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게 하는 것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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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1-07-01 13:12
***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게 하는 것 / 요 13:31-35
** 들어가는 말
요한복음 13:31-35, “31 그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 32 만일 하나님이 그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말미암아 그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33 작은 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나 일찍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지금, 여러분은 행복하십니까? 물론 행복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자신의 기준으로 볼 때 행복하십니까? 많은 사람들이 행복의 기준을 소유에 둡니다. 돈뿐만 아니라 자녀, 배우자, 권력, 명예 등 많은 것을 소유하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저는 행복합니다. 비록 내가 가진 소유는 별로 없지만, 나의 주이시며, 나의 아버지가 되신 하나님께서 이 세상 모든 것의 주인이셔서 때를 따라 인도하시고 채우시니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때로는 당장 필요한 것이 없어서 잠시 고민도 되고, 염려가 되기도 하지만 아버지께 아뢰면 아버지의 뜻 안에서 이루게 하시니 정말 행복하고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은 우리의 모든 삶을 책임지셨다는 표현입니다. 우리의 생명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필요를 아시고 때를 따라 채우신다는 선언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6:31-32절에서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고 하십니다.
그 한 예로, 다윗 왕을 통하여 보여주셨습니다. 다윗 왕이 우연히 자신의 신하인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보고는 마음에 들었습니다. 다윗은 왕의 권한으로 밧세바를 차지했고, 우리아를 전쟁에서 고의로 죽게 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책망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무엘하 12:7-8절입니다. “내가 너를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 붓기 위하여 너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고, 네 주인의 집을 네게 주고 네 주인의 아내들을 네 품에 두고,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네게 맡겼느니라. 만일 그것이 부족하였을 것 같으면 내가 네게 이것저것을 더 주었으리라.” 즉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필요한 모든 것을 주셨고, 혹 무엇이 부족했으면 어떤 것이라도 더 주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좀 더 쉽게 말해서 ‘지금 우리의 소유나 생활은 하나님께서 주신 최고의 은혜’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사실은 세상에서 소유하는 것이 행복의 기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나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게 하는 것일까요?
※ 먼저 본문의 내용을 살펴봅시다.
본문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 제자들과의 마지막 유월절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면서 섬김의 본을 보이시며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15)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제자들이 영적으로 깨끗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다는 아니라, 한 사람이 자신을 팔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들킨 가룟 유다는 분한 마음을 품고 예수님을 넘기기 위하여 나가버렸습니다. 유다가 나간 후에 예수님께서는 남은 열 한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왜 유다가 나간 후에 새 계명을 주셨겠습니까? 이는 진리의 말씀을 들을 복 된 사람이 따로 있음을 나타냅니다. 뿐만 아니라 새 계명은 실천함으로써 영원한 행복에 이를 수 있음을 분명하게 가르치십니다. 본문 33절을 봅시다. “작은 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나 일찍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외식하며 예수님을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요 8:21)고 하셨습니다. 왜 유대인들이 예수님이 가시는 곳,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겠습니까? 그 이유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며,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주시면서, 새 계명을 믿고 실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새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이 새 계명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이며, 동시에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게 하는 길입니다. 즉 하나님 나라에서의 행복 기준이 ‘사랑’입니다. 세상에서의 육체적인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값없이 베푸시는 사랑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랑을 해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 사랑은 나눌 때에 행복해집니다.
오래 전에 ‘We are the World’라는 노래가 유행했던 때를 기억나시지요? 이 노래가 생겨난 동기가 되는 이야기입니다.
10년 이상 가뭄이 계속된 아프리카에는 수천만 명이 죽어 갔으며, 내전으로 인한 수십만 명의 난민들이 있었습니다. 그 난민들을 돌보려고 호주의 한 의사가 자원 봉사자로 나섰습니다. 끝없이 늘어선 환자들을 돌보고 있는 그 의사에게 어떤 기자가 물었습니다.
“당신은 아무리 돌보아도 흔적조차 없는 이 일을 어떻게 혼자서 하시렵니까?”
그러자 의사는
“한 사람씩 한 사람씩 돌보고 있을 뿐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바로 이 인터뷰 장면이 TV를 통하여 방영이 되었고, 당시의 유명한 자메이카계 미국 가수였던 ‘해리 벨라폰테(Harry belaFonte, 1927- ) ’가 그 장면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동기가 되어 시작된 운동이 세계의 슈퍼스타들이 아프리카를 돕자고 벌인 구호운동이었고, 그들의 노래가 바로 ‘We are the World’였습니다. 세계가 함께 했던 사랑의 하모니였습니다.
사랑의 힘은 이러합니다. 하면 할수록 더 깊어지고 더욱 강한 힘이 나타나는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실천되지 않으면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사랑의 노래를 한다고 해도 실제로 사랑하지 않으면 행복은 없습니다. 세상의 사랑도 이처럼 엄청난 힘을 나타낸다면 하나님의 사랑은 어떠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 사랑하는 그 사랑의 힘은 기적을 이룹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이시며, 사랑 안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4:16절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고 하십니다.
본문 34-35절을 함께 읽어봅시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행복을 부르는 사랑은 짝사랑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는”것입니다. “서로 사랑”이란 사랑을 나누는 것을 의미합니다. 혼자서만 하는 사랑은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표현되어야 하고, 행동으로 실천되어야 합니다. 잠언 27:5절에서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공동번역 / 속으로 사랑하는 것보다 터놓고 꾸짖는 것이 낫다.)”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친하고 가까운 사람들에게 사랑을 표현하거나 실천하는 것을 민망스러워합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우리 선조들은 ‘가슴에 품은 사랑’을 미덕으로 여겼습니다. 가슴에 품은 사랑은 서로가 알 수 없고, 행복으로 이어질 수도 없습니다. 차라리 드러내놓고 나무라는 것이 그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어서 더 좋습니다.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사랑은 서로 나누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따뜻한 위로와 격려로, 살뜰한 배려, 친절, 힘겹고 어려울 때에는 손을 잡아주고 토닥여주는 것도 작은 사랑의 실천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발을 씻어주신 것처럼 서로를 높여주고, 섬겨주는 것이 행복해지는 사랑입니다. 여기 경상도 사람들 참 무뚝뚝합니다. 남자나 여자나 표현할 줄 모르고 사랑할 줄 모릅니다. 돈이 많다고 행복하고, 부족한 것 없이 산다고 행복합니까? 그런다고 저절로 사랑이 됩니까? 사랑을 나누는 데는 희생이 따르고, 섬김과 봉사가 따릅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으로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셨습니다. 요한일서 4:10절에서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고 하십니다. 자기 자존심 다 세우고, 자기 이익 챙기면서는 사랑할 수도 없고 행복해질 수는 더욱 없습니다. 이제는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 사랑을 표현하고 실천해 보십시오. 행복이 가슴 가득히 차오르게 될 것입니다.
※ 사랑은 마음을 열 때에 행복해집니다.
‘자폐증’이라는 병을 알고 계시지요? 이 병은 ‘작은 변화에도 견디지 못하고 고통을 받으며, 어떤 대상에만 집착을 하려는 경향이 있는 정서 발달 장애’를 말합니다. 즉 ‘스스로에게 갇혀 사는 마음 폐쇄증상’입니다. 쉽게 말해서 마음 문을 꽁꽁 닫아버린 상태입니다. 스스로 마음을 닫으면 세상은 온통 어둡고 불행과 고통으로 다가옵니다. 어떻게 보면, 지금 시대가 화려해 보이지만 실상은 마음들이 닫혀져 가는 그런 시대가 아닌가 합니다. 웬만큼 친한 사람이 아니면, 대화를 해도 쉽게 자신을 내보이지 않습니다. 마음이 닫힌 사람들 사이에는 ‘무관심’이라는 깊은 계곡이 생겨납니다. 무관심이란, 어떤 것이라도 흔적도 없이 삼켜버리는 깊은 계곡입니다. 이 시대를 깨울 수 있는 것은 ‘사랑’뿐입니다. 사랑은 다른 사람을 향한 관심이며, 마음의 문을 여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에 마음을 닫아버린다는 것은 스스로 불행을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로 말미암아 원수가 된 사람들을 향하여 먼저 화해의 손을 내미셨으며 마음을 여셨습니다. 로마서 5:8절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30여년을 길에서 구걸하며 살아온 걸인총각이 있었습니다. 이 걸인청년은 어린 시절에 집에서 내쫒긴 선천성 뇌성마비 환자였습니다. 그는 듣고 생각하는 것은 정상인이지만,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구걸 외에는 어떤 다른 일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서울의 번화가 길목에 앉아서 하루 동냥 받는 것이 거의 4-5만원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허기진 배는 채울 길이 없었습니다. 음식점 문안으로 들어서기도 전에 내쫓기기 때문입니다. 구걸이 아니라 돈을 내는 손님이라 해도 모든 식당들은 그에겐 영업사절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온 몸이 떨리고 뒤틀려서 먹는다 해도 입에 들어가는 것보다 흘리는 밥이 더 많아 영업에 지장을 준다는 것입니다.
이토록 문전박대를 당해 서럽고 배고픈 그가 예수의 기적을 염원하면서 성경 한 권을 다 외우기도 했습니다. 그는 30년간 성당 주변을 떠나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두터운 신앙심도 육체의 허기를 채워주지 못했습니다. 그 뿐 아니라 장가드는 일이란 상상조차 못할 일이었습니다. 그가 마지막 선택한 곳은 창녀촌이었습니다. ‘돈을 내 놓으면 저들처럼 나를 문전 박대하지 않겠지.’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는 창녀촌에서 돈이면 독이라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한 창녀를 만났습니다. 걸인청년은 창녀에게 음식을 주문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를 더 주문했습니다. ‘먹여달라.’고. 그 창녀는 밥상을 차려왔으며, 먹여주기 시작했습니다.
걸인은 밥을 받아먹으면서 눈물을 줄줄 흘렸습니다. 세상이 정말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자신을 내쫒지 않고 받아주며 밥을 먹여주는 저 여인이야말로 천사가 아닐까? 라고 생각했습니다. 청년은 어눌한 말로 “다… 당시…인…이 바… 바로… 처… 언사야…!”
창녀는 깜짝 놀랐습니다. ‘뭇 남성의 천대, 사회의 냉대만을 받던 내가 천사라니!’ 걸인은 계속 ‘당신이 바로 천사’라고 우겼습니다. 일생 처음 듣는 이 고상한 말에 창녀는 감격했습니다. 감격은 눈물이 되어 흘렀습니다. ‘창녀를 천사라고 말하는 당신이야말로 천사!’라고 창녀가 고백했습니다.
두 사람은 성당에서 혼인식을 올렸습니다. 4백여 명의 축하객들의 눈물과 축복 속에서. 그들은 지금 계절장사를 하고 있습니다. 문전박대를 당하지 않고도 매일 밥을 먹여주는 아내가 있어 걸인은 이 세상은 에덴동산이라 찬양합니다. 온갖 수모를 당하지 않고도, 살림을 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이 여인은 이제 남성들을 저주하지 않고, 진심으로 남성을 사랑할 수 있어서 매일을 축제로 살아갑니다.
마음이 닫힌 관계는 서로를 불행하게 합니다. 행복해지려면 자신의 마음부터 열어야 합니다. 걸인 총각이 창녀에게 마음을 열었을 때에, 창녀의 마음도 열렸고 서로의 행복이 시작된 것입니다. 만일 서로의 외적인 모습과 조건만 생각하면서 마음을 열지 않았다면 이들은 결코 행복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먼저 마음을 여시고 다가오셨음을 잊지 마십시오. 예수님의 십자가는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징표입니다.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주님이 계신 곳에 갈 수가 없습니다. 이제 자기 마음속에 갇혀 살던 생활을 떨쳐버립시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마음을 열고 서로를 받아들이고, 작은 사랑의 실천이라도 시작합니다. 내가 먼저 관심을 가지고 따뜻한 배려와 사랑을 행하노라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앞날에 하나님께로 말미암는 이런 아름답고 따뜻한 사랑으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삶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 들어가는 말
요한복음 13:31-35, “31 그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 32 만일 하나님이 그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말미암아 그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33 작은 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나 일찍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지금, 여러분은 행복하십니까? 물론 행복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자신의 기준으로 볼 때 행복하십니까? 많은 사람들이 행복의 기준을 소유에 둡니다. 돈뿐만 아니라 자녀, 배우자, 권력, 명예 등 많은 것을 소유하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저는 행복합니다. 비록 내가 가진 소유는 별로 없지만, 나의 주이시며, 나의 아버지가 되신 하나님께서 이 세상 모든 것의 주인이셔서 때를 따라 인도하시고 채우시니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때로는 당장 필요한 것이 없어서 잠시 고민도 되고, 염려가 되기도 하지만 아버지께 아뢰면 아버지의 뜻 안에서 이루게 하시니 정말 행복하고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은 우리의 모든 삶을 책임지셨다는 표현입니다. 우리의 생명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필요를 아시고 때를 따라 채우신다는 선언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6:31-32절에서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고 하십니다.
그 한 예로, 다윗 왕을 통하여 보여주셨습니다. 다윗 왕이 우연히 자신의 신하인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보고는 마음에 들었습니다. 다윗은 왕의 권한으로 밧세바를 차지했고, 우리아를 전쟁에서 고의로 죽게 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책망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무엘하 12:7-8절입니다. “내가 너를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 붓기 위하여 너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고, 네 주인의 집을 네게 주고 네 주인의 아내들을 네 품에 두고,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네게 맡겼느니라. 만일 그것이 부족하였을 것 같으면 내가 네게 이것저것을 더 주었으리라.” 즉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필요한 모든 것을 주셨고, 혹 무엇이 부족했으면 어떤 것이라도 더 주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좀 더 쉽게 말해서 ‘지금 우리의 소유나 생활은 하나님께서 주신 최고의 은혜’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사실은 세상에서 소유하는 것이 행복의 기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나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게 하는 것일까요?
※ 먼저 본문의 내용을 살펴봅시다.
본문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 제자들과의 마지막 유월절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면서 섬김의 본을 보이시며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15)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제자들이 영적으로 깨끗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다는 아니라, 한 사람이 자신을 팔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들킨 가룟 유다는 분한 마음을 품고 예수님을 넘기기 위하여 나가버렸습니다. 유다가 나간 후에 예수님께서는 남은 열 한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왜 유다가 나간 후에 새 계명을 주셨겠습니까? 이는 진리의 말씀을 들을 복 된 사람이 따로 있음을 나타냅니다. 뿐만 아니라 새 계명은 실천함으로써 영원한 행복에 이를 수 있음을 분명하게 가르치십니다. 본문 33절을 봅시다. “작은 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나 일찍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외식하며 예수님을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요 8:21)고 하셨습니다. 왜 유대인들이 예수님이 가시는 곳,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겠습니까? 그 이유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며,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주시면서, 새 계명을 믿고 실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새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이 새 계명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이며, 동시에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게 하는 길입니다. 즉 하나님 나라에서의 행복 기준이 ‘사랑’입니다. 세상에서의 육체적인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값없이 베푸시는 사랑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랑을 해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 사랑은 나눌 때에 행복해집니다.
오래 전에 ‘We are the World’라는 노래가 유행했던 때를 기억나시지요? 이 노래가 생겨난 동기가 되는 이야기입니다.
10년 이상 가뭄이 계속된 아프리카에는 수천만 명이 죽어 갔으며, 내전으로 인한 수십만 명의 난민들이 있었습니다. 그 난민들을 돌보려고 호주의 한 의사가 자원 봉사자로 나섰습니다. 끝없이 늘어선 환자들을 돌보고 있는 그 의사에게 어떤 기자가 물었습니다.
“당신은 아무리 돌보아도 흔적조차 없는 이 일을 어떻게 혼자서 하시렵니까?”
그러자 의사는
“한 사람씩 한 사람씩 돌보고 있을 뿐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바로 이 인터뷰 장면이 TV를 통하여 방영이 되었고, 당시의 유명한 자메이카계 미국 가수였던 ‘해리 벨라폰테(Harry belaFonte, 1927- ) ’가 그 장면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동기가 되어 시작된 운동이 세계의 슈퍼스타들이 아프리카를 돕자고 벌인 구호운동이었고, 그들의 노래가 바로 ‘We are the World’였습니다. 세계가 함께 했던 사랑의 하모니였습니다.
사랑의 힘은 이러합니다. 하면 할수록 더 깊어지고 더욱 강한 힘이 나타나는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실천되지 않으면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사랑의 노래를 한다고 해도 실제로 사랑하지 않으면 행복은 없습니다. 세상의 사랑도 이처럼 엄청난 힘을 나타낸다면 하나님의 사랑은 어떠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 사랑하는 그 사랑의 힘은 기적을 이룹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이시며, 사랑 안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4:16절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고 하십니다.
본문 34-35절을 함께 읽어봅시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행복을 부르는 사랑은 짝사랑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는”것입니다. “서로 사랑”이란 사랑을 나누는 것을 의미합니다. 혼자서만 하는 사랑은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표현되어야 하고, 행동으로 실천되어야 합니다. 잠언 27:5절에서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공동번역 / 속으로 사랑하는 것보다 터놓고 꾸짖는 것이 낫다.)”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친하고 가까운 사람들에게 사랑을 표현하거나 실천하는 것을 민망스러워합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우리 선조들은 ‘가슴에 품은 사랑’을 미덕으로 여겼습니다. 가슴에 품은 사랑은 서로가 알 수 없고, 행복으로 이어질 수도 없습니다. 차라리 드러내놓고 나무라는 것이 그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어서 더 좋습니다.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사랑은 서로 나누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따뜻한 위로와 격려로, 살뜰한 배려, 친절, 힘겹고 어려울 때에는 손을 잡아주고 토닥여주는 것도 작은 사랑의 실천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발을 씻어주신 것처럼 서로를 높여주고, 섬겨주는 것이 행복해지는 사랑입니다. 여기 경상도 사람들 참 무뚝뚝합니다. 남자나 여자나 표현할 줄 모르고 사랑할 줄 모릅니다. 돈이 많다고 행복하고, 부족한 것 없이 산다고 행복합니까? 그런다고 저절로 사랑이 됩니까? 사랑을 나누는 데는 희생이 따르고, 섬김과 봉사가 따릅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으로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셨습니다. 요한일서 4:10절에서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고 하십니다. 자기 자존심 다 세우고, 자기 이익 챙기면서는 사랑할 수도 없고 행복해질 수는 더욱 없습니다. 이제는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 사랑을 표현하고 실천해 보십시오. 행복이 가슴 가득히 차오르게 될 것입니다.
※ 사랑은 마음을 열 때에 행복해집니다.
‘자폐증’이라는 병을 알고 계시지요? 이 병은 ‘작은 변화에도 견디지 못하고 고통을 받으며, 어떤 대상에만 집착을 하려는 경향이 있는 정서 발달 장애’를 말합니다. 즉 ‘스스로에게 갇혀 사는 마음 폐쇄증상’입니다. 쉽게 말해서 마음 문을 꽁꽁 닫아버린 상태입니다. 스스로 마음을 닫으면 세상은 온통 어둡고 불행과 고통으로 다가옵니다. 어떻게 보면, 지금 시대가 화려해 보이지만 실상은 마음들이 닫혀져 가는 그런 시대가 아닌가 합니다. 웬만큼 친한 사람이 아니면, 대화를 해도 쉽게 자신을 내보이지 않습니다. 마음이 닫힌 사람들 사이에는 ‘무관심’이라는 깊은 계곡이 생겨납니다. 무관심이란, 어떤 것이라도 흔적도 없이 삼켜버리는 깊은 계곡입니다. 이 시대를 깨울 수 있는 것은 ‘사랑’뿐입니다. 사랑은 다른 사람을 향한 관심이며, 마음의 문을 여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에 마음을 닫아버린다는 것은 스스로 불행을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로 말미암아 원수가 된 사람들을 향하여 먼저 화해의 손을 내미셨으며 마음을 여셨습니다. 로마서 5:8절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30여년을 길에서 구걸하며 살아온 걸인총각이 있었습니다. 이 걸인청년은 어린 시절에 집에서 내쫒긴 선천성 뇌성마비 환자였습니다. 그는 듣고 생각하는 것은 정상인이지만,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구걸 외에는 어떤 다른 일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서울의 번화가 길목에 앉아서 하루 동냥 받는 것이 거의 4-5만원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허기진 배는 채울 길이 없었습니다. 음식점 문안으로 들어서기도 전에 내쫓기기 때문입니다. 구걸이 아니라 돈을 내는 손님이라 해도 모든 식당들은 그에겐 영업사절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온 몸이 떨리고 뒤틀려서 먹는다 해도 입에 들어가는 것보다 흘리는 밥이 더 많아 영업에 지장을 준다는 것입니다.
이토록 문전박대를 당해 서럽고 배고픈 그가 예수의 기적을 염원하면서 성경 한 권을 다 외우기도 했습니다. 그는 30년간 성당 주변을 떠나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두터운 신앙심도 육체의 허기를 채워주지 못했습니다. 그 뿐 아니라 장가드는 일이란 상상조차 못할 일이었습니다. 그가 마지막 선택한 곳은 창녀촌이었습니다. ‘돈을 내 놓으면 저들처럼 나를 문전 박대하지 않겠지.’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는 창녀촌에서 돈이면 독이라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한 창녀를 만났습니다. 걸인청년은 창녀에게 음식을 주문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를 더 주문했습니다. ‘먹여달라.’고. 그 창녀는 밥상을 차려왔으며, 먹여주기 시작했습니다.
걸인은 밥을 받아먹으면서 눈물을 줄줄 흘렸습니다. 세상이 정말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자신을 내쫒지 않고 받아주며 밥을 먹여주는 저 여인이야말로 천사가 아닐까? 라고 생각했습니다. 청년은 어눌한 말로 “다… 당시…인…이 바… 바로… 처… 언사야…!”
창녀는 깜짝 놀랐습니다. ‘뭇 남성의 천대, 사회의 냉대만을 받던 내가 천사라니!’ 걸인은 계속 ‘당신이 바로 천사’라고 우겼습니다. 일생 처음 듣는 이 고상한 말에 창녀는 감격했습니다. 감격은 눈물이 되어 흘렀습니다. ‘창녀를 천사라고 말하는 당신이야말로 천사!’라고 창녀가 고백했습니다.
두 사람은 성당에서 혼인식을 올렸습니다. 4백여 명의 축하객들의 눈물과 축복 속에서. 그들은 지금 계절장사를 하고 있습니다. 문전박대를 당하지 않고도 매일 밥을 먹여주는 아내가 있어 걸인은 이 세상은 에덴동산이라 찬양합니다. 온갖 수모를 당하지 않고도, 살림을 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이 여인은 이제 남성들을 저주하지 않고, 진심으로 남성을 사랑할 수 있어서 매일을 축제로 살아갑니다.
마음이 닫힌 관계는 서로를 불행하게 합니다. 행복해지려면 자신의 마음부터 열어야 합니다. 걸인 총각이 창녀에게 마음을 열었을 때에, 창녀의 마음도 열렸고 서로의 행복이 시작된 것입니다. 만일 서로의 외적인 모습과 조건만 생각하면서 마음을 열지 않았다면 이들은 결코 행복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먼저 마음을 여시고 다가오셨음을 잊지 마십시오. 예수님의 십자가는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징표입니다.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주님이 계신 곳에 갈 수가 없습니다. 이제 자기 마음속에 갇혀 살던 생활을 떨쳐버립시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마음을 열고 서로를 받아들이고, 작은 사랑의 실천이라도 시작합니다. 내가 먼저 관심을 가지고 따뜻한 배려와 사랑을 행하노라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앞날에 하나님께로 말미암는 이런 아름답고 따뜻한 사랑으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삶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