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기다림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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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2-10-15 21:28
*** 행복한 기다림 / 이사야 30:18-22
** 들어가는 말
이사야 30:18-22, “18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무릇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19 시온에 거주하며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백성아, 너는 다시 통곡하지 아니할 것이라. 그가 네 부르짖는 소리로 말미암아 네게 은혜를 베푸시되 그가 들으실 때에 네게 응답하시리라. 20 주께서 너희에게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을 주시나 네 스승은 다시 숨기지 아니하시리니 네 눈이 네 스승을 볼 것이며 21 너희가 오른쪽으로 치우치든지 왼쪽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바른 길이니 너희는 이리로 가라.’ 할 것이며 22 또 너희가 너희 조각한 우상에 입힌 은과 부어 만든 우상에 올린 금을 더럽게 하여 불결한 물건을 던짐같이 던지며 이르기를 ‘나가라.’ 하리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 한 점 부끄러움을 없기를 / 잎 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기독교 색채가 진하게 나타나는 윤동주 시인의 ‘서시’입니다. 윤동주 시인은 29세의 젊은 나이에 죽었지만 유아세례를 받았고, 용정 중앙교회에서 주일학교 교사를 했으며, 독립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기까지 주님을 깊이 사랑한 사람이었습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정말 정직하고 깨끗하고 아름다운 마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는 삶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너무 조급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묻고, 기다리며, 순종하는 것에 익숙하지를 않습니다. 오히려 무엇이든지 빠른 결과를 보려하는 조급함과 자신의 뜻을 주장하는 아집과 1등만이 성공이라고 생각하는데 익숙해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기다림을 못견뎌합니다. 하지만 사람은 일평생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기다림의 연속입니다. 성장을 기다리고, 출세를 기다리고, 무엇인가에 합격을 기다리고, 회복을 기다리며, 결혼을 기다리며, 자식을 기다리고, 죽음을 기다립니다. 이러한 세상적인 기다림은 행복한 기다림도 있지만, 마음을 초조하고 불안하게 하는 기다림도 많습니다. 그런데 정말 행복한 기다림이 있습니다. 이 시간에는 이 행복한 기다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살펴보려 합니다.
※ 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살펴봅시다.
이사야는 남 유다의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등. 네 왕의 시대에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활동한 선지자이며 이사야서의 저자입니다. 이사야서는 주제가 ‘하나님의 의(義)’입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를 지적하여 죄를 깨닫게 하고 회개하도록 가르치며,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선포하면서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1:18-20절에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저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켜지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거절했습니다. 본문 앞쪽의 15-17절을 봅시다. “주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돌이켜 조용히 있어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거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아니라 우리가 말 타고 도망하리라 하였으므로 너희가 도망할 것이요 또 이르기를 우리가 빠른 짐승을 타리라 하였으므로 너희를 쫓는 자들이 빠르리니 한 사람이 꾸짖은즉 천 사람이 도망하겠고 다섯이 꾸짖은즉 너희가 다 도망하고 너희 남은 자는 겨우 산꼭대기의 깃대 같겠고 산마루 위의 기치 같으리라.’ 하셨느니라.” 이렇게 하나님을 거절하고 자신의 생각대로 살면 잘되는 것이 아니라 매를 맞을 뿐만 아니라 패망의 길이 됩니다. 그래서 이사야 1:5절에서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패역을 거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라고 하십니다.
어리석은 인생들이 이렇게 하나님을 거역하다가 실패와 좌절을 맛보며, 전쟁과 삶의 위협 속에서 고통스럽게 살았습니다. 이러한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베푸시려고 말씀에 순종하여 돌아오기를 기다리신다고 하십니다. 본문 18절입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저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무릇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 돌아오며 하나님을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풍성한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에도 이 말씀은 변함없는 약속입니다. 비록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했던 환경과 우리가 사는 환경이 다르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하신 약속’은 변함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언제나 동일하시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3:8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리는 것, 이것이 행복한 기다림입니다. 그러면 이 행복한 기다림이 무엇인지를 살펴봅시다.
※ 그리스도인의 행복한 기다림이 있습니다.
어느 시골의 한 가정에서 딸이 가출을 하여 자기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나중에는 돌이킬 수 없는 처지에까지 이르게 되자 소녀는 자살을 결심했습니다. 하지만 부모님이 계시는 고향이 그리워서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고향집을 보려고 고향집으로 내려갔습니다. 밤중에 가보니 자신이 가꾸던 장미꽃도 보이고, 뛰어놀던 잔디밭도 보였습니다. 달밤에 자기 집을 바라보니 담장 옆 대문이 활짝 열려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집에 들어가지는 못하고 문 가까이 다가가서, “아버지-”라고 작은 소리로 불러보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잠깐 사이에 아버지가 뛰어 나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버지는 딸을 덥썩 안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디에 있다가 이제 오느냐? 네가 집을 나간 뒤 대문도 닫아보지 못하고 지금까지 네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단다.”
아버지는 혹시 밤중에 딸이 돌아올까 봐 대문도 열어 놓은 채로 깊이 잠들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와 흡사한 이 이야기는 하나님의 깊으신 관심과 사랑을 깨닫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시편 139:1-4절의 말씀처럼 우리의 상황과 형편을 훤히 아실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의지하기를 기다리십니다. 시편 139:1-4절입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이처럼 내 마음의 생각부터 모든 행동과 모든 걸음을 낱낱이 아시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은 행복입니다. 만일 이것이 불편하게 여겨진다면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지 못한 모습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떻든 나의 모든 것을 아시는 전능하신 분이 나의 후원자가 되신다면 어떻겠습니까? 정말 든든할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성공적이기를 원한다면 환경을 초월하는 후원자를 두어야 합니다. 본문 18-19절을 읽어봅시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무릇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시온에 거주하며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백성아, 너는 다시 통곡하지 아니할 것이라. 그가 네 부르짖는 소리로 말미암아 네게 은혜를 베푸시되 그가 들으실 때에 네게 응답하시리라.” 하나님의 엄청난 후원의 약속입니다. 이 약속은 이 약속을 하신 하나님을 믿고 기다리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후원자로 모시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잠언 3:6절을 봅시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시편 37:4-7절 상반절입니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전능하신 하나님을 내 인생의 후원자로 모시는 길은 ‘모든 일에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고, 기뻐하며, 모든 일을 맡기고 인내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내 인생의 후원자가 되십니다.
여러분은 일을 행할 때에 하나님께 은혜를 구합니까? 그리고 하나님께 은혜를 구한 후에는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이루실 때까지 믿음으로 기다립니까?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말하는 많은 사람들이 실제 생활에서는 조급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기다리지 못하고 자신의 뜻대로 해버리는 것을 봅니다. 사무엘상 13장에는 슬픈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세움 받는 사울이 ‘기다리지 못하여’ 하나님께 버림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모였습니다. 사울 왕도 전쟁을 위해 길갈에 백성들을 모았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예배를 한 후에 전쟁을 해야 하기 때문에 사무엘 선지자를 기다렸습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사울 왕에게 일주일을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이 기다림은 사울 왕이 하나님을 신뢰하는지를 시험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이 늦어지자 마음이 조급해진 사울 왕이 번제를 드렸습니다. 이 일은 선지자만 해야 하는 일입니다. 번제를 드리자마자 사무엘 선지자가 도착했고, 왕이 한 행동을 책망했습니다. 왕이 이렇게 변명합니다. “백성은 내게서 흩어지고 당신은 정한 날 안에 오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은 믹마스에 모였음을 내가 보았으므로 이에 내가 이르기를 블레셋 사람들이 나를 치러 길갈로 내려오겠거늘 내가 여호와께 은혜를 간구하지 못하였다 하고 부득이하여 번제를 드렸나이다.”(삼상 13:11-12) 이 일 때문에 사울 왕은 버림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을 기다리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대로 행동하여 하나님의 법을 어겼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자식 주시기를 25년을 기다렸으며, 노아는 120년을 배를 만들며 기다렸고, 요셉이 민족 구원을 위하여 억울하게 13년을 노예와 감옥살이의 고통 속에서 기다려야 했습니다. 이 모든 기다림의 이유는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때를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일을 아시고 이미 계획하시고, 그 일을 위하여 모든 환경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믿고 기다리십시오. 때가 되면 반드시 이루게 하십니다.
※ 행복한 기다림에는 성실한 삶이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때를 기다린다고 무작정 손 놓고 기다리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삶의 자세는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나 자신에게 주어지는 모든 환경과 일들까지도 하나님께서 주관하시고 인도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의 일들을 하나님께서 경영하십니다. 앞서 보았던 시편 37:5-6절에서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오해하지 않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하나님께서 경영하시니까 모든 것이 순조롭고, 형통하게 되겠다.’ 라고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본문 20절에서는 오히려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자만하지 못하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배려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전도서 7:14절에서 이 사실을 말씀합니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사람들은 일이 잘되면 은연중에 교만한 마음이 발동하게 되고, 너무 안 되면 주저앉아 버릴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들이 이러한 마음을 품지 못하도록, 때로는 실패하는 듯이 보이게도 하시며, 때로는 고통스럽게도 하시고, 때로는 형통한 길을 걷게도 하십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경영임을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이 항상 함께 하신다는 사실입니다(본문 20-21절).
그러면, 지금 우리의 걸음을 구체적으로 인도하시는 분이 누구시며, 어떻게 인도하십니까? 요한복음 14:25-27절을 봅시다.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보내 주신 성령께서 우리 속에 있는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고 깨우치셔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경영하심은 비록 우리에게는 고통스러운 환경으로 보인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이 이룰 때까지 그리스도의 평안을 주십니다.
주님의 섭리하심을 믿고 소망 중에 인내하며 기다립시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다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통하여 뜻을 이루실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인생을 맡기고,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면서 주님의 뜻을 기다리는 행복한 기다림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삶이되시기를 축복합니다.
** 들어가는 말
이사야 30:18-22, “18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무릇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19 시온에 거주하며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백성아, 너는 다시 통곡하지 아니할 것이라. 그가 네 부르짖는 소리로 말미암아 네게 은혜를 베푸시되 그가 들으실 때에 네게 응답하시리라. 20 주께서 너희에게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을 주시나 네 스승은 다시 숨기지 아니하시리니 네 눈이 네 스승을 볼 것이며 21 너희가 오른쪽으로 치우치든지 왼쪽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바른 길이니 너희는 이리로 가라.’ 할 것이며 22 또 너희가 너희 조각한 우상에 입힌 은과 부어 만든 우상에 올린 금을 더럽게 하여 불결한 물건을 던짐같이 던지며 이르기를 ‘나가라.’ 하리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 한 점 부끄러움을 없기를 / 잎 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기독교 색채가 진하게 나타나는 윤동주 시인의 ‘서시’입니다. 윤동주 시인은 29세의 젊은 나이에 죽었지만 유아세례를 받았고, 용정 중앙교회에서 주일학교 교사를 했으며, 독립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기까지 주님을 깊이 사랑한 사람이었습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정말 정직하고 깨끗하고 아름다운 마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는 삶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너무 조급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묻고, 기다리며, 순종하는 것에 익숙하지를 않습니다. 오히려 무엇이든지 빠른 결과를 보려하는 조급함과 자신의 뜻을 주장하는 아집과 1등만이 성공이라고 생각하는데 익숙해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기다림을 못견뎌합니다. 하지만 사람은 일평생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기다림의 연속입니다. 성장을 기다리고, 출세를 기다리고, 무엇인가에 합격을 기다리고, 회복을 기다리며, 결혼을 기다리며, 자식을 기다리고, 죽음을 기다립니다. 이러한 세상적인 기다림은 행복한 기다림도 있지만, 마음을 초조하고 불안하게 하는 기다림도 많습니다. 그런데 정말 행복한 기다림이 있습니다. 이 시간에는 이 행복한 기다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살펴보려 합니다.
※ 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살펴봅시다.
이사야는 남 유다의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등. 네 왕의 시대에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활동한 선지자이며 이사야서의 저자입니다. 이사야서는 주제가 ‘하나님의 의(義)’입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를 지적하여 죄를 깨닫게 하고 회개하도록 가르치며,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선포하면서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1:18-20절에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저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켜지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거절했습니다. 본문 앞쪽의 15-17절을 봅시다. “주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돌이켜 조용히 있어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거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아니라 우리가 말 타고 도망하리라 하였으므로 너희가 도망할 것이요 또 이르기를 우리가 빠른 짐승을 타리라 하였으므로 너희를 쫓는 자들이 빠르리니 한 사람이 꾸짖은즉 천 사람이 도망하겠고 다섯이 꾸짖은즉 너희가 다 도망하고 너희 남은 자는 겨우 산꼭대기의 깃대 같겠고 산마루 위의 기치 같으리라.’ 하셨느니라.” 이렇게 하나님을 거절하고 자신의 생각대로 살면 잘되는 것이 아니라 매를 맞을 뿐만 아니라 패망의 길이 됩니다. 그래서 이사야 1:5절에서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패역을 거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라고 하십니다.
어리석은 인생들이 이렇게 하나님을 거역하다가 실패와 좌절을 맛보며, 전쟁과 삶의 위협 속에서 고통스럽게 살았습니다. 이러한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베푸시려고 말씀에 순종하여 돌아오기를 기다리신다고 하십니다. 본문 18절입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저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무릇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 돌아오며 하나님을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풍성한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에도 이 말씀은 변함없는 약속입니다. 비록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했던 환경과 우리가 사는 환경이 다르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하신 약속’은 변함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언제나 동일하시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3:8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리는 것, 이것이 행복한 기다림입니다. 그러면 이 행복한 기다림이 무엇인지를 살펴봅시다.
※ 그리스도인의 행복한 기다림이 있습니다.
어느 시골의 한 가정에서 딸이 가출을 하여 자기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나중에는 돌이킬 수 없는 처지에까지 이르게 되자 소녀는 자살을 결심했습니다. 하지만 부모님이 계시는 고향이 그리워서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고향집을 보려고 고향집으로 내려갔습니다. 밤중에 가보니 자신이 가꾸던 장미꽃도 보이고, 뛰어놀던 잔디밭도 보였습니다. 달밤에 자기 집을 바라보니 담장 옆 대문이 활짝 열려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집에 들어가지는 못하고 문 가까이 다가가서, “아버지-”라고 작은 소리로 불러보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잠깐 사이에 아버지가 뛰어 나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버지는 딸을 덥썩 안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디에 있다가 이제 오느냐? 네가 집을 나간 뒤 대문도 닫아보지 못하고 지금까지 네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단다.”
아버지는 혹시 밤중에 딸이 돌아올까 봐 대문도 열어 놓은 채로 깊이 잠들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와 흡사한 이 이야기는 하나님의 깊으신 관심과 사랑을 깨닫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시편 139:1-4절의 말씀처럼 우리의 상황과 형편을 훤히 아실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의지하기를 기다리십니다. 시편 139:1-4절입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이처럼 내 마음의 생각부터 모든 행동과 모든 걸음을 낱낱이 아시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은 행복입니다. 만일 이것이 불편하게 여겨진다면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지 못한 모습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떻든 나의 모든 것을 아시는 전능하신 분이 나의 후원자가 되신다면 어떻겠습니까? 정말 든든할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성공적이기를 원한다면 환경을 초월하는 후원자를 두어야 합니다. 본문 18-19절을 읽어봅시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무릇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시온에 거주하며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백성아, 너는 다시 통곡하지 아니할 것이라. 그가 네 부르짖는 소리로 말미암아 네게 은혜를 베푸시되 그가 들으실 때에 네게 응답하시리라.” 하나님의 엄청난 후원의 약속입니다. 이 약속은 이 약속을 하신 하나님을 믿고 기다리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후원자로 모시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잠언 3:6절을 봅시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시편 37:4-7절 상반절입니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전능하신 하나님을 내 인생의 후원자로 모시는 길은 ‘모든 일에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고, 기뻐하며, 모든 일을 맡기고 인내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내 인생의 후원자가 되십니다.
여러분은 일을 행할 때에 하나님께 은혜를 구합니까? 그리고 하나님께 은혜를 구한 후에는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이루실 때까지 믿음으로 기다립니까?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말하는 많은 사람들이 실제 생활에서는 조급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기다리지 못하고 자신의 뜻대로 해버리는 것을 봅니다. 사무엘상 13장에는 슬픈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세움 받는 사울이 ‘기다리지 못하여’ 하나님께 버림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모였습니다. 사울 왕도 전쟁을 위해 길갈에 백성들을 모았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예배를 한 후에 전쟁을 해야 하기 때문에 사무엘 선지자를 기다렸습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사울 왕에게 일주일을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이 기다림은 사울 왕이 하나님을 신뢰하는지를 시험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이 늦어지자 마음이 조급해진 사울 왕이 번제를 드렸습니다. 이 일은 선지자만 해야 하는 일입니다. 번제를 드리자마자 사무엘 선지자가 도착했고, 왕이 한 행동을 책망했습니다. 왕이 이렇게 변명합니다. “백성은 내게서 흩어지고 당신은 정한 날 안에 오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은 믹마스에 모였음을 내가 보았으므로 이에 내가 이르기를 블레셋 사람들이 나를 치러 길갈로 내려오겠거늘 내가 여호와께 은혜를 간구하지 못하였다 하고 부득이하여 번제를 드렸나이다.”(삼상 13:11-12) 이 일 때문에 사울 왕은 버림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을 기다리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대로 행동하여 하나님의 법을 어겼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자식 주시기를 25년을 기다렸으며, 노아는 120년을 배를 만들며 기다렸고, 요셉이 민족 구원을 위하여 억울하게 13년을 노예와 감옥살이의 고통 속에서 기다려야 했습니다. 이 모든 기다림의 이유는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때를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일을 아시고 이미 계획하시고, 그 일을 위하여 모든 환경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믿고 기다리십시오. 때가 되면 반드시 이루게 하십니다.
※ 행복한 기다림에는 성실한 삶이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때를 기다린다고 무작정 손 놓고 기다리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삶의 자세는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나 자신에게 주어지는 모든 환경과 일들까지도 하나님께서 주관하시고 인도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의 일들을 하나님께서 경영하십니다. 앞서 보았던 시편 37:5-6절에서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오해하지 않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하나님께서 경영하시니까 모든 것이 순조롭고, 형통하게 되겠다.’ 라고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본문 20절에서는 오히려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자만하지 못하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배려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전도서 7:14절에서 이 사실을 말씀합니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사람들은 일이 잘되면 은연중에 교만한 마음이 발동하게 되고, 너무 안 되면 주저앉아 버릴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들이 이러한 마음을 품지 못하도록, 때로는 실패하는 듯이 보이게도 하시며, 때로는 고통스럽게도 하시고, 때로는 형통한 길을 걷게도 하십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경영임을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이 항상 함께 하신다는 사실입니다(본문 20-21절).
그러면, 지금 우리의 걸음을 구체적으로 인도하시는 분이 누구시며, 어떻게 인도하십니까? 요한복음 14:25-27절을 봅시다.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보내 주신 성령께서 우리 속에 있는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고 깨우치셔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경영하심은 비록 우리에게는 고통스러운 환경으로 보인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이 이룰 때까지 그리스도의 평안을 주십니다.
주님의 섭리하심을 믿고 소망 중에 인내하며 기다립시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다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통하여 뜻을 이루실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인생을 맡기고,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면서 주님의 뜻을 기다리는 행복한 기다림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삶이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