며 또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하신 것이 무슨 말씀이냐?’ 하고 18 또 말하되 ‘조금 있으면이라 하신 말씀이 무슨 말씀이냐?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거늘 19 예수께서 그 묻고자 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내 말이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므로 서로 문의하느냐?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21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 22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23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오늘은 교회력에서 감사절기로 지키는 ‘맥추절’입니다. 또 다른 이름으로는 ‘칠칠절’ 혹은 ‘초실절’이라고도 합니다. 이는 그 해의 첫 추수로써 보리를 추수한 후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지금은 산업사회로 농사를 하지 않는 사람이 더 많아서 의미로만 사용돠고 있습니다. 즉 일년 중 전반기 동안의 직장이나 사업을 통하여 얻은 수익과 하나님의 인도하시고 보호하신 은혜를 감사하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감사의 절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주심과 변함없으신 사랑으로 품으시고 인도하신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감사’는 하나님의 사랑을 얻는 길이며, 형통한 삶의 길이 되기도 합니다. 시편 50:23절에서는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형통의 길이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려합니다.
※ 본문의 내용과 의미를 살펴봅시다.
본문의 내용은 13장에서 시작되는 ‘다락방 강화’의 마지막 결론 부분이면서,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곧 십자가를 지고 속죄의 죽음을 당하실 시간이 다가옴을 아셨습니다. 그 일이 닥치면 제자들은 많이 당황하게 될 것이고, 뿔뿔이 흩어지게 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제자들을 위로할 뿐만 아니라 마음을 준비하도록 배려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직 믿음도 약하고 영적 진리에 대하여는 어린아이와 같은 제자들을 어떻게 이해시켜야 할지를 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제자들에게 ‘성령님’을 소개하시면서 성령님의 역할을 가르치셨습니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리고 계속해서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가르치시면서, 더불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성령강림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조금 있으면”이라는 말씀으로 곧 다가올 이러한 일들을 설명하셨습니다.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할 것이요”라는 말씀은 ‘십자가의 죽음’을 말씀하시며,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니”라는 말씀은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며, 22절의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는 말씀은 또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님의 강림하심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곧 겪게 될 새 시대의 큰 변화를 미리 말씀으로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일시적인 죽음은 부활로 이어지고, 또한 승천과 성령강림으로 이어지게 되는 이 길이 영원토록 제자들과 함께 하는 길임을 말씀하십니다.
이 길을 깨닫게 될 때에, 제자들의 근심이 기쁨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깨달은 날부터는 예수님께 묻지도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님께서 낱낱이 알려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기만 하면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무엇이든지 받게 될 것이며, 그로 인해 제자들은 기쁨이 충만해질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의 진정한 기쁨이며 형통함입니다.
※ 형통한 삶의 길은 성령님으로 말미암습니다.
본문 13절을 봅시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22-23절을 봅시다.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영과 육신의 온 삶을 주관하시고 인도하시는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말씀하십니다. ‘형통함’이란, ‘나의 삶에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이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을 우리의 삶에서 이루게 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이 본문말씀은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 인한 기쁨의 충만을 말씀합니다. 그러나 모든 성도들이 이런 경험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이런 경험을 쉽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신앙의 길을 포기하거나 좌절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처음부터 너무 크고 완벽한 것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미국과 캐나다 사이에 있는 나이아가라 폭포. '천둥소리' 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이 폭포는 말 그대로 땅을 뒤흔드는 굉음과 구름처럼 피어오르는 물안개, 그리고 주변의 절경으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이 폭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매력아 ‘Rainbow Bridge(무지개 다리)'입니다. 레인보우 브릿지는 244미터나 되는 험한 협곡에 놓인 다리입니다. 어떻게 그곳에 다리를 놓았겠습니까? 그런데 다리를 놓는 과정은 의외로 간단했습니다.
1847년, 현수교 설계시공 전문가인 ‘찰스 엘렛 주니어(Charles Ellet Jr)’는 우선 연을 띄워 연줄로 계곡 양쪽을 연결했습니다. 다음으로 그 연줄에 가는 코일을 매달아 잡아당겼고, 다음에는 가는 코일에 약간 더 강한 철사를, 그 다음에는 철사에 밧줄을 매달아 당겼습니다. 마지막으로 밧줄에 쇠로 만든 케이블을 매달아 잡아당겼습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쇠줄을 이용해 구름다리를 놓기 시작했고, 마침내 사람들이 원하던 대로 나이아가라 폭포 위에 레인보우 브리지가 놓이게 됐습니다.
나이아가라 폭포의 험한 협곡 위에 다리를 놓을 수 있다는 것을 믿었던 사람은 별로 없었을 것입니다. 그 아름답고 웅장한 다리도 연을 띄운 작은 실 한 올로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께로 향하는 우리의 신앙도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작은 한 걸음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겠다.’는 약속을 하시고, 성령께서 오시면 하시는 일을 가르치셨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를 진리의 길로 인도하실 것이며, 예수님께서 가르치셨던 말씀들을 생각나게 하시며, 장래의 일들을 알게 하시고, 그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즉 제자들은 임재하신 성령님을 잘 따르고 순종하면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우리도 똑 같습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면 성령님을 선물로 주십니다. 사도행전 2:38절에서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임재하시면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된 증거가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8:15-16절입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는 이것이 성령께서 여러분 속에 임재하신 증거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임재하심은 우리가 하나님의 상속자이며, 하나님의 풍성하신 모든 것을 상속할 자녀라는 사실입니다. 로마서 8:17절에서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라고 하시며, 32절에서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의심할 여지없이 우리의 삶이 형통하기를 원한다면 성령님 안에 있어야 합니다.
※ 형통한 삶의 길은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따르는 길입니다.
두 딸을 가진 사람이 있었습니다. 결혼시킬 나이가 되어 큰 딸은 야채농사를 하는 사람에게 보냈고, 둘째 딸은 옹기를 굽는 사람에게 보냈습니다. 몇 년이 지난 후, 아버지는 큰 딸네 집으로 가서 딸에게 ‘내게 원하는 것이 있느냐?’고 물으면서, ‘내가 하나님께 기도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큰 딸은 ‘채소가 잘 자라도록 비를 적당하게 내려주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습니다. 둘째 딸에게도 역시 같은 것을 물었더니 그 딸은 ‘흙으로 만든 그릇들이 잘 마르도록 적당한 바람과 맑은 날을 주시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고민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그럼 나는 하나님께 뭐라고 빌면 되지?”
여러분이 이런 경우라면 하나님께 어떻게 기도하겠습니까? 본문 23-24절을 봅시다.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님의 임재하심으로 말미암는 확신과 기쁨이 분명합니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도우시는 성령님이 임하시면 그 때에는 하나님 아버지께 무엇이든지 구하라.’고 하십니다. 즉 기도는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구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께 구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아시는 분은 성령님뿐이십니다. 고린도전서 2:10절에서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고 하시며, 로마서 8:27절에서는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고 하십니다.
진정한 기도는 성령님 안에서 하는 기도입니다. 즉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아시는 성령님께서 우리가 기도할 때에 하나님의 뜻대로 아뢰도록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하는 일조차도 제대로 알지 못할 때가 더 많습니다. 지금이 채소가 잘 되어야 할 때인지, 옹기가 잘 말라야 할 때인지를 분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모든 일의 때와 시기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전도서 3:1절에서는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라고 하시며, 11절에서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라고 하십니다. 즉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과 그것이 있어야 할 때를 정확하게 아십니다. 그러므로 성령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가는 것이 형통한 삶을 이루는 길이 됩니다.
그러면 ‘성령님께서 인도하시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하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우리 인생들이 낱낱이 알 수는 없습니다. 요한복음 3:8절에서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성령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고 하십니다. 바람이 불면 우리가 바람을 느낄 수는 있지만 보거나 잡을 수는 없습니다. 성령님의 역사하심도 이와 같습니다. 다만 성령께서 임재하시고 충만할수록 우리 속에서 기쁨과 평안이 충만하게 됩니다. 내가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성령께서 내 안에 거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성령님께서 내 안에 충만하셔서 모든 영과 육신의 삶을 다스리시도록 의뢰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충만하심은 기도로써 이루어집니다. 즉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11:13절에서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의 충만하심과 인도하심을 항상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구했으면,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 길이 형통한 삶의 길입니다.
성자 칭호를 받은 ‘알로이시오’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23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알로이시오가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던 어느 날, 휴식 시간이었습니다. 모두들 즐겁게 놀다가 잠시 스승과 한자리에 모이게 되었습니다. 이때 스승이 학생들에게 물었습니다. “혹시 지금 당장 세상의 종말을 당하게 된다면 자네들은 어떻게 무슨 일을 하겠는가?”
첫째 학생은 ‘빨리 교회에 달려가서 기도를 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둘째 학생은 ‘집에 가서 부모님을 찾아뵙고 함께 종말을 준비하겠다.’고 했고, 셋째 학생은 ‘어제 대화하다가 마음 상한 친구를 찾아가서 화해하겠다.’고 했습니다. 알로이시오는 주저하지 않고 “지금은 휴식시간이니까, 이대로 놀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준비 된 사람의 여유로운 모습입니다. 우리의 형통한 삶도 이와 같습니다. 매일 매 순간의 삶을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산다면 매일, 모든 삶이 기적을 이루는 형통한 삶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감사와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삶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형통한 삶의 길을 이루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