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 장로회
설교모음

내가 사는 이유

작성자 배의신 댓글 / 조회: 5,525회 작성일 2012-08-22 22:28
*** 내가 사는 이유 / 빌립보서 3:10-16

** 들어가는 말

빌립보서 3:10-16,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15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16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본문말씀은 빌립보서에서 가장 많이 설교되는 구절일 것입니다. 가장 많이 설교되는 이유는 성도의 삶의 목표를 실증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일 것입니다. 말씀의 내용은 부활의 소망을 안고 살아가는 사도 바울의 삶의 목적을 통하여 성도들을 권면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내용을 살펴보면서 ‘내가 사는 이유’를 찾아보려합니다.

어느 병원에 네 살짜리 어린아이가 입원했습니다. 아이는 ‘중증심신장애’라는 전혀 의사소통을 하지 못하는 병명이 붙었습니다. 아이는 일어나 앉지도 못하고, 말하거나 다른 어떤 의사 표시를 하지 못하고 2년을 병상에 누워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섯 살의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어린 환자를 2년 동안 극진히 치료하고 돌보던 간호사와 의사들은 한 생명을 건지지 못한 것을 무척 마음 아파하고 슬퍼했습니다. 그 아이의 어머니가 탄식하면서 의사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6년간을 병으로만 고생하다가 세상을 떠나다니 선생님, 도대체 그 아이가 이 세상에 태어날 가치가 있었습니까?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지 않았을까요?”
아이의 시신 주위에는 몇 사람의 의사와 간호사가 둘러 서 있었는데, 한 의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주머니, 이 아이는 비록 6년이라는 짧은 기간을 병으로만 살다가 갔지만 결코 무의미한 인생은 아니었습니다. 이 아이가 입원해 있는 동안 여러 명의 간호사, 의사, 그리고 가족들이 이 아이를 사랑하였고 이 아이를 통해서 사랑의 마음이 일어났고, 사랑을 배웠습니다. 이 아이는 많은 사람들 마음속에 사랑을 일깨웠고 사랑의 생활이 소중함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인간이 하는 일이 많이 있지만 이 보다 더 귀중한 일이 있을까요?”

잠언 16:4절에서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인들조차 사는 이유가 있다고 하십니다. 이처럼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 쓰임에 적당하게’지으셨고 사용하십니다. 그러므로 저나 여러분이나 우리 모두도 역시 하나님의 쓰심에 적당하게 만드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말은 자신의 환경이나 처지를 비관하거나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아야 함을 뜻합니다. 오히려 주어진 자신의 삶을 감사하면서 성실하게 관리하고 성장시켜가야 합니다. 이렇게 자신의 삶을 잘 가꾸면 하나님께 쓰임 받는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2:21절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반면에 불평과 원망으로 일관하게 되면 그 결국은 멸망에 이르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10:10-11절입니다.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여러분은 지금의 삶의 자리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것임을 믿고 감사하면서 성실하게 성장시켜가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고 ‘어쩔 수 없이 산다거나’ ‘불평이나 원망이 마음에 들어있거나’ ‘아무런 생각 없이 사는’ 것이라면 오늘 말씀을 통하여 분명한 삶의 목적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본문 12-14절에서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고 고백했듯이 우리도 흔들릴 수 없는 소망의 목표를 향하여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자신이 살아가는 삶의 이유를 분명하게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삶의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본문 10-11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사도 바울의 삶의 이유는 ‘부활의 소망’입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라는 말은 모든 사람의 부활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죽은 자들의 부활’ 즉 ‘그리스도인의 부활’을 뜻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부활은 상급이 기다리는 ‘영광의 부활’이며,  주님과 함께 영원을 누리는 ‘생명의 부활’입니다. 이 부활이 사도 바울이 세상에서 사는 이유였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9:25절에서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의 것은 영원한 것이 없습니다. 요한일서 2:15, 17절입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여러분이 사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세상의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뜻입니까?

지난 런던 올림픽을 보셨지요? 금메달을 받은 선수들이 지나온 훈련의 시간들을 잠깐씩 보여주는 것을 보면 한결같이 고된 훈련을 견뎌낸 것을 봅니다. 이들은 짧은 영광의 순간을 얻기 위하여 오랜 기간을 절제하며 훈련합니다. 이 세상의 영광을 위하여 경주하는 이들에 비하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고 있는 이 경주는 비교할 수 없이 중요한 것입니다. 세상의 면류관은 썩을 것이며 잠시 있는 것이지만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영원한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고린도전서 9:24-27절입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터키 중동부 도시 말라티야 지역에서 2007년 4월 18일 오전 10시경, 이슬람 과격단체 타리캇의 일원들인 20대 청년 5명의 무슬림들에 의해 기독교 박해가 일어났습니다. 이들은 독일인 틸만 선교사를 비롯하여 현지인 네자티와 우르 이렇게 세 명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알라를 믿으라.’로 강요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믿음을 지키면서 칼로 무참하게 찔리며 고문당했고, 형체를 알아볼 수 없도록 난자당하여, 결국 목이 잘려 순교했습니다. 네자티는 평소에 늘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무슬림으로 태어났지만 그리스도인으로 죽을 것입니다.” 남편이 순교한 후에 네자티 부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위해 살았고, 그리스도를 위해 죽었기 때문에 그의 죽음은 의미 있는 죽음이었고, 나는 그와 인생을 같이 했다는 것만으로도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는 이 땅에서 영광에 합당한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그 후 이스탄불 광장에는 숨어있던 수백 명의 터키 그리스도인들이 “우리도 그리스도인이다. 우리도 죽여라.”고 외치며 몰려나왔고, 죽음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장례식의 자리를 지켰습니다. 터키는 사도 바울의 고향이며 계시록의 일곱 교회 지역이기도 합니다. 천년이 넘도록 기독교 국가였지만 지금은 기독교가 0.3%, 이슬람이 98%인 지구촌 최대의 미전도 국가가 되어있습니다.

이들 뿐만 아니라 불교국가들인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에서도 이와 같은 박해가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부활의 소망’을 안고 믿음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의 이유를 세상에 두거나 불분명하게 말합니다. 이들은 자기 합리화를 통하여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핍박이나 불이익을 피해 보려합니다. ‘다른 사람들도 그러는데 뭘’ ‘이건 별 문제가 아닌데’ ‘조금만 더 벌어 놓고 열심히 하면 되지’ 등. 이렇게 자신이 세상을 따라가는 삶을 변명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다가 하나님께 책망을 받고 버림을 당했습니다. 열왕기상 18:21절입니다.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한 말도 대답지 아니하는지라.” 그리고 요한계시록 3:15-16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우리의 삶의 목적을 분명히 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 자신의 삶의 목적을 향하여 달려야 합니다.

본문 12-14절을 읽어봅시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이 말씀에서 “달려간다.”는 말은 ‘목표를 향하는 결심과 열정의 표현’입니다. 즉 ‘오로지 목표를 향하는 열정의 삶’을 말합니다. 앞으로 달려가는 사람은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 됩니다. 자신의 암울했던 기억이든, 좋게 생각되는 것이든 지나 간 모든 것은 잊어버려야 합니다. 실패든 성공이든 지나간 것에 연연해 있다는 것은 마치 자동차를 운전하면서 항상 백미러만 보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안전하게 앞으로 나아가기를 원한다면, 지나간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목표를 향해야 합니다. 아이가 걸음마를 배울 때, 한 번 넘어졌다고 그냥 누워만 있다면 그는 결코 걸을 수 없을 것입니다. 아이는 자신이 걸을 수 있을 때까지 계속 시도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나간 과거에 사로잡혀서 그 환영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 때가 좋았는데’라고 하면서 현실을 피하려고 합니다. 지나간 일을 다 접어버리고 현실과 부딪치며 앞에 있는 삶의 목표를 향하여 전력 질주해야 합니다.

이렇게 목표를 향하여 달리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잘 못된 길을 깨닫고 돌아서야 합니다. ‘탕자의 비유’에 보면, 인생의 많은 문제를 안고 있던 탕자가 자기 스스로 살길을 찾아보았지만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깨달은 것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야 살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탕자는 깨닫는 것에 머물지 않고 일어나서 염치불구하고 아버지 집으로 향했습니다. 탕자는 자녀의 영광을 회복했을 뿐만 아니라 풍족함과 자유를 얻었습니다. 여러분,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말고 주님께 맡기고 주님께 나아오십시오. 여러분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문제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기도하십시오. 애써 꾸미거나 변명을 준비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를 아뢰고 도움을 구하십시오. 역대하 16:9절 상반절에서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라고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이사야 55:6-7절에서는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 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고 하십니다.

옛말에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인생의 목적을 세웠다고 할지라도 목적을 향하여 나아가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삶의 목적을 향하여 나아가지 못하는 변명을 합니다. ‘내게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없어서’ ‘좋은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서’ ‘능력이 없어서’ ‘이만큼 하면 되었지!’ 등. 자신이 못하고 있는 변명을 합니다. 잠언 26:13-14절입니다. “게으른 자는 ‘길에 사자가 있다. 거리에 사자가 있다.’ 하느니라. 문짝이 돌쩌귀를 따라 도는 것 같이 게으른 자는 침상에서 도느니라.” 재미있는 표현입니다. 게으른 자가 침대에서 뒹굴면서 자신이 밖에 나가지 않는 이유는 거리에 사자가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본문 15-16절에서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현대어성경 / 나는 여러분이 모두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점에 대해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지기를 바랍니다. 혹시 여러분이 생각을 달리하는 점이 있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점을 분명히 지적해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어떻게 됐든 지간에 이제는 같은 원칙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갑시다.)” 이 말씀은 계속 앞으로 나아가자는 독려의 말씀입니다.

여러분에게 이 시대를 깨닫는 지혜가 있으시기를 기원합니다. 삶의 이유가 분명하지 않으면 결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으며, 삶의 이유가 분명하다고 할지라도 실천하는 믿음이 없으면 역시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이 불분명한 시대에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분명한 삶의 목적을 가지고 열정적인 삶으로 목표에 이르는 복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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