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한 사랑을 합시다.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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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2-08-07 20:52
*** 진실한 사랑을 합시다. / 요한일서 3:13-24
*** 들어가는 말
요한일서 3:13-24, “13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 14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있느니라. 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17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19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20 이는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 21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22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23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24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세상은 기독교의 사상을 일컬어 ‘박애사상(博愛思想)’이라고 합니다. ‘넓은 사랑의 마음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누가복음 6:27-31절을 봅시다.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너의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 하지 말며,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세상 사람들은 이런 사상을 두고 박애사상이라고 했습니다. 이 사상은 여러분도 아시듯이 사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에서도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라고 하셨는데, 지금 이렇게 실천하는 크리스천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저 자신을 많이 돌아보며 회개하는 마음으로 준비했습니다.
오늘 말씀의 주제는 ‘실천하는 사랑’입니다. 비록 행하기가 어렵지만 이것이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마지막 열쇠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실천하는 사랑으로 우리가 하나를 이루어 예수님 안에 있을 때 주님의 지체가 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7:21절에서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을 수 있는 길은 요한복음 15:10절에서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진정으로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는 근거를 세상에 맡기셨습니다. 그 근거는 ‘예수님의 계명대로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있느냐?’라는 것입니다. 안디옥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세상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아무리 어려워도 사랑을 실천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 본문말씀의 의미를 살펴봅시다.
요한일서는 예수님의 제자인 사도 요한이 기록한 편지입니다. 전체내용은 참된 사랑이신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특히 본문에서는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수직적인 사랑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수평적인 사랑으로 관심을 돌리고 있습니다. 즉 성도가 삶의 현장에서 사랑을 실천할 것을 가르칩니다. 내용 중에는 사랑을 실천할 때 따르는 여러 가지 상황을 말씀합니다. 세상의 핍박(13절), 사랑을 실천해야 할 이유(14-16절), 사랑의 실천 방법(17-18절), 실천적 사랑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과 보증(19-24절)을 말씀합니다. 이렇게 자세하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사랑의 실천이 비록 어렵지만 약속된 보장을 통하여 실천하도록 독려하시는 것입니다.
13절의 “이상히 여기지 말라.”는 말씀은 ‘놀라지 말라.’는 뜻인데, 세상 사람들이 왜 우리를 미워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도 놀라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14-15절에서의 “사랑”은 ‘생명’을 의미하며, “미움”은 ‘죽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것을 시험하는 것은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을 가르친 17절에서의 “재물”은 ‘생활필수품’을 뜻합니다. 즉 주님처럼 다른 사람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특별한 경우를 요구하신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물질적인 필요를 서로 나누는 실질적인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이처럼 사랑을 실천하는 데 따르는 여러 원인들을 들으면서 너무 어려워서 성도들이 염려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19-24절에서 사랑의 실천이 비록 어렵지만 이 세상에서의 생활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기까지 보장된 약속이 있음을 가르칩니다.
※ 사랑은 실천해야 능력이 됩니다.
노예가 매매되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죠”라는 성실하고 진실한 흑인 노예가 있었습니다. 주인은 그를 몹시 사랑하고 신뢰하여 무슨 일이나 다 그와 의논할 정도였습니다. 어느 날, 주인이 흑인노예 몇 사람을 사기 위해 노예시장에 가면서 죠를 함께 가도록 했습니다. 노예시장에는 많은 노예들이 늘어서 있었습니다. 그 중에는 늙고 병든 쇠약한 흑인 남자가 있었습니다. 죠는 한참 그를 쳐다보더니 주인에게 말했습니다. “주인님, 이 사람을 사시지요!” 주인은 한 번 훑어보면서 “하지만 너무 늙어서 쓸모가 없겠는걸! 훨씬 젊고 힘 좋은 남자도 얼마든지 있는데…”라며 꺼려했습니다. 그런데 죠의 부탁이 너무 간절했습니다. 주인은 죠의 간곡한 부탁을 들어주어 다른 노예와 함께 그 병든 노예를 샀습니다.
죠는 그 늙고 병든 노예를 극진히 보살펴 주었는데, 주인이 그 광경을 지켜보았습니다. 어느 날, 주인이 죠를 서재로 불렀습니다. “죠, 나는 얼마동안 너를 지켜보았다. 그 늙고 병든 노인은 우연히 만난 네 아버지냐?” 라고 물었습니다. 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주인님. 그는 오랜 나의 원수입니다. 그는 내가 어린 소년이었을 때 나를 유괴하여 주인님께 판 사람입니다. 우리가 노예 시장에 갔던 날 그가 거기에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 내 마음에 작은 소리로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네 원수를 사랑하라.’(눅6:35)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롬12:20). 주인님, 나는 크리스천입니다. 나는 그를 돕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잠언 27:5절에서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공동번역, 속으로 사랑하는 것보다 터놓고 꾸짖는 것이 낫다.)”고 했습니다. 실천되지 않는 사랑은 차라리 나무라는 것보다 못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민족의 사랑 법은 ‘속사랑’이었습니다. 지금은 물론 많이 달라졌지만, 아직도 기성세대는 사랑을 표현하는데 익숙하지 않습니다. 부부가 손잡고 다니는 것조차 어색해합니다. 특히 경상도 사람들은 더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바뀌어야 합니다. 사랑은 실천될 때 가치가 있고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은 성부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을 인간들의 속죄 제물로 보내시기까지 하신 사랑이며, 예수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버리시면서 까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사랑을 헛되이 하지 말고 이 사랑에 감사하며 우리도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본문 16절의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는 말씀처럼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요구하신 사랑의 실천은 목숨을 버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 17절의 말씀처럼 성도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돕는 손길을 말씀하셨습니다. 야고보서 2:15-17절을 봅시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이 말씀처럼 생활 속에서 필요를 채워주는 나눔과 섬김의 일들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사랑이 메말라 버렸습니다. 워낙 믿을 수 없는 세상이 되어서 정말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조차 믿을 수 없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4:12절에서 마지막 때에는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가 그러합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지는 시대를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이런 시대에까지라도 사랑을 잃지 말라고 하십니다. 히브리서 3:14절에서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고 하십니다. 사랑을 잊지 마십시오. 결코 사랑을 잃지 마십시오. 사랑은 하나님의 자녀 된 표시입니다.
어느 약국의 약사가 자기가 나가는 교회에서 성실한 청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청년은 재능도 많았고 대학에 다니고도 싶었지만 형편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 청년은 부모님이 돌아가신 까닭에 맏아들로서 두 남동생들 양육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약사는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하심을 구하며 많은 기도를 한 후에 그 청년의 두 동생에게 아르바이트 자리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형이 동생들을 양육하지 않아도 되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청년에게는 대학교에 진학하도록 도왔고, 졸업할 때까지 모든 비용을 빌려 주었습니다.
6년 후, 그 청년은 석사 학위를 받고 확실한 미래를 보장받았습니다. 이제 돈을 갚을 준비가 된 그는 자기 은인인 약사를 찾아가서 그동안의 은혜를 감사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계산해 보니까 매달 얼마씩을 갚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약사는 청년의 말을 중단시키고는 고개를 저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난 젊은이에게 돈을 빌려 주긴 했지만 되돌려 받고 싶지는 않소. 과거의 당신처럼, 도움을 줄 가치가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내가 했던 것처럼 해주기를 바라오.”
이렇게 하기가 결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약사처럼 사랑을 실천할 때에 사랑의 능력이 아름다운 열매로 나타나게 됩니다. 본문 14-15절을 봅시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있느니라.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고 하십니다. 만일 미워하게 되면 살인하는 것과 같다고 하십니다. 이렇게 되면 당연히 생명이 없으니 지옥에서의 영원한 고통을 받게 되겠지요. 저는 잠시 사는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다 잃는다고 해도 하나님의 나라를 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 실천하는 사랑에는 보상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을 실천하면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안다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도 우리 마음이 굳세게 된다고 했습니다. 즉 사랑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표징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확신이 생기면 특별한 선물이 주어집니다. 본문 22절입니다.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을 모두 응답받는 비결이 실천하는 사랑에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을 실천하면 예수님 안에 거하게 되고,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면 어떤 기도도 응답을 받게 됩니다. 본문 23-24절을 봅시다.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그리고 요한복음 15:7절을 봅시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내가 예수님 안에 있는 증거는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있는 줄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갈라디아서 4:6절에서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고 하시며, 고린도전서 12:3절에서는 “…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즉 하나님을 주님이라,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진심으로 하나님을 주님이라 또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 사람에게는 성령님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님이 내 안에 거하시고 내가 사랑을 실천한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기도하는 모든 것을 응답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처한 환경과 여건을 탓하지 말고 내게 베푸신 주님의 사랑을 힘입어 우리도 사랑을 실천합시다. 이렇게 주님의 자녀다운 삶을 이루어서 현세와 내세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모두 받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들어가는 말
요한일서 3:13-24, “13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 14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있느니라. 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17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19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20 이는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 21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22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23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24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세상은 기독교의 사상을 일컬어 ‘박애사상(博愛思想)’이라고 합니다. ‘넓은 사랑의 마음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누가복음 6:27-31절을 봅시다.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너의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 하지 말며,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세상 사람들은 이런 사상을 두고 박애사상이라고 했습니다. 이 사상은 여러분도 아시듯이 사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에서도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라고 하셨는데, 지금 이렇게 실천하는 크리스천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저 자신을 많이 돌아보며 회개하는 마음으로 준비했습니다.
오늘 말씀의 주제는 ‘실천하는 사랑’입니다. 비록 행하기가 어렵지만 이것이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마지막 열쇠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실천하는 사랑으로 우리가 하나를 이루어 예수님 안에 있을 때 주님의 지체가 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7:21절에서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을 수 있는 길은 요한복음 15:10절에서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진정으로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는 근거를 세상에 맡기셨습니다. 그 근거는 ‘예수님의 계명대로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있느냐?’라는 것입니다. 안디옥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세상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아무리 어려워도 사랑을 실천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 본문말씀의 의미를 살펴봅시다.
요한일서는 예수님의 제자인 사도 요한이 기록한 편지입니다. 전체내용은 참된 사랑이신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특히 본문에서는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수직적인 사랑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수평적인 사랑으로 관심을 돌리고 있습니다. 즉 성도가 삶의 현장에서 사랑을 실천할 것을 가르칩니다. 내용 중에는 사랑을 실천할 때 따르는 여러 가지 상황을 말씀합니다. 세상의 핍박(13절), 사랑을 실천해야 할 이유(14-16절), 사랑의 실천 방법(17-18절), 실천적 사랑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과 보증(19-24절)을 말씀합니다. 이렇게 자세하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사랑의 실천이 비록 어렵지만 약속된 보장을 통하여 실천하도록 독려하시는 것입니다.
13절의 “이상히 여기지 말라.”는 말씀은 ‘놀라지 말라.’는 뜻인데, 세상 사람들이 왜 우리를 미워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도 놀라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14-15절에서의 “사랑”은 ‘생명’을 의미하며, “미움”은 ‘죽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것을 시험하는 것은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을 가르친 17절에서의 “재물”은 ‘생활필수품’을 뜻합니다. 즉 주님처럼 다른 사람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특별한 경우를 요구하신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물질적인 필요를 서로 나누는 실질적인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이처럼 사랑을 실천하는 데 따르는 여러 원인들을 들으면서 너무 어려워서 성도들이 염려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19-24절에서 사랑의 실천이 비록 어렵지만 이 세상에서의 생활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기까지 보장된 약속이 있음을 가르칩니다.
※ 사랑은 실천해야 능력이 됩니다.
노예가 매매되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죠”라는 성실하고 진실한 흑인 노예가 있었습니다. 주인은 그를 몹시 사랑하고 신뢰하여 무슨 일이나 다 그와 의논할 정도였습니다. 어느 날, 주인이 흑인노예 몇 사람을 사기 위해 노예시장에 가면서 죠를 함께 가도록 했습니다. 노예시장에는 많은 노예들이 늘어서 있었습니다. 그 중에는 늙고 병든 쇠약한 흑인 남자가 있었습니다. 죠는 한참 그를 쳐다보더니 주인에게 말했습니다. “주인님, 이 사람을 사시지요!” 주인은 한 번 훑어보면서 “하지만 너무 늙어서 쓸모가 없겠는걸! 훨씬 젊고 힘 좋은 남자도 얼마든지 있는데…”라며 꺼려했습니다. 그런데 죠의 부탁이 너무 간절했습니다. 주인은 죠의 간곡한 부탁을 들어주어 다른 노예와 함께 그 병든 노예를 샀습니다.
죠는 그 늙고 병든 노예를 극진히 보살펴 주었는데, 주인이 그 광경을 지켜보았습니다. 어느 날, 주인이 죠를 서재로 불렀습니다. “죠, 나는 얼마동안 너를 지켜보았다. 그 늙고 병든 노인은 우연히 만난 네 아버지냐?” 라고 물었습니다. 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주인님. 그는 오랜 나의 원수입니다. 그는 내가 어린 소년이었을 때 나를 유괴하여 주인님께 판 사람입니다. 우리가 노예 시장에 갔던 날 그가 거기에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 내 마음에 작은 소리로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네 원수를 사랑하라.’(눅6:35)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롬12:20). 주인님, 나는 크리스천입니다. 나는 그를 돕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잠언 27:5절에서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공동번역, 속으로 사랑하는 것보다 터놓고 꾸짖는 것이 낫다.)”고 했습니다. 실천되지 않는 사랑은 차라리 나무라는 것보다 못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민족의 사랑 법은 ‘속사랑’이었습니다. 지금은 물론 많이 달라졌지만, 아직도 기성세대는 사랑을 표현하는데 익숙하지 않습니다. 부부가 손잡고 다니는 것조차 어색해합니다. 특히 경상도 사람들은 더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바뀌어야 합니다. 사랑은 실천될 때 가치가 있고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은 성부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을 인간들의 속죄 제물로 보내시기까지 하신 사랑이며, 예수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버리시면서 까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사랑을 헛되이 하지 말고 이 사랑에 감사하며 우리도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본문 16절의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는 말씀처럼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요구하신 사랑의 실천은 목숨을 버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 17절의 말씀처럼 성도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돕는 손길을 말씀하셨습니다. 야고보서 2:15-17절을 봅시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이 말씀처럼 생활 속에서 필요를 채워주는 나눔과 섬김의 일들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사랑이 메말라 버렸습니다. 워낙 믿을 수 없는 세상이 되어서 정말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조차 믿을 수 없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4:12절에서 마지막 때에는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가 그러합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지는 시대를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이런 시대에까지라도 사랑을 잃지 말라고 하십니다. 히브리서 3:14절에서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고 하십니다. 사랑을 잊지 마십시오. 결코 사랑을 잃지 마십시오. 사랑은 하나님의 자녀 된 표시입니다.
어느 약국의 약사가 자기가 나가는 교회에서 성실한 청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청년은 재능도 많았고 대학에 다니고도 싶었지만 형편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 청년은 부모님이 돌아가신 까닭에 맏아들로서 두 남동생들 양육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약사는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하심을 구하며 많은 기도를 한 후에 그 청년의 두 동생에게 아르바이트 자리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형이 동생들을 양육하지 않아도 되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청년에게는 대학교에 진학하도록 도왔고, 졸업할 때까지 모든 비용을 빌려 주었습니다.
6년 후, 그 청년은 석사 학위를 받고 확실한 미래를 보장받았습니다. 이제 돈을 갚을 준비가 된 그는 자기 은인인 약사를 찾아가서 그동안의 은혜를 감사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계산해 보니까 매달 얼마씩을 갚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약사는 청년의 말을 중단시키고는 고개를 저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난 젊은이에게 돈을 빌려 주긴 했지만 되돌려 받고 싶지는 않소. 과거의 당신처럼, 도움을 줄 가치가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내가 했던 것처럼 해주기를 바라오.”
이렇게 하기가 결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약사처럼 사랑을 실천할 때에 사랑의 능력이 아름다운 열매로 나타나게 됩니다. 본문 14-15절을 봅시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있느니라.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고 하십니다. 만일 미워하게 되면 살인하는 것과 같다고 하십니다. 이렇게 되면 당연히 생명이 없으니 지옥에서의 영원한 고통을 받게 되겠지요. 저는 잠시 사는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다 잃는다고 해도 하나님의 나라를 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 실천하는 사랑에는 보상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을 실천하면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안다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도 우리 마음이 굳세게 된다고 했습니다. 즉 사랑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표징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확신이 생기면 특별한 선물이 주어집니다. 본문 22절입니다.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을 모두 응답받는 비결이 실천하는 사랑에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을 실천하면 예수님 안에 거하게 되고,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면 어떤 기도도 응답을 받게 됩니다. 본문 23-24절을 봅시다.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그리고 요한복음 15:7절을 봅시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내가 예수님 안에 있는 증거는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있는 줄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갈라디아서 4:6절에서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고 하시며, 고린도전서 12:3절에서는 “…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즉 하나님을 주님이라,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진심으로 하나님을 주님이라 또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 사람에게는 성령님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님이 내 안에 거하시고 내가 사랑을 실천한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기도하는 모든 것을 응답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처한 환경과 여건을 탓하지 말고 내게 베푸신 주님의 사랑을 힘입어 우리도 사랑을 실천합시다. 이렇게 주님의 자녀다운 삶을 이루어서 현세와 내세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모두 받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