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 쌓는 상급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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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1-06-22 20:29
*** 하늘에 쌓는 상급 / 고전 9:24027, 마 6:19-21
** 들어가는 말
고린도전서 9:24-27, “24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26 그러므로 나의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며 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마태복음 6:19-21, “19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20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21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요즈음 지구촌은 인터넷 덕분으로 마치 가까운 이웃 도시 같은 느낌이 듭니다. 인터넷을 집이나 회사에 두고 사용하는 데스크탑 형식의 큰 컴퓨터에서만 사용하던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이제는 들고 다니는 노트북이나 핸드폰, 스마트폰 등으로 아무 곳에서나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세계 어느 곳에서 일어난 일이든지 몇 초 혹은 몇 분이면 온 세계에서 알게 되는 시대입니다. 그 덕분에 자그마한 우리나라가 세계에 한류열풍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적인 조류를 타고 오늘의 사람들은 예전에는 알지도 못했던 새로운 환경과 즐거움을 찾아다니기에 바쁩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과 다른 사람들과의 삶이 쉽게 비교되면서 더 나은 삶을 얻으려고 집착합니다. 쉽게 말해서 오늘의 시대는 사람들로 하여금 현실의 삶에 집착하게 합니다. 그러다가 뜻대로 되지 않으면 좌절하거나 죽음을 택합니다. 그래서 성도들조차 하나님의 나라, 예수님을 따르는 고난과 희생과 섬김을 통한 영원한 부활의 삶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이 일을 디모데후서 3:1-5절에서 “너희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세상에 빠져 사는 사람들에게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해도 이미 세상으로 향한 사람의 마음은 쉽게 움직이지 않습니다. 오늘의 말씀도 ‘영원한 행복의 삶을 위하여 하늘에 상급을 쌓으라.’는 내용인데, 현실에 마음이 팔려 있다면 이 말씀도 귓가에 맴돌겠지요. 하지만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진리이며, 지금 세상이 어떠하든지 반드시 말씀대로 될 것이기에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디모데후서 4:3-4절에서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고 하셨고, 이어서 5절에서는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고 하십니다.
고등학생인 테니스 선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모교의 본관 진열장에 우승 트로피를 세워놓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트로피가 학교 본관출입구에 세워져 있다면 자신이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열심히 연습했고, 출전할 때마다 최선을 다했습니다. 결국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해서 학교에 트로피를 바칠 수 있었습니다. 그가 학교를 졸업한 몇 년 후, 자신 앞으로 발신인이 적혀있지 않는 소포가 도착했습니다. 소포를 열자 짧은 내용의 편지가 들어있었습니다.
“제가 쓰레기장에서 근무하는데 쓰레기 더미에 웬 트로피가 보여서 우연히 꺼내보았습니다. 당신의 이름이 적혀있더군요. 너무 아까운 것 같아 어렵게 주소를 찾아서 소포로 부칩니다.”
그 편지 밑에는 자신이 그토록 애써서 받았던 테니스 우승 트로피가 반은 부서진 채로 동봉 되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오늘도 자신이 세운 공로와 자신의 이름이 영원하기를 바라면서 나름대로 많은 노력을 합니다. 그러나 세상에서의 영광은 결코 오래가지 않습니다. ‘화무십일홍 권무십년 (花無十日紅 權無十年)’이라고 했습니다. ‘열흘 동안 붉은 꽃이 없고, 십년 가는 권세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세상의 화려함과 권세는 얼마 못 가서 반드시 쇠하여진다는 것을 세상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베드로후서 3:10-11절에서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고 묻습니다. 그 답은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는”(벧후 3:11-12)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늘에 상급을 쌓으라.’고 할 수 있습니다.
※ 본문의 내용을 살펴봅시다.
고린도전서 9:24-27절의 말씀은 운동경기에 임하는 선수의 자세를 통하여 신앙의 삶을 가르칩니다. 달리기 선수가 금메달을 따기 위하여 불필요한 모든 것을 다 절제하면서 오직 우승을 목표로 달리듯이 신앙의 삶도 그렇게 살라고 합니다. 또한 격투기 선수가 상대방을 바로 가격하는 것처럼, 신앙의 삶의 목표를 분명하게 해야 함을 말합니다. 목표가 분명하지 않으면 달릴 수도, 정확하게 맞출 수가 없습니다. 신앙의 목표도 분명해야 전력질주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하는 신앙의 목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급입니다.
마태복음 6:19-21절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말씀으로서,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는 내용입니다. 즉 세상에서 육신이 사는 동안 가지는 일시적인 소유가 아니라, 영원토록 소유하며 누릴 수 있는 쪽을 선택하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의 전무후무한 부귀영화를 누렸던 솔로몬은 전도서 5:13-16절에서 이렇게 진술합니다. “내가 해 아래에서 큰 폐단 되는 일이 있는 것을 보았나니 곧 소유주가 재물을 자기에게 해가 되도록 소유하는 것이라. 그 재물이 재난을 당할 때 없어지나니 비록 아들을 낳았으나 그 손에 아무것도 없느니라. 그가 모태에서 벌거벗고 나왔은즉 그가 나온 대로 돌아가고 수고하여 얻은 것을 아무것도 자기 손에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이것도 큰 불행이라. 어떻게 왔든지 그대로 가리니 바람을 잡는 수고가 그에게 무엇이 유익하랴”
여러분은 지금 어느 쪽을 선택하여 살고 있습니까? 세상에 재물을 쌓아두고 자자손손이 누리기를 바라고 있습니까? 아니면 영원히 누릴 하나님의 나라에 쌓고 있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늘에 상급을 쌓을 수 있겠습니까?
※ 영원한 삶을 위하여 하늘에 상급을 쌓으십시오.
이렇게 말하면 어떤 분은 ‘지금 살기에도 급급한데 언제 올지도 모를 영원한 세상을 어떻게 준비해!’라고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만일 이런 비슷한 생각을 하시는 분이 있다면, 영화관을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자신이 정말 보고 싶었던 영화가 있어 어렵게 표를 구해서 영화관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바쁜 일이 있어서 본 영화에 앞서 보여주는 다른 영화 예고편만 보고 나온다면 어떻겠습니까? 아마도 그런 사람은 없겠지요. 이와 같이 우리가 이 땅에 육신으로 사는 것은 영화로 치면 예고편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 살게 하신 것은 ‘영원한 생명과 영광을 누리게 하시려고 준비하록 하지 위함’입니다. 즉 예고편 삶입니다. 이 삶을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영원한 삶의 질이 결정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강제로 그 길을 가게 하지는 않으십니다. 선택은 우리 자신에게 있습니다. 영원한 행복의 삶을 위하여 하늘에 상급을 쌓을 수도 있고, 잠시 사는 이 땅에서의 만족을 위하여 이 땅에 모든 것을 쌓을 수도 있습니다. “평양 감사도 제 싫으면 못한다.”고 했습니다. 즉 ‘아무리 좋은 일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싫어하면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진수성찬을 차려놓아도 먹는 것은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중세 수도원 시대에 ‘성 안토니’라는 경건한 수도사가 세상을 피하여 동굴에서 오직 수도에만 전념하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어느 날 꿈속에서 한 사람이 나타나서 자신에게
“안토니여, 알렉산드리아에 사는 구두 수선공이 당신보다 더 경건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깜짝 놀라 잠에서 깬 안토니는 그길로 알렉산드리아로 달려갔습니다. 그는 구두 수선공에게 “당신은 어떻게 그런 경건한 신앙생활을 하는가?”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수선공은
“내가 경건한 신앙생활을 하다니요? 저는 매일 땀 흘려 일하는 노동자에 불과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보듯이 하늘에 상급을 쌓는다고 수도사처럼 세상과의 관계를 끊고 기도원에만 들어가 있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5:9-10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쓴 편지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이나, 속여 빼앗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너희가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보혜사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성실하게 순종하고 실천하는 삶입니다.
먼저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성실하게 해야 합니다. 매일 기도하는 것과 말씀을 읽고 듣는 것과 찬양은 성도가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므로 육신의 생명이 있는 동안에는 계속해야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하여 영의 삶을 추구하는 것은 신앙의 기본입니다. 때로는 자신의 심한 죄책감 때문에 이런 영적 생활이 힘들 때에라도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가 너무 더럽고 무겁기 때문에 받지 않으시는 경우는 없습니다. 오히려 심각한 죄로 인하여 마음이 무거울수록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이사야 1:18절에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고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일이 많고 삶이 바빠서 눈코 뜰 겨를이 없을지라도 그럴수록 더욱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일이 많고 바쁠수록 하나님의 도움이 더 많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기억할 것은 혼자서 애쓰는 것보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훨씬 쉽고 형통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의 삶에서 나타나는 생활의 열매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21절에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교제 안에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고 따른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10절에서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고 하십니다. 성령님께서 내 속에 거하시는 것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순간에 선물로 보내주십니다. 다만 성령님께서 내 속에 충만하셔서 나를 인도하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충만하심은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11:13절에서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매일 하나님과의 교통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성령님께서 내 안에 거하시고 충만하시면 나의 모든 삶을 다스리시고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힘쓰게 되고, 삶의 순간마다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나거나 마음이 감동되게 됩니다. 잘못된 일을 하게 되면 양심이 거세게 저항하거나 하나님이 두렵게 여겨집니다. 뿐만 아니라 전에는 보이지도 않고 생각지도 못했던 이웃들이 생각나고 주변을 살피게 됩니다. 혹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없는지, 해야 할 일이 없는지를 살피는 것입니다. 때때로 불쑥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사람이 생각나거나, 기도해 주고 싶어지거나, 전화로 혹은 찾아보고자 하는 마음도 일어납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도 일어나고, 마음이 넓어지고, 마음에 기쁨이 있고, 불안과 염려가 사라지고 마음에 잔잔한 평안이 있습니다. 교회를 돌아볼 생각이 나고, 성도들을 섬기는 기쁨이 있습니다. 이렇게 나의 모든 삶의 목표를 하나님께 두면 자연히 마음도 하나님께로 향하게 됩니다. 이 모두는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에 역사하시는 결과입니다. 이런 마음들이 일어나면 바쁘다고 핑계하거나, 자신의 형편을 생각하면서 거역하지 말고, 기쁘게 순종하십시오.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필요를 채우시면서 사람들을 움직이시고, 모든 환경에까지 역사하실 것입니다. 이렇게 매일 매 삶의 순간마다 하나님과 교제하며,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면 나를 위하여 하늘에 상급이 쌓이는 것입니다.
세상이 혼란스럽고 가치관이 흔들리고 있다고 우리 마음도 흔들리게 하지 맙시다.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성실하고 열심 있게 순종하고 따라갑시다. 그 보상은 하나님께서 하실 것입니다. 어떤 환경과 상황에서도 이 목표를 잃지 않고 계속 달려간다면 반드시 승리자의 상급과 하나님의 자녀의 행복을 누리게 하실 것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들어가는 말
고린도전서 9:24-27, “24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26 그러므로 나의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며 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마태복음 6:19-21, “19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20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21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요즈음 지구촌은 인터넷 덕분으로 마치 가까운 이웃 도시 같은 느낌이 듭니다. 인터넷을 집이나 회사에 두고 사용하는 데스크탑 형식의 큰 컴퓨터에서만 사용하던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이제는 들고 다니는 노트북이나 핸드폰, 스마트폰 등으로 아무 곳에서나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세계 어느 곳에서 일어난 일이든지 몇 초 혹은 몇 분이면 온 세계에서 알게 되는 시대입니다. 그 덕분에 자그마한 우리나라가 세계에 한류열풍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적인 조류를 타고 오늘의 사람들은 예전에는 알지도 못했던 새로운 환경과 즐거움을 찾아다니기에 바쁩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과 다른 사람들과의 삶이 쉽게 비교되면서 더 나은 삶을 얻으려고 집착합니다. 쉽게 말해서 오늘의 시대는 사람들로 하여금 현실의 삶에 집착하게 합니다. 그러다가 뜻대로 되지 않으면 좌절하거나 죽음을 택합니다. 그래서 성도들조차 하나님의 나라, 예수님을 따르는 고난과 희생과 섬김을 통한 영원한 부활의 삶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이 일을 디모데후서 3:1-5절에서 “너희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세상에 빠져 사는 사람들에게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해도 이미 세상으로 향한 사람의 마음은 쉽게 움직이지 않습니다. 오늘의 말씀도 ‘영원한 행복의 삶을 위하여 하늘에 상급을 쌓으라.’는 내용인데, 현실에 마음이 팔려 있다면 이 말씀도 귓가에 맴돌겠지요. 하지만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진리이며, 지금 세상이 어떠하든지 반드시 말씀대로 될 것이기에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디모데후서 4:3-4절에서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고 하셨고, 이어서 5절에서는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고 하십니다.
고등학생인 테니스 선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모교의 본관 진열장에 우승 트로피를 세워놓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트로피가 학교 본관출입구에 세워져 있다면 자신이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열심히 연습했고, 출전할 때마다 최선을 다했습니다. 결국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해서 학교에 트로피를 바칠 수 있었습니다. 그가 학교를 졸업한 몇 년 후, 자신 앞으로 발신인이 적혀있지 않는 소포가 도착했습니다. 소포를 열자 짧은 내용의 편지가 들어있었습니다.
“제가 쓰레기장에서 근무하는데 쓰레기 더미에 웬 트로피가 보여서 우연히 꺼내보았습니다. 당신의 이름이 적혀있더군요. 너무 아까운 것 같아 어렵게 주소를 찾아서 소포로 부칩니다.”
그 편지 밑에는 자신이 그토록 애써서 받았던 테니스 우승 트로피가 반은 부서진 채로 동봉 되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오늘도 자신이 세운 공로와 자신의 이름이 영원하기를 바라면서 나름대로 많은 노력을 합니다. 그러나 세상에서의 영광은 결코 오래가지 않습니다. ‘화무십일홍 권무십년 (花無十日紅 權無十年)’이라고 했습니다. ‘열흘 동안 붉은 꽃이 없고, 십년 가는 권세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세상의 화려함과 권세는 얼마 못 가서 반드시 쇠하여진다는 것을 세상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베드로후서 3:10-11절에서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고 묻습니다. 그 답은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는”(벧후 3:11-12)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늘에 상급을 쌓으라.’고 할 수 있습니다.
※ 본문의 내용을 살펴봅시다.
고린도전서 9:24-27절의 말씀은 운동경기에 임하는 선수의 자세를 통하여 신앙의 삶을 가르칩니다. 달리기 선수가 금메달을 따기 위하여 불필요한 모든 것을 다 절제하면서 오직 우승을 목표로 달리듯이 신앙의 삶도 그렇게 살라고 합니다. 또한 격투기 선수가 상대방을 바로 가격하는 것처럼, 신앙의 삶의 목표를 분명하게 해야 함을 말합니다. 목표가 분명하지 않으면 달릴 수도, 정확하게 맞출 수가 없습니다. 신앙의 목표도 분명해야 전력질주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하는 신앙의 목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급입니다.
마태복음 6:19-21절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말씀으로서,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는 내용입니다. 즉 세상에서 육신이 사는 동안 가지는 일시적인 소유가 아니라, 영원토록 소유하며 누릴 수 있는 쪽을 선택하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의 전무후무한 부귀영화를 누렸던 솔로몬은 전도서 5:13-16절에서 이렇게 진술합니다. “내가 해 아래에서 큰 폐단 되는 일이 있는 것을 보았나니 곧 소유주가 재물을 자기에게 해가 되도록 소유하는 것이라. 그 재물이 재난을 당할 때 없어지나니 비록 아들을 낳았으나 그 손에 아무것도 없느니라. 그가 모태에서 벌거벗고 나왔은즉 그가 나온 대로 돌아가고 수고하여 얻은 것을 아무것도 자기 손에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이것도 큰 불행이라. 어떻게 왔든지 그대로 가리니 바람을 잡는 수고가 그에게 무엇이 유익하랴”
여러분은 지금 어느 쪽을 선택하여 살고 있습니까? 세상에 재물을 쌓아두고 자자손손이 누리기를 바라고 있습니까? 아니면 영원히 누릴 하나님의 나라에 쌓고 있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늘에 상급을 쌓을 수 있겠습니까?
※ 영원한 삶을 위하여 하늘에 상급을 쌓으십시오.
이렇게 말하면 어떤 분은 ‘지금 살기에도 급급한데 언제 올지도 모를 영원한 세상을 어떻게 준비해!’라고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만일 이런 비슷한 생각을 하시는 분이 있다면, 영화관을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자신이 정말 보고 싶었던 영화가 있어 어렵게 표를 구해서 영화관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바쁜 일이 있어서 본 영화에 앞서 보여주는 다른 영화 예고편만 보고 나온다면 어떻겠습니까? 아마도 그런 사람은 없겠지요. 이와 같이 우리가 이 땅에 육신으로 사는 것은 영화로 치면 예고편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 살게 하신 것은 ‘영원한 생명과 영광을 누리게 하시려고 준비하록 하지 위함’입니다. 즉 예고편 삶입니다. 이 삶을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영원한 삶의 질이 결정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강제로 그 길을 가게 하지는 않으십니다. 선택은 우리 자신에게 있습니다. 영원한 행복의 삶을 위하여 하늘에 상급을 쌓을 수도 있고, 잠시 사는 이 땅에서의 만족을 위하여 이 땅에 모든 것을 쌓을 수도 있습니다. “평양 감사도 제 싫으면 못한다.”고 했습니다. 즉 ‘아무리 좋은 일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싫어하면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진수성찬을 차려놓아도 먹는 것은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중세 수도원 시대에 ‘성 안토니’라는 경건한 수도사가 세상을 피하여 동굴에서 오직 수도에만 전념하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어느 날 꿈속에서 한 사람이 나타나서 자신에게
“안토니여, 알렉산드리아에 사는 구두 수선공이 당신보다 더 경건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깜짝 놀라 잠에서 깬 안토니는 그길로 알렉산드리아로 달려갔습니다. 그는 구두 수선공에게 “당신은 어떻게 그런 경건한 신앙생활을 하는가?”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수선공은
“내가 경건한 신앙생활을 하다니요? 저는 매일 땀 흘려 일하는 노동자에 불과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보듯이 하늘에 상급을 쌓는다고 수도사처럼 세상과의 관계를 끊고 기도원에만 들어가 있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5:9-10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쓴 편지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이나, 속여 빼앗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너희가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보혜사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성실하게 순종하고 실천하는 삶입니다.
먼저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성실하게 해야 합니다. 매일 기도하는 것과 말씀을 읽고 듣는 것과 찬양은 성도가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므로 육신의 생명이 있는 동안에는 계속해야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하여 영의 삶을 추구하는 것은 신앙의 기본입니다. 때로는 자신의 심한 죄책감 때문에 이런 영적 생활이 힘들 때에라도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가 너무 더럽고 무겁기 때문에 받지 않으시는 경우는 없습니다. 오히려 심각한 죄로 인하여 마음이 무거울수록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이사야 1:18절에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고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일이 많고 삶이 바빠서 눈코 뜰 겨를이 없을지라도 그럴수록 더욱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일이 많고 바쁠수록 하나님의 도움이 더 많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기억할 것은 혼자서 애쓰는 것보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훨씬 쉽고 형통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의 삶에서 나타나는 생활의 열매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21절에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교제 안에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고 따른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10절에서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고 하십니다. 성령님께서 내 속에 거하시는 것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순간에 선물로 보내주십니다. 다만 성령님께서 내 속에 충만하셔서 나를 인도하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충만하심은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11:13절에서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매일 하나님과의 교통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성령님께서 내 안에 거하시고 충만하시면 나의 모든 삶을 다스리시고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힘쓰게 되고, 삶의 순간마다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나거나 마음이 감동되게 됩니다. 잘못된 일을 하게 되면 양심이 거세게 저항하거나 하나님이 두렵게 여겨집니다. 뿐만 아니라 전에는 보이지도 않고 생각지도 못했던 이웃들이 생각나고 주변을 살피게 됩니다. 혹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없는지, 해야 할 일이 없는지를 살피는 것입니다. 때때로 불쑥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사람이 생각나거나, 기도해 주고 싶어지거나, 전화로 혹은 찾아보고자 하는 마음도 일어납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도 일어나고, 마음이 넓어지고, 마음에 기쁨이 있고, 불안과 염려가 사라지고 마음에 잔잔한 평안이 있습니다. 교회를 돌아볼 생각이 나고, 성도들을 섬기는 기쁨이 있습니다. 이렇게 나의 모든 삶의 목표를 하나님께 두면 자연히 마음도 하나님께로 향하게 됩니다. 이 모두는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에 역사하시는 결과입니다. 이런 마음들이 일어나면 바쁘다고 핑계하거나, 자신의 형편을 생각하면서 거역하지 말고, 기쁘게 순종하십시오.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필요를 채우시면서 사람들을 움직이시고, 모든 환경에까지 역사하실 것입니다. 이렇게 매일 매 삶의 순간마다 하나님과 교제하며,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면 나를 위하여 하늘에 상급이 쌓이는 것입니다.
세상이 혼란스럽고 가치관이 흔들리고 있다고 우리 마음도 흔들리게 하지 맙시다.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성실하고 열심 있게 순종하고 따라갑시다. 그 보상은 하나님께서 하실 것입니다. 어떤 환경과 상황에서도 이 목표를 잃지 않고 계속 달려간다면 반드시 승리자의 상급과 하나님의 자녀의 행복을 누리게 하실 것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