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아시는 하나님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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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2-03-19 13:38
*** 나를 아시는 하나님 / 시편 139:1-6, 마태복음 6:30-34
** 들어가는 말
시편 139:1-6, “1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2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3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4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5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6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마태복음 6:30-34, “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어떤 아이가 사과를 먹으며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어머니가 물었습니다.
“얘야, 웬 사과? 누가 줬지?”
“과일 가게에서요.”
“아저씨가 주시던?”
“아니, 안 주셨어요, 아무도 보지 않기에 그냥 갖고 왔어요.”
“뭐? 아무도 보지 않는다고? 하나님이 다 보고 계셔!”
“괜찮아요, 가게에는 지붕이 있어서 하나님도 못 보셨을 거예요.”
요즘 웬만한 가게에는 CCTV(감시카메라) 하나쯤은 설치해 두고 있습니다. 저희 친척이 경영하는 슈퍼마켓에는 그리 크지 않은데도 CCTV가 일곱 개나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그래도 물건들이 없어진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 눈에만 들키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하고 가책도 없이 죄를 짓습니다. 중국 명나라 시대의 철학자인 왕양명(王陽明)은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내가 안다.”고 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보다 더 ‘마음의 생각까지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히브리서 4:12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사실을 잊고 있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혼자 있을 때나, 자신을 아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면 엉뚱한 짓을 잘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시대는 우리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도록 하는 첨단 과학 장비들이 많이 개발되어 있습니다. 적외선으로 보는 야간 투시경, 물체의 열을 감지하여 보여주는 열 감지장치, 가려진 안쪽을 보는 엑스선 등. 캄캄하고 가려지고 막혀 있는 그 안쪽의 모든 것을 감지할 수 있는데, 그 원리를 만드신 하나님께서 볼 수 없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이 사실을 안다면 아무리 어둡고, 보는 사람이 없다 할지라도 함부로 행동할 수 없을 것입니다. 더욱이 마음 속 생각까지를 살피시는 하나님이심을 안다면 허탄한 생각까지도 함부로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시편 본문 1절에서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라고 하신대로, 우리 마음의 생각과 말과 행동,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생각해보려 합니다. 이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확실하게 하나님의 자녀다운 생활을 하기 위한 것’입니다.
※ 먼저 본문말씀의 내용과 의미를 살펴봅시다.
시편 본문말씀을 포함하는 139편은 하나님의 전지성(全知性)과 편재성(遍在性)을 노래한 시입니다. 전지성이란 ‘모든 것을 아신다.’는 것이며, 편재성은 ‘모든 곳에 존재하신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의 앉고 일어섬과 행하는 길과 모든 생각과 행위를 아신다.’고 고백합니다. 특히 자신이 행동하는 동기나 의도까지도 감지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깨닫고 놀라워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전지하심은 인간의 지식이나 지혜로는 결코 이해할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이 짧은 구절에 ‘안다.’는 동사가 다섯 번이나 등장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하여 무엇이든지 다 알고 계신다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비밀이 없습니다.
마태복음 본문은 너무도 잘 아는 예수님의 산상수훈 중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요약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형편을 아시니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고 하십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지금 내가 처한 환경과 상황에서 무엇이 필요한지를 아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서 꼭 기억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아신다.’는 말입니다. 쉽게 말해서 ‘내가 지금 필요로 하는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내가 가만히 있어도 주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주신다.’는 말은 그 다음에 있습니다. 우리의 필요를 공급받을 수 있는 방법은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고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즉 내게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기를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나의 필요를 채워주십니다. 그러므로 나를 아시는 하나님께 내 마음을 여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두 본문에서 찾아야 할 진리는 ‘나를 아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속속들이 나를 아시니 내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 하나님을 가까이 하십시오.
나의 드러나는 행동뿐만 아니라 마음의 경영과 말까지 속속들이 살피시고 아신다는 것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오라.’는 신호입니다. 쉽게 표현하면 ‘내가 너의 모든 것을 알고 있으니 와서 나와 이야기해 보자.’는 말씀입니다. 이사야 1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을 따라가고 우상을 따라가는 마음을 속속들이 아셨습니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하셨도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의 사정을 훤하게 아신다고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이처럼 하나님께서 나를 아신다는 것은 죄의 문제이든지, 삶의 문제이든지, 자녀의 문제이든지, 직장이나 사업의 문제이든지, 장래에 대한 문제이든지, 어떤 것이든지 서로 이야기해 보자고 가까이 부르시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감찰하신다.’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인간세상을 살피시는 이유는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있는지’를 찾으시는 것입니다. 시편 14:2절에서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이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찾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이유는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역대하 16:9절에서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라고 하시며, 신명기 5:29절에서는 “다만 그들이 항상 이같은 마음을 품어 나를 경외하며 내 모든 명령을 지켜서 그들과 그 자손이 영원히 복 받기를 원하노라.”고 하십니다. 이 사실을 알았던 다윗은 아들 솔로몬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내 아들 솔로몬아, 너는 네 아버지의 하나님을 알고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섬길지어다. 여호와께서는 모든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의도를 아시나니 네가 만일 그를 찾으면 만날 것이요. 만일 네가 그를 버리면 그가 너를 영원히 버리시리라.”(대상 28:9) 하나님께서 이렇게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향하는 마음을 아시고 능력과 복을 주시거나 버리시는 것입니다.
혹시 이 말씀을 들으면서 ‘감시당한다.’는 생각이 드십니까? 하나님께서 내 생각까지 살피신다고 하시니 불안한 마음이 들지는 않습니까? 아마도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큰 부담이 되기도 하고, 하나님이 미운 존재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성도를 살피시는 것은 감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으로 인도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아니면 우리 인생은 하나님의 평안을 누릴 수도 없고, 하나님의 나라에 이를 수도 없습니다. 로마서 8:26-27절에서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동행하신다는 것을 또 다르게 표현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나를 아시는 하나님께 가까이 가야합니다.
※ 염려하지 말고 맡기십시오.
하나님께서 나를 속속들이 아시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염려하지 않아야 합니다. 염려, 걱정, 근심, 두려움 등. 이 모두는 하나님을 불신하는 큰 죄악입니다. 요한계시록 21:8절에서 이렇게 경고하십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따르는 제자들에게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주님은 인간의 가장 기초적인 생존본능과 관계되는 의식주문제를 거론하십니다. 도대체 염려하지 않을 수 없는, 인간의 생존본능을 자극하는 의식주의 문제라 할지라도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미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처한 환경과 상황을 아시며, 그에 따르는 필요를 아십니다. 그러므로 염려하기보다는 나의 모든 처지를 아시는 하나님께 기도로 나를 맡겨야 합니다.
기도는 나를 하나님께 맡기는 통로입니다. 기도는 나를 섬기는 천사가 기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히브리서 1:14절에서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 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라고 하시며, 요한계시록 8:3-4절에서는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와 합하여 보좌 앞 금제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의 기도는 천사들에 의하여 하나님 앞으로 드려지는 향기로운 제물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작은 죄악도 역시 천사에 의하여 하나님께 보고 드려진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18:10절에서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내게서 주님이 나타내시도록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기를 힘써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디모데후서 2:15절에서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삶이 힘들고 고통스럽다.’고 생각하십니까? 앞길이 정말 막막하여 살맛이 나지 않습니까? 아니면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서 다 포기하고 되는대로 살아갑니까? 여러분이 진정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신한다면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의 생각까지 살피시며, 여러분의 환경과 처지를 아시고, 무엇이 필요한지를 아십니다. 다만 주님께 가까이 다가오기를 원하시며, 여러분 자신을 주님께 맡기기를 원하십니다. 포기하지 말고 주님께로 다가오십시오. 그리고 기도로 자신을 주님께 맡기십시오. 갈라디아서 6:9절에서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하십니다. 포기하지 마십시오. 실패하더라도 계속하십시오. 주님이 여러분을 아시며 진정으로 자신을 주님께 맡기기를 기다리십니다.
‘앤 셀리반’ 선생은 ‘헬렌 켈러’여사를 사람답게 만든 인생의 스승입니다. 헬렌 캘러는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중증 장애인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을 어떻게 글을 가르치고, 학문을 가르쳐서 전 세계를 놀라게 하는 위대한 사람으로 만들었겠습니까?
헬렌 켈러를 가르치는 것은 오직 한 가지, 감각을 의지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설리반 선생은 헬렌 켈러의 손바닥에 손가락으로 쓰고 그리고 터치하면서 가르쳤습니다. 정말 오랜 고난 끝에 결국 글을 알게 했고, 박사 학위까지 받아서 수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위대한 인물이 되게 했습니다. 설리반 선생이 헬렌 켈러에게 끊임없이 가르친 글이 있습니다.
“시작하고 실패하는 것을 계속하라. 실패할 때마다 무엇인가 성취할 것이다. 네가 원하는 것은 성취하지 못할지라도 무엇인가 가치 있는 것을 얻게 되리라. 시작하는 것과 실패하는 것을 계속하라(Keep on beginning and failing).”
하나님께서 나 자신을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보시며, 나의 모든 생각과 말을 아시며, 나의 행동을 아신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나를 아신다는 것은 ‘주님께 가까이 다가오라.’는 신호이며, ‘염려하지 말고 맡기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진정으로 주님께 다가가며, 자신을 맡기는 자들에게 능력과 복을 주십니다. 여러분이 이와 같은 복을 받고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 들어가는 말
시편 139:1-6, “1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2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3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4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5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6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마태복음 6:30-34, “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어떤 아이가 사과를 먹으며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어머니가 물었습니다.
“얘야, 웬 사과? 누가 줬지?”
“과일 가게에서요.”
“아저씨가 주시던?”
“아니, 안 주셨어요, 아무도 보지 않기에 그냥 갖고 왔어요.”
“뭐? 아무도 보지 않는다고? 하나님이 다 보고 계셔!”
“괜찮아요, 가게에는 지붕이 있어서 하나님도 못 보셨을 거예요.”
요즘 웬만한 가게에는 CCTV(감시카메라) 하나쯤은 설치해 두고 있습니다. 저희 친척이 경영하는 슈퍼마켓에는 그리 크지 않은데도 CCTV가 일곱 개나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그래도 물건들이 없어진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 눈에만 들키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하고 가책도 없이 죄를 짓습니다. 중국 명나라 시대의 철학자인 왕양명(王陽明)은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내가 안다.”고 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보다 더 ‘마음의 생각까지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히브리서 4:12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사실을 잊고 있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혼자 있을 때나, 자신을 아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면 엉뚱한 짓을 잘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시대는 우리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도록 하는 첨단 과학 장비들이 많이 개발되어 있습니다. 적외선으로 보는 야간 투시경, 물체의 열을 감지하여 보여주는 열 감지장치, 가려진 안쪽을 보는 엑스선 등. 캄캄하고 가려지고 막혀 있는 그 안쪽의 모든 것을 감지할 수 있는데, 그 원리를 만드신 하나님께서 볼 수 없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이 사실을 안다면 아무리 어둡고, 보는 사람이 없다 할지라도 함부로 행동할 수 없을 것입니다. 더욱이 마음 속 생각까지를 살피시는 하나님이심을 안다면 허탄한 생각까지도 함부로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시편 본문 1절에서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라고 하신대로, 우리 마음의 생각과 말과 행동,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생각해보려 합니다. 이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확실하게 하나님의 자녀다운 생활을 하기 위한 것’입니다.
※ 먼저 본문말씀의 내용과 의미를 살펴봅시다.
시편 본문말씀을 포함하는 139편은 하나님의 전지성(全知性)과 편재성(遍在性)을 노래한 시입니다. 전지성이란 ‘모든 것을 아신다.’는 것이며, 편재성은 ‘모든 곳에 존재하신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의 앉고 일어섬과 행하는 길과 모든 생각과 행위를 아신다.’고 고백합니다. 특히 자신이 행동하는 동기나 의도까지도 감지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깨닫고 놀라워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전지하심은 인간의 지식이나 지혜로는 결코 이해할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이 짧은 구절에 ‘안다.’는 동사가 다섯 번이나 등장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하여 무엇이든지 다 알고 계신다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비밀이 없습니다.
마태복음 본문은 너무도 잘 아는 예수님의 산상수훈 중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요약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형편을 아시니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고 하십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지금 내가 처한 환경과 상황에서 무엇이 필요한지를 아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서 꼭 기억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아신다.’는 말입니다. 쉽게 말해서 ‘내가 지금 필요로 하는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내가 가만히 있어도 주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주신다.’는 말은 그 다음에 있습니다. 우리의 필요를 공급받을 수 있는 방법은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고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즉 내게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기를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나의 필요를 채워주십니다. 그러므로 나를 아시는 하나님께 내 마음을 여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두 본문에서 찾아야 할 진리는 ‘나를 아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속속들이 나를 아시니 내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 하나님을 가까이 하십시오.
나의 드러나는 행동뿐만 아니라 마음의 경영과 말까지 속속들이 살피시고 아신다는 것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오라.’는 신호입니다. 쉽게 표현하면 ‘내가 너의 모든 것을 알고 있으니 와서 나와 이야기해 보자.’는 말씀입니다. 이사야 1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을 따라가고 우상을 따라가는 마음을 속속들이 아셨습니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하셨도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의 사정을 훤하게 아신다고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이처럼 하나님께서 나를 아신다는 것은 죄의 문제이든지, 삶의 문제이든지, 자녀의 문제이든지, 직장이나 사업의 문제이든지, 장래에 대한 문제이든지, 어떤 것이든지 서로 이야기해 보자고 가까이 부르시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감찰하신다.’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인간세상을 살피시는 이유는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있는지’를 찾으시는 것입니다. 시편 14:2절에서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이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찾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이유는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역대하 16:9절에서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라고 하시며, 신명기 5:29절에서는 “다만 그들이 항상 이같은 마음을 품어 나를 경외하며 내 모든 명령을 지켜서 그들과 그 자손이 영원히 복 받기를 원하노라.”고 하십니다. 이 사실을 알았던 다윗은 아들 솔로몬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내 아들 솔로몬아, 너는 네 아버지의 하나님을 알고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섬길지어다. 여호와께서는 모든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의도를 아시나니 네가 만일 그를 찾으면 만날 것이요. 만일 네가 그를 버리면 그가 너를 영원히 버리시리라.”(대상 28:9) 하나님께서 이렇게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향하는 마음을 아시고 능력과 복을 주시거나 버리시는 것입니다.
혹시 이 말씀을 들으면서 ‘감시당한다.’는 생각이 드십니까? 하나님께서 내 생각까지 살피신다고 하시니 불안한 마음이 들지는 않습니까? 아마도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큰 부담이 되기도 하고, 하나님이 미운 존재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성도를 살피시는 것은 감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으로 인도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아니면 우리 인생은 하나님의 평안을 누릴 수도 없고, 하나님의 나라에 이를 수도 없습니다. 로마서 8:26-27절에서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동행하신다는 것을 또 다르게 표현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나를 아시는 하나님께 가까이 가야합니다.
※ 염려하지 말고 맡기십시오.
하나님께서 나를 속속들이 아시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염려하지 않아야 합니다. 염려, 걱정, 근심, 두려움 등. 이 모두는 하나님을 불신하는 큰 죄악입니다. 요한계시록 21:8절에서 이렇게 경고하십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따르는 제자들에게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주님은 인간의 가장 기초적인 생존본능과 관계되는 의식주문제를 거론하십니다. 도대체 염려하지 않을 수 없는, 인간의 생존본능을 자극하는 의식주의 문제라 할지라도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미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처한 환경과 상황을 아시며, 그에 따르는 필요를 아십니다. 그러므로 염려하기보다는 나의 모든 처지를 아시는 하나님께 기도로 나를 맡겨야 합니다.
기도는 나를 하나님께 맡기는 통로입니다. 기도는 나를 섬기는 천사가 기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히브리서 1:14절에서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 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라고 하시며, 요한계시록 8:3-4절에서는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와 합하여 보좌 앞 금제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의 기도는 천사들에 의하여 하나님 앞으로 드려지는 향기로운 제물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작은 죄악도 역시 천사에 의하여 하나님께 보고 드려진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18:10절에서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내게서 주님이 나타내시도록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기를 힘써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디모데후서 2:15절에서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삶이 힘들고 고통스럽다.’고 생각하십니까? 앞길이 정말 막막하여 살맛이 나지 않습니까? 아니면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서 다 포기하고 되는대로 살아갑니까? 여러분이 진정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신한다면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의 생각까지 살피시며, 여러분의 환경과 처지를 아시고, 무엇이 필요한지를 아십니다. 다만 주님께 가까이 다가오기를 원하시며, 여러분 자신을 주님께 맡기기를 원하십니다. 포기하지 말고 주님께로 다가오십시오. 그리고 기도로 자신을 주님께 맡기십시오. 갈라디아서 6:9절에서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하십니다. 포기하지 마십시오. 실패하더라도 계속하십시오. 주님이 여러분을 아시며 진정으로 자신을 주님께 맡기기를 기다리십니다.
‘앤 셀리반’ 선생은 ‘헬렌 켈러’여사를 사람답게 만든 인생의 스승입니다. 헬렌 캘러는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중증 장애인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을 어떻게 글을 가르치고, 학문을 가르쳐서 전 세계를 놀라게 하는 위대한 사람으로 만들었겠습니까?
헬렌 켈러를 가르치는 것은 오직 한 가지, 감각을 의지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설리반 선생은 헬렌 켈러의 손바닥에 손가락으로 쓰고 그리고 터치하면서 가르쳤습니다. 정말 오랜 고난 끝에 결국 글을 알게 했고, 박사 학위까지 받아서 수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위대한 인물이 되게 했습니다. 설리반 선생이 헬렌 켈러에게 끊임없이 가르친 글이 있습니다.
“시작하고 실패하는 것을 계속하라. 실패할 때마다 무엇인가 성취할 것이다. 네가 원하는 것은 성취하지 못할지라도 무엇인가 가치 있는 것을 얻게 되리라. 시작하는 것과 실패하는 것을 계속하라(Keep on beginning and failing).”
하나님께서 나 자신을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보시며, 나의 모든 생각과 말을 아시며, 나의 행동을 아신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나를 아신다는 것은 ‘주님께 가까이 다가오라.’는 신호이며, ‘염려하지 말고 맡기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진정으로 주님께 다가가며, 자신을 맡기는 자들에게 능력과 복을 주십니다. 여러분이 이와 같은 복을 받고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