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하여 자느냐?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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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2-08-28 13:35
*** 어찌하여 자느냐? / 누가복음 22:39-46
** 들어가는 말
누가복음 22:39-46, “39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 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 40 그 곳에 이르러 그들에게 이르시되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 하시고 41 그들을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42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43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 44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더라. 45 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슬픔으로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 46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
여러분은 혹시 ‘잠’ 때문에 황당한 일을 당해본 경험이 있습니까?
인터넷 이데일리 뉴스에 `비행기에서 18시간 잠에 빠져든 女, 결국…‘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2012년 8월 21일 오전, ’파트리스 크리스틴 아흐메드‘라는 이름의 여성은 파키스탄 라호르에서 출발해 프랑스 파리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잠시 후, 잠에 빠져든 여성은 비행기가 파리에 도착했지만 잠에 빠져 제때 내리지 못했고, 결국 비행기는 그녀를 실은 채로 다시 파키스탄으로 되돌아갔습니다. 그녀가 자는 동안 비행기는 18시간에 걸쳐 총 1만2000km를 왕복했습니다.
파키스탄에 다시 돌아와서야 눈을 뜬 아흐메드는 파키스탄 국제항공 측이 알아봐 준 다른 항공사의 노선을 통해 파리로 돌아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파키스탄 국제항공 측은 해당 비행기가 파리 샤를 드골 공항에서 2시간 머무는 동안 어떻게 공항의 지상 근무자들이 기내에 승객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는지 여부를 추궁했습니다. 그러나 항공사 측은 “목적지를 확인하고 정해진 공항에 도착했을 때 내리는 것은 승객의 할 일”이라면서 “제때 내리지 못한 승객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 승객은 사연이 어떤지는 모르지만 18시간의 긴 잠에 빠져 목적지에 내리지도 못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잠 때문에 일을 그르친 이야기는 심심찮게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육신의 잠은 만회할 수 있는 기회라도 다시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심각한 것은 ‘영의 잠’입니다. 이 시간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육신의 잠과 영의 잠이 모두 언급하십니다.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는 말씀은 영과 육신의 잠 모두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지금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 본문말씀의 내용과 우리의 상황을 살펴봅시다.
본문말씀에는 예수님의 깊은 고뇌의 표정이 역력합니다. 땀방울에 피가 베일 정도로 간절하게 기도하시는 모습이 심각한 상황을 알게 합니다. 예수님을 그토록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본문 42절에서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라고 기도하십니다. 이는 요약된 기도의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당신께서 이루셔야 할 사명 앞에서 깊이 고뇌하고 계십니다. 주님의 고뇌는 참혹한 십자가를 지는 것 때문이 아니라, 당신께서 저야 하는 짐이 너무나 엄청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짐은 ‘창세 이후로 하나님을 거역한 온 인류의 죄의 짐’입니다. 죄의 짐이 무서운 이유는 그 결과가 하나님과의 영원한 결별이며 영적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1:15절에서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하셨고, 에스겔 18:20절 상반절에서는 “범죄 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영원 전부터 한 번도 떨어지지 않으셨던 삼위 하나님의 자리에서 떨어져 죽음의 자리까지 가셔야만 합니다. 주님은 그 두려움과 고통을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6:37하-38절에서 “고민하고 슬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그리고 성부 하나님께 버림받고 떨어지는 그 고통을 마가복음 15:34절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는 뜻입니다. 죽을 지경에 이르도록 고민되는 현실 앞에서 주님은 성부하나님께 땀에 피가 베어나오도록 간절하게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함께 했던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세 제자는 육신의 피곤에 빠져 깊이 잠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열 두 제자 중에서 그래도 나은 세 명을 뽑아서 함께 하게 하셨지만 그들조차 깨어있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슬픔으로 인해 잠들었다.’고 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십자가 죽음을 구체적으로는 알지 못했지만 자신들의 꿈이 깨어지는 슬픔으로 몰려왔습니다. 주님께서는 잠든 제자들을 보시며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영의 잠은 육신의 잠을 부르며, 육신의 잠은 기도를 쉬게 하여 영의 삶이 시험에 들게 합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영이 잠들어 육신에 얽매이게 하고, 육신의 피곤함으로 기도까지 쉬게 하는 영의 생명의 위기시대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6절에서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고 하시며, 베드로전서 5:8절에서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라고 하십니다.
지금 우리는 깨어서 정신을 차리고 기도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깨어 있어야 하는지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봅시다.
※ ‘어찌하여 자느냐?’ 라는 주님의 물음은 무슨 의미입니까?
“어찌하여 자느냐?”라는 물음은 ‘지금이 잠을 자야 하는 때가 아니다.’는 말씀입니다. 로마서 13:11절에서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고 하십니다. 즉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잠들어 있어야 할 때가 아닙니다. 어떤 잠입니까? 육신의 잠과 영의 잠 모두를 말씀하십니다. 육신의 잠과 영의 잠은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세 제자들은 영문도 잘 모르면서 주님의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슬픔에 잠겼습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어야 한다.’고 하신 말씀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지금껏 한 자리 하겠다는 꿈에 부풀었었는데, 그 꿈이 사라지고 있음을 느꼈을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이 울다가 잠이 드는 모습처럼 제자들의 인간적인 슬픔은 잠을 불렀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인간적인 슬픔으로 인하여 잠이 들었음을 아시고 그들을 깨우셨습니다.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세상적인 슬픔과 근심은 영적인 생각을 마비시킵니다. 영적인 마비는 더욱 육신적인 생각에 빠지게 하는 악순환을 일으킵니다. 가장 깨어있어야 하는 때에 잠이 들게 합니다.
사람들이 세상적인 어려움이 닥칠 때, 순간적으로 신앙을 잃고 방황하는 경우가 이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성도들에게 위기가 닥쳐올 때에 그 위기를 더욱 가중시키는 위험을 일깨우셨습니다. 영이 잠든다는 것은 육신에 얽매이며, 세상적인 근심과 걱정들이 몰려옴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씨뿌리는 비유’를 통하여 그 사실을 자세하게 가르치셨습니다. 마태복음 13:22절에서,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라고 하십니다. 영이 잠들면 세상의 염려들이 엄습하게 되고, 마음은 가시밭처럼 황량하게 변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어찌하여 자느냐?”라고 하신 물음은 ‘지금이 위기의 때’라는 경고입니다. 지금은 육신의 잠이든지 영의 잠이든지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어야 할 때입니다. 이는 육신적인 위기가 영의 위기로 발전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조치이기도 합니다.
※ 그러면 깨어 있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을 찾으신 것은 기도하기 위함이셨습니다. 본문 39절에서 ‘습관을 따라 감람산에 가셨다.’고 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은 예수님께서는 항상 기도하시던 자리였습니다. 이는 성도의 기도가 습관이 되어 있어야 함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기도가 습관이 되어야 하는 것은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함’입니다. 즉 기도는 하나님의 자녀가 깨어 있는 표입니다. 기도가 멈추고 말씀묵상이 멈추면 영은 잠들게 됩니다. 성도가 기도를 쉬는 것은 분명한 죄입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사무엘상 12:23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치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길을 너희에게 가르칠 것인즉” 뿐만 아니라 신약에서의 기도는 범위와 시기가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항상 기도하며”, “무시로 기도하며”, “모든 이를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이는 기도가 영이 깨어있는 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영이 잠들면 시험에 빠지게 됩니다. 영이 잠드는 순간 육신의 생각이 봇물 터지듯 몰려듭니다. 영의 잠은 예배에 참석하거나 교회 일에 봉사하는 것과는 별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함께 하셨음에도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모시고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를 건너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돌풍이 일어나면서 파도가 거칠어지면서 그 작은 배가 위기에 처했습니다. 배에 물이 차면서 침몰할 위기에 처하자 제자들은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예수님은 뱃전에 누워 평안히 잠들어 계셨습니다. 제자들이 잠드신 예수님을 깨우면서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라고 부르짖습니다. 예수님은 일어나셔서 바람을 꾸짖으시며 “잠잠하라. 고요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바람도 풍랑도 즉시 그치고 가라앉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어찌 믿음이 없느냐?”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했지만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신앙생활을 잘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없으면 영은 잠들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영이 잠들면 육신의 삶에 위기가 닥치게 됩니다. 깨어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오해하지 않아야 할 한 가지는 영이 늘 깨어 주님과 교통하는 사람에게는 육신의 잠이 그리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기도로 깨어 있다고 육신의 피곤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서 문제를 삼는 육신의 잠은 영의 생명을 위태롭게 할 정도로 육신적인 삶에 빠져있는 것을 말합니다. 요한일서 2:15-16절입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렇게 세상일에 몰두하여 육신이 피곤해지면 육신이 쉼을 요구하게 되고 기도와 말씀묵상은 저만큼 멀어지게 됩니다. 이처럼 세상의 것에 빠져 있는 것이 육신의 잠이며, 영의 잠을 부르는 원인이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세상의 일을 할 때에도 영의 생명과 영의 삶을 염두에 두고 지혜롭게 해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육신의 생활 때문에 영의 생명을 위한 시간을 낼 수 없다면 영원토록 가슴을 치며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코리스타의 우화 중에 하나입니다.
어느 총각 비둘기가 좋아하는 처녀 비둘기에게 청혼했다가 몇 번이나 퇴짜를 맞아서 실연의 늪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를 본 참새가 다가와서 물었습니다. “비둘기야, 눈송이 하나가 얼마나 무거운지 아니?”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아니고, 비둘기는 관심 없는 듯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몰라, 그게 되 봐야 얼마나 무거울까!”그 때 참새가 이야기를 합니다. “내 말 좀 들어봐, 어느 날 내가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데, 함박눈이 내리기 시작했어. 눈들은 아주 먼 곳에서부터 천천히 내려와서 나뭇가지에 사뿐사뿐 앉았는데, 나는 그 모습이 하도 아름다워서 눈송이들을 하나 둘 세기 시작했어. 그런데 신기하게도 3,641,950 송이가 그 가지에 내려앉을 때까지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그 다음 한 송이인 3,641,951번째 눈송이가 내려앉자 그 나뭇가지는 그만 뚝 부러져 버리고 말았어.” 잠자코 듣고 있던 총각 비둘기가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결국 눈송이 하나가 더 내리자 그 단단한 나뭇가지가 부러졌다 이 말이로군. 흠!!! … . 나도 다시 한 번 그녀에게 가보자.” 그래서 총각 비둘기가 여덟 번째 청혼을 했을 때 결국 결혼 승낙을 받았다고 합니다.
몇 번 기도하다가 응답이 없다고 실망하여 기도를 쉬거나, 세상일에 바빠서 영이 잠들어 버려서 기도를 못하거나, 아예 기도의 필요성이나 능력을 알지 못하여 기도하지 않거나. 어떤 경우라도 기도를 쉬기에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과 준비해 두신 것들이 너무나 멋지고 많습니다. 여러분에게 닥쳐오는 삶의 위기나, 세상일에 빠져 영이 잠들고 여러분의 마음에 염려와 근심이 자리 잡지 못하도록 깨어 기도하십시오. 기도는 우리의 삶을 빛으로 인도하는 길이며 생명줄입니다. 주님께 “어찌하여 자느냐?”라는 책망을 받지 않고, 오히려 깨어 있어 육신의 삶을 지혜롭게 조절하고 기도와 말씀에 깨어 있어 주님이 함께 하시는 능력의 삶을 이루시기를 축복합니다.
** 들어가는 말
누가복음 22:39-46, “39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 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 40 그 곳에 이르러 그들에게 이르시되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 하시고 41 그들을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42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43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 44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더라. 45 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슬픔으로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 46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
여러분은 혹시 ‘잠’ 때문에 황당한 일을 당해본 경험이 있습니까?
인터넷 이데일리 뉴스에 `비행기에서 18시간 잠에 빠져든 女, 결국…‘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2012년 8월 21일 오전, ’파트리스 크리스틴 아흐메드‘라는 이름의 여성은 파키스탄 라호르에서 출발해 프랑스 파리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잠시 후, 잠에 빠져든 여성은 비행기가 파리에 도착했지만 잠에 빠져 제때 내리지 못했고, 결국 비행기는 그녀를 실은 채로 다시 파키스탄으로 되돌아갔습니다. 그녀가 자는 동안 비행기는 18시간에 걸쳐 총 1만2000km를 왕복했습니다.
파키스탄에 다시 돌아와서야 눈을 뜬 아흐메드는 파키스탄 국제항공 측이 알아봐 준 다른 항공사의 노선을 통해 파리로 돌아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파키스탄 국제항공 측은 해당 비행기가 파리 샤를 드골 공항에서 2시간 머무는 동안 어떻게 공항의 지상 근무자들이 기내에 승객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는지 여부를 추궁했습니다. 그러나 항공사 측은 “목적지를 확인하고 정해진 공항에 도착했을 때 내리는 것은 승객의 할 일”이라면서 “제때 내리지 못한 승객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 승객은 사연이 어떤지는 모르지만 18시간의 긴 잠에 빠져 목적지에 내리지도 못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잠 때문에 일을 그르친 이야기는 심심찮게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육신의 잠은 만회할 수 있는 기회라도 다시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심각한 것은 ‘영의 잠’입니다. 이 시간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육신의 잠과 영의 잠이 모두 언급하십니다.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는 말씀은 영과 육신의 잠 모두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지금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 본문말씀의 내용과 우리의 상황을 살펴봅시다.
본문말씀에는 예수님의 깊은 고뇌의 표정이 역력합니다. 땀방울에 피가 베일 정도로 간절하게 기도하시는 모습이 심각한 상황을 알게 합니다. 예수님을 그토록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본문 42절에서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라고 기도하십니다. 이는 요약된 기도의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당신께서 이루셔야 할 사명 앞에서 깊이 고뇌하고 계십니다. 주님의 고뇌는 참혹한 십자가를 지는 것 때문이 아니라, 당신께서 저야 하는 짐이 너무나 엄청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짐은 ‘창세 이후로 하나님을 거역한 온 인류의 죄의 짐’입니다. 죄의 짐이 무서운 이유는 그 결과가 하나님과의 영원한 결별이며 영적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1:15절에서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하셨고, 에스겔 18:20절 상반절에서는 “범죄 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영원 전부터 한 번도 떨어지지 않으셨던 삼위 하나님의 자리에서 떨어져 죽음의 자리까지 가셔야만 합니다. 주님은 그 두려움과 고통을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6:37하-38절에서 “고민하고 슬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그리고 성부 하나님께 버림받고 떨어지는 그 고통을 마가복음 15:34절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는 뜻입니다. 죽을 지경에 이르도록 고민되는 현실 앞에서 주님은 성부하나님께 땀에 피가 베어나오도록 간절하게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함께 했던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세 제자는 육신의 피곤에 빠져 깊이 잠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열 두 제자 중에서 그래도 나은 세 명을 뽑아서 함께 하게 하셨지만 그들조차 깨어있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슬픔으로 인해 잠들었다.’고 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십자가 죽음을 구체적으로는 알지 못했지만 자신들의 꿈이 깨어지는 슬픔으로 몰려왔습니다. 주님께서는 잠든 제자들을 보시며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영의 잠은 육신의 잠을 부르며, 육신의 잠은 기도를 쉬게 하여 영의 삶이 시험에 들게 합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영이 잠들어 육신에 얽매이게 하고, 육신의 피곤함으로 기도까지 쉬게 하는 영의 생명의 위기시대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6절에서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고 하시며, 베드로전서 5:8절에서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라고 하십니다.
지금 우리는 깨어서 정신을 차리고 기도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깨어 있어야 하는지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봅시다.
※ ‘어찌하여 자느냐?’ 라는 주님의 물음은 무슨 의미입니까?
“어찌하여 자느냐?”라는 물음은 ‘지금이 잠을 자야 하는 때가 아니다.’는 말씀입니다. 로마서 13:11절에서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고 하십니다. 즉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잠들어 있어야 할 때가 아닙니다. 어떤 잠입니까? 육신의 잠과 영의 잠 모두를 말씀하십니다. 육신의 잠과 영의 잠은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세 제자들은 영문도 잘 모르면서 주님의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슬픔에 잠겼습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어야 한다.’고 하신 말씀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지금껏 한 자리 하겠다는 꿈에 부풀었었는데, 그 꿈이 사라지고 있음을 느꼈을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이 울다가 잠이 드는 모습처럼 제자들의 인간적인 슬픔은 잠을 불렀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인간적인 슬픔으로 인하여 잠이 들었음을 아시고 그들을 깨우셨습니다.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세상적인 슬픔과 근심은 영적인 생각을 마비시킵니다. 영적인 마비는 더욱 육신적인 생각에 빠지게 하는 악순환을 일으킵니다. 가장 깨어있어야 하는 때에 잠이 들게 합니다.
사람들이 세상적인 어려움이 닥칠 때, 순간적으로 신앙을 잃고 방황하는 경우가 이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성도들에게 위기가 닥쳐올 때에 그 위기를 더욱 가중시키는 위험을 일깨우셨습니다. 영이 잠든다는 것은 육신에 얽매이며, 세상적인 근심과 걱정들이 몰려옴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씨뿌리는 비유’를 통하여 그 사실을 자세하게 가르치셨습니다. 마태복음 13:22절에서,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라고 하십니다. 영이 잠들면 세상의 염려들이 엄습하게 되고, 마음은 가시밭처럼 황량하게 변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어찌하여 자느냐?”라고 하신 물음은 ‘지금이 위기의 때’라는 경고입니다. 지금은 육신의 잠이든지 영의 잠이든지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어야 할 때입니다. 이는 육신적인 위기가 영의 위기로 발전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조치이기도 합니다.
※ 그러면 깨어 있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을 찾으신 것은 기도하기 위함이셨습니다. 본문 39절에서 ‘습관을 따라 감람산에 가셨다.’고 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은 예수님께서는 항상 기도하시던 자리였습니다. 이는 성도의 기도가 습관이 되어 있어야 함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기도가 습관이 되어야 하는 것은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함’입니다. 즉 기도는 하나님의 자녀가 깨어 있는 표입니다. 기도가 멈추고 말씀묵상이 멈추면 영은 잠들게 됩니다. 성도가 기도를 쉬는 것은 분명한 죄입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사무엘상 12:23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치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길을 너희에게 가르칠 것인즉” 뿐만 아니라 신약에서의 기도는 범위와 시기가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항상 기도하며”, “무시로 기도하며”, “모든 이를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이는 기도가 영이 깨어있는 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영이 잠들면 시험에 빠지게 됩니다. 영이 잠드는 순간 육신의 생각이 봇물 터지듯 몰려듭니다. 영의 잠은 예배에 참석하거나 교회 일에 봉사하는 것과는 별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함께 하셨음에도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모시고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를 건너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돌풍이 일어나면서 파도가 거칠어지면서 그 작은 배가 위기에 처했습니다. 배에 물이 차면서 침몰할 위기에 처하자 제자들은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예수님은 뱃전에 누워 평안히 잠들어 계셨습니다. 제자들이 잠드신 예수님을 깨우면서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라고 부르짖습니다. 예수님은 일어나셔서 바람을 꾸짖으시며 “잠잠하라. 고요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바람도 풍랑도 즉시 그치고 가라앉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어찌 믿음이 없느냐?”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했지만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신앙생활을 잘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없으면 영은 잠들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영이 잠들면 육신의 삶에 위기가 닥치게 됩니다. 깨어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오해하지 않아야 할 한 가지는 영이 늘 깨어 주님과 교통하는 사람에게는 육신의 잠이 그리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기도로 깨어 있다고 육신의 피곤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서 문제를 삼는 육신의 잠은 영의 생명을 위태롭게 할 정도로 육신적인 삶에 빠져있는 것을 말합니다. 요한일서 2:15-16절입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렇게 세상일에 몰두하여 육신이 피곤해지면 육신이 쉼을 요구하게 되고 기도와 말씀묵상은 저만큼 멀어지게 됩니다. 이처럼 세상의 것에 빠져 있는 것이 육신의 잠이며, 영의 잠을 부르는 원인이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세상의 일을 할 때에도 영의 생명과 영의 삶을 염두에 두고 지혜롭게 해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육신의 생활 때문에 영의 생명을 위한 시간을 낼 수 없다면 영원토록 가슴을 치며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코리스타의 우화 중에 하나입니다.
어느 총각 비둘기가 좋아하는 처녀 비둘기에게 청혼했다가 몇 번이나 퇴짜를 맞아서 실연의 늪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를 본 참새가 다가와서 물었습니다. “비둘기야, 눈송이 하나가 얼마나 무거운지 아니?”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아니고, 비둘기는 관심 없는 듯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몰라, 그게 되 봐야 얼마나 무거울까!”그 때 참새가 이야기를 합니다. “내 말 좀 들어봐, 어느 날 내가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데, 함박눈이 내리기 시작했어. 눈들은 아주 먼 곳에서부터 천천히 내려와서 나뭇가지에 사뿐사뿐 앉았는데, 나는 그 모습이 하도 아름다워서 눈송이들을 하나 둘 세기 시작했어. 그런데 신기하게도 3,641,950 송이가 그 가지에 내려앉을 때까지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그 다음 한 송이인 3,641,951번째 눈송이가 내려앉자 그 나뭇가지는 그만 뚝 부러져 버리고 말았어.” 잠자코 듣고 있던 총각 비둘기가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결국 눈송이 하나가 더 내리자 그 단단한 나뭇가지가 부러졌다 이 말이로군. 흠!!! … . 나도 다시 한 번 그녀에게 가보자.” 그래서 총각 비둘기가 여덟 번째 청혼을 했을 때 결국 결혼 승낙을 받았다고 합니다.
몇 번 기도하다가 응답이 없다고 실망하여 기도를 쉬거나, 세상일에 바빠서 영이 잠들어 버려서 기도를 못하거나, 아예 기도의 필요성이나 능력을 알지 못하여 기도하지 않거나. 어떤 경우라도 기도를 쉬기에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과 준비해 두신 것들이 너무나 멋지고 많습니다. 여러분에게 닥쳐오는 삶의 위기나, 세상일에 빠져 영이 잠들고 여러분의 마음에 염려와 근심이 자리 잡지 못하도록 깨어 기도하십시오. 기도는 우리의 삶을 빛으로 인도하는 길이며 생명줄입니다. 주님께 “어찌하여 자느냐?”라는 책망을 받지 않고, 오히려 깨어 있어 육신의 삶을 지혜롭게 조절하고 기도와 말씀에 깨어 있어 주님이 함께 하시는 능력의 삶을 이루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