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음의 행복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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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1-10-12 16:52
*** 한마음의 행복 / 로마서 15:1-7
** 들어가는 말
로마서 15:1-7, “1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2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3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4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5 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6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7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영국의 만화가인 ‘막스 비어봄(Henry Maximilian Beerbohm)’이 쓴 ‘행복한 위선자(The Happy Hypocrite, 1897년)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소설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사랑을 모르고 부도덕하기만 한 귀족 출신의 '로드 헬'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험악한 얼굴에 인간미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데다가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생활도 아주 엉망이어서 항상 사람들 사이에서 분란을 일으키며 방탕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는 아름답고 순결한 여인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온갖 사랑스런 말로 청혼을 했지만 그녀에게서 돌아온 것은 싸늘한 거절뿐이었습니다.
\"그 마음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당신처럼 험악하게 생긴 사람의 아내가 될 수는 없습니다.\"
사내는. 어떻게든 그녀를 붙잡으려고 궁리에 궁리를 거듭했습니다. 그러던 중 한 가지 묘안이 떠올랐다. 무도회 같은 데서 흔히 사용하는 가면을 이용하기로 한 것입니다. 사내는 비싼 값을 치르고 인자하게 생긴 얼굴의 가면을 쓰고 다시 청혼을 했습니다. 달콤한 사랑의 밀어와 인자한 모습에 감동한 여자는 청혼을 받아들여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원하던 신부를 얻게 된 사내는 신부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 열심히 일했고, \"사랑한다.\"는 말을 아끼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던 어느 날,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그 손님은 사내의 험악한 얼굴과 방탕했던 과거의 일들을 낱낱이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때마침 그 사내는 편안히 낮잠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손님은 \"잘 됐다\"고 생각하고는 사내의 과거를 그 아내에게 폭로했습니다. 손님의 말을 듣고는 아내는 심한 갈등에 빠졌습니다. 그의 말은 도저히 믿기 힘들었지만 사실을 확인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잠든 남편의 얼굴에서 가면을 벗겼습니다. 순간 남편의 과거를 폭로했던 손님의 얼굴에는 놀라움이 가득 찼습니다. 왜냐하면 가면 속의 얼굴은 험악하고 비열한 사내의 얼굴이 아니라, 그가 쓰고 있던 가면의 얼굴보다 더 인자하고 푸근하게 변해 있었던 것입니다.
이 풍자적인 이야기는 ‘진실한 사랑이 사람의 모습까지도 변하게 한다.’는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비슷한 이야기로 미국의 작가 “나다나엘 호손(nathaniel hawthorne)”의 ‘큰 바위 얼굴’이란 작품도 있습니다. 쉬운 예로, ‘부부는 서로 닮는다.’고 했습니다. 즉 오래도록 서로를 보고 함께 살게 되면 모습까지도 닮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닮게 되는 원리도 그렇습니다. 항상 예수님을 생각하며 그분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순종하고 실천하다보면 모습도 삶도 예수님을 닮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안디옥의 초대교회 성도들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칭을 얻은 것이 그러합니다. 사도행전 11:26절에서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의 사람’을 뜻하며, 쉽게 ‘예수님을 닮은 사람, 예수님처럼 사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서로가 닮아가는 것은 한마음, 한 뜻으로 한 곳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가정이나 직장이나 교회 등. 모든 공동체가 한마음이 된다면 기쁨과 평안과 행복으로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 먼저, 본문말씀을 살펴봅시다.
로마서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에서의 의의 중요성’이라는 중요한 신학적 교리를 다루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인간이 의롭지 못하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의로워 질 수 있을까?” 라는 문제를 풀어갑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된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특히 후반부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게 된 그리스도인들의 실제적인 생활’을 강조합니다. 그 중에서 본문말씀은 마지막 부분으로써 ‘교회 안에서 성도 서로 간에 한마음 한 뜻을 이루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권면합니다. 본문 5-6절에서 “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고 하십니다.
한마음, 한 뜻, 이는 성도가 하나를 이루라는 말씀입니다. ‘하나 됨’이라는 말은 우리가 잘 아는 “샬롬”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평화’, ‘화목’, ‘하나 됨’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 됨이 중요한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도록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내용인 요한복음 17장에서 ‘삼위 하나님이 하나를 이루시듯이, 성도들이 하나를 이루어, 하나님과 성도 모두가 하나를 이루도록’ 간구하십니다. 21절에서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라고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를 이룰 때 진정한 평화와 기쁨과 행복도 이루는 것입니다. 지금 이 혼란스럽고 이기적인 세상에서 하나를 이루는 것은 너무도 중요합니다. 가정이 한마음이 되어야 하고, 교회가 한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한마음 한 뜻이 될 때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게 됩니다.
※ 어떻게 한마음을 이루어 가야합니까?
사실 많은 사람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정말 힘들고 어렵습니다. 비록 성도들이라고 할지라도 자라온 환경이 다르고, 지금의 가정과 직장과 사업과 여러 가지 환경과 여건이 다른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입니다. 이들이 한마음이 되려면 뜻이 같아야 하고, 서로를 배려하고, 관용하고,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그래서 본문 1-2절에서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고 하셨고, 7절에서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고 하십니다.
합창단에는 성악가들을 잘 기용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악가들은 자신만의 독특한 음색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훌륭한 합창은 단원들이 자신의 소리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소리를 들어가면서 화합된 소리를 낼 때 가능합니다. 어느 한 파트가 수가 많다고 강한 소리를 내면 화음이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약한 파트를 배려해 가면서 소리의 조화를 이루어야 훌륭한 합창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공동체도 마치 많은 종류의 악기들이 모인 오케스트라나 혹은 개성 있는 사람들이 모인 합창단과 같습니다. 여기에는 필요 없는 존재란 없습니다. 모두가 서로를 배려하면서 화합을 이루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될 수가 있습니다. 본문 5-6절을 다시 봅시다. “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쉽게 풀이하면,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추구하는 뜻이 같고, 마음이 하나가 되고, 말까지도 하나가 되어야 한다. 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세상의 피조물 중에서 특별히 구별된 위대한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이 공동체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찬양하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한마음 한 뜻으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본문에서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하나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합니다. 그 방법은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을 있는 그대로 서로 받는 것입니다. 본문 1,2절에서,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연약한 자”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성숙이 부족한 성도’를 말하며, “강한 자”란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는 믿음이 강한 성도’를 의미합니다. 즉 믿음이 강한 성도가 아직은 영적으로 미숙하여 신앙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성도들의 약점을 끈기 있게 참고 견디며 이끌어주어야 함을 말합니다. 왜 이렇게 해야 합니까? 그 이유를 7절에서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즉 예수님께서 나에게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로 죽었던 나를 살려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 받을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서로를 판단하고 헤아리면서 편을 가르고 멀리합니다.
지난 노회 때에 일본에서 사역하시는 선교사님이 보고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 보고 중에서 일본 교회의 나쁜 특징이 ‘성도가 잘못하거나 죄를 지으면 권면하고 용서하고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 추방시켜버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정신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8:23-35절에서 “무자비한 종의 비유”로 가르치신 이유가 이것 때문입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종이 주인으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아 그 엄청난 빚을 탕감 받았습니다. 그런데 자신은 백 데나리온을 빚진 친구를 만나 빚을 갚지 않는다고 감옥에 넣어버렸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한동안 미국에서 크리스천 청소년들 간에 WWJD라는 팔찌가 유행했다고 합니다. WWJD란 “What Would Jesus Do”의 첫 글자를 딴 것입니다. 모든 일에 있어서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묻고 실천하자는 신앙의 운동이었습니다. 이 운동의 시작은 ‘찰스 쉘돈’(Chrales M. Sheldon)이 1896년에 쓴 소설인 “그의 발자취를 따라서(In His Steps)”라는 책이 출판되면서 부터였습니다. 찰스 쉘돈은 미국 켄사스 주에서 목회하던 젊은 목사였습니다. 그가 우연한 일이 계기가 되어 쓴 이 소설은 미국에서만 삼천만부 이상이 팔렸다고 합니다.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도 “Jesus is Here\"(예수라면 어떻게 하실까?) 라는 책으로 소개가 되었습니다.
이 책과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믿음교회 목사였던 ‘후안 카를로스 오르티즈’가 쓴 “제자입니까?”라는 책이 불씨가 되어 한국교회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던 적이 있었습니다.
‘예수라면 어떻게 하실까?’ 라는 책을 쓰게 된 동기는 이렇습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맥스웰’이라고 하는 목사입니다. 어느 금요일 아침에 맥스웰 목사는 그 주일 설교를 준비하느라고 매우 분주했습니다. 그날따라 설교 준비가 잘되지 않아서 아내에게 누가 찾아오든지 내가 방해 받지 않게 해 달라고 단단히 일러두었습니다. 그의 설교 본문은 베드로전서 2:21절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하셨느니라.”는 말씀이었습니다. 한참 설교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을 때 초인종 소리가 울리고 누군가가 찾아 왔습니다. 맥스웰 목사는 얼굴을 찌푸리면서 할 수 없다는 듯이 문을 열어봤더니 옷차림이 초라한 한 사나이가 서 있었습니다.
“목사님, 저는 직장을 잃었습니다. 목사님에게 오면 무슨 수가 있을 것 같아서 이렇게 찾아 왔습니다.”
“참 안됐습니다만 저도 어쩔 수가 없군요. 요즘은 하도 일자리가 귀해서…”
맥스웰 목사는 이렇게 말꼬리를 흐리면서 말했습니다.
“아무 도움을 드리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저는 지금 아주 바쁘거든요. 우리 집에도 마땅한 일감이 없고… 어디 다른 곳에 가서 알아보세요.”
맥스웰 목사가 문을 닫자 그 사나이는 힘없이 돌아섰습니다. 맥스웰 목사는 창밖으로 그 사나이의 모습에서 뭔가 마음이 찔렸습니다. 그렇지만 맥스웰 목사는 다시 책상에 앉아 설교 준비를 계속했습니다. 그리고 주일이 되었습니다.
예배가 시작되기 전에 독창이 있었습니다. “주의 인도하심 따라 주의 인도하심 따라 어디든지 주를 따라 주와 함께 가려네.” 교인들은 그녀의 아름다운 독창에 감동했습니다. 그리고 맥스웰 목사의 설교가 시작되었습니다. 젊은 맥스웰 목사는 그날따라 열정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에 대해서 설교했습니다. 교인들은 그의 설교에 만족했습니다. 막 설교를 마칠 무렵에 갑자기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너무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어서 누가 말릴 틈도 없었습니다. 한 사나이가 예배당으로 뛰어든 것입니다. 모두 어안이 벙벙해 있는 틈에 이 사나이는 강대상 앞에까지 뚜벅뚜벅 걸어 나갔습니다.
“이 예배가 끝나기 전에 꼭 한 말씀드리고 싶어서 이렇게 나왔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이런 자리를 빌어서 한 말씀 드렸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면서 이 세상을 하직하려고 합니다.”
맥스웰 목사가 이 사나이의 옆모습을 자세히 보았더니 바로 지난 금요일에 자기를 찾아왔던 그 사람이었습니다. 신기한 것은 이 사나이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전혀 그 음성이 흥분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전적이지도 않았습니다.
“저는 10개월 전에 직장을 잃었습니다. 저는 숙련된 인쇄 식자공이었습니다만 새로 나온 기계 덕분에 그만 직장을 잃어 버렸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 일 밖에 없어서 그동안 일자리를 찾아 전국을 돌아다녔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목사님은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을 때 과연 예수님께서 뜻한 바가 무엇이었을까요?’라고 여러분에게 물으셨습니다. 목사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지요?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야 하며 그 발자취란 순종, 믿음, 사랑, 그리고 모방(模倣, imitation)이라고요. 하지만 목사님께서는 예수님을 따르는 진짜 의미를 말씀하지 않으시더군요. 특히 모방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이 도시를 사흘 동안이나 샅샅이 헤매면서 일자리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그동안 저에게 동정이나 위로의 말씀이라도 주신 분은 여기 계신 목사님 한분 밖에 없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미안하다고 하시면서 어디 다른데 가서 일자리를 찾아보는 것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저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주님의 발자취를 따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라는 것입니다. 지금 이 나라에는 여러분처럼 이렇게 교회도 나올 수 없는 나처럼 일자리를 잃고 아내와 아이들이 셋방에서 죽어가는 수백만 명의 실직자들이 있습니다.”
여기까지 말한 이 사나이는 갑자기 현기증이 나는지 비틀거리더니 그만 통로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날 예배는 그렇게 소란스럽게 끝났고, 그리고 병원으로 옮긴 그 사나이는 사흘 만에 죽었습니다.
‘예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책은 이 사나이의 사건이 주는 충격적인 여파(餘波)를 쓴 것입니다. \"Jesus is Here!\" 그렇습니다. ‘주님이 지금 여기(내 삶의 자리)에 계신다.’는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하나를 이루기에 훨씬 쉬울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한마음을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을 미리 준비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일을 연습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 서로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관용하고, 배려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여서 마음과 뜻을 하나로 모읍시다. 그리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에 이를 때까지 이 땅에서도 예수님 안에서 한마음 한 뜻으로 하나를 이루어 사랑과 기쁨과 행복을 함께 누릴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 들어가는 말
로마서 15:1-7, “1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2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3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4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5 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6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7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영국의 만화가인 ‘막스 비어봄(Henry Maximilian Beerbohm)’이 쓴 ‘행복한 위선자(The Happy Hypocrite, 1897년)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소설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사랑을 모르고 부도덕하기만 한 귀족 출신의 '로드 헬'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험악한 얼굴에 인간미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데다가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생활도 아주 엉망이어서 항상 사람들 사이에서 분란을 일으키며 방탕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는 아름답고 순결한 여인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온갖 사랑스런 말로 청혼을 했지만 그녀에게서 돌아온 것은 싸늘한 거절뿐이었습니다.
\"그 마음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당신처럼 험악하게 생긴 사람의 아내가 될 수는 없습니다.\"
사내는. 어떻게든 그녀를 붙잡으려고 궁리에 궁리를 거듭했습니다. 그러던 중 한 가지 묘안이 떠올랐다. 무도회 같은 데서 흔히 사용하는 가면을 이용하기로 한 것입니다. 사내는 비싼 값을 치르고 인자하게 생긴 얼굴의 가면을 쓰고 다시 청혼을 했습니다. 달콤한 사랑의 밀어와 인자한 모습에 감동한 여자는 청혼을 받아들여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원하던 신부를 얻게 된 사내는 신부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 열심히 일했고, \"사랑한다.\"는 말을 아끼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던 어느 날,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그 손님은 사내의 험악한 얼굴과 방탕했던 과거의 일들을 낱낱이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때마침 그 사내는 편안히 낮잠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손님은 \"잘 됐다\"고 생각하고는 사내의 과거를 그 아내에게 폭로했습니다. 손님의 말을 듣고는 아내는 심한 갈등에 빠졌습니다. 그의 말은 도저히 믿기 힘들었지만 사실을 확인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잠든 남편의 얼굴에서 가면을 벗겼습니다. 순간 남편의 과거를 폭로했던 손님의 얼굴에는 놀라움이 가득 찼습니다. 왜냐하면 가면 속의 얼굴은 험악하고 비열한 사내의 얼굴이 아니라, 그가 쓰고 있던 가면의 얼굴보다 더 인자하고 푸근하게 변해 있었던 것입니다.
이 풍자적인 이야기는 ‘진실한 사랑이 사람의 모습까지도 변하게 한다.’는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비슷한 이야기로 미국의 작가 “나다나엘 호손(nathaniel hawthorne)”의 ‘큰 바위 얼굴’이란 작품도 있습니다. 쉬운 예로, ‘부부는 서로 닮는다.’고 했습니다. 즉 오래도록 서로를 보고 함께 살게 되면 모습까지도 닮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닮게 되는 원리도 그렇습니다. 항상 예수님을 생각하며 그분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순종하고 실천하다보면 모습도 삶도 예수님을 닮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안디옥의 초대교회 성도들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칭을 얻은 것이 그러합니다. 사도행전 11:26절에서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의 사람’을 뜻하며, 쉽게 ‘예수님을 닮은 사람, 예수님처럼 사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서로가 닮아가는 것은 한마음, 한 뜻으로 한 곳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가정이나 직장이나 교회 등. 모든 공동체가 한마음이 된다면 기쁨과 평안과 행복으로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 먼저, 본문말씀을 살펴봅시다.
로마서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에서의 의의 중요성’이라는 중요한 신학적 교리를 다루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인간이 의롭지 못하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의로워 질 수 있을까?” 라는 문제를 풀어갑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된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특히 후반부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게 된 그리스도인들의 실제적인 생활’을 강조합니다. 그 중에서 본문말씀은 마지막 부분으로써 ‘교회 안에서 성도 서로 간에 한마음 한 뜻을 이루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권면합니다. 본문 5-6절에서 “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고 하십니다.
한마음, 한 뜻, 이는 성도가 하나를 이루라는 말씀입니다. ‘하나 됨’이라는 말은 우리가 잘 아는 “샬롬”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평화’, ‘화목’, ‘하나 됨’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 됨이 중요한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도록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내용인 요한복음 17장에서 ‘삼위 하나님이 하나를 이루시듯이, 성도들이 하나를 이루어, 하나님과 성도 모두가 하나를 이루도록’ 간구하십니다. 21절에서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라고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를 이룰 때 진정한 평화와 기쁨과 행복도 이루는 것입니다. 지금 이 혼란스럽고 이기적인 세상에서 하나를 이루는 것은 너무도 중요합니다. 가정이 한마음이 되어야 하고, 교회가 한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한마음 한 뜻이 될 때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게 됩니다.
※ 어떻게 한마음을 이루어 가야합니까?
사실 많은 사람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정말 힘들고 어렵습니다. 비록 성도들이라고 할지라도 자라온 환경이 다르고, 지금의 가정과 직장과 사업과 여러 가지 환경과 여건이 다른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입니다. 이들이 한마음이 되려면 뜻이 같아야 하고, 서로를 배려하고, 관용하고,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그래서 본문 1-2절에서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고 하셨고, 7절에서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고 하십니다.
합창단에는 성악가들을 잘 기용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악가들은 자신만의 독특한 음색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훌륭한 합창은 단원들이 자신의 소리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소리를 들어가면서 화합된 소리를 낼 때 가능합니다. 어느 한 파트가 수가 많다고 강한 소리를 내면 화음이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약한 파트를 배려해 가면서 소리의 조화를 이루어야 훌륭한 합창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공동체도 마치 많은 종류의 악기들이 모인 오케스트라나 혹은 개성 있는 사람들이 모인 합창단과 같습니다. 여기에는 필요 없는 존재란 없습니다. 모두가 서로를 배려하면서 화합을 이루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될 수가 있습니다. 본문 5-6절을 다시 봅시다. “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쉽게 풀이하면,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추구하는 뜻이 같고, 마음이 하나가 되고, 말까지도 하나가 되어야 한다. 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세상의 피조물 중에서 특별히 구별된 위대한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이 공동체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찬양하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한마음 한 뜻으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본문에서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하나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합니다. 그 방법은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을 있는 그대로 서로 받는 것입니다. 본문 1,2절에서,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연약한 자”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성숙이 부족한 성도’를 말하며, “강한 자”란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는 믿음이 강한 성도’를 의미합니다. 즉 믿음이 강한 성도가 아직은 영적으로 미숙하여 신앙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성도들의 약점을 끈기 있게 참고 견디며 이끌어주어야 함을 말합니다. 왜 이렇게 해야 합니까? 그 이유를 7절에서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즉 예수님께서 나에게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로 죽었던 나를 살려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 받을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서로를 판단하고 헤아리면서 편을 가르고 멀리합니다.
지난 노회 때에 일본에서 사역하시는 선교사님이 보고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 보고 중에서 일본 교회의 나쁜 특징이 ‘성도가 잘못하거나 죄를 지으면 권면하고 용서하고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 추방시켜버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정신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8:23-35절에서 “무자비한 종의 비유”로 가르치신 이유가 이것 때문입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종이 주인으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아 그 엄청난 빚을 탕감 받았습니다. 그런데 자신은 백 데나리온을 빚진 친구를 만나 빚을 갚지 않는다고 감옥에 넣어버렸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한동안 미국에서 크리스천 청소년들 간에 WWJD라는 팔찌가 유행했다고 합니다. WWJD란 “What Would Jesus Do”의 첫 글자를 딴 것입니다. 모든 일에 있어서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묻고 실천하자는 신앙의 운동이었습니다. 이 운동의 시작은 ‘찰스 쉘돈’(Chrales M. Sheldon)이 1896년에 쓴 소설인 “그의 발자취를 따라서(In His Steps)”라는 책이 출판되면서 부터였습니다. 찰스 쉘돈은 미국 켄사스 주에서 목회하던 젊은 목사였습니다. 그가 우연한 일이 계기가 되어 쓴 이 소설은 미국에서만 삼천만부 이상이 팔렸다고 합니다.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도 “Jesus is Here\"(예수라면 어떻게 하실까?) 라는 책으로 소개가 되었습니다.
이 책과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믿음교회 목사였던 ‘후안 카를로스 오르티즈’가 쓴 “제자입니까?”라는 책이 불씨가 되어 한국교회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던 적이 있었습니다.
‘예수라면 어떻게 하실까?’ 라는 책을 쓰게 된 동기는 이렇습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맥스웰’이라고 하는 목사입니다. 어느 금요일 아침에 맥스웰 목사는 그 주일 설교를 준비하느라고 매우 분주했습니다. 그날따라 설교 준비가 잘되지 않아서 아내에게 누가 찾아오든지 내가 방해 받지 않게 해 달라고 단단히 일러두었습니다. 그의 설교 본문은 베드로전서 2:21절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하셨느니라.”는 말씀이었습니다. 한참 설교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을 때 초인종 소리가 울리고 누군가가 찾아 왔습니다. 맥스웰 목사는 얼굴을 찌푸리면서 할 수 없다는 듯이 문을 열어봤더니 옷차림이 초라한 한 사나이가 서 있었습니다.
“목사님, 저는 직장을 잃었습니다. 목사님에게 오면 무슨 수가 있을 것 같아서 이렇게 찾아 왔습니다.”
“참 안됐습니다만 저도 어쩔 수가 없군요. 요즘은 하도 일자리가 귀해서…”
맥스웰 목사는 이렇게 말꼬리를 흐리면서 말했습니다.
“아무 도움을 드리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저는 지금 아주 바쁘거든요. 우리 집에도 마땅한 일감이 없고… 어디 다른 곳에 가서 알아보세요.”
맥스웰 목사가 문을 닫자 그 사나이는 힘없이 돌아섰습니다. 맥스웰 목사는 창밖으로 그 사나이의 모습에서 뭔가 마음이 찔렸습니다. 그렇지만 맥스웰 목사는 다시 책상에 앉아 설교 준비를 계속했습니다. 그리고 주일이 되었습니다.
예배가 시작되기 전에 독창이 있었습니다. “주의 인도하심 따라 주의 인도하심 따라 어디든지 주를 따라 주와 함께 가려네.” 교인들은 그녀의 아름다운 독창에 감동했습니다. 그리고 맥스웰 목사의 설교가 시작되었습니다. 젊은 맥스웰 목사는 그날따라 열정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에 대해서 설교했습니다. 교인들은 그의 설교에 만족했습니다. 막 설교를 마칠 무렵에 갑자기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너무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어서 누가 말릴 틈도 없었습니다. 한 사나이가 예배당으로 뛰어든 것입니다. 모두 어안이 벙벙해 있는 틈에 이 사나이는 강대상 앞에까지 뚜벅뚜벅 걸어 나갔습니다.
“이 예배가 끝나기 전에 꼭 한 말씀드리고 싶어서 이렇게 나왔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이런 자리를 빌어서 한 말씀 드렸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면서 이 세상을 하직하려고 합니다.”
맥스웰 목사가 이 사나이의 옆모습을 자세히 보았더니 바로 지난 금요일에 자기를 찾아왔던 그 사람이었습니다. 신기한 것은 이 사나이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전혀 그 음성이 흥분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전적이지도 않았습니다.
“저는 10개월 전에 직장을 잃었습니다. 저는 숙련된 인쇄 식자공이었습니다만 새로 나온 기계 덕분에 그만 직장을 잃어 버렸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 일 밖에 없어서 그동안 일자리를 찾아 전국을 돌아다녔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목사님은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을 때 과연 예수님께서 뜻한 바가 무엇이었을까요?’라고 여러분에게 물으셨습니다. 목사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지요?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야 하며 그 발자취란 순종, 믿음, 사랑, 그리고 모방(模倣, imitation)이라고요. 하지만 목사님께서는 예수님을 따르는 진짜 의미를 말씀하지 않으시더군요. 특히 모방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이 도시를 사흘 동안이나 샅샅이 헤매면서 일자리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그동안 저에게 동정이나 위로의 말씀이라도 주신 분은 여기 계신 목사님 한분 밖에 없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미안하다고 하시면서 어디 다른데 가서 일자리를 찾아보는 것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저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주님의 발자취를 따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라는 것입니다. 지금 이 나라에는 여러분처럼 이렇게 교회도 나올 수 없는 나처럼 일자리를 잃고 아내와 아이들이 셋방에서 죽어가는 수백만 명의 실직자들이 있습니다.”
여기까지 말한 이 사나이는 갑자기 현기증이 나는지 비틀거리더니 그만 통로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날 예배는 그렇게 소란스럽게 끝났고, 그리고 병원으로 옮긴 그 사나이는 사흘 만에 죽었습니다.
‘예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책은 이 사나이의 사건이 주는 충격적인 여파(餘波)를 쓴 것입니다. \"Jesus is Here!\" 그렇습니다. ‘주님이 지금 여기(내 삶의 자리)에 계신다.’는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하나를 이루기에 훨씬 쉬울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한마음을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을 미리 준비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일을 연습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 서로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관용하고, 배려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여서 마음과 뜻을 하나로 모읍시다. 그리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에 이를 때까지 이 땅에서도 예수님 안에서 한마음 한 뜻으로 하나를 이루어 사랑과 기쁨과 행복을 함께 누릴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