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을 주는 사람이 됩시다.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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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2-09-25 16:44
*** 복을 주는 사람이 됩시다. / 예레미야 4:1-4
** 들어가는 말
예레미야 4:1-4, “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스라엘아, 네가 돌아오려거든 내게로 돌아오라. 네가 만일 나의 목전에서 가증한 것을 버리고 네가 흔들리지 아니하며 2 진실과 정의와 공의로 여호와의 삶을 두고 맹세하면 나라들이 나로 말미암아 스스로 복을 빌며, 나로 말미암아 자랑하리라.’ 3 여호와께서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에게 이와 같이 이르노라. 너희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에 파종하지 말라. 4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 악행으로 말미암아 나의 분노가 불같이 일어나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
(현대어성경), 1 이스라엘아, 네가 돌아오기를 원한다면 지금 네게로 돌아올 수 있다. 다만 네가 그 더러운 우상들을 떨쳐 버리기만 하면 네가 내게서 다시 평안을 얻을 것이다. 2 또 네가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걸고' 맹세하고, 진실하고 정직하게 살아가면서 네가 맹세한 말을 스스로 충실하게 지켜 나간다면 다른 민족들도 네게서 복을 받아갈 수가 있고, 그들도 너로 인해 나를 알게 될 것이며 이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길 것이다.' 3 너희는 똑똑히 들어라. 여호와께서 유다 백성과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너희는 엉겅퀴 속에 씨를 뿌리지 말고 묵은 땅을 완전히 갈아엎어라! 4 너희는 내 마음에 들도록 할례를 받아라. 곧 너희 마음에 할례를 베풀어 너희와 나를 갈라놓는 바로 그것을 제거 하여라! 너희 마음에서 그 겉껍질을 잘라 내어라! 그렇지 않으면 내 분노가 너희에게 불길처럼 내리 덮쳐서 너희를 모조리 태워 죽일 것이다. 그 불은 아무리 꺼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너희가 너무도 흉악한 짓을 많이 저질렀기 때문이다!'
세상에서나 믿음의 세계에서나 신뢰받는 사람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심지가 곧은 사람입니다. 즉 한 번 결단하면 마음이 쉽게 흔들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세상에는 자신의 이익을 따라서 마음이 쉽게 바뀌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계산이 빠르고, 모든 일에 약삭빠른 요령을 부리고, 화술에 능하고, 사람의 환심을 사는 재주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세상에서는 혹시 잘 살고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마음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는 결코 인정받지 못합니다. 이사야 26:3절에서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시는 사람은 그 마음을 하나님께 두고 일정하여 변함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심지가 곧은 삶을 요구하십니다. 그런데 이러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예나 지금이나 그리 흔하지는 않습니다.
영국의 소설가이며 극작가인 ‘윌리엄 서머셋 모옴(William Somerset Maugham, 1874-1965)’의 대표작인 ‘달과 6펜스’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이 작품은 화가 ‘고갱’을 모델로 했다고 합니다. 제목에 나오는 ‘6펜스’란 영국 은화 중 최저단위입니다. ‘달’은 품위와 고상함의 대명사로, ‘6펜스’는 세속적인 대명사로 사용되었습니다. 달도 6펜스도 모두 은색으로 빛나는 둥근 모양이라는 점에서 더 재미있는 대조가 됩니다.
작품의 주인공이 추구하는 순수한 예술을 ‘달’로 표현했고, 명예나 돈을 인생의 최고로 삼는 세속적 인간의 꿈을 ‘6펜스’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작가는 사람들이 이 두 사이를 선택하며 추구하는 삶을 그리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예외가 없습니다. ‘달의 사람이 되느냐? 6펜스짜리 인생을 살 것이냐?’ 하는 선택은 누구나가 해야 하는 결정입니다. 이 결정은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마태복음 6:24절을 봅시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이 말씀에서 ‘재물’은 세상을 대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야고보서 1:7-8절에서는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마음이 일정하지 않은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어떤 환경에서도 마음이 변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에게 복을 주며 자랑거리가 되도록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본문말씀을 통하여 나도 복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비결로서의 심지가 견고한 삶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활동한 시기는 남 유다가 몰락해 가는 말기부터 멸망을 당한 초기까지입니다. 북 이스라엘은 이미 100여 년 전에 앗수르에게 멸망을 당했습니다. 그들이 멸망한 이유는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고 세상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멸망을 남 유다가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 유다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며, 세속화되어 갔고 우상을 따라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본문 1절에서 “이스라엘아, 네가 돌아오려거든 내게로 돌아오라.”고 하시며, ‘하나님 앞에서 행한 모든 가증스러운 행위를 버리고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남 유다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시늉은 했지만 마음은 우상을 따르고 강대국들을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5:30-31절에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탄식하십니다. “이 땅에 무섭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 뿐만 아니라 남 유다의 죄악을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렘 2:13)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거짓된 신앙뿐인 백성들은 그래도 자신들이 하는 일들이 잘되기를 바랐습니다. 이 백성들의 행위가 바로 ‘밭을 갈지 않아서 가시덤불과 잡초가 가득한 채로 씨를 뿌린 것’과 같았습니다. 쉽게 말해서 ‘복 받을 짓은 하나도 하지 않고 오히려 책망 받을 일만 하고서도 복을 기대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에 파종하지 말라.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고 하시며, 이 백성들에게 깨닫고 돌아오라고 경고하십니다. 오늘의 우리도 묵은 땅, 잡초가 가득하고 가시덤불이 뒤덮인 땅처럼, 세상 것으로 가득한 마음으로 살면서 복을 기대하지는 않습니까?
※ 복을 주는 사람이 되려면 먼저 내 자신이 복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사람들은 복을 무진장 좋아합니다. 예수님을 믿든지 믿지 않든지 정말 복을 좋아합니다. 집에는 숟가락 젓가락부터 그릇, 베개, 이불, 먹는 과일에까지 온통 ‘복(福)’자가 가득합니다. 세상의 온갖 종교들을 숭배하는 것도 결국은 복을 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에게 복을 주고 싶다는 사람은 별로 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는 복을 받은 백성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복을 줄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복을 주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나 자신에게 복으로 채워져 있음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고 순서가 있습니다. 이른 새벽부터 늦은 저녁까지 부지런히 일한다고 많이 거둘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씨를 뿌리는 것도 시기가 있고, 낚시를 하는 것도 물때가 있고, 사랑을 고백하는 것도 적절한 때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일에는 먼저 해야 할 것과 나중에 해야 하는 순서가 있습니다. 바쁘다고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를 그대로 타고 갈 수도 없고, 우물에서 숭늉을 찾을 수도 없지 않습니까? 이런 삶의 이치를 잘 알면서도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인 일을 무시하고, 순서도 시기도 무시하고, 무작정 생활에 뛰어듭니다. 이것은 마치 농부가 바쁘다고 잡초가 무성한 땅을 갈지도 않고 씨를 뿌리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엉겅퀴 속에 씨를 뿌리지 말고 묵은 땅을 완전히 갈아엎어라!”(현대어성경). 우리 속에 하나님의 복으로 가득 채우기 위하여 먼저 묵은 땅을 갈아엎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복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그래야 복을 주는 사람이 됩니다.
옛날에 어느 마을에 두 나무꾼이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항상 이른 아침에 나란히 나무하러 산으로 갑니다. 그런데 저녁 무렵에 지고 내려오는 나뭇짐이 항상 달랐습니다. 덩치도 크고 힘이 센 나무꾼의 나뭇단이 항상 작았던 것입니다. 자신은 잠시 쉬는 것도 아까워서 잘 쉬지도 못하고 열심히 나무를 했는데도 나뭇단이 작았습니다. 덩치 큰 나무꾼은 이것이 늘 불만이었고 의문이었습니다.
어느 날, 덩치 큰 나무꾼은 다른 나무꾼이 나무하는 모습을 숨어서 지켜보기로 했습니다. 그 나무꾼은 틈틈이 그늘에 앉아서 쉬었고, 덩치도 작았음에도 아주 나무를 쉽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 나무꾼이 쉴 때에 무엇을 하는지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그 나무꾼은 쉴 때마다 도끼를 갈고 있었습니다. 일머리를 아는 사람이지요.
우리민족은 참 조급합니다. ‘빨리 빨리’ ‘바쁘다’라는 말이 입에 달렸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제대로 잘 갖추는 것이 중요합니다. 영적인 삶도 그러합니다. 신앙생활은 하는 둥 마는 둥 제대로 하는 것도 없고, 하나님과의 관계도 올바르지 않으면서 육신의 생활이 잘되기를 기대합니다. 남 유다의 백성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힘을 의지했으며, 도저히 열매를 기대할 수 없는 곳에 계속 씨를 뿌리고 있었습니다. 이 모습이 너무 답답하셔서 하나님께서 “네가 만일 나의 목전에서 가증한 것을 버리고 네가 흔들리지 아니하며, 진실과 정의와 공의로 여호와의 삶을 두고 맹세하면 ”이라고 하시며, “너희는 엉겅퀴 속에 씨를 뿌리지 말고 묵은 땅을 완전히 갈아엎어라!”고 하십니다. 즉 잘 되고 싶으면 마음부터 바꾸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바꾸고 무엇을 갈아엎어야 합니까? 그들의 마음에는 자신의 생각과 계획으로 가득하고,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한다고 하면서도 마음에는 우상을 두고 있고,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하면서도 강대국인 애굽과 앗수르를 의지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너는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 속에 파종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묵은 땅”이란 ‘하나님을 떠나 있는 마음과 세상을 의지하던 옛 성품’을 말합니다. 이 상태를 로마서 1:28-31절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 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다시 말해서 ‘회개를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회개를 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4절에서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 악행으로 말미암아 나의 분노가 불같이 일어나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고 하십니다. 할례는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맺은 언약의 표입니다. 이것은 ‘거룩한 구별’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갈아엎으라고 하신 것은 세상과 구별되지 않는 삶의 경영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적인 경영을 버리고 하나님의 경영방법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복이 채워집니다.
※ 복을 주는 사람이 되려면 좋은 씨를 뿌려야 합니다.
본문 1-2절을 봅시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스라엘아, 네가 돌아오려거든 내게로 돌아오라. 네가 만일 나의 목전에서 가증한 것을 버리고 네가 흔들리지 아니하며, 진실과 정의와 공의로 여호와의 삶을 두고 맹세하면 나라들이 나로 말미암아 스스로 복을 빌며, 나로 말미암아 자랑하리라.” 이것은 영적 회복운동이며 영적 개혁운동입니다. 묵은 땅을 갈아엎었으면 좋은 씨를 뿌려야 합니다. 무엇을 뿌려야 합니까? “진실과 정의와 공의로 여호와의 삶을 두고 맹세하면”이라는 말씀인데,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삶의 경영’을 뜻합니다. 마태복음 6:33절을 봅시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즉 나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의 뜻을 가장 우선권에 두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삶의 경영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려면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부지런히 읽고 연구해야 합니다. 결코 저절로 알아지지 않습니다. 갈라디아 6:7절(현대어성경)입니다. “잘못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무시당하실 분이 아닙니다. 사람은 무엇을 심든지 자기가 심은 대로 거둔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그리고 씨를 뿌릴 때는 좋은 씨를 뿌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적절한 시기를 따라야 합니다. 씨앗은 아무 때나 뿌리는 것이 아닙니다. 각종 작물마다 적절한 시기가 있습니다. 파종 시기가 지나가면 아무리 옥토라 할지라도 좋은 결실을 얻지 못합니다. 신앙에도 기회가 있습니다. 주어진 기회를 놓치면 영원히 그 기회를 잡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어리석은 부자’비유를 아시지요? 그 부자는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면서도 영의 삶에는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그가 죽은 후에 기회를 간청했지만 얻을 수 없었습니다. ‘에서’도 역시 장자의 권한을 한 그릇 음식과 바꾸었고, 아버지의 축복을 동생에게 빼앗긴 후, 뒤늦게 장자의 축복을 구했으나 기회는 다시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가장 좋은 시기는 언제입니까? 이사야 55:6절입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하나님을 만날 만한 때, 가까이 계시는 때는 성령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깨닫게 하시는 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혹은 성경을 읽을 때 마음을 울리시며 깨닫게 하시는 그 때입니다. 때를 놓치지 마십시오. 가슴이 뜨겁고 깨닫는 마음이 있었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미루거나 자신의 생각을 따라서 무시하면 씨 뿌릴 기회는 영영 사라질 수 있습니다. 우리를 대적하는 사탄의 세력들은 우리가 하나님을 따르고자 결심할 때면 결코 그대로 버려두지 않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실천하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사탄은 여러분의 마음에 속삭입니다. ‘오늘만 날이 아니야. 새털같이 많은 날이 있는데 다음에 하지!’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다음 날’이 언젠가는 오지 않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때에 후회하지 않도록 기회를 적극적으로 사야합니다.
이렇게 세상을 따라가던 마음 밭도 갈아엎고, 좋은 씨도 뿌리고 나면 결과는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복으로 나타납니다. 본문 2절 하반절에서 “나라들이 나로 말미암아 스스로 복을 빌며, 나로 말미암아 자랑하리라.”고 하십니다. 현대어성경으로 다시 봅니다. “다른 민족들도 네게서 복을 받아갈 수가 있고, 그들도 너로 인해 나를 알게 될 것이며 이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길 것이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복을 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랑거리가 되도록 충만한 은혜로 채워주십니다. 마태복음 5:16절을 봅시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오늘 본문말씀이랑 같지요? 우리는 세상에 복을 구걸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자녀들이면서 오히려 세상에 복을 주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세상에 복을 풍성하게 줄 수 있도록 우리의 영과 육신의 삶이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따라서 하나님의 복으로 충만하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 들어가는 말
예레미야 4:1-4, “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스라엘아, 네가 돌아오려거든 내게로 돌아오라. 네가 만일 나의 목전에서 가증한 것을 버리고 네가 흔들리지 아니하며 2 진실과 정의와 공의로 여호와의 삶을 두고 맹세하면 나라들이 나로 말미암아 스스로 복을 빌며, 나로 말미암아 자랑하리라.’ 3 여호와께서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에게 이와 같이 이르노라. 너희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에 파종하지 말라. 4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 악행으로 말미암아 나의 분노가 불같이 일어나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
(현대어성경), 1 이스라엘아, 네가 돌아오기를 원한다면 지금 네게로 돌아올 수 있다. 다만 네가 그 더러운 우상들을 떨쳐 버리기만 하면 네가 내게서 다시 평안을 얻을 것이다. 2 또 네가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걸고' 맹세하고, 진실하고 정직하게 살아가면서 네가 맹세한 말을 스스로 충실하게 지켜 나간다면 다른 민족들도 네게서 복을 받아갈 수가 있고, 그들도 너로 인해 나를 알게 될 것이며 이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길 것이다.' 3 너희는 똑똑히 들어라. 여호와께서 유다 백성과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너희는 엉겅퀴 속에 씨를 뿌리지 말고 묵은 땅을 완전히 갈아엎어라! 4 너희는 내 마음에 들도록 할례를 받아라. 곧 너희 마음에 할례를 베풀어 너희와 나를 갈라놓는 바로 그것을 제거 하여라! 너희 마음에서 그 겉껍질을 잘라 내어라! 그렇지 않으면 내 분노가 너희에게 불길처럼 내리 덮쳐서 너희를 모조리 태워 죽일 것이다. 그 불은 아무리 꺼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너희가 너무도 흉악한 짓을 많이 저질렀기 때문이다!'
세상에서나 믿음의 세계에서나 신뢰받는 사람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심지가 곧은 사람입니다. 즉 한 번 결단하면 마음이 쉽게 흔들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세상에는 자신의 이익을 따라서 마음이 쉽게 바뀌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계산이 빠르고, 모든 일에 약삭빠른 요령을 부리고, 화술에 능하고, 사람의 환심을 사는 재주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세상에서는 혹시 잘 살고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마음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는 결코 인정받지 못합니다. 이사야 26:3절에서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시는 사람은 그 마음을 하나님께 두고 일정하여 변함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심지가 곧은 삶을 요구하십니다. 그런데 이러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예나 지금이나 그리 흔하지는 않습니다.
영국의 소설가이며 극작가인 ‘윌리엄 서머셋 모옴(William Somerset Maugham, 1874-1965)’의 대표작인 ‘달과 6펜스’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이 작품은 화가 ‘고갱’을 모델로 했다고 합니다. 제목에 나오는 ‘6펜스’란 영국 은화 중 최저단위입니다. ‘달’은 품위와 고상함의 대명사로, ‘6펜스’는 세속적인 대명사로 사용되었습니다. 달도 6펜스도 모두 은색으로 빛나는 둥근 모양이라는 점에서 더 재미있는 대조가 됩니다.
작품의 주인공이 추구하는 순수한 예술을 ‘달’로 표현했고, 명예나 돈을 인생의 최고로 삼는 세속적 인간의 꿈을 ‘6펜스’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작가는 사람들이 이 두 사이를 선택하며 추구하는 삶을 그리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예외가 없습니다. ‘달의 사람이 되느냐? 6펜스짜리 인생을 살 것이냐?’ 하는 선택은 누구나가 해야 하는 결정입니다. 이 결정은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마태복음 6:24절을 봅시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이 말씀에서 ‘재물’은 세상을 대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야고보서 1:7-8절에서는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마음이 일정하지 않은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어떤 환경에서도 마음이 변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에게 복을 주며 자랑거리가 되도록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본문말씀을 통하여 나도 복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비결로서의 심지가 견고한 삶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활동한 시기는 남 유다가 몰락해 가는 말기부터 멸망을 당한 초기까지입니다. 북 이스라엘은 이미 100여 년 전에 앗수르에게 멸망을 당했습니다. 그들이 멸망한 이유는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고 세상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멸망을 남 유다가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 유다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며, 세속화되어 갔고 우상을 따라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본문 1절에서 “이스라엘아, 네가 돌아오려거든 내게로 돌아오라.”고 하시며, ‘하나님 앞에서 행한 모든 가증스러운 행위를 버리고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남 유다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시늉은 했지만 마음은 우상을 따르고 강대국들을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5:30-31절에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탄식하십니다. “이 땅에 무섭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 뿐만 아니라 남 유다의 죄악을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렘 2:13)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거짓된 신앙뿐인 백성들은 그래도 자신들이 하는 일들이 잘되기를 바랐습니다. 이 백성들의 행위가 바로 ‘밭을 갈지 않아서 가시덤불과 잡초가 가득한 채로 씨를 뿌린 것’과 같았습니다. 쉽게 말해서 ‘복 받을 짓은 하나도 하지 않고 오히려 책망 받을 일만 하고서도 복을 기대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에 파종하지 말라.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고 하시며, 이 백성들에게 깨닫고 돌아오라고 경고하십니다. 오늘의 우리도 묵은 땅, 잡초가 가득하고 가시덤불이 뒤덮인 땅처럼, 세상 것으로 가득한 마음으로 살면서 복을 기대하지는 않습니까?
※ 복을 주는 사람이 되려면 먼저 내 자신이 복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사람들은 복을 무진장 좋아합니다. 예수님을 믿든지 믿지 않든지 정말 복을 좋아합니다. 집에는 숟가락 젓가락부터 그릇, 베개, 이불, 먹는 과일에까지 온통 ‘복(福)’자가 가득합니다. 세상의 온갖 종교들을 숭배하는 것도 결국은 복을 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에게 복을 주고 싶다는 사람은 별로 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는 복을 받은 백성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복을 줄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복을 주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나 자신에게 복으로 채워져 있음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고 순서가 있습니다. 이른 새벽부터 늦은 저녁까지 부지런히 일한다고 많이 거둘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씨를 뿌리는 것도 시기가 있고, 낚시를 하는 것도 물때가 있고, 사랑을 고백하는 것도 적절한 때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일에는 먼저 해야 할 것과 나중에 해야 하는 순서가 있습니다. 바쁘다고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를 그대로 타고 갈 수도 없고, 우물에서 숭늉을 찾을 수도 없지 않습니까? 이런 삶의 이치를 잘 알면서도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인 일을 무시하고, 순서도 시기도 무시하고, 무작정 생활에 뛰어듭니다. 이것은 마치 농부가 바쁘다고 잡초가 무성한 땅을 갈지도 않고 씨를 뿌리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엉겅퀴 속에 씨를 뿌리지 말고 묵은 땅을 완전히 갈아엎어라!”(현대어성경). 우리 속에 하나님의 복으로 가득 채우기 위하여 먼저 묵은 땅을 갈아엎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복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그래야 복을 주는 사람이 됩니다.
옛날에 어느 마을에 두 나무꾼이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항상 이른 아침에 나란히 나무하러 산으로 갑니다. 그런데 저녁 무렵에 지고 내려오는 나뭇짐이 항상 달랐습니다. 덩치도 크고 힘이 센 나무꾼의 나뭇단이 항상 작았던 것입니다. 자신은 잠시 쉬는 것도 아까워서 잘 쉬지도 못하고 열심히 나무를 했는데도 나뭇단이 작았습니다. 덩치 큰 나무꾼은 이것이 늘 불만이었고 의문이었습니다.
어느 날, 덩치 큰 나무꾼은 다른 나무꾼이 나무하는 모습을 숨어서 지켜보기로 했습니다. 그 나무꾼은 틈틈이 그늘에 앉아서 쉬었고, 덩치도 작았음에도 아주 나무를 쉽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 나무꾼이 쉴 때에 무엇을 하는지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그 나무꾼은 쉴 때마다 도끼를 갈고 있었습니다. 일머리를 아는 사람이지요.
우리민족은 참 조급합니다. ‘빨리 빨리’ ‘바쁘다’라는 말이 입에 달렸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제대로 잘 갖추는 것이 중요합니다. 영적인 삶도 그러합니다. 신앙생활은 하는 둥 마는 둥 제대로 하는 것도 없고, 하나님과의 관계도 올바르지 않으면서 육신의 생활이 잘되기를 기대합니다. 남 유다의 백성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힘을 의지했으며, 도저히 열매를 기대할 수 없는 곳에 계속 씨를 뿌리고 있었습니다. 이 모습이 너무 답답하셔서 하나님께서 “네가 만일 나의 목전에서 가증한 것을 버리고 네가 흔들리지 아니하며, 진실과 정의와 공의로 여호와의 삶을 두고 맹세하면 ”이라고 하시며, “너희는 엉겅퀴 속에 씨를 뿌리지 말고 묵은 땅을 완전히 갈아엎어라!”고 하십니다. 즉 잘 되고 싶으면 마음부터 바꾸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바꾸고 무엇을 갈아엎어야 합니까? 그들의 마음에는 자신의 생각과 계획으로 가득하고,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한다고 하면서도 마음에는 우상을 두고 있고,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하면서도 강대국인 애굽과 앗수르를 의지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너는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 속에 파종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묵은 땅”이란 ‘하나님을 떠나 있는 마음과 세상을 의지하던 옛 성품’을 말합니다. 이 상태를 로마서 1:28-31절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 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다시 말해서 ‘회개를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회개를 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4절에서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 악행으로 말미암아 나의 분노가 불같이 일어나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고 하십니다. 할례는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맺은 언약의 표입니다. 이것은 ‘거룩한 구별’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갈아엎으라고 하신 것은 세상과 구별되지 않는 삶의 경영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적인 경영을 버리고 하나님의 경영방법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복이 채워집니다.
※ 복을 주는 사람이 되려면 좋은 씨를 뿌려야 합니다.
본문 1-2절을 봅시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스라엘아, 네가 돌아오려거든 내게로 돌아오라. 네가 만일 나의 목전에서 가증한 것을 버리고 네가 흔들리지 아니하며, 진실과 정의와 공의로 여호와의 삶을 두고 맹세하면 나라들이 나로 말미암아 스스로 복을 빌며, 나로 말미암아 자랑하리라.” 이것은 영적 회복운동이며 영적 개혁운동입니다. 묵은 땅을 갈아엎었으면 좋은 씨를 뿌려야 합니다. 무엇을 뿌려야 합니까? “진실과 정의와 공의로 여호와의 삶을 두고 맹세하면”이라는 말씀인데,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삶의 경영’을 뜻합니다. 마태복음 6:33절을 봅시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즉 나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의 뜻을 가장 우선권에 두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삶의 경영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려면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부지런히 읽고 연구해야 합니다. 결코 저절로 알아지지 않습니다. 갈라디아 6:7절(현대어성경)입니다. “잘못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무시당하실 분이 아닙니다. 사람은 무엇을 심든지 자기가 심은 대로 거둔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그리고 씨를 뿌릴 때는 좋은 씨를 뿌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적절한 시기를 따라야 합니다. 씨앗은 아무 때나 뿌리는 것이 아닙니다. 각종 작물마다 적절한 시기가 있습니다. 파종 시기가 지나가면 아무리 옥토라 할지라도 좋은 결실을 얻지 못합니다. 신앙에도 기회가 있습니다. 주어진 기회를 놓치면 영원히 그 기회를 잡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어리석은 부자’비유를 아시지요? 그 부자는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면서도 영의 삶에는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그가 죽은 후에 기회를 간청했지만 얻을 수 없었습니다. ‘에서’도 역시 장자의 권한을 한 그릇 음식과 바꾸었고, 아버지의 축복을 동생에게 빼앗긴 후, 뒤늦게 장자의 축복을 구했으나 기회는 다시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가장 좋은 시기는 언제입니까? 이사야 55:6절입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하나님을 만날 만한 때, 가까이 계시는 때는 성령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깨닫게 하시는 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혹은 성경을 읽을 때 마음을 울리시며 깨닫게 하시는 그 때입니다. 때를 놓치지 마십시오. 가슴이 뜨겁고 깨닫는 마음이 있었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미루거나 자신의 생각을 따라서 무시하면 씨 뿌릴 기회는 영영 사라질 수 있습니다. 우리를 대적하는 사탄의 세력들은 우리가 하나님을 따르고자 결심할 때면 결코 그대로 버려두지 않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실천하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사탄은 여러분의 마음에 속삭입니다. ‘오늘만 날이 아니야. 새털같이 많은 날이 있는데 다음에 하지!’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다음 날’이 언젠가는 오지 않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때에 후회하지 않도록 기회를 적극적으로 사야합니다.
이렇게 세상을 따라가던 마음 밭도 갈아엎고, 좋은 씨도 뿌리고 나면 결과는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복으로 나타납니다. 본문 2절 하반절에서 “나라들이 나로 말미암아 스스로 복을 빌며, 나로 말미암아 자랑하리라.”고 하십니다. 현대어성경으로 다시 봅니다. “다른 민족들도 네게서 복을 받아갈 수가 있고, 그들도 너로 인해 나를 알게 될 것이며 이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길 것이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복을 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랑거리가 되도록 충만한 은혜로 채워주십니다. 마태복음 5:16절을 봅시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오늘 본문말씀이랑 같지요? 우리는 세상에 복을 구걸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자녀들이면서 오히려 세상에 복을 주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세상에 복을 풍성하게 줄 수 있도록 우리의 영과 육신의 삶이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따라서 하나님의 복으로 충만하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