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 것을 선택하는 용기와 지혜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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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1-09-23 13:15
*** 바른 것을 선택하는 용기와 지혜 / 히 11:23-26
** 들어가는 말
히브리서 11;23-26, “23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아니하였으며 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우리는 매일 매순간을 선택과 결단이라는 과정을 반복합니다. 크고 작은 일 혹은 중요하거나 일상적이거나 구별 없이 모든 일을 선택하고 결정하게 됩니다. ‘Decision Pyramid’라는 학설에서는 인간의 선택을 중요도에 따라서 세 가지로 말합니다.
첫째는 Ordinary everyday decision인데, ‘일상적 결단’이라는 뜻입니다. 오늘 무슨 옷을 입고 갈까? 무슨 음식을 먹을까? 누구를 만날까? 교회에 가야하나 결혼식에 가야하나? 버스를 탈까? 지하철을 탈까? 등등. 매일의 일상생활에서의 선택과 결단이 있습니다.
두 번째는 Middle level decision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어느 정도 중요한 결단’을 말합니다. 전공과목은 뭘 택해야 하나? 나는 한평생을 무엇으로 기여하면서 살 것인가? 누구와 결혼할까? 어떤 직업을 택할까? 등등. 자신의 평생을 좌우할 수 있는 중요한 선택과 결단이 있습니다.
세 번째는 Real important decision이라고 하는데, ‘결정적인 결단’을 말합니다. 이것은 삶과 죽음에 대한 결단입니다. 공동체가 위기에 처했을 때 생명을 건 선택을 하는 것, 순교자의 삶, 희생적인 삶 등. 자신의 생명과 직결된 선택과 결단이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중요도에 차이는 있지만 매일 매순간을 선택과 결단으로 자신의 삶을 만들어갑니다. 지금 여러분들도 이 자리에 오기까지 선택과 결단의 시간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선택과 결단의 삶은 인간의 자유의지의 산물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이 선택한 결과에 따라서 책임을 져야 하는 것입니다. 에스겔 16:59절에서 “나 주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네가 맹세를 멸시하여 언약을 배반하였은즉 내가 네 행한 대로 네게 행하리라.”고 하시며, 마태복음 16:27절에서는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일상생활의 선택이든지 생명을 건 중요한 선택이든지 그 모든 선택과 결단은 자신이 해야 하며, 그 결과에 대한 책임도 자신에게 있습니다.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삶에 대한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에 더욱 신중하게 바른 것을 선택하는 용기와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 먼저 본문의 내용을 살펴봅시다.
본문을 포함하는 히브리서 11장에는 용기와 지혜와 믿음이 돋보이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특히 모세의 부모와 모세가 그러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들이 행한 일들이 위대한 용기와 지혜로운 선택이었음을 강조합니다. 본문의 내용은 모세의 120년의 생애 중에서 중요한 두 번의 선택의 순간을 기록했습니다. 첫 번째 선택은 모세의 부모의 선택이었습니다. 모세가 태어날 무렵에는 애굽 왕 바로에 의하여 ‘유대인이 자식을 출산할 때에는 아들이면 반드시 죽이라.’는 명령이 하달되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급격히 번성하자 애굽인들이 상대적으로 위기감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모세의 부모는 모세가 태어나자 출중한 인물인 것을 알았습니다. 죽일 수가 없어서 석 달 동안을 숨겨서 키웠습니다. 만일 그 사실이 들통 나는 날에는 모세나 모세의 부모마저 생명을 부지하지 못할 일입니다. 그러나 모세의 부모는 바로의 명령을 두려워하지 않고 믿음으로 용기 있는 선택을 했습니다.
두 번째 선택은 모세의 선택입니다. 모세는 석 달 동안 숨겨져서 키워진 후, 더 이상 숨길 수가 없게 되어 부모는 갈대 상자에 아이를 넣어서 나일 강에 띄워 보냈습니다. 마침 강가에서 목욕을 하던 바로의 딸이 모세를 발견하고는 양자로 삼았습니다. 이후 40년 동안을 모세는 애굽 왕궁에서 부러울 것이 없는 왕자로 자라고 생활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자신이 유대인이며 지금 노예로 고통 받는 민족이 자신의 민족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작업 현장을 돌아보고 있을 때, 자신의 동족이 애굽인에게 매를 맞는 광경을 보고는 분개하여 애굽인을 죽여 버렸습니다. 다음 날에는 같은 동족끼리 싸우는 광경을 보았는데, 동족끼리 싸우는 것을 책망하며 말렸습니다. 그러자 싸우던 사람이 “네가 애굽 사람을 죽임같이 나도 죽이려느냐?”고 했습니다. 모세는 자신의 살인행위가 탄로 난 것을 알고는 광야로 도망했습니다. 모세의 이러한 행동을 본문에서는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즉 이러한 모세의 선택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선택이며, 그리스도를 위한 위대한 선택이라고 표현합니다. 모세는 육신을 위한 권력과 평안을 버리고, 고난이 따르지만 하나님의 자녀로의 신분을 선택했습니다.
우리도 모세의 부모나 모세처럼 자신의 삶의 방향을 선택하고 결단해야 합니다. 삶의 방향이 결정되지 않으면 ‘될 대로 되라.’는 ‘자포자기의 인생’이 될 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가치 있는 삶은 바른 것을 선택하는 용기와 지혜가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그저 쉽고 평안한 삶을 원한다면 결코 하나님의 나라를 얻는 위대한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바른 것을 선택하는 용기와 지혜를 발휘할 수 있겠습니까?
※ 자신의 신분을 알아야 바른 것을 선택할 수 가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기도문이 있습니다. 현대신학의 거장인 미국 신학자 ‘라인홀드 니이버’의 기도문입니다. “하나님이여! 나에게, 내가 변화시킬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평정을 주시고, 내 힘으로 고칠 수 있는 일에 대하여는 그것을 고칠 수 있는 용기를 주시며, 그리고 이 두 가지 차이를 깨달아 알 수 있는 지혜를 허락해 주옵소서.”
우리는 생활 가운데서 우리의 한계를 벗어난 일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내가 변화시킬 수도 없고 고칠 수도 없는 일에 대해서 불평하고, 속상해하고 괴로워 하게 됩니다. 니이버는 이러한 일을 평안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영국의 ‘조지 5세’는 “하나님이여, 나로 하여금 달의 세계나 엎질러진 우유에 대해 울지 않도록 가르쳐 주옵소서.” 라는 좌우명을 벽에 걸어놓고 지표로 삼았다고 합니다. 즉 자신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불가항력적인 일에 대해서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순복하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사람은 이렇게 자신의 한계를 알고 순복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며, 용기와 결단을 필요로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지 못하고 고집이나 만용을 부리다가 낭패를 당하는 일이 많습니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순복하는 것은 나약함이나 부끄러운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지혜롭고 용기 있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할 수 있는 것 까지도 환경이나 상황을 탓하며 포기하고 체념하는 것은 결코 용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비겁한 일이고 나약한 태도일 뿐입니다. 그래서 니이버는 “내 힘으로 고칠 수 있는 일에 대해서는 그것을 고칠 수 있는 용기를 주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즉 자신에게 어렵고 힘겨운 상황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고칠 수 있는 일이고, 고처야 하는 일이라면 담대하게 행할 수 있기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결단력을 발휘할 수 있는 힘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모세의 부모는 육체적인 현실은 애굽의 노예 신분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부모인 ‘아므람’과 ‘요게벳’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선민인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현실적으로는 애굽 왕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었습니다. 막강한 권력과 부를 가지고 있는 신분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도 역시 자신이 하나님의 선민인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모세의 부모나 모세처럼 모두 두 종류의 신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세상에서의 신분이며, 다른 하나는 영적인 신분입니다. 세상에서의 신분은 세상에 속한 우리 몸의 신분입니다. 영의 신분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속한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입니다. 갈라디아서 3:28-29절입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고 하십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하나님의 자녀가 우리의 신분입니다. 학교에서 공부를 할 때에든지, 직장이나 사업장에서 일을 할 때에든지, 사람을 만날 때에든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평안할 때나 고통스러울 때, 성공할 때나 실패로 힘들 때나 인생의 위기 때에까지 언제나 자신은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며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처럼 자신의 신분을 아는 것이 바른 것을 선택하는 용기와 지혜가 있게 합니다.
※ 버려야 할 것과 취해야 할 것, 그 시기를 알아야 합니다.
본문 24절에서,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라고 했습니다. 즉 모세는 바로의 공주 아들로서 호화롭게 살며, 부와 권력이 예비 된 자리를 거절했습니다. 사도행전 7:23-25절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한글 킹 제임스) “그가 사십 세 되었을 때, 이스라엘 자손인 그의 형제들을 돌아보고 싶은 마음이 생긴지라. 마침 어떤 사람이 부당하게 취급받는 것을 보고서 그를 보호하고, 압제하는 이집트인에게 보복하여 그를 쳐 죽였더라. 그는 그의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으로 그들을 구원하고자 한 것을 이해하리라고 생각했으나 그들은 이해하지 못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이는 모세의 행동이 의도적인 것이었음을 말합니다. 모세는 자신의 영의 신분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모세가 왕족이라는 신분을 쉽게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현실은 노예라는 최악의 상황입니다. 왕족과 노예는 천지(天地)차이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을 선택했으며,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선택했다고 했습니다. 모세가 현실을 감안하여 적당히 타협만 해도, 그 큰 대국인 애굽의 왕자로서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자기 동족을 위한다 할지라도 좀 더 좋은 기회를 기다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참으로 어리석은 결단이고 선택입니다. 그러나 바른 길을 선택하는 것은 곧 신앙의 용기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모세는 세상에서의 한 순간의 부귀영화보다 하나님의 상급을 소망했던 것입니다. 모세는 버려야 할 것과 취해야 할 것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행동으로 실천해야 할 시기도 알았으며, 가장 적절한 시기에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모세가 행동해야만 하도록 살인이라는 빠져나가지 못할 기회를 만드셨습니다. 아무리 올바른 선택이라 할지라도 시기가 적절하지 않으면 아니함만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본문 25-26절을 봅시다.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모세는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와 즐거움 보다 하나님 나라의 상급을 바라보았다고 했습니다. 이는 보다 더 가치 있고 중요한 것을 아는 지혜를 의미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때를 놓치는 사람입니다. 버려야 할 것을 버리지 못하여 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을 놓치는 사람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을 선택하기 위하여 버려야 할 것을 결단하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에게 보이고 인정받으려고 버려야 할 것을 버리지 못하고, 마땅히 취해야 할 것을 가지지 못하는 사람이 가장 불쌍한 사람입니다.
프랑스에서 ‘태양 왕’ 이라고 불리는 루이14세 때 있었던 실화라고 합니다.
왕은 신앙이 좋지는 않았지만 주일이면 가족들과 왕족들을 거느리고 늘 교회에 출석했습니다. 왕은 프넬론 대주교가 시무하는 교회에 출석했는데, 항상 교회는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만원이었습니다. 대주교는 교인들의 마음을 시험해 볼 생각을 했습니다. 어느 주일에 대주교는 왕이 나간 다음에 조용히 “다음 주일에는 왕이 못 나오십니다.”라고 광고했습니다. 교인들이 정말 예수님을 믿어서 나오는지 왕에게 잘 보이러 오는지 알아보고자 했던 것입니다.
다음 주일에 왕과 왕족들이 교회에 왔는데, 교인들이 하나도 없고 대주교만 있었습니다. 왕이 놀라서 “사람들이 모두 어디에 갔느냐?”라고 물었습니다. 대주교는 “아무래도 교인들이 예배하러 오는 것이 아니라 폐하를 만나러 오는 것 같아서 제가 실험을 해보았습니다. 지난 주일에 조용히 ‘다음 주일은 왕이 못 나오십니다.’라고 했더니 이렇게 됐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의 삶은 이러합니까?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또는 인정받으려고 하는 외식적인 삶은 아닙니까?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을 위하여 잠시 사는 세상의 부귀영화와 즐거움을 거절할 수 있습니까? 지금 혹시 두 신분 사이에서 선택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일은 없습니까? 자신의 신분을 알고, 그 신분에 걸맞은 선택을 하며, 때와 시기를 알아 실천하는 신앙이 가장 귀한 믿음의 삶을 이루게 합니다. 모세처럼 또는 많은 믿음의 선조들처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예수님을 따르는 진실한 삶을 선택하는 용기와 지혜로운 삶을 이루시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히브리서 11;23-26, “23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아니하였으며 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우리는 매일 매순간을 선택과 결단이라는 과정을 반복합니다. 크고 작은 일 혹은 중요하거나 일상적이거나 구별 없이 모든 일을 선택하고 결정하게 됩니다. ‘Decision Pyramid’라는 학설에서는 인간의 선택을 중요도에 따라서 세 가지로 말합니다.
첫째는 Ordinary everyday decision인데, ‘일상적 결단’이라는 뜻입니다. 오늘 무슨 옷을 입고 갈까? 무슨 음식을 먹을까? 누구를 만날까? 교회에 가야하나 결혼식에 가야하나? 버스를 탈까? 지하철을 탈까? 등등. 매일의 일상생활에서의 선택과 결단이 있습니다.
두 번째는 Middle level decision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어느 정도 중요한 결단’을 말합니다. 전공과목은 뭘 택해야 하나? 나는 한평생을 무엇으로 기여하면서 살 것인가? 누구와 결혼할까? 어떤 직업을 택할까? 등등. 자신의 평생을 좌우할 수 있는 중요한 선택과 결단이 있습니다.
세 번째는 Real important decision이라고 하는데, ‘결정적인 결단’을 말합니다. 이것은 삶과 죽음에 대한 결단입니다. 공동체가 위기에 처했을 때 생명을 건 선택을 하는 것, 순교자의 삶, 희생적인 삶 등. 자신의 생명과 직결된 선택과 결단이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중요도에 차이는 있지만 매일 매순간을 선택과 결단으로 자신의 삶을 만들어갑니다. 지금 여러분들도 이 자리에 오기까지 선택과 결단의 시간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선택과 결단의 삶은 인간의 자유의지의 산물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이 선택한 결과에 따라서 책임을 져야 하는 것입니다. 에스겔 16:59절에서 “나 주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네가 맹세를 멸시하여 언약을 배반하였은즉 내가 네 행한 대로 네게 행하리라.”고 하시며, 마태복음 16:27절에서는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일상생활의 선택이든지 생명을 건 중요한 선택이든지 그 모든 선택과 결단은 자신이 해야 하며, 그 결과에 대한 책임도 자신에게 있습니다.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삶에 대한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에 더욱 신중하게 바른 것을 선택하는 용기와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 먼저 본문의 내용을 살펴봅시다.
본문을 포함하는 히브리서 11장에는 용기와 지혜와 믿음이 돋보이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특히 모세의 부모와 모세가 그러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들이 행한 일들이 위대한 용기와 지혜로운 선택이었음을 강조합니다. 본문의 내용은 모세의 120년의 생애 중에서 중요한 두 번의 선택의 순간을 기록했습니다. 첫 번째 선택은 모세의 부모의 선택이었습니다. 모세가 태어날 무렵에는 애굽 왕 바로에 의하여 ‘유대인이 자식을 출산할 때에는 아들이면 반드시 죽이라.’는 명령이 하달되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급격히 번성하자 애굽인들이 상대적으로 위기감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모세의 부모는 모세가 태어나자 출중한 인물인 것을 알았습니다. 죽일 수가 없어서 석 달 동안을 숨겨서 키웠습니다. 만일 그 사실이 들통 나는 날에는 모세나 모세의 부모마저 생명을 부지하지 못할 일입니다. 그러나 모세의 부모는 바로의 명령을 두려워하지 않고 믿음으로 용기 있는 선택을 했습니다.
두 번째 선택은 모세의 선택입니다. 모세는 석 달 동안 숨겨져서 키워진 후, 더 이상 숨길 수가 없게 되어 부모는 갈대 상자에 아이를 넣어서 나일 강에 띄워 보냈습니다. 마침 강가에서 목욕을 하던 바로의 딸이 모세를 발견하고는 양자로 삼았습니다. 이후 40년 동안을 모세는 애굽 왕궁에서 부러울 것이 없는 왕자로 자라고 생활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자신이 유대인이며 지금 노예로 고통 받는 민족이 자신의 민족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작업 현장을 돌아보고 있을 때, 자신의 동족이 애굽인에게 매를 맞는 광경을 보고는 분개하여 애굽인을 죽여 버렸습니다. 다음 날에는 같은 동족끼리 싸우는 광경을 보았는데, 동족끼리 싸우는 것을 책망하며 말렸습니다. 그러자 싸우던 사람이 “네가 애굽 사람을 죽임같이 나도 죽이려느냐?”고 했습니다. 모세는 자신의 살인행위가 탄로 난 것을 알고는 광야로 도망했습니다. 모세의 이러한 행동을 본문에서는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즉 이러한 모세의 선택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선택이며, 그리스도를 위한 위대한 선택이라고 표현합니다. 모세는 육신을 위한 권력과 평안을 버리고, 고난이 따르지만 하나님의 자녀로의 신분을 선택했습니다.
우리도 모세의 부모나 모세처럼 자신의 삶의 방향을 선택하고 결단해야 합니다. 삶의 방향이 결정되지 않으면 ‘될 대로 되라.’는 ‘자포자기의 인생’이 될 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가치 있는 삶은 바른 것을 선택하는 용기와 지혜가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그저 쉽고 평안한 삶을 원한다면 결코 하나님의 나라를 얻는 위대한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바른 것을 선택하는 용기와 지혜를 발휘할 수 있겠습니까?
※ 자신의 신분을 알아야 바른 것을 선택할 수 가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기도문이 있습니다. 현대신학의 거장인 미국 신학자 ‘라인홀드 니이버’의 기도문입니다. “하나님이여! 나에게, 내가 변화시킬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평정을 주시고, 내 힘으로 고칠 수 있는 일에 대하여는 그것을 고칠 수 있는 용기를 주시며, 그리고 이 두 가지 차이를 깨달아 알 수 있는 지혜를 허락해 주옵소서.”
우리는 생활 가운데서 우리의 한계를 벗어난 일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내가 변화시킬 수도 없고 고칠 수도 없는 일에 대해서 불평하고, 속상해하고 괴로워 하게 됩니다. 니이버는 이러한 일을 평안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영국의 ‘조지 5세’는 “하나님이여, 나로 하여금 달의 세계나 엎질러진 우유에 대해 울지 않도록 가르쳐 주옵소서.” 라는 좌우명을 벽에 걸어놓고 지표로 삼았다고 합니다. 즉 자신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불가항력적인 일에 대해서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순복하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사람은 이렇게 자신의 한계를 알고 순복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며, 용기와 결단을 필요로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지 못하고 고집이나 만용을 부리다가 낭패를 당하는 일이 많습니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순복하는 것은 나약함이나 부끄러운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지혜롭고 용기 있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할 수 있는 것 까지도 환경이나 상황을 탓하며 포기하고 체념하는 것은 결코 용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비겁한 일이고 나약한 태도일 뿐입니다. 그래서 니이버는 “내 힘으로 고칠 수 있는 일에 대해서는 그것을 고칠 수 있는 용기를 주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즉 자신에게 어렵고 힘겨운 상황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고칠 수 있는 일이고, 고처야 하는 일이라면 담대하게 행할 수 있기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결단력을 발휘할 수 있는 힘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모세의 부모는 육체적인 현실은 애굽의 노예 신분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부모인 ‘아므람’과 ‘요게벳’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선민인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현실적으로는 애굽 왕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었습니다. 막강한 권력과 부를 가지고 있는 신분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도 역시 자신이 하나님의 선민인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모세의 부모나 모세처럼 모두 두 종류의 신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세상에서의 신분이며, 다른 하나는 영적인 신분입니다. 세상에서의 신분은 세상에 속한 우리 몸의 신분입니다. 영의 신분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속한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입니다. 갈라디아서 3:28-29절입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고 하십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하나님의 자녀가 우리의 신분입니다. 학교에서 공부를 할 때에든지, 직장이나 사업장에서 일을 할 때에든지, 사람을 만날 때에든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평안할 때나 고통스러울 때, 성공할 때나 실패로 힘들 때나 인생의 위기 때에까지 언제나 자신은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며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처럼 자신의 신분을 아는 것이 바른 것을 선택하는 용기와 지혜가 있게 합니다.
※ 버려야 할 것과 취해야 할 것, 그 시기를 알아야 합니다.
본문 24절에서,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라고 했습니다. 즉 모세는 바로의 공주 아들로서 호화롭게 살며, 부와 권력이 예비 된 자리를 거절했습니다. 사도행전 7:23-25절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한글 킹 제임스) “그가 사십 세 되었을 때, 이스라엘 자손인 그의 형제들을 돌아보고 싶은 마음이 생긴지라. 마침 어떤 사람이 부당하게 취급받는 것을 보고서 그를 보호하고, 압제하는 이집트인에게 보복하여 그를 쳐 죽였더라. 그는 그의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으로 그들을 구원하고자 한 것을 이해하리라고 생각했으나 그들은 이해하지 못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이는 모세의 행동이 의도적인 것이었음을 말합니다. 모세는 자신의 영의 신분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모세가 왕족이라는 신분을 쉽게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현실은 노예라는 최악의 상황입니다. 왕족과 노예는 천지(天地)차이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을 선택했으며,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선택했다고 했습니다. 모세가 현실을 감안하여 적당히 타협만 해도, 그 큰 대국인 애굽의 왕자로서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자기 동족을 위한다 할지라도 좀 더 좋은 기회를 기다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참으로 어리석은 결단이고 선택입니다. 그러나 바른 길을 선택하는 것은 곧 신앙의 용기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모세는 세상에서의 한 순간의 부귀영화보다 하나님의 상급을 소망했던 것입니다. 모세는 버려야 할 것과 취해야 할 것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행동으로 실천해야 할 시기도 알았으며, 가장 적절한 시기에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모세가 행동해야만 하도록 살인이라는 빠져나가지 못할 기회를 만드셨습니다. 아무리 올바른 선택이라 할지라도 시기가 적절하지 않으면 아니함만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본문 25-26절을 봅시다.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모세는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와 즐거움 보다 하나님 나라의 상급을 바라보았다고 했습니다. 이는 보다 더 가치 있고 중요한 것을 아는 지혜를 의미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때를 놓치는 사람입니다. 버려야 할 것을 버리지 못하여 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을 놓치는 사람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을 선택하기 위하여 버려야 할 것을 결단하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에게 보이고 인정받으려고 버려야 할 것을 버리지 못하고, 마땅히 취해야 할 것을 가지지 못하는 사람이 가장 불쌍한 사람입니다.
프랑스에서 ‘태양 왕’ 이라고 불리는 루이14세 때 있었던 실화라고 합니다.
왕은 신앙이 좋지는 않았지만 주일이면 가족들과 왕족들을 거느리고 늘 교회에 출석했습니다. 왕은 프넬론 대주교가 시무하는 교회에 출석했는데, 항상 교회는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만원이었습니다. 대주교는 교인들의 마음을 시험해 볼 생각을 했습니다. 어느 주일에 대주교는 왕이 나간 다음에 조용히 “다음 주일에는 왕이 못 나오십니다.”라고 광고했습니다. 교인들이 정말 예수님을 믿어서 나오는지 왕에게 잘 보이러 오는지 알아보고자 했던 것입니다.
다음 주일에 왕과 왕족들이 교회에 왔는데, 교인들이 하나도 없고 대주교만 있었습니다. 왕이 놀라서 “사람들이 모두 어디에 갔느냐?”라고 물었습니다. 대주교는 “아무래도 교인들이 예배하러 오는 것이 아니라 폐하를 만나러 오는 것 같아서 제가 실험을 해보았습니다. 지난 주일에 조용히 ‘다음 주일은 왕이 못 나오십니다.’라고 했더니 이렇게 됐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의 삶은 이러합니까?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또는 인정받으려고 하는 외식적인 삶은 아닙니까?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을 위하여 잠시 사는 세상의 부귀영화와 즐거움을 거절할 수 있습니까? 지금 혹시 두 신분 사이에서 선택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일은 없습니까? 자신의 신분을 알고, 그 신분에 걸맞은 선택을 하며, 때와 시기를 알아 실천하는 신앙이 가장 귀한 믿음의 삶을 이루게 합니다. 모세처럼 또는 많은 믿음의 선조들처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예수님을 따르는 진실한 삶을 선택하는 용기와 지혜로운 삶을 이루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