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 장로회
설교모음

생활 속의 신앙

작성자 배의신 댓글 / 조회: 8,453회 작성일 2011-10-19 13:42
*** 생활 속의 신앙 / 마태복음 5:13-20

** 들어가는 말

마태복음 5:13-20,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언젠가 결혼식에 참석했을 때입니다. 축하 순서에서 피아노 5중주(피아노,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콘트라베이스 )의 축하 연주가 있었습니다. 연주곡목이 ‘조바니 마르티니’의 유명한 노래인 ‘사랑의 기쁨’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트윈폴리오’가 불렀지요. 그런데 곡목은 사랑의 기쁨이지만 가사는 제목처럼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의 기쁨은 어느덧 사라지고 사랑의 슬픔만 영원히 남았네 어느듯 해지고 어둠이 쌓여오면 서글픈 눈물은 별빛에 씻기네…”
이 가사내용을 신랑 신부가 알았더라면 기절할 노릇이지요. 그런데 피아노 5중주의 연주는 감미롭고 가슴이 뭉클하여 사람의 가슴을 녹이는 것입니다. 내심 ‘어떻게 저런 곡을 결혼축가로 연주할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마도 제목이 그렇고 맬로디가 좋으니까 사용하는 것이리라 생각됩니다. 아무튼 때로는 모르는 것이 약이 될 때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트윈폴리오’가 부른 ‘웨딩 케잌’이라는 노래도 마찬가지입니다. 제목이 그래서 그런지 종종 결혼을 축하하는 신청곡으로 사용됩니다. 이 가사도 만만찮습니다. “이제 밤도 깊어 고요한데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 잠 못 이루고 깨어나서 창문을 열고 내어다 보니 사람은 간 곳이 없고 외로이 남아 있는 저 웨딩케익 그 누가 두고 갔나 나는 가네 서글픈 나의 사랑이여 이 밤이 지나가면 나는 가네 원치 않는 사람에게로 눈물을 흘리면서 나는 가네 그대 아닌 사람에게로…”

이 이야기를 서두에 하는 이유는 ‘현실과 감정’, ‘현실과 이상’이 다른 세계를 말하고 싶어서입니다. 사람에게 이상(꿈)과 다른 현실은 생동감이 없습니다. 쉽게 말해서 ‘살기 위해서 먹고, 먹기 위해서 사는’ 그런 의미 없는 삶이 됩니다. 우리의 신앙의 세계도 같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감사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주일이면 교회당에 나와 예배하고 섬기고 봉사합니다. 그런데 생활의 현장에서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됩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가정에서나 직장에서, 사업장에서, 학교에서, 일을 할 때나, 사람을 만날 때나 어떤 때라도 하나님을 생각조차 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즉 그리스도인다운 생활을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는 자신의 마음의 신앙과 실제의 생활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앞의 예화처럼 내용은 모르고 소리에만 반응하는 생활입니다. 이러한 삶은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2:14-17절에서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우리의 생활 속에서의 신앙을 생각해 보려 합니다. 본문말씀은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말씀하시려는 하나님의 그 뜻을 생각해 보면서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법에 근거한 진실한 신앙의 삶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 우리 시대에 기독교가 정말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고,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일이 많습니다. 그 이유가 여러 가지이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들이 신앙과 생활을 바르게 조화시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인답게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의미를 잘 표현한 말씀이 베드로전서 2:21절입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고 하십니다.

※ 먼저, 본문말씀의 배경과 내용을 살펴봅시다.

본문말씀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13-16절에서 주님을 따르는 자들이 나타내야 할 실천적인 삶으로 ‘빛과 소금의 삶’을 말씀하십니다. 이어지는 17-20절에서는 ‘하나님의 법’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소금과 빛에 대한 비유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의미합니다. 소금과 빛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소금과 빛의 역할은 그리스도인들이 생활의 현장에서 나타내야 할 행위입니다. 성경에서의 소금은 크게 네 가지의 상징적인 의미를 가집니다. ➀골로새서 4:6절에서 “소금으로 맛을 내다”라고 하신 것처럼 맛을 내는 것입니다. 즉 지혜롭고 은혜스러운 말을 의미합니다. ➁율법의 번제(燔祭)처럼 다른 어떤 것도 끼어들지 않은 순수성을 말합니다. ➂파괴된 성읍에 소금을 뿌렸던 것(삿 9:45) 혹은 소금기둥이 된 롯의 아내(창 19:26)처럼 영원한 황폐를 상징합니다. ➃‘간직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소금을 먹는다는 것은 ‘우정을 간직한다’는 것이며, 소제(素祭)에 소금을 치는 것은 하나님께서 구속하신다는 ‘영원한 소금 언약’을 의미했습니다(레 2:13; 민 18:19).

성경에서의 빛은 거룩한 것이며 하나님께 대한 자연의 상징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빛을 창조하셨고(창 1:30) 시편 104:2절에는 “주께서 옷을 입음 같이 빛을 이브시며”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시편 36:9절에서는 하나님의 빛을 생명의 원천으로 표현했습니다. 신약성경에서의 빛은 죄악과 거짓을 나타내는 어두움과 대조되어 있습니다. 요한일서 1:5절에는, “하나님은 빛이시라.”고 했고, 야고보서 1:17절에는 하나님을 “빛들의 아버지”라고 표현했습니다. 즉 빛은 어두움과 대조되면서 어두움을 밝히는 역할을 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의미합니다. 어두움을 밝힌다는 것은 어두움의 세력을 무너뜨리고 빛의 세계를 구축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고 새로운 법을 세우는 것이 아님을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율법과 다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 율법사들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가르침이 잘못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장로들의 가르침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법을 바르게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이 법이 산상수훈인 마태복음 5-7장의 내용들입니다. 그리고 이 법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 소금과 빛인 그리스도인입니다. 즉 산상수훈은 철저하게 생활 속의 신앙을 말씀합니다. 이 산상수훈은 그리스도인들의 생활 속에서 나타나야 하는 하나님의 법입니다.

※ 어떻게 신앙과 생활을 조화시킬 수 있습니까?

본문 13절에서 “너희는”이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는 어느 특정한 부류를 지목하는 것입니다. 특정한 부류가 누구인지는 다음의 말씀들을 볼 때에 바로 ‘그리스도인’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인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소금’이니, ‘빛’이니 하는 비유적인 표현들은 ‘그리스도인’을 지칭하며, 부연되는 소금과 빛의 역할은 그리스도인이 나타내야 할 ‘신분적인 일들’을 의미합니다. 결국 소금과 빛으로서 신앙과 생활에 대한 조화가 16절에 나타납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에서 현실적인 주제를 하나 뽑아낸다면, ‘너희 삶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라.’는 것입니다.

인터넷 뉴스사이트 가운데 ‘뉴스엔조이(newsnjoy)’라는 곳이 있습니다. 기독교 언론계 기자들이 만드는 인터넷 신문입니다. 이들은 한국 교회의 새로운 갱신을 목표로 삼고 있는 젊은 기자들입니다. 얼마 전에 ‘현재 한국 개신교의 위기’라는 분석 자료를 실었습니다.
개신교가 불교 신도보다 통계상 숫자는 많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근래에는 ‘개종자가 많다.’는 통계가 오르고 있습니다. 즉 기독교에 들어왔다가 다른 종교로 빠져나가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 말입니다. 결국 교회에 다니다가 교회에 실망하는 숫자가 많아지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이는 교회공동체가 신분적으로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반발심도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흔히 외국에서 한국 교회를 볼 때 두 가지에 놀란다고 합니다. 한국 교회의 엄청난 숫자와 급성장에 놀라고, 그 사회적 무책임함에 또 한 번 놀란다고 합니다.

결국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기고 있다는 말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산다.’는 말은 세상적인 표현으로는 ‘환심을 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교회는 엉뚱한 방법으로 사람들의 환심을 사려고 해왔습니다. 같은 지체가 된 교회들이 서로 헐뜯고 비방하고, 물질공세로 교인 뺏기에 열을 올립니다. 이러한 방법은 사람의 마음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라고 하십니다. 즉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세상 사람들 앞에서 밝은 빛으로 나타나게 하라.’고 하시는 주님의 요청이십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다운 행실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이 땅에 왜 필요한가를 진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교회공동체에 요청하시는 것과 세상 사람들이 우리에게 기대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기억하면서 삶의 방향을 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세상의 빛”,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십니다. 세상을 비추지 않는 빛은 더 이상 의미가 없습니다. 세상에 맛을 주고, 세상을 신선하게 지키지 못하는 소금은 더 이상 소금이 아닙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실제적인 신앙, 생활 속의 신앙을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말 그대로 그리스도께 소유된 사람들이며, 세상에서 그리스도처럼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말하는 말 한마다 한마디조차 얼마나 중요한지 아십니까? 마태복음 12:36절을 봅시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라고 하시며, 에베소서 4:29절에서는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고 하십니다.

시카고 로욜라 대학교의 ‘프레드 브라이언트’ 교수는 심리적 건강에 대한 실험을 했습니다. 실험 대상자들을 세 그룹으로 나누고 매일 20분씩 일주일간 산책을 하게 했습니다. 첫 번째 그룹에게는 어떤 물체든, 지나가는 사람이든 관계없이 가슴 벅찬 대상으로 주목하라고 했고, 두 번째 그룹은 낙서, 쓰레기, 찌푸린 얼굴같이 부정적인 대상을 주목하라고 했고, 세 번째 그룹은 별 생각 없이 그냥 운동 삼아 걸으라고 했습니다.
일주일이 지난 후 웰빙 지수를 평가 했습니다. 첫 번째 그룹은 실험 전 보다 행복감을 느꼈고, 두 번째 그룹은 실험 전 보다 덜 행복감을 느꼈으며, 세 번째 그룹은 변한 것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지난 5월 서울 성수 고등학교의 권정은 선생님이 특별한 실험을 했습니다. 말(言)의 힘에 대한 실험을 하기 위하여 2개의 유리병으로 실험을 했습니다. 첫 번째 유리병에는 '감사합니다.'를 쓰고 다른 병에는 '짜증나'를 써 놓았습니다. 이 두 병을 교실 뒤에 놓고 학생들이 지나다닐 때 마다 ‘감사합니다.’라는 병에는 '고마워' '사랑해' '감사해' 라고 긍정적인 말을 하게 하고, ‘짜증나’ 병에는 '미워' '싫어' '짜증나' 등의 부정적인 말을 하게 했습니다.
3주 후에 실험의 결과를 보기 위해 병을 열었는데, 선생님도 학생들도 모두 놀랐습니다. '감사합니다.' 병에는 구수한 냄새가 나는 ‘누룩 곰팡이’가 가득했고, '짜증나' 병에는 숨이 막힐 정도로 지독한 냄새가 나는 ‘시커먼 곰팡이’가 가득했습니다.

이 실험이 말하는 것은 사람들의 작은 생활 하나하나의 중요성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 속에서 실현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중세의 수도원이나 지금의 기도원 같은 세상과 동떨어진 곳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이 북적대는 삶의 현장 한가운데 오셨습니다. 요한복음 3:16절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고 하십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면서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우리는 세상에서 사는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법을 실현하고 사랑을 나타내야 합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들이 모이기를 힘쓰고, 우리들 가운데서 사랑을 실현해야 합니다. 그래야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위하여 자신을 주셨습니다. 이 큰 은혜를 우리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순간에 예수님께서 내 속에 들어오셔서 주인이 되셨습니다. 이제는 주님이 나의 주인이 되시도록 합시다. 나의 모든 생활 속에서 주님이 주인이 되셔서 내가 주님의 일을 하는 주님의 일군이 됩시다. 이러한 삶을 산다면 언제 주님이 다시 오셔도, 언제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도 부끄럽지 않는 삶이 될 것입니다. 우리 대복교회가 이렇게 이 시대에 하나님의 법에 깨어 있는 바른 신앙으로 하나님의 기쁨이 되게 합시다. 갈라디아서 2:20절을 함께 읽고 마치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 은혜가 모두에게 충만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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