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지 않아야 할 선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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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2-02-06 20:26
*** 넘지 않아야 할 선 / 로마서 14:1-4, 눅 6:37-38
** 들어가는 말
로마서 14:1-4, “1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2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 3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 4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
누가복음 6:37-38, “37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저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오늘 말씀의 주제 단어는 ‘헤아림’입니다. 이 단어는 좋은 의미일 수도 있고, 좋지 않은 의미로 사용될 수도 있습니다. 좋은 의미로 사용될 때는 ‘돌아본다.’ ‘살핀다.’라는 의미가 들어있고, 나쁜 의미로 사용될 때는 오늘 본문말씀인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그리고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라는 말씀처럼 ‘비판’, ‘판단’, ‘정죄’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것을 어느 한계를 긋는 줄, 즉 선(線)으로 표현했습니다. ‘넘지 않아야 할 한계’를 말합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에는 한계를 나타내는 선(線)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도로에 표시되어 있는 ‘차선’이 있습니다. 흰색 점선은 변경을 허용하는 표시, 흰색 실선은 넘지 말라는 표시, 노란색은 절대 넘어서는 안 되는 경계표시, 도로 중앙의 노란 두 줄은 중앙 분리선으로 결코 넘어서는 안 되는 표시입니다. 이것은 눈에 보이는 선이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이라는 선도 있고, 도덕과 윤리, 예의범절이라는 선도 있습니다. 그리고 군사용어로 사회에서도 많이 사용되는 ‘마지노선’, ‘보루’, ‘배수진’ 등의 ‘최후의 방언선’이라는 의미의 선들도 있습니다. 이 많은 선들 중에서 결코 넘어서는 안 되는 선들이 있습니다. 만일 넘게 되면 생명을 잃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 많은 한계선들 중에서 이 시간에는 영의 삶을 좌우하는 ‘헤아림’이라는 선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먼저, 본문말씀의 배경과 내용을 살펴봅시다.
로마서 본문은 초대 로마교회가 안고 있던 교회 내부의 실제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 문제는 믿음이 강한 성도와 믿음이 약한 성도사이에 일어난 ‘음식’과 ‘날’에 대한 견해 차이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성도들이 서로 헤아리고 비판하는 불화가 일어났습니다. 당시는 기독교가 막 전파되고 확산되는 초기였습니다. 구약의 율법을 따르던 유대인들에게는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교리가 대단히 충격적이고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옛 전통을 존중하는 ‘보수파’와 새로운 진리를 따르는 ‘진보파’로 갈라지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 중에는 음식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아직은 새 언약의 복음을 잘 알지 못하는 성도들이 옛 전통도 중요시했습니다. 즉 구약의 율법이 가르치는 성결법에 따라서 ‘육식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고기를 먹는 사람들을 헤아리고 비난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의 시장에서 파는 고기는 우상의 제물로 바쳐졌던 것이 섞여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도 작용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채소만 먹을 것을 주장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새 언약의 말씀은 음식에 대하여 정하고 부정한 것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모든 음식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므로 깨끗하다고 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0:25-26절에서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니라.”고 하셨고, 사도행전 10:12-16절에서는 이방인에 대하여 편견을 가진 베드로에게 하나님께서 환상을 통하여 가르치셨습니다.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더라.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으라.’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한대, 또 두 번째 소리가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려져 가니라.” 이 말씀은 새로운 기준을 가르치십니다. 설령 우상에게 바쳐졌던 음식이라 할지라도 믿음으로 먹었을 때에는 전혀 신앙의 문제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율법을 지키면서 음식을 가리는 성도들을 ‘믿음이 약하다.’고 업신여겼고,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은 범법자로 정죄했습니다.
또 하나의 문제는 ‘날’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날’이라고 하는 것은 당시의 유
대인들이 성일(聖日)로 지키던 월삭, 맥추절, 수장절 등과 같은 축제나, 금식을 하며 하나님께 기도했던 금식일, 속죄일 등의 특별한 절기들을 말합니다. 그런데 유대교에서 개종한 유대인들은 율법에서 명시한 이러한 특별한 날들을 신성하게 여겨서 그 날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의 신앙을 판단하며 비난했습니다. 반면에 새 언약의 복음을 믿는 사람들은 구원의 기쁨을 감사하며 모든 날들이 차별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구약 절기의 본래의 정신을 잊어버리고 절기 자체만을 중시하는 사람들을 판단하고 업신여겼습니다. 이로 인하여 교회는 믿음의 본질이 아니라, 믿음의 형식과 이해 방식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서로 악한 마음으로 헤아리고 비판하면서 갈등과 불화만 커져갔습니다.
오늘의 교회도 율법과 복음의 사이에서 서로 비난하는 일들이 종종 일어나고 있습니다. 즉 복음을 말하면서도 마치 선한 행위로 구원을 받는 것처럼 ‘공덕사상’을 가르칩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신앙적 경험이 최고인 것처럼 다른 사람을 무시하거나, 자신의 신앙을 잣대로 삼아서 남을 헤아리고 판단합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것이 무서운 죄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본문에서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말씀합니다. 누가복음 본문의 내용은 한 마디로 “행한 대로 갚겠다.”는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야고보서 2:13절에서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고 하십니다.
※ 지금 우리 앞에 있는 문제가 무엇입니까?
로마서 본문에는 ‘음식’과 ‘날’에 대한 문제가 구체적으로 부각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여러 편지에서 이와 같은 문제들이 지적되는 것을 보면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보편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문제뿐만 아니라, 당파문제, 부자와 가난한 자의 차등문제, 신분적인 문제 등등. 많은 일들이 교회를 소란스럽게 하고 분열을 조장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일은 초대교회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이어져 왔습니다. 오히려 오늘에 와서는 과학과 문명의 발달로 인하여 이기주의와 개인주의가 더욱 만연하여 더 많은 문제들이 쌓이고 있습니다. 첨단과학과 문명의 발달은 새로운 문화권을 만들었고, 사람들의 생활의 차이를 불러왔습니다. 결국 끼리끼리 모이는 병폐가 교회에까지 자연스럽게 들어왔습니다. 야고보서 2:3-4절을 봅시다.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현실적인 교회의 문제 중 하나입니다.
문제는 문화나 신분이나 삶의 차이가 아니라, 바르게 보지 못하는 관점이 문제입니다. ‘관점’이란, 자신의 경험과 관심사를 기준으로 형성되는 것입니다. 즉 옛 신앙에 매어있으면 율법적인 행위가 앞서게 될 것이며, 세상으로 기울어져 있으면 육신의 혈기나 육신의 삶이 중심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삶의 중심에 있다면 사랑과 이해와 관용이 기준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생각이나 경험이나 관점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진정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지를 먼저 살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7:3-5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즉 자신의 관점 변화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자신이 하면 로멘스이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식의 자기중심적 관점이 우리의 문제입니다.
※ 그러면 우리의 기준점과 넘지 않아야 할 선(線)을 봅시다.
먼저 우리가 가져야 할 기준점입니다. 로마서 본문 다음의 6-9절을 같이 읽어봅시다.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 이 말씀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주를 위하여”라는 말이 다섯 번, “주의 것”이라는 말이 한 번 등장합니다. 이는 그리스도인의 기준점이 무엇임을 밝혀주는 말씀입니다. 즉 우리 그리스도인의 기준점은 “하나님께 합당한 것”입니다. 교회나 성도 개인이 행하는 어떤 일이든지 그 일이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는 합당한 것’인지 아니면 ‘내 생각이거나 혹은 세상적인 것인지’를 먼저 분별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7:21-23절에서 예수님은 마지막 심판의 때에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한 자”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주님 앞에 와서 ‘주님, 저는 평생을 주의 이름으로 목사 일을 했습니다.’, ‘주님, 저는 주의 이름으로 귀신도 쫓아내고 능력도 행했습니다.’라고 자신이 행한 일을 인정해 달라고 주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너희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라.”고 선언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 마음에 맞지 않는다고, 아니면 내 생각과 내 삶의 방식과 다르다고 헤아리고 비판하고 비난한다면 우리도 주님 앞에서 그런 판단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결코 넘지 않아야 할 신앙의 마지노선은 무엇입니까? 그 선(線)은 ‘헤아림’입니다. 누가복음 본문을 함께 읽어봅시다.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저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이 말씀을 자세히 설명하려면 너무 깁니다. 하지만 아주 간단하게 표현하면 ‘내가 하나님께 받고 싶은 대로 행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다른 사람에게 행한 대로 하나님께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본문 4절을 봅시다.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 주님께서는 ‘다른 사람을 네 마음대로 헤아리는 너는 누구냐?’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네가 그 사람의 주인이냐?’라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주인도 아니면서 어떻게 그 사람을 헤아리고 판단하느냐?’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헤아리는 사람이나, 헤아림은 당하는 사람이나 모두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설령 우리가 헤아리는 사람들이 믿음이 약하여 모든 일에 실수가 많다할지라도 그들을 헤아리시고 판단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남을 악하게 헤아리는 것은 하나님의 권위를 침범하는 죄가 됩니다.
반면에 비판하거나 정죄하는 악한 헤아림을 버리고 용서하고 베풀고 선을 행하는 아름다운 보살피는 헤아림이라면, 하나님께서 엄청난 보상으로 안겨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고 하십니다. 나 자신의 태도에 따라서 우리가 속한 공동체는 달라집니다. 서로 자신의 기준점으로 헤아리고 판단하고 비난하면 미움과 분열이 일어날 뿐만 아니라 나 자신에게로 다시 돌아옵니다. 그러나 이해와 관용과 사랑으로 서로를 돌아보는 아름다운 헤아림으로 감싸면 그곳은 작은 천국이 될 것입니다. 이처럼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이루어야 할 신앙의 선을 잘 지켜서 하나님의 풍성한 보상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 들어가는 말
로마서 14:1-4, “1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2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 3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 4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
누가복음 6:37-38, “37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저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오늘 말씀의 주제 단어는 ‘헤아림’입니다. 이 단어는 좋은 의미일 수도 있고, 좋지 않은 의미로 사용될 수도 있습니다. 좋은 의미로 사용될 때는 ‘돌아본다.’ ‘살핀다.’라는 의미가 들어있고, 나쁜 의미로 사용될 때는 오늘 본문말씀인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그리고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라는 말씀처럼 ‘비판’, ‘판단’, ‘정죄’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것을 어느 한계를 긋는 줄, 즉 선(線)으로 표현했습니다. ‘넘지 않아야 할 한계’를 말합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에는 한계를 나타내는 선(線)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도로에 표시되어 있는 ‘차선’이 있습니다. 흰색 점선은 변경을 허용하는 표시, 흰색 실선은 넘지 말라는 표시, 노란색은 절대 넘어서는 안 되는 경계표시, 도로 중앙의 노란 두 줄은 중앙 분리선으로 결코 넘어서는 안 되는 표시입니다. 이것은 눈에 보이는 선이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이라는 선도 있고, 도덕과 윤리, 예의범절이라는 선도 있습니다. 그리고 군사용어로 사회에서도 많이 사용되는 ‘마지노선’, ‘보루’, ‘배수진’ 등의 ‘최후의 방언선’이라는 의미의 선들도 있습니다. 이 많은 선들 중에서 결코 넘어서는 안 되는 선들이 있습니다. 만일 넘게 되면 생명을 잃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 많은 한계선들 중에서 이 시간에는 영의 삶을 좌우하는 ‘헤아림’이라는 선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먼저, 본문말씀의 배경과 내용을 살펴봅시다.
로마서 본문은 초대 로마교회가 안고 있던 교회 내부의 실제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 문제는 믿음이 강한 성도와 믿음이 약한 성도사이에 일어난 ‘음식’과 ‘날’에 대한 견해 차이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성도들이 서로 헤아리고 비판하는 불화가 일어났습니다. 당시는 기독교가 막 전파되고 확산되는 초기였습니다. 구약의 율법을 따르던 유대인들에게는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교리가 대단히 충격적이고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옛 전통을 존중하는 ‘보수파’와 새로운 진리를 따르는 ‘진보파’로 갈라지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 중에는 음식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아직은 새 언약의 복음을 잘 알지 못하는 성도들이 옛 전통도 중요시했습니다. 즉 구약의 율법이 가르치는 성결법에 따라서 ‘육식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고기를 먹는 사람들을 헤아리고 비난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의 시장에서 파는 고기는 우상의 제물로 바쳐졌던 것이 섞여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도 작용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채소만 먹을 것을 주장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새 언약의 말씀은 음식에 대하여 정하고 부정한 것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모든 음식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므로 깨끗하다고 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0:25-26절에서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니라.”고 하셨고, 사도행전 10:12-16절에서는 이방인에 대하여 편견을 가진 베드로에게 하나님께서 환상을 통하여 가르치셨습니다.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더라.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으라.’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한대, 또 두 번째 소리가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려져 가니라.” 이 말씀은 새로운 기준을 가르치십니다. 설령 우상에게 바쳐졌던 음식이라 할지라도 믿음으로 먹었을 때에는 전혀 신앙의 문제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율법을 지키면서 음식을 가리는 성도들을 ‘믿음이 약하다.’고 업신여겼고,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은 범법자로 정죄했습니다.
또 하나의 문제는 ‘날’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날’이라고 하는 것은 당시의 유
대인들이 성일(聖日)로 지키던 월삭, 맥추절, 수장절 등과 같은 축제나, 금식을 하며 하나님께 기도했던 금식일, 속죄일 등의 특별한 절기들을 말합니다. 그런데 유대교에서 개종한 유대인들은 율법에서 명시한 이러한 특별한 날들을 신성하게 여겨서 그 날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의 신앙을 판단하며 비난했습니다. 반면에 새 언약의 복음을 믿는 사람들은 구원의 기쁨을 감사하며 모든 날들이 차별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구약 절기의 본래의 정신을 잊어버리고 절기 자체만을 중시하는 사람들을 판단하고 업신여겼습니다. 이로 인하여 교회는 믿음의 본질이 아니라, 믿음의 형식과 이해 방식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서로 악한 마음으로 헤아리고 비판하면서 갈등과 불화만 커져갔습니다.
오늘의 교회도 율법과 복음의 사이에서 서로 비난하는 일들이 종종 일어나고 있습니다. 즉 복음을 말하면서도 마치 선한 행위로 구원을 받는 것처럼 ‘공덕사상’을 가르칩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신앙적 경험이 최고인 것처럼 다른 사람을 무시하거나, 자신의 신앙을 잣대로 삼아서 남을 헤아리고 판단합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것이 무서운 죄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본문에서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말씀합니다. 누가복음 본문의 내용은 한 마디로 “행한 대로 갚겠다.”는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야고보서 2:13절에서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고 하십니다.
※ 지금 우리 앞에 있는 문제가 무엇입니까?
로마서 본문에는 ‘음식’과 ‘날’에 대한 문제가 구체적으로 부각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여러 편지에서 이와 같은 문제들이 지적되는 것을 보면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보편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문제뿐만 아니라, 당파문제, 부자와 가난한 자의 차등문제, 신분적인 문제 등등. 많은 일들이 교회를 소란스럽게 하고 분열을 조장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일은 초대교회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이어져 왔습니다. 오히려 오늘에 와서는 과학과 문명의 발달로 인하여 이기주의와 개인주의가 더욱 만연하여 더 많은 문제들이 쌓이고 있습니다. 첨단과학과 문명의 발달은 새로운 문화권을 만들었고, 사람들의 생활의 차이를 불러왔습니다. 결국 끼리끼리 모이는 병폐가 교회에까지 자연스럽게 들어왔습니다. 야고보서 2:3-4절을 봅시다.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현실적인 교회의 문제 중 하나입니다.
문제는 문화나 신분이나 삶의 차이가 아니라, 바르게 보지 못하는 관점이 문제입니다. ‘관점’이란, 자신의 경험과 관심사를 기준으로 형성되는 것입니다. 즉 옛 신앙에 매어있으면 율법적인 행위가 앞서게 될 것이며, 세상으로 기울어져 있으면 육신의 혈기나 육신의 삶이 중심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삶의 중심에 있다면 사랑과 이해와 관용이 기준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생각이나 경험이나 관점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진정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지를 먼저 살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7:3-5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즉 자신의 관점 변화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자신이 하면 로멘스이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식의 자기중심적 관점이 우리의 문제입니다.
※ 그러면 우리의 기준점과 넘지 않아야 할 선(線)을 봅시다.
먼저 우리가 가져야 할 기준점입니다. 로마서 본문 다음의 6-9절을 같이 읽어봅시다.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 이 말씀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주를 위하여”라는 말이 다섯 번, “주의 것”이라는 말이 한 번 등장합니다. 이는 그리스도인의 기준점이 무엇임을 밝혀주는 말씀입니다. 즉 우리 그리스도인의 기준점은 “하나님께 합당한 것”입니다. 교회나 성도 개인이 행하는 어떤 일이든지 그 일이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는 합당한 것’인지 아니면 ‘내 생각이거나 혹은 세상적인 것인지’를 먼저 분별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7:21-23절에서 예수님은 마지막 심판의 때에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한 자”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주님 앞에 와서 ‘주님, 저는 평생을 주의 이름으로 목사 일을 했습니다.’, ‘주님, 저는 주의 이름으로 귀신도 쫓아내고 능력도 행했습니다.’라고 자신이 행한 일을 인정해 달라고 주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너희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라.”고 선언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 마음에 맞지 않는다고, 아니면 내 생각과 내 삶의 방식과 다르다고 헤아리고 비판하고 비난한다면 우리도 주님 앞에서 그런 판단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결코 넘지 않아야 할 신앙의 마지노선은 무엇입니까? 그 선(線)은 ‘헤아림’입니다. 누가복음 본문을 함께 읽어봅시다.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저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이 말씀을 자세히 설명하려면 너무 깁니다. 하지만 아주 간단하게 표현하면 ‘내가 하나님께 받고 싶은 대로 행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다른 사람에게 행한 대로 하나님께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본문 4절을 봅시다.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 주님께서는 ‘다른 사람을 네 마음대로 헤아리는 너는 누구냐?’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네가 그 사람의 주인이냐?’라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주인도 아니면서 어떻게 그 사람을 헤아리고 판단하느냐?’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헤아리는 사람이나, 헤아림은 당하는 사람이나 모두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설령 우리가 헤아리는 사람들이 믿음이 약하여 모든 일에 실수가 많다할지라도 그들을 헤아리시고 판단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남을 악하게 헤아리는 것은 하나님의 권위를 침범하는 죄가 됩니다.
반면에 비판하거나 정죄하는 악한 헤아림을 버리고 용서하고 베풀고 선을 행하는 아름다운 보살피는 헤아림이라면, 하나님께서 엄청난 보상으로 안겨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고 하십니다. 나 자신의 태도에 따라서 우리가 속한 공동체는 달라집니다. 서로 자신의 기준점으로 헤아리고 판단하고 비난하면 미움과 분열이 일어날 뿐만 아니라 나 자신에게로 다시 돌아옵니다. 그러나 이해와 관용과 사랑으로 서로를 돌아보는 아름다운 헤아림으로 감싸면 그곳은 작은 천국이 될 것입니다. 이처럼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이루어야 할 신앙의 선을 잘 지켜서 하나님의 풍성한 보상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