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특별하신 계획
작성자 배의신 댓글
/ 조회: 5,450회
작성일
2011-11-30 16:00
*** 하나님의 특별하신 계획 / 누가복음 2:1-7
** 들어가는 말
누가복음 2:1-7, “1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2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3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4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5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6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7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오늘 대강절을 맞이하면서 예수님의 오심을 조금 다른 각도로 살펴보려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으로 세상에 오신 것을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사람으로 세상에 오신 목적을 예수님께서는 마가복음 10:45절에서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에서 “많은 사람들”이란 ‘불특정 다수’를 나타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인 유대인만을 위한 메시아로 오신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 4:8절에서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과 상급이 선민인 유대인들과 이방인을 불문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주어진다고 하십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그토록 고대하고 기다렸던 메시아였지만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복음은 거절하는 유대인들을 떠나서 이방인의 세계로 향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복음이 고향을 떠나서 이방세계를 떠돌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과정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하신 계획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로마서 11장에서 상세하게 말씀하십니다. 11절을 보면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 나게 함이니라.”고 하시며 25절 하반절부터 26절 상반절을 보면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하십니다. 선민인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영접하지 않는 미련함은 이방인들에게도 구원의 기회를 주시려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사랑의 계획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시간에는 하나님의 이 특별하신 계획에 대하여 살펴보려합니다.
※ 먼저 본문말씀의 배경을 살펴봅시다.
본문말씀은 예수님의 탄생을 역사적으로 증명하는 말씀입니다. ‘가이사 아구스도’라는 이름은 로마 초대황제인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에사르 옥타비아누스(Gaius Julius Caesar Octavianus, B.C. 31-A.D 14 재위)’에게 로마 원로원이 준 칭호입니다. 그리고 ‘구레뇨(Quirinius)’는 예수님이 탄생하실 무렵 수리아 지역을 관할하던 로마의 총독이었습니다. 역사에는 구레뇨가 주후 6년에 총독이었다는 것과 그 때 호적 조사가 시행되었다는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사실은 예수님의 탄생을 역사적으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사실을 나타내고 있는데, 이는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예고하신 메시아 탄생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7:42절에서 유대인들이 미가서 5:2절과 사무엘하 7:12절 이하의 말씀을 인용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의 살던 촌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며” 그리고 마구간에서 태어나시며,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었다는 것은 메시아의 표징으로 주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2:12절에서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라고 했습니다.
이 모든 사실들이 우리에게 전하는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첫째는 어느 누구도 예수님의 탄생 사실을 부인하지 못할 역사적인 사실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철저한 계획 속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대강절을 맞이하면서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특별하신 계획을 다시 한 번 생각하면서 깊은 감사와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리고 택함 받았다는 사실에 자만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서는 그 순간까지 믿음을 지키며 주님을 따르는 신실한 신앙의 삶을 살도록 결단해야 합니다. 로마서 11:20-21절에서 “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음으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이 원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나를 향한 하나님의 특별하신 계획을 살펴봅시다.
※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계획안에 있습니다.
독일 르네상스 시대의 가장 위대한 화가이며·판화가인 뒤러(Albrecht Dürer, 1471-1528)는 독실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는 소묘 900점, 목판화 350점을 비롯해서 많은 작품을 남겼지만 그 가운데서도 대표작은 현재 뉴른베르크 박물관에 보관되어져 있는 ‘기도하는 손’입니다. 이 그림에는 숨겨진 사랑과 헌신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뒤러는 그림공부에 뜻은 두었으나 너무나 가난했습니다. 여러 생각 끝에 친한 친구와 의논했습니다. 한 사람이 그림공부를 하는 동안 다른 친구는 돈을 벌어서 학비를 돕기로 한 것입니다. 뒤러가 먼저 공부를 하게 되었고, 친구는 막노동으로 뒤러의 학비를 벌었습니다. 수년이 지나서 공부도 마치고 어느 정도 이름을 얻게 된 뒤러는 자신의 뒷바라지를 해 준 친구를 공부시키기 위해 찾아갔습니다. 마침 친구는 기도하는 중이었는데, 그 기도의 내용이 뒤러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습니다.
“주여! 저는 저의 손은 이미 노동으로 굳어져 이제는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내가 할 몫의 능력을 뒤러에게 주시고, 주의 영광을 위해 제 친구가 훌륭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도와주소서.\"
그 기도를 들으면서 뒤러는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연필을 꺼내어 친구의 기도하는 손을 스케치했습니다.
화가 뒤러는 친구의 희생으로 르네상스 시대의 위대한 화가로서 수많은 기독교적인 그림과 판화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했습니다. 뒤러와 그의 친구의 관계가 마치 유대인들과 이방인들과의 관계를 생각하게 합니다.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기회를 주시기 위하여 선민인 유대민족을 희생시키신 것입니다. 지금의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하신 유대민족에 대하여는 이방인들입니다. 요한복음 4:22절은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수가 성의 우물가에서 여인에게 하신 말씀인데,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고 하십니다. 유대인에 대하여 우리는 이방인입니다. 그러나 온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선민인 유대민족들에게만 머물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로마서 11:11-21절까지를 함께 읽어봅시다.
“11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 나게 함이니라. 12 그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풍성함이 되며 그들의 실패가 이방인의 풍성함이 되거든 하물며 그들의 충만함이리요. 13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14 이는 곧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하게 하여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15 그들을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 16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17 또한 가지 얼마가 꺾이었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즉 18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 자랑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19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인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리니 20 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21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이 말씀을 읽은 것만으로도 그 내용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돌감람나무인 우리 이방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선민인 참감람나무의 일부를 꺾어버리셨습니다. 그리고 그 꺾어버린 자리에 돌감람나무인 우리를 접붙이셔서 참감람나무, 즉 하나님의 선민의 자리에 앉게 하셨습니다. 물론 꺾인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불순종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과정마저 이방인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계획이었습니다. 죄에 빠져 하나님을 떠난 인류를 살리시려고 외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온 인류에게 구원의 기회를 주시려고 선민인 유대민족의 일부를 잘라내신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말하는 사도 바울의 말이 떨리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로마서 9:3절에서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고 했듯이, 자신의 동족의 구원을 간절하게 바라는 사도 바울로서는 정말 가슴 아픈 일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의 기회를 주시려고 외아들 예수님을 속죄 제물로 십자가에 죽게 하시고, 선민인 유대민족의 일부를 잘라내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소중한 생명입니다.
※ 하나님의 특별하신 계획이 나의 삶에서 이루도록 순종해야 합니다.
로마서 11:20-21절을 봅시다. “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음으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이 원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이 말씀을 두렵게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백성인 유대민족들 조차 불순종할 때에 아낌없이 잘라내셨습니다. 하물며 그 자리에 접붙인 이방인 가지를 잘라내시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접붙임 받은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하고 따라야 합니다. 왜냐하면 원가지를 잘라내고 다른 가지를 접붙인 목적이 ‘열매’ 이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서 선민인 유대민족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이루지 못하고, 불순종과 우상 숭배로 하나님을 고통스럽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멸하시고, 이방 민족들에게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호머(Homer)의 전설적인 소설인 The Odyssey에서 이타카의 왕이자 트로이 전쟁의 영웅으로 등장하는 율리시즈가 있습니다. 율리시즈 왕이 대군을 거느리고 트로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10년 만에 자신의 나라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왕이 나라를 비운 시일이 너무 길어지자 나라에 남아있던 신하 가운데 간사한 사람이 ‘왕이 전사했다.’는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왕비와 결혼을 하고 왕권을 차지하려는 음모를 꾸몄습니다.
10년 만에 자신의 나라에 도착한 율리시즈 왕이 간사한 신하의 음모 소식을 들었습니다. 율리시즈는 실상을 파악하기 위하여 거지로 꾸며서 정탐을 했습니다. 왕궁 앞에는 다음날에 있을 결혼식과 대관식을 준비하느라 복잡하고 분주했습니다. 사람들은 거지 차림의 율리시즈를 비키라고 밀치기도 하며, 때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과거의 신하였던 한 사람은 거지를 불쌍하게 생각해서 친절하게 대해주었습니다. 율리시즈는 그에게
“너는 내일 이 연회장에 들어오지 말라. 들어오면 죽게 된다.”
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거지가 율리시즈 왕인 줄을 알지 못했던 그 신하는 그 말에 마음을 두지 않았습니다. 다음날, 율리시즈는 군사들을 이끌고 연회장을 덮쳐서 자신을 배반한 모든 신하들을 죽였습니다. 그 중에 어제 자신에게 친절을 베푼 그 신하를 발견했습니다. “이놈, 왜 내 말을 명심하지 않았느냐?”고 호통을 치고는 그도 죽여 버렸습니다.
친절을 베푼 신하는 살 수 있는 기회를 얻었지만 무시하고 순종하지 않았다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순종할 때는 생명과 행복의 길이 되지만, 거역하고 불순종하면 패망과 죽음의 길이 됩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아무리 특별하고 우리를 살리시기 위한 사랑의 길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순종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사랑으로 접붙임 받은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하고 따라야 합니다. 그렇게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순종하면 디모데후서 4:8절에서 말씀하신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는 말씀 그대로 하나님의 상급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번 대강절과 성탄절은 이렇게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특별하신 계획을 깊이 감사하며 하나님을 기뻐하는 순종의 삶을 이루시기를 축복합니다.
** 들어가는 말
누가복음 2:1-7, “1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2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3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4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5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6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7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오늘 대강절을 맞이하면서 예수님의 오심을 조금 다른 각도로 살펴보려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으로 세상에 오신 것을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사람으로 세상에 오신 목적을 예수님께서는 마가복음 10:45절에서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에서 “많은 사람들”이란 ‘불특정 다수’를 나타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인 유대인만을 위한 메시아로 오신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 4:8절에서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과 상급이 선민인 유대인들과 이방인을 불문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주어진다고 하십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그토록 고대하고 기다렸던 메시아였지만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복음은 거절하는 유대인들을 떠나서 이방인의 세계로 향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복음이 고향을 떠나서 이방세계를 떠돌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과정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하신 계획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로마서 11장에서 상세하게 말씀하십니다. 11절을 보면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 나게 함이니라.”고 하시며 25절 하반절부터 26절 상반절을 보면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하십니다. 선민인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영접하지 않는 미련함은 이방인들에게도 구원의 기회를 주시려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사랑의 계획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시간에는 하나님의 이 특별하신 계획에 대하여 살펴보려합니다.
※ 먼저 본문말씀의 배경을 살펴봅시다.
본문말씀은 예수님의 탄생을 역사적으로 증명하는 말씀입니다. ‘가이사 아구스도’라는 이름은 로마 초대황제인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에사르 옥타비아누스(Gaius Julius Caesar Octavianus, B.C. 31-A.D 14 재위)’에게 로마 원로원이 준 칭호입니다. 그리고 ‘구레뇨(Quirinius)’는 예수님이 탄생하실 무렵 수리아 지역을 관할하던 로마의 총독이었습니다. 역사에는 구레뇨가 주후 6년에 총독이었다는 것과 그 때 호적 조사가 시행되었다는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사실은 예수님의 탄생을 역사적으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사실을 나타내고 있는데, 이는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예고하신 메시아 탄생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7:42절에서 유대인들이 미가서 5:2절과 사무엘하 7:12절 이하의 말씀을 인용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의 살던 촌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며” 그리고 마구간에서 태어나시며,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었다는 것은 메시아의 표징으로 주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2:12절에서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라고 했습니다.
이 모든 사실들이 우리에게 전하는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첫째는 어느 누구도 예수님의 탄생 사실을 부인하지 못할 역사적인 사실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철저한 계획 속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대강절을 맞이하면서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특별하신 계획을 다시 한 번 생각하면서 깊은 감사와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리고 택함 받았다는 사실에 자만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서는 그 순간까지 믿음을 지키며 주님을 따르는 신실한 신앙의 삶을 살도록 결단해야 합니다. 로마서 11:20-21절에서 “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음으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이 원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나를 향한 하나님의 특별하신 계획을 살펴봅시다.
※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계획안에 있습니다.
독일 르네상스 시대의 가장 위대한 화가이며·판화가인 뒤러(Albrecht Dürer, 1471-1528)는 독실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는 소묘 900점, 목판화 350점을 비롯해서 많은 작품을 남겼지만 그 가운데서도 대표작은 현재 뉴른베르크 박물관에 보관되어져 있는 ‘기도하는 손’입니다. 이 그림에는 숨겨진 사랑과 헌신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뒤러는 그림공부에 뜻은 두었으나 너무나 가난했습니다. 여러 생각 끝에 친한 친구와 의논했습니다. 한 사람이 그림공부를 하는 동안 다른 친구는 돈을 벌어서 학비를 돕기로 한 것입니다. 뒤러가 먼저 공부를 하게 되었고, 친구는 막노동으로 뒤러의 학비를 벌었습니다. 수년이 지나서 공부도 마치고 어느 정도 이름을 얻게 된 뒤러는 자신의 뒷바라지를 해 준 친구를 공부시키기 위해 찾아갔습니다. 마침 친구는 기도하는 중이었는데, 그 기도의 내용이 뒤러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습니다.
“주여! 저는 저의 손은 이미 노동으로 굳어져 이제는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내가 할 몫의 능력을 뒤러에게 주시고, 주의 영광을 위해 제 친구가 훌륭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도와주소서.\"
그 기도를 들으면서 뒤러는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연필을 꺼내어 친구의 기도하는 손을 스케치했습니다.
화가 뒤러는 친구의 희생으로 르네상스 시대의 위대한 화가로서 수많은 기독교적인 그림과 판화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했습니다. 뒤러와 그의 친구의 관계가 마치 유대인들과 이방인들과의 관계를 생각하게 합니다.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기회를 주시기 위하여 선민인 유대민족을 희생시키신 것입니다. 지금의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하신 유대민족에 대하여는 이방인들입니다. 요한복음 4:22절은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수가 성의 우물가에서 여인에게 하신 말씀인데,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고 하십니다. 유대인에 대하여 우리는 이방인입니다. 그러나 온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선민인 유대민족들에게만 머물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로마서 11:11-21절까지를 함께 읽어봅시다.
“11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 나게 함이니라. 12 그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풍성함이 되며 그들의 실패가 이방인의 풍성함이 되거든 하물며 그들의 충만함이리요. 13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14 이는 곧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하게 하여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15 그들을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 16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17 또한 가지 얼마가 꺾이었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즉 18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 자랑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19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인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리니 20 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21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이 말씀을 읽은 것만으로도 그 내용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돌감람나무인 우리 이방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선민인 참감람나무의 일부를 꺾어버리셨습니다. 그리고 그 꺾어버린 자리에 돌감람나무인 우리를 접붙이셔서 참감람나무, 즉 하나님의 선민의 자리에 앉게 하셨습니다. 물론 꺾인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불순종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과정마저 이방인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계획이었습니다. 죄에 빠져 하나님을 떠난 인류를 살리시려고 외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온 인류에게 구원의 기회를 주시려고 선민인 유대민족의 일부를 잘라내신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말하는 사도 바울의 말이 떨리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로마서 9:3절에서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고 했듯이, 자신의 동족의 구원을 간절하게 바라는 사도 바울로서는 정말 가슴 아픈 일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의 기회를 주시려고 외아들 예수님을 속죄 제물로 십자가에 죽게 하시고, 선민인 유대민족의 일부를 잘라내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소중한 생명입니다.
※ 하나님의 특별하신 계획이 나의 삶에서 이루도록 순종해야 합니다.
로마서 11:20-21절을 봅시다. “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음으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이 원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이 말씀을 두렵게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백성인 유대민족들 조차 불순종할 때에 아낌없이 잘라내셨습니다. 하물며 그 자리에 접붙인 이방인 가지를 잘라내시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접붙임 받은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하고 따라야 합니다. 왜냐하면 원가지를 잘라내고 다른 가지를 접붙인 목적이 ‘열매’ 이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서 선민인 유대민족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이루지 못하고, 불순종과 우상 숭배로 하나님을 고통스럽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멸하시고, 이방 민족들에게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호머(Homer)의 전설적인 소설인 The Odyssey에서 이타카의 왕이자 트로이 전쟁의 영웅으로 등장하는 율리시즈가 있습니다. 율리시즈 왕이 대군을 거느리고 트로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10년 만에 자신의 나라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왕이 나라를 비운 시일이 너무 길어지자 나라에 남아있던 신하 가운데 간사한 사람이 ‘왕이 전사했다.’는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왕비와 결혼을 하고 왕권을 차지하려는 음모를 꾸몄습니다.
10년 만에 자신의 나라에 도착한 율리시즈 왕이 간사한 신하의 음모 소식을 들었습니다. 율리시즈는 실상을 파악하기 위하여 거지로 꾸며서 정탐을 했습니다. 왕궁 앞에는 다음날에 있을 결혼식과 대관식을 준비하느라 복잡하고 분주했습니다. 사람들은 거지 차림의 율리시즈를 비키라고 밀치기도 하며, 때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과거의 신하였던 한 사람은 거지를 불쌍하게 생각해서 친절하게 대해주었습니다. 율리시즈는 그에게
“너는 내일 이 연회장에 들어오지 말라. 들어오면 죽게 된다.”
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거지가 율리시즈 왕인 줄을 알지 못했던 그 신하는 그 말에 마음을 두지 않았습니다. 다음날, 율리시즈는 군사들을 이끌고 연회장을 덮쳐서 자신을 배반한 모든 신하들을 죽였습니다. 그 중에 어제 자신에게 친절을 베푼 그 신하를 발견했습니다. “이놈, 왜 내 말을 명심하지 않았느냐?”고 호통을 치고는 그도 죽여 버렸습니다.
친절을 베푼 신하는 살 수 있는 기회를 얻었지만 무시하고 순종하지 않았다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순종할 때는 생명과 행복의 길이 되지만, 거역하고 불순종하면 패망과 죽음의 길이 됩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아무리 특별하고 우리를 살리시기 위한 사랑의 길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순종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사랑으로 접붙임 받은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하고 따라야 합니다. 그렇게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순종하면 디모데후서 4:8절에서 말씀하신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는 말씀 그대로 하나님의 상급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번 대강절과 성탄절은 이렇게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특별하신 계획을 깊이 감사하며 하나님을 기뻐하는 순종의 삶을 이루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