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 장로회
설교모음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

작성자 배의신 댓글 / 조회: 7,485회 작성일 2011-06-17 15:40
***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 / 막 3:13-15, 미 6:6-8

** 들어가는 말

막 3:13-15, “13 또 산에 오르사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14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15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미 6:6-8, “6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7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독일 함부르크의 어느 호텔에 새로 채용된 접객주임이 직원들을 지시하며 열심히 손님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옷차림이 누추한 한 노인이 손님들을 위하여 정원에 멋지게 꾸며놓은 고급의자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습니다. 이를 본 접객주임은 은근히 화가 나서 슬그머니 그 사람의 뒤로가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즉시 이곳을 떠나시오.”
라고 쓴 쪽지를 내밀었습니다. 며칠 후, 접객주임 앞으로 편지 한 장이 전달되었습니다.
“미안하지만 남의 귀에 소문나지 않게 오늘 즉시 이 호텔에서 나가십시오.” - 며칠 전 정원에서 쫓겨난 사람으로부터 -
깜짝 놀란 접객주임이 호텔 인사 담당자에게 그 남루한 옷차림의 노인이 누구인지 물었습니다. 그 노인은 대 기업을 12개나 가지고 있는 대재벌일 뿐만 아니라 바로 그 호텔의 경영주인 ‘스티너스’회장이었습니다. 사람을 외모로만 판단했던 접객주임은 해고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설교의 서두에 하는 이유는 경영주와 고용인의 관계를 생각해 보기 위함입니다. 즉 일터에서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경영주의 경영방침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제멋대로 일한다면 해고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이 사실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마태복음 7:21-23절을 봅시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자기 딴에는 젖 먹던 힘까지 다해서 열심히 일을 했는데, 나중에 주인으로부터 ‘너 일을 왜 이렇게 했어?’라고 책망을 받는다면 여러분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아마도 당황되고 난감할 것입니다. 특히 생명과 결부되는 일이라면 절망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이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모든 삶의 경영주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경영주의 경영방침 즉 ‘하나님의 뜻’에 민감해야만 우리가 소망하는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영원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신약과 구약의 두 본문을 중심으로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찾아보려합니다.

먼저, 본문 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살펴봅시다.

마가복음의 본문말씀은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를 부르시는 과정에서 제자를 부르신 목적을 간략하게 말씀하십니다.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 이 목적이라고 하십니다. 첫째는 주님과 함께 있는 것, 두 번째는 전도하는 것, 세 번째는 귀신을 내어 쫓는 것. 이 세 가지입니다. 이것은 오늘 이 시대에 부르심을 받은 우리들에게도 주어진 부르심의 목적, 즉 사명입니다.

구약 본문인 미가서의 말씀은 ‘구약의 황금률’이라고 불리는 말씀입니다. 즉 구약 전체에서 핵심적인 하나님의 법이라는 말씀입니다. 미가 시대의 사람들이 하나님께 예배하러 나아오면서 이렇게 묻습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이때에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으로 대답합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이 말씀에서도 사람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세 가지로 보이십니다. 첫째는 공의를 행하는 것, 둘째는 경건과 자비한 마음을 갖는 것, 세 번째는 겸손하게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 이 세 가지입니다.

마가복음의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세 가지 목적과 미가서에서 가르치신 하나님의 뜻 세 가지는 의미상으로는 거의 같은 내용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 우리가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라고 묻는 물음에 대한 답변이 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중요한 두 가지를 생각해 보려 합니다. 곧 모든 성경에서 공통적으로 가르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부르심의 목적과 우리에게 주신 사명에 대한 것입니다.

※ 나를 부르신 목적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 내가 무엇을 할까요?”라고 물었을 때,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공통적으로 대답하시는 말씀은 “나와 함께 있는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함께 있다.”는 말은 말 그대로 생활을 함께 하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 살고, 주님과 뜻을 같이 하며,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왜 제자들이 주님과 함께 해야 합니까? 그 이유는 주님 안에 풍요로움이 있고, 주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5:5절에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친구로서 또는 한 가족으로서의 친밀한 교제를 위한 동거이기도 합니다. 마태복음 12:30절에서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함께 한다는 것은 뜻을 같이 하고 삶을 나누는 것입니다.

미국의 역대 대통령 중에서 퇴임 후에 명성을 얻은 분으로 1977-1981년까지 재임한 39대 대통령이었던 ‘지미카터’를 꼽을 수 있습니다. ‘카터’는 대통령 재임시절에는 빛을 발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1981년에 퇴임 한 후부터 국가간의 분쟁해결과 강의, 저술, 세계적으로 사랑의 집을 지어주는 '해비타트 운동'의 총재이자 상징으로서 그는 직접 망치를 들고 작업장에 나서고 있고, 아프리카와 북한에서 화해와 사랑을 외치는 평화의 사도로 활약하고 있습니다. 이 일을 인정받아 2002년에는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의 신앙만은 아주 특별했습니다. 그는 고향 조지아 주 플레인스에 있는 마라나타 침례교회의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주민이 716명에 불과한 작은 마을은 전 세계에서 카터의 성경공부 모습을 보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로 매주일 붐비고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들의 가장 큰 특징은 ‘충성됨’과 ‘평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평강의 왕이신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당연히 평화를 이루게 되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기 때문에 신실하고 충성된 삶을 나타내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것은 주님의 뜻을 순종하여 삶에서 나타내며, 주님을 닮아가는 삶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자신과 함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누가복음 22:28-30절을 봅시다.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한 자들인즉,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로 함께 있게 하신 뜻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까?
구약본문인 미가서의 시대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미가는 이사야 선지자와 거의 같은 시대인 B. C 8세기 후반에 남 유다를 중심으로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그는 요담(11), 아하스(12), 히스기야(13)가 왕위를 이어간 시대에 활동했습니다. 하지만 귀족 출신이었던 이사야와는 달리 가난한 계급 출신으로 권력자들의 불의에 대하여 날카로운 비판과 함께 공의(公義)를 부르짖는 선지자였습니다. 그래서 미가 선지자의 별명이 ‘공의의 선지자’입니다. 특히 미가 선지자는 ‘마음이 빠진 형식적인 종교의식은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임을 강조합니다. 당시의 사회상은 지도자들과 백성들이 부정과 부패, 거짓과 가식으로 극도의 타락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그들에게 지금 내리고 있는 저주가 바로 잘못 된 신앙 때문임을 지적하면서 무엇이 참된 예배인지를 가르칩니다.

당시의 하나님의 백성들은 율법에 기록된 대로 1년 된 송아지를 제물로 바쳤습니다. 이 제물은 최상의 제물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최상의 제물을 드리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줄로 생각했으며, 이런 최상의 제물을 많이 바침으로써 자신들의 죄를 용서받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런 제물로도 만족하지 못한 백성들은 우상 숭배자들의 방법을 흉내 내어 장자를 제물로 바치는 인신제사까지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무엇인가를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예배 방식은 하나님의 규례와 율법의 근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외형적인 것이었습니다. 즉 그들은 스스로 회개하기보다는 자식을 이방인들처럼 제물로 바침으로서 하나님의 진노를 가라앉힐 수 있다고 오해하였던 것입니다. 열왕기하 16:3절에서 그 사실을 보이십니다. “이스라엘 여러 왕의 길로 행하며 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의 가증한 일을 따라 자기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며” ‘불 가운데고 지나가게 한다’는 것은 자식을 번제로 바치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은 혹시 지금 자신의 신앙생활에 대하여 하나님의 뜻을 오해하고 있는 것은 없습니까? 헌금을 많이 하고, 전도하고, 봉사하고, 예배에 꼬박꼬박 참석 잘하고, 성경 많이 읽고, 기도 많이 하고, 정직하게 사는 것. 이런 것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물론 이렇게 하는 것도 어렵지만, 무엇보다 마음이 빠진 신앙생활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아메리카의 오지에서 사역하는 선교사가 인디언 마을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오랜 시간을 수고하여 드디어 인디언 추장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추장은 자신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값진 가죽신을 가져와서 선교사에게 그것을 하나님께 바치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선교사는 “하나님께서는 그런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다음에는 자기가 타던 훌륭한 백마, 그 다음에는 추장의 상징적인 머리장식등을 바치려고 했지만 그때마다 선교사는 “하나님께서는 그런 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난감해진 추장은 “그렇다면 저는 더 이상 드릴 게 없습니다. 이제 나에게 남은 것은 내 생명밖에 없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선교사는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체를 원하십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드려야할 제물은 우리의 소유들이 아니라 우리 자신입니다. 참 제물은 나의 것들과 함께 나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매일 매 순간을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일을 할 때, 사람을 만날 때, 길을 갈 때, 쉴 때, 공부를 할 때 등등. 모든 생활에서 하나님이 내 주인이심을 잊지 않고, 하나님께 묻고 맡기는 것입니다. 기쁘고 즐거울 때, 모든 것이 형통할 때뿐만 아니라, 힘이 들고 어려울 때, 고난이 있을 때까지도 주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모든 생활을 주님과 함께 했듯이 그렇게 우리가 살아가는 것입니다. 앞서 보았던 누가복음 22:28-30절에서의 말씀처럼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한 자들인즉,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부르심의 가장 큰 목적입니다. 결코 쉽지 않는 이 길은 그래서 좁은 문이고 좁은 길입니다.

※ 나에게 주신 사명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입니다.

미가서의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는” 것이며, 마가복음의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어 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함”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살면서 행하게 되는 섬김과 봉사의 삶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권세와 재물과 경험 등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권세들을 제압하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이하여 기도하면서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라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세상에서 살아갈 능력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녀들에게 주신 사명은  하나님의 뜻과 성령의 능력을 따라서 세상에서 정의롭게 사는 것입니다.

정의로운 삶이란 ‘바르게 살아가는 것’과 “인자를 사랑하는 것” 즉 ‘어질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바르게 사는 것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사는 것이며, 어질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사는 것은 주님의 사랑으로 봉사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본문의 말씀을 누가복음 9:1-2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보내시며”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와 병을 고치는 능력은 그리스도인이 복음 전파와 함께 세상 사람들에게 나타내야 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섬김이며 봉사입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부르심의 목적은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즉 예배와 동거입니다. 이 땅에서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은 장차 영원한 나라에서 영원히 함께 있을 준비이자 연습입니다. 그리고 부름받은 사명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정의롭게 사는 것’입니다. 즉 복음 전파와 섬김과 봉사의 삶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함께 행하다가 에녹도 엘리야도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로 옮김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험한 세상이지만 이렇게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어느 날 주님이 부르실 때에 기쁨으로 영원한 본향으로 옮겨갈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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