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생각 개혁하기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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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1-11-03 15:56
*** 나의 생각 개혁하기 / 에베소서 4:1-6
** 들어가는 말
에베소서 4:1-6, “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4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5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6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오늘은 ‘종교개혁기념주일’입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난 이유는 당시 가톨릭 교회의 악습(惡習)을 철패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재정비하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의 역사에서는 남유다의 13대 왕인 히스기야의 종교 개혁(왕하 18:1-8)이 있고, 16대 왕인 요시야의 종교 개혁(왕하 23:4-20)이 있습니다. 종교개혁은 1517년 10월 31일 부패한 가톨릭교회에 반발하여 마틴 루터가 독일 비텐베르크 성의 만인성자교회의 문에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붙인 것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10월 마지막 날에 반박문을 붙인 이유는 다음 날(11월 1일)이 만성절 축제일(All Saints Day, 聖人祝日)이었기 때문입니다. 만성절이란 가톨릭교회에 알려져 있거나 혹은 알려져 있지 않은 모든 성인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반박문의 요점은 면죄부 거래, 고해성사, 교황의 권위 등. 기존 질서에 대한 부패성을 지적하여 개혁의 필요성을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루터는 반박문에서 교회가 인간의 죄를 면하거나 구원할 수 없으며, 그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써 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섬김과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이 드러난다는 '십자가 신학'을 주장했습니다. 이는 만성절에 모인 대중들로부터 폭발적인 지지를 받았으며 독일뿐만 아니라 주변 국가들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 종교 개혁으로 Reformed church(개혁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들을 두고 Protestant(신교도)라고 불렀습니다. 지금의 개신교입니다. 그로부터 494년이 지난 오늘의 교회는 더 지능적인 부패와 타락으로 세속화가 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거의 오백년 전에 일어났던 종교개혁을 기념해야 할 때가 아닙니다. 우리 시대에 걸맞은 신앙의 개혁을 이루어야 할 때입니다. 루터는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말씀(sola scriptula), 오직 은혜(sola gracia). 이 세 가지를 개혁의 핵심으로 삼았습니다. 즉 하나님 중심주의로 돌아가자는 주장입니다. 지금 우리도 하나님 중심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마태복음 7:21-23절의 말씀인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들이 나더러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는 이 말씀이 하나님 중심으로 돌아가야 함을 경고하십니다. 그렇다면 가장 우선적으로 개혁해야 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 먼저, 생각의 방향을 바꾸어야 합니다.
회사를 경영하는 어느 사업가가 사업차 외국 출장 중에 호텔에 투숙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의 회사는 경영 상황이 많이 힘들어서 좌절감이 몰려올 때였습니다. 그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창가에 서서 멍한 시선으로 밖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파리 한 마리가 밖으로 나가려다가 창문에 부딪쳐서 제자리에서 윙윙거리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파리에게 있어서 유리창은 보이지 않는 방해물이었습니다. 파리는 아래로 떨어졌다가는 다시 시도하고, 뒤로 날아갔다가 다시 돌진하기를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리창을 통하여 어렴풋이 비치는 방 반대편에는 현관문이 열려 있었습니다. 사업가는 파리를 보면서 생각합니다.
“파리가 방향을 바꾸어서 몇 초만 날면 밖으로 나갈 수 있을 텐데…, 혹시 이 모습이 지금의 내 모습은 아닐까?! 내 삶의 방향만 조금 바꾸면 될 것을 고집스럽게 계속 돌진하는 것은 아닌가?”
여러분은 이 사업가처럼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습니까? “지금 내가 가고 있는 삶의 방향이 올바른 것일까?” “혹시 내 생각과 아집으로 한 방향만을 고집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런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까? 사람은 자신이 한 번 옳다고 생각한 것은 잘 바꾸려 하지 않습니다. 거듭되는 실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의 자세나 생각이 잘못되어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런 것을 ‘고집’또는 ‘아집’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곧 ‘교만’입니다. 생각만 조금 바꾸고, 삶의 방향만 조금 바꾸어도 쉽게 해결 될 수 있는 일을 자신의 고집 때문에 고생을 자초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고집과 교만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입니다. 잠언 16:5절에서 “무릇 마음이 교만한 자를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니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하지 못하리라.”고 하시며, 18절에서는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런 고집이 하나님을 섬기는 그리스도인에게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자신의 신앙이 옳다고 고집하기 시작하면 어느 누구의 말도 들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주장이 통하지 않으면 교회를 떠나든지 신앙을 포기하는 것조차 마다하지 않는 과감함까지 보이고 있는 형편입니다. 이것은 영의 생명을 위협하는 신앙적인 고집이며 교만입니다. 본문말씀에는 그리스도인을 신앙의 고집에서 벗어나게 하는 방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생활원리이기도 합니다. 쉽게 말해서 ‘자신을 낮추는 겸손’입니다. 겸손은 교만과는 반대편에 있으며,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3:15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고 하시며, 빌립보서 2:5-8절에서는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하시면서 성육신하신 예수님의 겸손을 보여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마태복음 11:29절에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라고 하십니다. 이 예수님을 따라서 마음을 낮추고 주님 안에서 서로를 존중하며 높이는 겸손한 마음으로 우리 자신을 개혁해야 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닮은 겸손은 지금 우리가 이루어야 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를 이루는 데 중요한 요소입니다. 마음이 거만하고 서로의 아집을 주장하면 하나를 이룰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 됨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 삼으신 가장 중요한 목적입니다. 본문 11절에서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3절 후반절에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하시면서 6절까지 하나 됨을 이루어야 할 이유를 가르치십니다. 그 이유는 성삼위 되신 하나님께서 하나를 이루고 계시기 때문이며, 우리가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으며, 자녀 삼으심의 근거가 되는 믿음도 세례도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7:21-22절에서도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라고 하십니다.
하나 됨은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처음 천국 공동체였던 에덴은 사람이 하나님과 함께 살던 기쁨과 행복의 삶의 동산이었습니다. 교회는 이 천국 공동체를 회복해 가야합니다. 개인주의가 팽배한 지금의 세상에서 자신을 낮추어 하나가 되는 천국 공동체를 이루는 것은 많이 힘든 일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로 부르셨지만 아직 우리는 하나를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천국 공동체의 회복은 우리 서로가 생각의 방향을 바꾸는 자신의 개혁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자신을 개혁해야 합니까?
※ 자신의 생각을 개혁하는 몇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겸손’입니다.
‘겸손’이란, 자기를 주장하지 않고 남을 자신보다 더 낫게 여기는 행위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겸손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보기에는 겸손은 줏대가 없는 것처럼 보이고, 나약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은 자신의 능력과 지위와 소유를 자랑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하나님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처럼 되셔서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님의 겸손을 본받아야 합니다. 이런 우화가 있습니다.
공작새 가정이 있었습니다. 그 집에는 공작새 부부와 외동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외동딸이 자라서 결혼하게 되어 부모 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외동딸 공작새가 분가해 간지 한 달도 못되어 초췌한 모습을 한 채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외동딸 공작새 가, “엄마, 다른 새들한테 따돌림을 받아서 살수가 없어요.”라고 하소연하며 울었습니다. 딸 공작새의 말을 들은 어머니 공작새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습니다.
“네가 겸손하지 못해 그런 거란다. 넌 네 꽁지를 아무데서나 자랑했었지?”
엄마 공작새의 말에 외동딸 공작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반문했습니다.
“이 꼬리는 우리 공작새만이 가지고 있는 것인데, 그걸 자랑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란 말 이예요?”
이런 딸 공작새의 반문을 들은 엄마 공작새가 말을 이었습니다.
“내가 언젠가 세상에 있는 어느 인간선생님의 말을 엿들은 적이 있단다. 그분은 이렇게 어떤 사람에게 일러주더구나. ‘자네는 대화 할 때 그 자동차 얘기를 좀 빼게나, 영국 골퍼들 사이에는 젠틀맨 골퍼상식 이라는 것이 있네. 그것은 골프를 치지 않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을 때는 절대로 골프에 대하여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것일세.’라고 하더구나.”
이 말을 들은 딸 공작새는 다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그 후로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이런 마음이 절제되지 못하고 그대로 발산하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우리 곁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자신의 부족한 것이 남들과 비교되는 것을 좋아합니까? 자신의 부족함이 남들과 비교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나를 위하여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사람이 되셨고 죄 없이 십자가를 지신 겸손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두 번째는 ‘온유’입니다.
‘온유’란, 잘 절제된 부드러움입니다. 이 말은 ‘굉장한 힘이 어떤 일정한 방향으로 잘 조절되어 나타낼 때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예를 들어, 야생마를 생포하여 오랜 훈련을 통하여 길들인 다음에 경주마나 군마로 사용하는 그런 것입니다. 이처럼 다듬어지지 않은 힘이 잘 다듬어져서 귀한 일에 사용되어질 때, 그것을 가리켜 ‘온유해졌다.’라고 합니다. 반대로 ‘온유하지 못하다.’는 것은 ‘다듬어지지 않아서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가 이렇게 잘 다듬어진 온유함을 위하여 고난과 역경을 통한 연단의 길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 온유함은 팔복과 성령의 열매에도 들어 있는 중요한 성도의 생활덕목입니다.
세 번째는 ‘오래 참음’입니다.
‘오래참음(makroqumiva\", 마크로뒤미아)’이라는 말은 ‘마크로스(μακρός, 긴, 먼 거리의)’와 ‘뒤모스(θυμός, 열정, 분노)’ 라는 말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이 단어의 의미는 ‘상대방의 나쁜 감정이나 잘못에 대해 응징할 수 있는 상황 하에서도 참는 것’을 말합니다. 즉 상대방의 잘못된 행동에 대하여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고 기다리며 참는 것입니다. 이는 인간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입니다. 만약 인간의 죄악과 허물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즉각적인 심판을 내리신다면 이 땅에 살아남아 있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3:9절입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이처럼 교회공동체에서는 서로에 대해서 참고 기다려주는 인내심이 있어야합니다. 주님께서는 주님을 믿지 않던 우리들에게 오래 참으셨습니다. 지금도 날마다 주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지만 우리의 신앙이 성장하기를 참으시며 기다리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웃의 부족함과 연약함에 대하여 참고 기다리며 격려하고 돕는 것이 필요합니다.
네 번째는 ‘사랑 안에서 서로 용납하는 것’입니다.
서로 용납한다는 것은 상대방을 자기에게 맞추어 바꾸려는 의도가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부부간이나 성도간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이, 아내가 이렇게 하면 좋겠는데…”, “저 분이 이렇게 해 주면 좋겠는데…”, “왜 이렇게 하지 않지!”등. 상대방을 자꾸만 자기에게 맞춰 변화시키려고 하면 갈등은 점점 더 깊어지게 마련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다른 교인의 부족함과 흠을 보고 고쳐지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로마서 15:7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즉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기쁨으로 받아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만 되면 가정에서든지 교회에서든지 큰소리가 나고 분란이 일어날 일이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평안의 매는 줄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즉 이러한 마음으로 서로 돌아보고 격려할 때에 가정도 교회도 천국 공동체를 회복해 가는 것입니다.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의 개성을 그대로 받아주셨습니다. 하물며 그렇게 부름 받은 우리가 서로에 대하여 자신의 방법을 우기고 편을 가르고 마음이 나누인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겠습니까? 우리는 서로가 개성이 다르고, 재능이 다르고, 믿음의 분량이 다르고, 출신도 다르고, 생긴 모양도 다르고, 생활이 다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로 부름을 받아 한 식구가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한 몸을 이룬 지체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가 되어 천국 공동체를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 몸에서 다리가 불편하다고 잘라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싸고 더 편안하게 해 주듯이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그러해야 합니다.
대복교회가 성숙한 교회로 나아가기 위하여 주님께서 부르신 부름에 합당하도록 자신의 마음부터 개혁합시다. 겸손하고, 온유하며, 오래참고, 사랑 안에서 서로 용납함으로서 주님께서 이루신 하나 됨을 주님이 오실 때까지 힘써 지켜 갈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 들어가는 말
에베소서 4:1-6, “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4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5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6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오늘은 ‘종교개혁기념주일’입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난 이유는 당시 가톨릭 교회의 악습(惡習)을 철패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재정비하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의 역사에서는 남유다의 13대 왕인 히스기야의 종교 개혁(왕하 18:1-8)이 있고, 16대 왕인 요시야의 종교 개혁(왕하 23:4-20)이 있습니다. 종교개혁은 1517년 10월 31일 부패한 가톨릭교회에 반발하여 마틴 루터가 독일 비텐베르크 성의 만인성자교회의 문에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붙인 것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10월 마지막 날에 반박문을 붙인 이유는 다음 날(11월 1일)이 만성절 축제일(All Saints Day, 聖人祝日)이었기 때문입니다. 만성절이란 가톨릭교회에 알려져 있거나 혹은 알려져 있지 않은 모든 성인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반박문의 요점은 면죄부 거래, 고해성사, 교황의 권위 등. 기존 질서에 대한 부패성을 지적하여 개혁의 필요성을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루터는 반박문에서 교회가 인간의 죄를 면하거나 구원할 수 없으며, 그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써 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섬김과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이 드러난다는 '십자가 신학'을 주장했습니다. 이는 만성절에 모인 대중들로부터 폭발적인 지지를 받았으며 독일뿐만 아니라 주변 국가들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 종교 개혁으로 Reformed church(개혁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들을 두고 Protestant(신교도)라고 불렀습니다. 지금의 개신교입니다. 그로부터 494년이 지난 오늘의 교회는 더 지능적인 부패와 타락으로 세속화가 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거의 오백년 전에 일어났던 종교개혁을 기념해야 할 때가 아닙니다. 우리 시대에 걸맞은 신앙의 개혁을 이루어야 할 때입니다. 루터는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말씀(sola scriptula), 오직 은혜(sola gracia). 이 세 가지를 개혁의 핵심으로 삼았습니다. 즉 하나님 중심주의로 돌아가자는 주장입니다. 지금 우리도 하나님 중심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마태복음 7:21-23절의 말씀인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들이 나더러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는 이 말씀이 하나님 중심으로 돌아가야 함을 경고하십니다. 그렇다면 가장 우선적으로 개혁해야 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 먼저, 생각의 방향을 바꾸어야 합니다.
회사를 경영하는 어느 사업가가 사업차 외국 출장 중에 호텔에 투숙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의 회사는 경영 상황이 많이 힘들어서 좌절감이 몰려올 때였습니다. 그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창가에 서서 멍한 시선으로 밖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파리 한 마리가 밖으로 나가려다가 창문에 부딪쳐서 제자리에서 윙윙거리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파리에게 있어서 유리창은 보이지 않는 방해물이었습니다. 파리는 아래로 떨어졌다가는 다시 시도하고, 뒤로 날아갔다가 다시 돌진하기를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리창을 통하여 어렴풋이 비치는 방 반대편에는 현관문이 열려 있었습니다. 사업가는 파리를 보면서 생각합니다.
“파리가 방향을 바꾸어서 몇 초만 날면 밖으로 나갈 수 있을 텐데…, 혹시 이 모습이 지금의 내 모습은 아닐까?! 내 삶의 방향만 조금 바꾸면 될 것을 고집스럽게 계속 돌진하는 것은 아닌가?”
여러분은 이 사업가처럼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습니까? “지금 내가 가고 있는 삶의 방향이 올바른 것일까?” “혹시 내 생각과 아집으로 한 방향만을 고집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런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까? 사람은 자신이 한 번 옳다고 생각한 것은 잘 바꾸려 하지 않습니다. 거듭되는 실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의 자세나 생각이 잘못되어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런 것을 ‘고집’또는 ‘아집’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곧 ‘교만’입니다. 생각만 조금 바꾸고, 삶의 방향만 조금 바꾸어도 쉽게 해결 될 수 있는 일을 자신의 고집 때문에 고생을 자초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고집과 교만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입니다. 잠언 16:5절에서 “무릇 마음이 교만한 자를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니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하지 못하리라.”고 하시며, 18절에서는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런 고집이 하나님을 섬기는 그리스도인에게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자신의 신앙이 옳다고 고집하기 시작하면 어느 누구의 말도 들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주장이 통하지 않으면 교회를 떠나든지 신앙을 포기하는 것조차 마다하지 않는 과감함까지 보이고 있는 형편입니다. 이것은 영의 생명을 위협하는 신앙적인 고집이며 교만입니다. 본문말씀에는 그리스도인을 신앙의 고집에서 벗어나게 하는 방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생활원리이기도 합니다. 쉽게 말해서 ‘자신을 낮추는 겸손’입니다. 겸손은 교만과는 반대편에 있으며,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3:15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고 하시며, 빌립보서 2:5-8절에서는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하시면서 성육신하신 예수님의 겸손을 보여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마태복음 11:29절에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라고 하십니다. 이 예수님을 따라서 마음을 낮추고 주님 안에서 서로를 존중하며 높이는 겸손한 마음으로 우리 자신을 개혁해야 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닮은 겸손은 지금 우리가 이루어야 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를 이루는 데 중요한 요소입니다. 마음이 거만하고 서로의 아집을 주장하면 하나를 이룰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 됨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 삼으신 가장 중요한 목적입니다. 본문 11절에서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3절 후반절에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하시면서 6절까지 하나 됨을 이루어야 할 이유를 가르치십니다. 그 이유는 성삼위 되신 하나님께서 하나를 이루고 계시기 때문이며, 우리가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으며, 자녀 삼으심의 근거가 되는 믿음도 세례도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7:21-22절에서도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라고 하십니다.
하나 됨은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처음 천국 공동체였던 에덴은 사람이 하나님과 함께 살던 기쁨과 행복의 삶의 동산이었습니다. 교회는 이 천국 공동체를 회복해 가야합니다. 개인주의가 팽배한 지금의 세상에서 자신을 낮추어 하나가 되는 천국 공동체를 이루는 것은 많이 힘든 일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로 부르셨지만 아직 우리는 하나를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천국 공동체의 회복은 우리 서로가 생각의 방향을 바꾸는 자신의 개혁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자신을 개혁해야 합니까?
※ 자신의 생각을 개혁하는 몇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겸손’입니다.
‘겸손’이란, 자기를 주장하지 않고 남을 자신보다 더 낫게 여기는 행위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겸손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보기에는 겸손은 줏대가 없는 것처럼 보이고, 나약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은 자신의 능력과 지위와 소유를 자랑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하나님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처럼 되셔서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님의 겸손을 본받아야 합니다. 이런 우화가 있습니다.
공작새 가정이 있었습니다. 그 집에는 공작새 부부와 외동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외동딸이 자라서 결혼하게 되어 부모 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외동딸 공작새가 분가해 간지 한 달도 못되어 초췌한 모습을 한 채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외동딸 공작새 가, “엄마, 다른 새들한테 따돌림을 받아서 살수가 없어요.”라고 하소연하며 울었습니다. 딸 공작새의 말을 들은 어머니 공작새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습니다.
“네가 겸손하지 못해 그런 거란다. 넌 네 꽁지를 아무데서나 자랑했었지?”
엄마 공작새의 말에 외동딸 공작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반문했습니다.
“이 꼬리는 우리 공작새만이 가지고 있는 것인데, 그걸 자랑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란 말 이예요?”
이런 딸 공작새의 반문을 들은 엄마 공작새가 말을 이었습니다.
“내가 언젠가 세상에 있는 어느 인간선생님의 말을 엿들은 적이 있단다. 그분은 이렇게 어떤 사람에게 일러주더구나. ‘자네는 대화 할 때 그 자동차 얘기를 좀 빼게나, 영국 골퍼들 사이에는 젠틀맨 골퍼상식 이라는 것이 있네. 그것은 골프를 치지 않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을 때는 절대로 골프에 대하여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것일세.’라고 하더구나.”
이 말을 들은 딸 공작새는 다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그 후로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이런 마음이 절제되지 못하고 그대로 발산하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우리 곁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자신의 부족한 것이 남들과 비교되는 것을 좋아합니까? 자신의 부족함이 남들과 비교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나를 위하여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사람이 되셨고 죄 없이 십자가를 지신 겸손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두 번째는 ‘온유’입니다.
‘온유’란, 잘 절제된 부드러움입니다. 이 말은 ‘굉장한 힘이 어떤 일정한 방향으로 잘 조절되어 나타낼 때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예를 들어, 야생마를 생포하여 오랜 훈련을 통하여 길들인 다음에 경주마나 군마로 사용하는 그런 것입니다. 이처럼 다듬어지지 않은 힘이 잘 다듬어져서 귀한 일에 사용되어질 때, 그것을 가리켜 ‘온유해졌다.’라고 합니다. 반대로 ‘온유하지 못하다.’는 것은 ‘다듬어지지 않아서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가 이렇게 잘 다듬어진 온유함을 위하여 고난과 역경을 통한 연단의 길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 온유함은 팔복과 성령의 열매에도 들어 있는 중요한 성도의 생활덕목입니다.
세 번째는 ‘오래 참음’입니다.
‘오래참음(makroqumiva\", 마크로뒤미아)’이라는 말은 ‘마크로스(μακρός, 긴, 먼 거리의)’와 ‘뒤모스(θυμός, 열정, 분노)’ 라는 말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이 단어의 의미는 ‘상대방의 나쁜 감정이나 잘못에 대해 응징할 수 있는 상황 하에서도 참는 것’을 말합니다. 즉 상대방의 잘못된 행동에 대하여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고 기다리며 참는 것입니다. 이는 인간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입니다. 만약 인간의 죄악과 허물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즉각적인 심판을 내리신다면 이 땅에 살아남아 있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3:9절입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이처럼 교회공동체에서는 서로에 대해서 참고 기다려주는 인내심이 있어야합니다. 주님께서는 주님을 믿지 않던 우리들에게 오래 참으셨습니다. 지금도 날마다 주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지만 우리의 신앙이 성장하기를 참으시며 기다리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웃의 부족함과 연약함에 대하여 참고 기다리며 격려하고 돕는 것이 필요합니다.
네 번째는 ‘사랑 안에서 서로 용납하는 것’입니다.
서로 용납한다는 것은 상대방을 자기에게 맞추어 바꾸려는 의도가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부부간이나 성도간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이, 아내가 이렇게 하면 좋겠는데…”, “저 분이 이렇게 해 주면 좋겠는데…”, “왜 이렇게 하지 않지!”등. 상대방을 자꾸만 자기에게 맞춰 변화시키려고 하면 갈등은 점점 더 깊어지게 마련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다른 교인의 부족함과 흠을 보고 고쳐지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로마서 15:7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즉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기쁨으로 받아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만 되면 가정에서든지 교회에서든지 큰소리가 나고 분란이 일어날 일이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평안의 매는 줄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즉 이러한 마음으로 서로 돌아보고 격려할 때에 가정도 교회도 천국 공동체를 회복해 가는 것입니다.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의 개성을 그대로 받아주셨습니다. 하물며 그렇게 부름 받은 우리가 서로에 대하여 자신의 방법을 우기고 편을 가르고 마음이 나누인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겠습니까? 우리는 서로가 개성이 다르고, 재능이 다르고, 믿음의 분량이 다르고, 출신도 다르고, 생긴 모양도 다르고, 생활이 다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로 부름을 받아 한 식구가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한 몸을 이룬 지체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가 되어 천국 공동체를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 몸에서 다리가 불편하다고 잘라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싸고 더 편안하게 해 주듯이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그러해야 합니다.
대복교회가 성숙한 교회로 나아가기 위하여 주님께서 부르신 부름에 합당하도록 자신의 마음부터 개혁합시다. 겸손하고, 온유하며, 오래참고, 사랑 안에서 서로 용납함으로서 주님께서 이루신 하나 됨을 주님이 오실 때까지 힘써 지켜 갈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