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릅답고 유익한 삶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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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2-09-30 17:20
*** 아름답고 유익한 삶 / 디도서 2:15-3:11
** 들어가는 말
디도서 3:3-11, “15 너는 이것을 말하고 권면하며 모든 권위로 책망하여 누구에게서든지 업신여김을 받지 말라. 1 너는 그들로 하여금 통치자들과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하며, 모든 선한 일 행하기를 준비하게 하며 2 아무도 비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 3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하지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여러 가지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 한 자요 악독과 투기를 일삼은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였으나 4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이 나타날 때에 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6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7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8 이 말이 미쁘도다. 원하건대 너는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 9 그러나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은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 10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 11 이러한 사람은 네가 아는 바와 같이 부패하여 스스로 정죄한 자로서 죄를 짓느니라.”
디도서를 목회서신이라고 부릅니다. 사도 바울이 목회자인 디도에게 목회적인 교훈을 주는 개인 서신이기 때문입니다. 디도가 사역하고 있던 지중해의 그레데 섬 지역에는 일찍이 기독교가 전해져 있었지만 게으르고 타락한 삶과 유대 주의자와 이단들 때문에 교회가 어지러웠습니다. 그레데의 시인이었던 ‘에피메니데스(Epimenides)’는 그레데 인들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뱅이라.”(딛 1:12) 그래서 그레데 교회에 이단적인 신앙을 멀리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바른 신앙과 바른 삶을 강조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바른 신앙과 바른 삶을 이어가도록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의식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솝의 우화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숲에 왕 노릇하는 사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자에게 늘 당하기만 하는 여우가 있었는데, ‘어떻게 하면 저 사자를 숲에서 쫓아낼 수 있을까?’하고 궁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한 가지 꾀를 생각해내고는 사자에게 도전장을 보냈습니다.
“너 사자는 들어라! 이제부터 이 숲의 동물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나니까 사자는 그만 왕좌에서 내려오기를 바란다.”
사자는 어이가 없었지만 그래도 미심쩍어서 여우에게 ‘동물들이 무서워하는 증거를 대라.’고 했습니다. 여우는 ‘나를 하루만 따라 다녀 보면 알 수 있다.’고 큰 소리를 쳤습니다. 그래서 사자는 당장 여우의 뒤를 따라 숲을 다녀 보았습니다. 아, 그랬더니 정말 동물들이 여우를 보고 줄행랑을 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토끼며 노루는 물론이고, 곰과 멧돼지도 도망을 쳤습니다. 여우보다 힘도 세고 덩치도 큰 동물들이 모두 슬금슬금 도망을 쳤습니다. 이것을 본 사자는 저 여우에게 뭔가 막강한 힘이 생겼다고 생각을 하고는 그만 짐을 사서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숲 속의 동물들이 도망간 것은 여우 때문이 아니라, 여우 뒤를 따라 다니는 사자를 보고 도망간 것이지요. 즉 여우가 다른 맹수들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었던 것은 사자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세상을 당당하게 살 수 있는 것도 창조주이시며 우리의 힘과 능력과 피난처가 되시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자신이 힘이 있고 능력이 있어서 잘 사는 줄로 생각하고 교만을 부릴 때가 있습니다. 아니면 여우가 사자를 이용한 것처럼, 사람들이 꾀를 내어 하나님을 교묘히 이용하려 들기도 합니다. ‘믿음’을 빌미로 하여 자신의 이득을 챙기려 하거나, ‘신앙’을 이익의 도구쯤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이 이단과 사이비 종교인이 되어 참 신앙을 위협합니다. 디도서 1:13-14절입니다. “이 증언이 참되도다. 그러므로 네가 그들을 엄히 꾸짖으라. 이는 그들로 하여금 믿음을 온전하게 하고 유대인의 허탄한 이야기와 진리를 배반하는 사람들의 명령을 따르지 않게 하려 함이라.”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는 이런 위협과 미혹이 더욱 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깨닫고 따르도록 정신 차리고 깨어있어야 합니다. 본문 8절에서 “이 말이 미쁘도다. 원하건대 너는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고 하십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 나라를 상속할 자녀가 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자녀다운 선한 삶을 사는 것이 아름다고 유익한 일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아름답고 유익한 일을 위하여 지켜가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 아름답고 유익한 일을 위해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본문 3-7절을 봅시다.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하지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여러 가지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 한 자요 악독과 투기를 일삼은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였으나 4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이 나타날 때에 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6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7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은혜를 말씀합니다. 3절의 모습은 옛 사람인 하나님을 믿지 않아 영이 죽어 있던 때의 모습입니다. 이런 우리들에게 4-7절에서처럼 하나님께서 값없이 베푸신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었고, 새사람을 입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8절에서는 ‘이 사실을 굳세게 말하라.’고 하십니다. 즉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서 값없이 베푸신 은혜를 깨닫도록 가르치라는 말입니다. 그리하면 듣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선한 일에 힘쓸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사 둘을 불러 각자에게 바구니를 주면서 임무를 주었습니다. 한 천사에게는 ‘사람들의 감사’를 담아오도록 했으며, 또 한 천사에게는 ‘사람들의 소원’을 담아오도록 했습니다.
천사들이 파송된 후 얼마 있지 않아서 한 천사가 가득 찬 바구니를 들고 하나님 앞에 왔습니다. 그 천사는 ‘사람들의 소원’을 담아오는 천사였습니다. 그 후로도 계속 바쁘게 다니는 천사는 ‘소원을 거두는 천사’였습니다. 나중에 하나님께서 두 천사를 부르실 때까지 ‘감사’를 거두는 천사는 한 바구니도 채우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받은 은혜는 잘 잊어버리지만, 자신의 요청에 대하여는 끈질긴 인간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1:3절에서 하나님께서 탄식하십니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이는 한갓 미물들도 받은바 은혜를 알지만, 가장 큰 은혜를 입은 인간은 받은바 은혜를 잊어버리는 배은망덕함을 말합니다. 우리는 내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잊지 않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내가 받은 은혜를 생활 속에서 감사함으로 나타내야 합니다. 생활 속에서 나타낸다는 것은 실천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실천합니까? 내가 하나님께 받은 사랑과 은혜를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고 나누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5:40, 45절을 봅니다.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우리가 받은 사랑과 은혜를 베풀고 나누어야 할 대상은 함께 생활하는 사람들입니다. 가까운 가족, 일가친척, 성도들, 이웃들, 특히 보잘 것 없는 사람들 등. 이들에게 한 것이 주님께 한 것입니다.
※ 아름답고 유익한 일을 위해 단호하게 버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본문 9절-11절을 봅시다. “그러나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은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 10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 11 이러한 사람은 네가 아는 바와 같이 부패하여 스스로 정죄한 자로서 죄를 짓느니라.” 그리스도인이 피해야 할 것은 쓸데없이 따지는 말장난입니다.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은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변론’이란, 성경의 어려운 내용이나 성경에 없는 내용, 구원과 무관한 일 등으로 무익한 논쟁을 일삼는 것을 말합니다. ‘족보 이야기’란, 유대 랍비들이 족보에 큰 관심을 가지고 족보를 연구하며, 선조들의 신앙적인 업적들을 들먹임으로써, 자신들의 부족한 신앙을 채우려고 했던 것을 말합니다. ‘분쟁’이란, 고린도전서 3장에서처럼 바울파, 게바파, 그리스도파 등으로 당을 짓고 서로 시기하며 다투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 신앙이나 지식이나 경험이나 행위를 자랑하는 일들은 일체 무익하고 헛된 것입니다. 이런 것은 자신을 위해서나 다른 사람을 위해서나 아무런 도움도 유익도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단에 대한 대처는 단호해야 합니다. 인정에 이끌리거나 다른 어떤 이유로든지 그들을 용납하거나 묵인해 주어서는 안 됩니다. 만일 그렇게 묵인하면 자신도 그 어리석은 일에 동참하는 자가 됩니다. 요한이서 10-11절입니다.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예하는 자임이니라.” 이는 단호하게 버려야 할 것입니다. 이단이나 사이비 종교인들은 사탄의 조종을 받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조금의 흔들림이나 틈을 보여서는 안 됩니다. 단호하게 대적해야 합니다.
첨단 과학의 산물이 우주 왕복선은 수십만 개의 부품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의 하나라도 빠지거나 고장을 일으키면 치명적인 손상을 입는다고 합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나 성도 개개인에 있어서도 작은 이단적인 요소를 방치한다면 그로 인하여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의식 자체부터 그리스도화 되어야 하며, 받아들여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을 분명히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영국의 철학자인 ‘밀’은, “어제 맨 끈은 오늘 허술해지기 쉽고, 내일은 풀어지기 쉽다.”고 했습니다. 즉 끈은 매일 다시 매어야 하듯, 사람도 그 결심한 일을 매일 거듭 여며야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날마다 내 자신을 돌아보고 신앙을 점검하여 옳고 그름을 잘 분별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아름답고 유익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단호하게 결단하고 버릴 때에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라도 사랑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4:10-13절을 봅시다.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실족하게 되어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앞으로는 고난의 일들이 많아지는 시대가 될 것이며, 믿지 못할 시대가 되어서 사랑이 식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의 사람들이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사랑을 지키는 것입니다. 즉 어떤 환경과 여건이 닥치더라도 사랑으로 행하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사랑을 잃으면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들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집니다. 그러므로 의무감에서 하지 않도록 힘써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께 받은 사랑과 은혜를 깨닫고 기억하여 내 삶에서 실천하여 하나님 앞에서 아름답고 유익한 삶을 이루시기를 축복합니다.
** 들어가는 말
디도서 3:3-11, “15 너는 이것을 말하고 권면하며 모든 권위로 책망하여 누구에게서든지 업신여김을 받지 말라. 1 너는 그들로 하여금 통치자들과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하며, 모든 선한 일 행하기를 준비하게 하며 2 아무도 비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 3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하지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여러 가지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 한 자요 악독과 투기를 일삼은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였으나 4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이 나타날 때에 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6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7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8 이 말이 미쁘도다. 원하건대 너는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 9 그러나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은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 10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 11 이러한 사람은 네가 아는 바와 같이 부패하여 스스로 정죄한 자로서 죄를 짓느니라.”
디도서를 목회서신이라고 부릅니다. 사도 바울이 목회자인 디도에게 목회적인 교훈을 주는 개인 서신이기 때문입니다. 디도가 사역하고 있던 지중해의 그레데 섬 지역에는 일찍이 기독교가 전해져 있었지만 게으르고 타락한 삶과 유대 주의자와 이단들 때문에 교회가 어지러웠습니다. 그레데의 시인이었던 ‘에피메니데스(Epimenides)’는 그레데 인들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뱅이라.”(딛 1:12) 그래서 그레데 교회에 이단적인 신앙을 멀리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바른 신앙과 바른 삶을 강조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바른 신앙과 바른 삶을 이어가도록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의식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솝의 우화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숲에 왕 노릇하는 사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자에게 늘 당하기만 하는 여우가 있었는데, ‘어떻게 하면 저 사자를 숲에서 쫓아낼 수 있을까?’하고 궁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한 가지 꾀를 생각해내고는 사자에게 도전장을 보냈습니다.
“너 사자는 들어라! 이제부터 이 숲의 동물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나니까 사자는 그만 왕좌에서 내려오기를 바란다.”
사자는 어이가 없었지만 그래도 미심쩍어서 여우에게 ‘동물들이 무서워하는 증거를 대라.’고 했습니다. 여우는 ‘나를 하루만 따라 다녀 보면 알 수 있다.’고 큰 소리를 쳤습니다. 그래서 사자는 당장 여우의 뒤를 따라 숲을 다녀 보았습니다. 아, 그랬더니 정말 동물들이 여우를 보고 줄행랑을 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토끼며 노루는 물론이고, 곰과 멧돼지도 도망을 쳤습니다. 여우보다 힘도 세고 덩치도 큰 동물들이 모두 슬금슬금 도망을 쳤습니다. 이것을 본 사자는 저 여우에게 뭔가 막강한 힘이 생겼다고 생각을 하고는 그만 짐을 사서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숲 속의 동물들이 도망간 것은 여우 때문이 아니라, 여우 뒤를 따라 다니는 사자를 보고 도망간 것이지요. 즉 여우가 다른 맹수들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었던 것은 사자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세상을 당당하게 살 수 있는 것도 창조주이시며 우리의 힘과 능력과 피난처가 되시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자신이 힘이 있고 능력이 있어서 잘 사는 줄로 생각하고 교만을 부릴 때가 있습니다. 아니면 여우가 사자를 이용한 것처럼, 사람들이 꾀를 내어 하나님을 교묘히 이용하려 들기도 합니다. ‘믿음’을 빌미로 하여 자신의 이득을 챙기려 하거나, ‘신앙’을 이익의 도구쯤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이 이단과 사이비 종교인이 되어 참 신앙을 위협합니다. 디도서 1:13-14절입니다. “이 증언이 참되도다. 그러므로 네가 그들을 엄히 꾸짖으라. 이는 그들로 하여금 믿음을 온전하게 하고 유대인의 허탄한 이야기와 진리를 배반하는 사람들의 명령을 따르지 않게 하려 함이라.”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는 이런 위협과 미혹이 더욱 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깨닫고 따르도록 정신 차리고 깨어있어야 합니다. 본문 8절에서 “이 말이 미쁘도다. 원하건대 너는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고 하십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 나라를 상속할 자녀가 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자녀다운 선한 삶을 사는 것이 아름다고 유익한 일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아름답고 유익한 일을 위하여 지켜가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 아름답고 유익한 일을 위해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본문 3-7절을 봅시다.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하지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여러 가지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 한 자요 악독과 투기를 일삼은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였으나 4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이 나타날 때에 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6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7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은혜를 말씀합니다. 3절의 모습은 옛 사람인 하나님을 믿지 않아 영이 죽어 있던 때의 모습입니다. 이런 우리들에게 4-7절에서처럼 하나님께서 값없이 베푸신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었고, 새사람을 입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8절에서는 ‘이 사실을 굳세게 말하라.’고 하십니다. 즉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서 값없이 베푸신 은혜를 깨닫도록 가르치라는 말입니다. 그리하면 듣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선한 일에 힘쓸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사 둘을 불러 각자에게 바구니를 주면서 임무를 주었습니다. 한 천사에게는 ‘사람들의 감사’를 담아오도록 했으며, 또 한 천사에게는 ‘사람들의 소원’을 담아오도록 했습니다.
천사들이 파송된 후 얼마 있지 않아서 한 천사가 가득 찬 바구니를 들고 하나님 앞에 왔습니다. 그 천사는 ‘사람들의 소원’을 담아오는 천사였습니다. 그 후로도 계속 바쁘게 다니는 천사는 ‘소원을 거두는 천사’였습니다. 나중에 하나님께서 두 천사를 부르실 때까지 ‘감사’를 거두는 천사는 한 바구니도 채우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받은 은혜는 잘 잊어버리지만, 자신의 요청에 대하여는 끈질긴 인간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1:3절에서 하나님께서 탄식하십니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이는 한갓 미물들도 받은바 은혜를 알지만, 가장 큰 은혜를 입은 인간은 받은바 은혜를 잊어버리는 배은망덕함을 말합니다. 우리는 내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잊지 않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내가 받은 은혜를 생활 속에서 감사함으로 나타내야 합니다. 생활 속에서 나타낸다는 것은 실천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실천합니까? 내가 하나님께 받은 사랑과 은혜를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고 나누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5:40, 45절을 봅니다.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우리가 받은 사랑과 은혜를 베풀고 나누어야 할 대상은 함께 생활하는 사람들입니다. 가까운 가족, 일가친척, 성도들, 이웃들, 특히 보잘 것 없는 사람들 등. 이들에게 한 것이 주님께 한 것입니다.
※ 아름답고 유익한 일을 위해 단호하게 버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본문 9절-11절을 봅시다. “그러나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은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 10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 11 이러한 사람은 네가 아는 바와 같이 부패하여 스스로 정죄한 자로서 죄를 짓느니라.” 그리스도인이 피해야 할 것은 쓸데없이 따지는 말장난입니다.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은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변론’이란, 성경의 어려운 내용이나 성경에 없는 내용, 구원과 무관한 일 등으로 무익한 논쟁을 일삼는 것을 말합니다. ‘족보 이야기’란, 유대 랍비들이 족보에 큰 관심을 가지고 족보를 연구하며, 선조들의 신앙적인 업적들을 들먹임으로써, 자신들의 부족한 신앙을 채우려고 했던 것을 말합니다. ‘분쟁’이란, 고린도전서 3장에서처럼 바울파, 게바파, 그리스도파 등으로 당을 짓고 서로 시기하며 다투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 신앙이나 지식이나 경험이나 행위를 자랑하는 일들은 일체 무익하고 헛된 것입니다. 이런 것은 자신을 위해서나 다른 사람을 위해서나 아무런 도움도 유익도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단에 대한 대처는 단호해야 합니다. 인정에 이끌리거나 다른 어떤 이유로든지 그들을 용납하거나 묵인해 주어서는 안 됩니다. 만일 그렇게 묵인하면 자신도 그 어리석은 일에 동참하는 자가 됩니다. 요한이서 10-11절입니다.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예하는 자임이니라.” 이는 단호하게 버려야 할 것입니다. 이단이나 사이비 종교인들은 사탄의 조종을 받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조금의 흔들림이나 틈을 보여서는 안 됩니다. 단호하게 대적해야 합니다.
첨단 과학의 산물이 우주 왕복선은 수십만 개의 부품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의 하나라도 빠지거나 고장을 일으키면 치명적인 손상을 입는다고 합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나 성도 개개인에 있어서도 작은 이단적인 요소를 방치한다면 그로 인하여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의식 자체부터 그리스도화 되어야 하며, 받아들여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을 분명히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영국의 철학자인 ‘밀’은, “어제 맨 끈은 오늘 허술해지기 쉽고, 내일은 풀어지기 쉽다.”고 했습니다. 즉 끈은 매일 다시 매어야 하듯, 사람도 그 결심한 일을 매일 거듭 여며야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날마다 내 자신을 돌아보고 신앙을 점검하여 옳고 그름을 잘 분별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아름답고 유익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단호하게 결단하고 버릴 때에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라도 사랑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4:10-13절을 봅시다.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실족하게 되어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앞으로는 고난의 일들이 많아지는 시대가 될 것이며, 믿지 못할 시대가 되어서 사랑이 식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의 사람들이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사랑을 지키는 것입니다. 즉 어떤 환경과 여건이 닥치더라도 사랑으로 행하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사랑을 잃으면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들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집니다. 그러므로 의무감에서 하지 않도록 힘써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께 받은 사랑과 은혜를 깨닫고 기억하여 내 삶에서 실천하여 하나님 앞에서 아름답고 유익한 삶을 이루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